소설리스트

102화. (102/250)

102화.

‘저, 저… 미친 자가…!’

듀란드의 등이 식은땀으로 푹 적었다.

애써 진정해 보려 하지만, 파르르 떨리는 눈이 쉽사리 멈추질 않는다.

왜 아니겠는가?

레온하르트 영지를 위기 빠뜨렸던 몬스터들.

놈들에게 남은 흑마법의 흔적은 다름 아닌 자신들이 저지르고 남긴 것이었다.

물론 그 흔적만 가지고 자신들의 조직이 만천하에 밝혀질 리 없겠지만, 그래도 만에하나라는 것도 있지 않은가?

듀란드 공작이 마른침을 삼키는 사이.

웅성웅성.

이든의 발언이 몰고 온 파장은 대단했다.

대신들이 저마다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한마디씩 내던졌다.

“아니… 지금 흑마법이라 했소?”

“흑마법은 과거의 그 명맥이 끊겨 유실된 것이 아니었소?”

“말도 안 돼.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마녀들과 흑마법사들은 아슬란 제국이 세워지기도 훨씬 이전에 모두 숙청당한 것이 아니었소? 사실상 계승자는 더는 없는 것으로 아는데!”

웅성웅성….

정적에 휩싸였던 회장이 금세 소란스러워졌다.

이든의 입이 재차 열린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여러분들의 반응. 충분히 이해합니다. 저 역시 처음엔 믿기 힘들었으니까요.”

믿을 수 없다는 격한 반응에도, 도리어 담담히 말하는 그의 모습에서 더욱 진정성이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그때, 현 상황을 모면하고자 듀란드가 내색하지 않는 얼굴로 능청스럽게 물었다.

“흑마법은 오래전 유실되었기에 설령 흔적이 남았다고 해도 이를 알아볼 수 있는 이들은 현재 그리 많지 않소. 기껏해야 마법사 아카데미의 교장이자, 황실 대마법사 듀크 경정도라면 모를까. 이든 길드장의 노파심은 이해하오만. 억측이 조금 심하지 않소?”

빙 돌려 말하긴 했지만.

‘네가 그게 흑마법임을 어찌 아느냐?’

듀란드의 속뜻은 그것이었다.

아직은 세간에 알려져선 안 되는 흑마법의 존재.

이를 뒤집기 위해 이의를 제기한 듀란드의 반론이 먹혀든 모양이다.

그의 얘길 듣던 좌중들이 저마다 숙덕였다.

“듣고 보니 그렇네…?”

“음. 하긴…. 계승자가 없는데 흑마법이 다시 나타났을 리가….”

사람들은 금세 동요하기 시작했다.

나쁘지 않은 반응에 듀란드가 회심의 미소를 지을 때쯤.

이든이 답했다.

“물론 그럴 수도요. 일개 길드장에 눈도 보이지 않는 제가 어찌 흑마법을 알아볼 수 있겠습니까.”

‘훗.’

순순히 인정하는 듯한 이든의 반응에 듀란드의 입술이 비릿하게 말려 올라가려던 그 순간.

“그런데 말입니다.”

“응?”

이든이 재차 입을 뗐다. 회장의 이목이 단숨에 그를 향했다.

“줄곧 레온하르트 영지를 괴롭히던 몬스터에게 발견된 흑마법의 흔적을 알아본 이가, 다른 누구도 아닌 엘프족 신관이라면 신빙성이 충분하지 않습니까?”

‘뭐라고!?’

일순 피어난 정적.

하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회장에 모인 이들이 믿기지 않는단 얼굴로 한마디씩 꺼내며 회장은 금세 소란스러워졌다,

“…세상에. 엘프족 신관을 만났다고!?!?”

듀란드가 뒤집어 놓았던 판을 사실을 기반으로 하여 금세 다시 되돌려 뒤집어 놓은 이든.

회장의 모인 이들의 반응이 이토록 즉각적으로 변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엘프란 종족이 무언가.

수백 년은 우습게 살아가고, 많게는 천 년 이상도 젊음을 유지한 채 살아가는 장수의 종족이 아니던가.

정말 오래 살아 봐야 백 년 남짓 살아가는 인간과 달리 그들은 이 땅의 오랜 역사의 산증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들이라고 흑마법의 존재를 모를까.

아니, 그보다 더한 것도 알면 알았지. 흑마법의 흔적을 절대 못 알아볼 리가 없다.

더군다나….

엘프족 신관이라면 그 실력을 떠나, 단지 마법과 관련된 역사 쪽에선 대마법사 듀크 경보다 훨씬 도가 튼 이들일 것이다.

“엘프족 신관이 흑마법 흔적을 알아봤다면 얘기가 달라지지….”

“아암! 그렇고말고. 다른 종족도 아니고 엘프족이라잖은가… 말로는 천 년 이상도 거뜬히 살아가는 종족이라는데 그들이 설마 흑마법을 못 알아볼 리가 없지.”

“만약 그 신관이란 자의 말이 사실이면 어찌 되는 거지?”

“어찌 되긴! 누군가 기를 쓰고 레온하르트 영지를 노렸다는 말이 되는 거지! 뭐, 레온하르트 영지야 오래전부터 버림받아 도태되었다지만, 어찌 됐든 간에 그곳도 엄연히 우리 제국의 땅이 아닌가!”

“그렇지!”

“만약 레온하르트 영지를 그간 괴롭혔던 몬스터의 돌발 행동의 원인이 어느 단체 혹은 어느 주변국의 짓이라면…. 이건 쉬이 볼 문제가 아니게 되네.”

“하긴. 그 말인즉슨 아슬란 제국의 전복을 꾀하는 짓이라 볼 수 있는 것 아닌… 잠깐.그러면 곧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다. 그 말인가?”

“그렇다 볼 수 있지.”

“허허…. 이런 세상에!”

좌중의 얘길 잠자코 듣던 듀란드가 이를 악물었다.

이든의 말에 아무런 반박도 못 하고 상황을 뒤집지 못해서?

그럴 리가.

아니면 흑마법의 존재 여부가 세상에 알려져서?

그것도 맞긴 하지만, 이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다만….

그 흑마법을 사용한 배후 세력.

이곳에 모인 좌중이 자신들의 존재에 대해 인식하기 시작했단 것이다.

듀란드가 입술을 질끈 깨물며 해결책을 모색하려던 그때, 이든이 선수를 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좌중의 이목이 재차 그에게로 단숨에 향했다.

“유니콘 길드가 지금까지 성장할 수 있었던 까닭은 뭐라 해도 아슬란 제국의 덕임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혀에 기름칠이라도 한 듯 그럴듯한 말이 술술 나온다.

이든이 계속 말을 이었다.

“사업을 한다는 집단은 무엇보다 이윤 추구가 가장 우선입니다. 하지만 저희 유니콘은 그간 입은 제국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레온하르트 영지의 지부를 세웠습니다. 수도의 무관 학교를 설립한 것 역시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주변국의 움직임이 시시각각 변하고 있고, 이러한 상황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국방 아니겠습니까? 국방의 힘은 인재에서 나오는 법이지요. 다만 현재 기사 아카데미의 예비 기사들을 선별하기 위한 무도 대회만으론 세상의 모든 인재들을 발굴해 내기엔 분명히 한계가 있다 봅니다. 해서…! 그 역할에 저희 유니콘이 보탬이 되고자 합니다! 혹여 숨어 있는 천재들을 발굴해 내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야말로 장황했던 연설.

일순 정적이 찾아왔지만, 그것도 잠시.

짝짝.

짝짝짝짝….

그의 연설에 홀린듯 누군가 연신 손뼉을 쳐 댔다.

그리고….

전염은 빨랐다.

그를 시작으로, 마찬가지로 넋 놓고 바라보던 이들이 일제히 손뼉을 쳐 대기 시작한 것.

짝짝짝짝!

회장이 떠나갈 듯 울리는 갈채 소리.

대부분의 사람이 손에 불이 나도록 이든을 향해 박수를 보내는 와중에도 단 한 사람.

듀란드 공작만큼은 불편한 기색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가 이를 악물며 불신 어린 눈으로 좌중을 훑었다.

‘이 멍청한 것들, 저자의 뱀 같은 혀에 다들 깜빡 속아서는…! 저자에겐 우리 제국의 국방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다. 단지 우리의 체제 근간을 뒤흔들기 위함임을 어찌 이리도 모른단 말인가!!!’

하지만 그의 속마음이 이들에게 들릴 리 만무하다.

듀란드 공작이 대신들을 향해 속으로 연신 욕을 내뱉던 그때.

회장의 문이 열리며 신하 한 명이 부리나케 달려 들어왔다.

들어왔던 신하가 회장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목청껏 외쳤다.

“황제 폐하께서 입장하십니다!”

신하의 외침에, 갈채를 보내던 대신들의 손이 덜컥 멈추었다.

그리고.

드륵.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는 대신들.

회장에 모여든 좌중의 이목이 향한 곳.

좌우로 활짝 열린 문으로, 한 사람이 부축을 받으며 힘겹게 걸어오고 있었다.

뼈만 앙상히 남은 볼품없는 노인의 모습이지만, 엄연히 이 제국의 지존이라 할 수 있는 아슬란 황제의 등장이었다.

아슬란 황제의 입실과 함께, 각자의 좌석 앞에 아침 식사가 빠르게 놓이기 시작했다.

조찬이다 보니 과하지 않게 음식이 차려졌지만, 그래도 하나같이 황실의 품위를 보여 주는 음식들이었다.

모두 황제의 덕담에 맞장구를 치며 식사에 열중하던 와중.

아슬란 황제의 눈이 한곳으로 향했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

다름 아닌 유니콘 길드장 이든이었다.

이든을 바라보던 아슬란 황제가 천천히 입을 뗐다.

“간밤에 고생했다 들었소.”

회장의 웅성거리던 소리가 멎었다.

황궁을 내내 떠들썩하게 했던 간밤에 있던 소동이 황제의 입에서 직접 나오는 순간이었으니 당연했다.

그의 말이 자신을 향한 것임을 모를 리 없다.

이든이 고갤 저었다.

“염려치 마십시오. 별달리 고생한 것은 없습니다.”

걱정 말라는 그의 답에도 황제는 고갤 휘휘 저었다.

“모든 것이 나의 무능함으로 인해 생긴 불찰이오. 용서해 주시오….”

제국의 황제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곤 생각할 수 없는, 힘없는 목소리에 대신들이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눈으로 황제와 이든을 번갈아 보았다.

듣던 이든마저 차마 입을 떼지 못하던 그때.

아슬란 황제가 재차 입을 열었다.

“혹… 이든 길드장만 괜찮다면, 내 자릴 마련할 터이니 따로 얘길 나누지 않겠소?”

황제와의 독대가 거론되고,

모든 좌중에 이목이 이든에게 집중된 가운데, 그가 천천히 고갤 끄덕였다.

“…아, 네. 저는 괜찮습니다.”

***

축 처진 그의 어깨가 더욱 처량해 보인다.

제국을 통치하는 황제의 기개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모습.

따듯한 차가 따라진 찻잔을 만지작거리던 아슬란 황제가 천천히 입을 뗐다.

“갑자기 이리 불러 미안하오.”

힘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황제의 목소릴 듣던 이든이 고갤 저었다.

“전혀 미안해하실 필요 없습니다. 폐하.”

이든의 기감이 앞에 앉은 황제를 향했다.

과거 혼란한 대륙 통일했다는 황제의 위상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미약한 기.

쌕쌕….

그리고 이따금 그가 숨을 들이 내쉴 때마다 들리는 미약한 숨소리.

‘죽어가고 있다.’

이든은 복잡한 심경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근래 들어 유니콘 길드를 시시때때로 노려 왔던 세력과는 별개로, 유니콘 길드는 황실의 미움을 받고 있다 생각했다.

그래서 조금은 각오를 하고 사교회에 참석했던 것도 없지 않아 있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보니, 황실이나 황제의 미움을 받던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침묵 속, 아슬란 황제가 다시 먼저 입을 뗐다.

“내가 이리 부른 이유는….”

입을 뗐던 아슬란 황제는 말을 다 하다말고, 말끝을 흐렸다.

대체 무슨 말을 앞두고 이리도 뜸을 들이는 것일까.

고민의 고민을 거듭했던 그가 다시 입을 뗀 것은 차가 다 식도록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였다.

“…이든 길드장.”

“말씀하십시오.”

“나를…. 도와주실 수 있겠소?”

이든이 듣다가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로 고갤 갸웃거렸다.

“…네?”

“…….”

대답은 없었다.

묵묵부답인 아슬란 황제의 모습에

이번엔 이든이 먼저 입을 뗐다.

“실례지만 폐하, 방금 하신 말씀…. 무슨 뜻이온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이든의 물음에 한참이나 대답이 없던 아슬란 황제가 살짝 미소 지었다.

조금은 허탈한 듯한 얼굴.

살짝 미소 짓던 그의 주름진 입가에서 초라한 지금의 모습만큼이나 힘없는 음성이 새어 나왔다.

“말 그대로요…. 이 나를…. 아니, 위기에 처한 아슬란 제국을 도와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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