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이든이 복잡미묘한 심경으로 아슬란 황제를 마주했다.
아무런 대답이 없던 그의 앞, 아슬란 황제가 착잡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고갤 숙였다.
거대한 제국의 황제라 볼 수 없는, 너무도 초라한 모습.
보이지 않아도.
목소리만 들어도 그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충분히 그려졌다.
그리고 조금 전 그 말을 꺼내기 전까지 아슬란 황제가 얼마나 고민을 거듭하고 스스로가 얼마나 초라하다 여기고 있을지도.
한참을 묵묵히 있던 이든이 무거웠던 입을 뗐다.
“제게 무엇을 도움받고자 하십니까?”
황제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앞에 놓인 다 식은 차를 단숨에 비웠다.
빈 잔을 만지작거리던 그의 손이 한쪽에 놓인 주전자를 향했다.
부르르….
이조차 들 힘이 없는 걸까.
찻주전자를 쥔 그의 앙상한 팔이 부르르 떨리며 빈 잔을 천천히 채워 갔다.
잔이 모두 채워지고.
탁.
주전자를 다시 구석 한쪽에 놓았던 아슬란 황제의 눈이 다시 착잡한 빛으로 가라앉았다.
무엇을 보는 걸까.
가라앉은 눈으로 물이 채워진 찻잔을 응시하던 그가 입을 뗐다.
“…난 죽어 가고 있소.”
“…….”
“알고 있지 않으셨소?”
이든은 대답 대신 천천히 고갤 끄덕였다.
아슬란 황제는 ‘역시….’란 표정을 지었다.
“…성직자의 말로는 중독된 것 같다 하더이다.”
잠자코 듣던 이든의 입이 열렸다.
“언제부터였습니까?”
아슬란 황제가 휘휘 고갤 저었다.
“모르겠소….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 모양 이 꼴이더군….”
“미독이군요.”
미독.
워낙에 극소량의 독이라, 먹어도 당장에 효과도 반응도 없다.
다만 미독의 특징이라고 한다면, 강제로 체외로 배출하지 않는 이상, 계속 체내에 남는다는 것.
오랜 시간 공을 들여 계속 먹이다 보면 그것이 체내에 쌓이고 쌓여 후엔 마치 지병이 발병한 것처럼 몸을 병들게 한다.
그리고.
이때가 되어 중독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땐 독의 잠식이 오래된 상태라 알게 되어도 강제로 배출할 수 없게 된다.
이든의 앞에 앉은 아슬란 황제 역시 그 미독에 중독된 것이다.
그것도 꽤 오랫동안 말이다.
“누군지 의심 가는 이도 없으십니까?”
“모르겠소….”
이든의 물음에 아슬란 황제가 답하며 살짝 미소 지었다.
살짝 허망해 보이기까지 한 얼굴.
제국의 일인자 자리까지 올라 모두를 굽어 볼 수 있는 위치에 섰으나….
정작 옆에는 믿고 의지할 사람 하나 없는 외롭고 쓸쓸해 보이는 인간….
그것이 지금의 아슬란 황제의 모습이었다.
“폐하.”
“……?”
“제게 팔을 내밀어 보시겠습니까?”
“팔을?”
아슬란 황제가 고갤 갸웃거리며 의아해하는 얼굴을 했지만, 곧장 앙상하게 마른 가느다란 팔을 내밀었다.
“여깄소….”
이든이 손을 뻗어 황제의 팔목을 잡고는 그의 맥문에 검지와 중지를 짚었다.
“…….”
말없이 황제의 맥문을 쥔 이든의 손끝에 찰나 푸른 기운이 화하며 일었다.
삼매진화를 이용한 마기의 진기화.
그때, 아슬란 황제가 화들짝 놀란 얼굴을 했다.
“……!”
이든의 손가락 끝에서 흘러나와 스며든 진기가 그의 맥을 타고 온몸을 훑는 느낌 때문이었다.
그 생소하고 이질적인 느낌에 아슬란 황제가 무어냐고 입을 떼려던 그 순간.
아슬란 황제의 입이 꾹 다물어졌다.
그의 시선이 앞의 이든을 향했다.
좀처럼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이마에 구슬땀까지 맺히며 집중하는 이든의 모습에, 황제 역시 저도 모르게 떼려던 입을 닫은 것이다.
“…….”
맥문을 쥔 채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는 듯 보이지만.
지금 이든은, 아슬란 황제의 맥을 타고 흐르는 자신의 기운에까지 기감을 확장한 상태였다.
진기를 타고 흐르는 그의 기감이 아슬란 황제의 체내 구석구석을 살폈다.
어떤 미독에, 얼마나 오랫동안 중독된 상태였을까.
기감으로 그의 상태를 살피던 이든의 표정이 더욱 딱딱하게 굳어 가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너무 오래되었다….’
아슬란 황제 체내에 쌓인 미독은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이미 전신에 퍼져 모든 신체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당장에 죽어도 이상할 것이 없을 상태였지만, 그는 사력을 다해 어떻게든 지금의 고통을 버텨 내고 있었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이든의 기감이 아슬란 황제의 단전을 향했다.
그리고 듣던 소문대로였다.
‘황제가 과거의 뛰어난 무인이었다고 하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군….’
이미 치사량만큼 쌓여 일반인이었다면 진즉에 유명을 달리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든의 기감이 향한 그의 단전.
지금 현재도 몸을 갉아 먹는 중독에 저항하고 있는 아슬란 황제의 기운이 느껴졌다.
이미 전신이 휘몰아치는 사기(死氣)로 지배된 상황이었지만, 그럼에도 아슬란 황제의 단전 속 기운은 이를 악물고 죽음에 저항하며 버티고 있었다.
그간 아슬란 황제가 대외적으로 활동하지 못하던 것 역시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젠 이것도 오래가지 못한다.’
그의 단전 속.
조금씩.
죽음의 저항하며 몸부림치는, 생을 향한 그 불꽃조차 사그라드는 것이 느껴졌다.
잠자코 그를 응시하던 아슬란 황제가 천천히 입을 뗐다.
이든의 표정만 보고도 이미 모든 것을 예상하고 체념한 듯한 얼굴로 말이다.
“얼마나… 더 살 수 있을 것 같소?”
이든이 맥문을 쥐었던 손을 뗐다.
그의 입이 무겁게 열렸다.
“상태로만 본다면…. 길어야 한 달 남짓입니다.”
“역시…. 나도 그러리라 생각했소….”
모든 것을 체념한.
아무렇지도 않은 말투로, 죽음을 앞둔 사람이라곤 볼 수 없는 담담한 모습.
그때, 이든이 대뜸 물었다.
“이것이 아니시지요?”
“…응?”
“폐하께서 조금 전, 제게 도와달라던 말씀. 단지 죽음을 앞둔 자신의 몸 상태를 보여 주고자 하신 말씀은 아닌 것 같습니다.”
“…….”
“제게 도와달라던 진짜 의중을 말씀해 주십시오.”
이든의 말을 듣던 아슬란 황제가 살짝 웃었다.
“과연…. 심안의 무사라더니, 내 속을 훤히 꿰고 계셨소. 길드장께서 그리 말하니 내 바로 본론을 꺼내리다…. 들이거라.”
말끝을 흐리던 아슬란 황제의 입이 재차 떨어지기 무섭게 그의 침소 안으로 신하와 한 아이가 들어섰다.
이제 10살이 되었을 법한 어린아이였다.
아슬란 황제가 눈짓하자 같이 들어왔던 신하가 고갤 숙이곤 급히 걸음을 돌려 나갔다.
“…….”
무거운 분위기에 안에 들어선 아이가 쭈뼛거리는 사이, 아슬란 황제가 먼저 입을 뗐다.
“내 손자요.”
“…….”
“내게 남은 유일무이한 혈육이요. 그리고 나를 이어 이 나라의 황제가 될 아이요.”
무겁게 본론을 꺼낸 아슬란 황제와 달리, 앞에서 듣던 이든의 표정은 어째선지 심드렁하기 짝이 없었다.
살짝 눈살을 찌푸린 그가, 조금 전과는 확연히 다른 차디찬 음성을 내뱉었다.
“혹, 폐하께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제게 그 아이의 대부라도 되어 달라 그 말씀입니까?”
“…….”
누군가 이든의 말을 들었다면 노발대발 경을 쳤을 것이다.
황제의 면전에 하는 말치곤 거침없는 발언인 것은 둘째치고.
새파랗게 어린아이라지만 아슬란 황제의 뒤를 이 나라의 태자다.
애는 맞지만, 신분이 신분인 만큼 대놓고 싫은 티를 내며 애 취급을 해선 안 됐다.
하지만 아슬란 황제는 전혀 개의치 않다는 듯, 고갤 끄덕였다.
“길드장께서 그래 준다면야 더 좋고.”
“황공하오나, 그럴 생각 없습니다.”
“…어떻게 정말 안 되겠소?”
“네. 절대.”
“…왜?”
“…말이 된다고 생각합니까?”
아슬란 황제가 고갤 갸웃거렸다.
“보통 이런 때는 황송하다. 영광이다. 하면서 어쩔 줄 몰라 하던데?”
“결혼도 안 한 총각한테 그러면 퍽이나 그러겠습니다.”
아슬란 황제가 무안한 얼굴로 괜한 헛기침을 해 댔다.
“…크흠.”
“대부 같은 것 해 줄 생각도 없고, 그럴 시간도 없습니다. 겨우 이런 얘기나 하고자 부르신 거라면 이만 가 보겠습니다.”
이든이 벌떡 일어서 발을 옮기던 그때.
“앉게나.”
대답은 없었다.
이든이 마저 걸음을 옮기려던 순간, 아슬란 황제의 힘없는 음성이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부탁일세….”
“하아….”
한숨을 한번 푹 내쉰 이든이 돌아와 자리에 앉았다.
그의 얼굴이 한껏 굳어져 있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아슬란 황제가 나이답지 않게 배시시 웃었다.
“그래도 여린 구석이 있구만.”
이든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진짜 갑니다.”
“농일세. 농!”
“…….”
“대부가 되어 달란 말 역시 그냥 던져 본 말일세. 아쉽게도 넘어오지 않는구만. 후후….”
아슬란 황제의 시선이 옆에 안절부절못하는 아이에게로 향했다.
“…내 손자이자, 제국의 태자 아슬란 트리니티일세.”
아슬란 황제가 어깨를 어루만지자, 손자라 소개한 아이가 쭈뼛 고갤 숙였다.
“…안녕…하세요!”
“네. 이든입니다.”
아이의 인사에도 참으로 냉랭하기 짝이 없는 반응이다.
그 모습에 아이가 저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그 모습에 아슬란 황제가 씁쓸한 얼굴을 하며 입을 뗐다.
“…테이머 길드.”
“……?”
익숙한 이름에 이든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레온하르트 영지의 고립… 캐슬롯 성의 붕괴. 그리고 어제 자네에게 있었던 일련의 사건까지…. 어째 수상한 냄새가 나지 않던가?”
“…구린내가 많이 나긴 했죠.”
이든의 답을 듣던 아슬란 황제가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었다.
조금 나른해 보이고, 조금 힘들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방금 나열한 사건 모두. 배후엔 공통된 세력이 있을 거로 생각하네. 그리고 이건 그냥 어림짐작이네만…. 그 배후 세력엔 필시 황실의 인물이 관여하고 있을 걸세.”
“어째서요?”
“훗. 응당 그리 생각해야 할 일 아닌가. 하나같이 쉬이 볼 사건들이 아닐세. 근데 지금은 어떤가. 세간에 이 일들이 그만큼 떠들썩하던가?”
“…아주 조용하죠.”
“관료 대신들이 손을 쓰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이야. 그리고 그 빌어먹을 놈들이 내 몸에 독을 풀었겠지.”
“해서 손을 잡자는 말씀이시군요.”
아슬란 황제는 순순히 인정하며 고갤 끄덕였다.
“맞네. 난 앞으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어. 문제는 이 아이지.”
아슬란의 착잡한 시선이 옆에 아이를 향했다.
“지금 황실은… 이 나라를 좀먹는 세력들로 가득하네. 하지만 그보다 가장 큰 문제는 내부의 적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단 거지….”
옆에 손자를 향한 아슬란의 눈에 씁쓸한 빛이 더욱 강해졌다.
“내가 죽으면…. 이 아이는 대신들에게 휘둘리는 허수아비 황제가 될 거야.”
“해서 같이 힘을 모아 뒤에서 음모를 꾸미고 황실을 마음대로 휘두르려는 대신들을 찾아내 무찌르자. 그 말 아니십니까?”
“맞네.”
하지만 듣던 이든의 표정은 여전히 탐탁지 않은 얼굴이었다.
“폐하의 추측엔 저 역시 동의하는 바입니다. 다만….”
“…….”
“그것이 구태여 폐하와 손을 잡을 이유는 못 됩니다. 유니콘의 일은 유니콘이 알아서 합니다. 저희를 방해하는 세력이 황실과 관련된 이라면, 그것이 폐하의 적인지 아군인지를 상관하지 않고 저희가 알아서 손을 쓸 것입니다. 게다가….”
이든의 고개가 돌려져 황제의 옆, 그의 손자를 향했다.
“일단 손을 잡게 되면 좋든 싫든 간에 태자의 안전을 책임져야 하는데…. 제겐 그럴 여유가 없습니다.”
단호하기 짝이 없는 말투.
하지만 이미 예상한 반응이라는 듯, 아슬란 황제가 천천히 고갤 끄덕이다 의미심장한 눈빛을 하며 입을 뗐다.
“그럼 이건 어떤가?”
“뭐가 말입니까?”
“조금 전 내가 나열한 사건들….”
말끝을 흐리던 아스란 황제가 재차 입을 연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 사건들의 배후가 레스타드 길드장의 죽음과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나?”
“…….”
심드렁하던 이든의 얼굴이 어느새 급속도로 차가워졌다.
아슬란 황제가 ‘역시’란 표정으로 재차 입을 뗐다.
“말이 없는 것을 보니 그리 생각해 본 적이 있나 보군.”
사실이었다.
캐슬롯 성 붕괴야 당시 현장에 이든 자신이 연관되어 있던 일이었고.
레스타드 길드장을 시해한 인물이 누군지는 이미 진즉에 자백을 받아 알고 있던 상황.
그가 무슨 이유에서 캐슬롯 성으로 호송 중이던 유니콘 길드를 노렸고, 레스타드 길드장까지 죽일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나중에 듀란드 공작만 조용히 처리할 생각이었다.
혹여 사교회에서도 그 사람만 주의하면 된다고 여겼다.
하지만….
어젯밤 간밤에 있었던 습격으로 생각이 바뀌었다.
레온하르트 영지의 몬스터들.
캐슬롯 영지의 반혼시들.
그리고 어젯밤 스파토이까지.
각기 다른 몬스터들이었지만, 필시 같은 기운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그간 호송 과정 중에 겪은 일련의 사건들.
그리고 마치 보란 듯이 레스타드 길드장을 시해한 듀란드 공작.
마지막으로 어젯밤 습격까지….
그 모든 사건에는 한 가지 공통분모가 있었다.
바로 유니콘 길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