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자네의 추측과 내 생각이 맞는다면 우린 같은 적을 공유하고 있는 것일세. 아닌가?”
“…….”
맞다.
그의 추측대로라면.
그리고 이든이 알고 있던 정보대로라면 분명 둘은 공통된 적을 두고 있다.
그때, 굳게 다물던 이든이 천천히 입을 뗐다.
“…황실을 어지럽히는 이들이, 레스타드 길드장을 시해한 이들과 공통된 이라면. 저 역시 그들을 용서할 생각이 추호도 없습니다.”
“오. 그럼…!”
아슬란 황제의 표정이 밝아지려는 찰나. 이든이 손을 저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만입니다.”
“응…?”
선을 긋는 이든의 말에 아슬란 황제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거기까지라니…?”
“아까도 말했듯이 저는 단지 레스타드 길드장의 복수와 유니콘 길드의 위협이 될 놈들을 처리하기 위해 움직일 뿐. 황실의 안전 같은 것은 관심 밖이라 그 말입니다. ”
“…….”
“폐하께서 그 정도만으로도 만족하신다면 손을 잡아 드리겠습니다. 단….”
이든이 말끝을 흐렸다.
아슬란 황제의 눈이 자연스레 그를 향했다.
“제게 충의를 바라진 마십시오. 우리의 관계는 그저 동업일 뿐. 충의는 폐하가 스스로 골라내어 충신이 될 자들에게 바라십시오.”
솔직하다면 과하게 솔직한 것이겠지만, 아무튼 황제의 면접 앞에다 두고 할 만한 얘긴 아니었다.
“훗.”
아슬란 황제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것만으로도 흡족하다는 듯 그가 작게 웃으며 고갤 끄덕였다.
“아쉽지만, 그 정도라면 내 만족할 수 있겠네….”
사실 황제 역시 알고 있었다.
황실의 안전 더 나아가 손자의 안전을 약속해 달란 것이 얼마나 무리한 부탁이었는지.
게다가.
그의 말대로 충의는 스스로 찾아 충신에게 부탁해야 할 일이었다.
더 나아가 그것이 황실을 위한 일임을 누구보다 그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그렇지만 수확이 전혀 없던 것이 아니야….’
비록 원하는 답 모두를 들은 것은 아니지만, 어찌 됐든 간에 유니콘 길드와 적을 공유한다는 자체만 놓아도 성공적인 대화였다 할 수 있다.
‘한 달…. 한 달이라. 너무 짧군.’
물론 여전히 아쉬움이 남는 것 역시 어쩔 수 없지만.
그럴 것이 그에게 남은 시간이 턱없이 적지 않은가?
“그리고….”
그때, 불현듯 이든이 재차 입을 열었다.
착잡한 빛으로 가라앉았던 아슬란 황제의 눈이 재차 이든에게 닿았다.
“폐하에게 지금 가장 도움이 될 만한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나에게 도움이 될 만한 방법?”
이든이 고갤 주억거렸다.
“한 달 남짓 남은 폐하의 수명을… 늘릴 수 있는 방도입니다.”
아슬란 황제가 주름진 눈가를 팽팽히 당기며 눈을 부릅떴다.
그가 제대로 들은 것이 맞냐는 듯한 얼굴로 재차 물었다.
“지, 지금 무어라 했나… 남은 내 수명을 늘릴 수 있다고…?”
“네. 기껏해야 1년 정도겠지만.”
“그, 그게 뭔가. 어서 말해 주게!!!”
몸은 서서히 죽어 가는 중이었지만, 그에겐 백전노장다운 여유가 느껴졌었다.
몸은 앙상하고 볼품없을지언정, 주름진 눈엔 필시 제왕의 위엄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모습일랑 온데간데없었다.
아슬란 황제가 근래 들어 어느 때보다 다급한 얼굴로 이든을 재촉해 댔다.
“뜸 들이지 말고 어서 말해 주게. 내 수명을 늘릴 수 있다는 것이 정녕 사실인가!?”
이든이 고갤 끄덕였다.
“맞습니다.”
“뭔가 그것이!”
“폐하 몸 안의 미독을 태워 버리는 겁니다.”
듣던 아슬란 황제가 고갤 갸웃했다.
“미독을… 태워 버린다?”
“네.”
“…쉬이 이해가 가질 않는군. 몸 안의 미독을 어찌 태운단 것인가?”
생소할 만하다.
이든이 말한 미독을 태운다는 것인즉슨, 맥문에 그의 기운을 불어넣은 후 삼매진화를 피워내 아슬란 황제의 몸 안에 미독을 말 그대로 태워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말만 들으면 단순하고 간단한 방법이지만, 문제는….
‘그 과정이 만만치 않다는 게 문제지….’
이것은 이든의 이전 생, 그러니까 그가 무진이었던 시절에도 얘기만 들었을 뿐, 단 한 번도 시도해 본 적이 없던 것이다.
그릇에 물이 차면 넘치듯.
사람은 각자 수용할 수 있는 기운의 한계치가 정해져 있다.
말인즉슨 자신의 기운을 남의 몸에 불어넣는 것 자체가 고도의 집중을 요한다는 것이다.
내공의 운용이 능숙한 이라면 들어오는 넘치는 기운을 다스릴 줄 알겠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엔 맥문을 쥔 이와 맥문을 짚는 이. 둘 모두가 동시에 자멸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
쉽게 말하자면 둘 다 주화입마에 빠질 위험이 크다는 것이다.
단지 기운을 불어넣는 것 자체만 해도 이리 위험한데, 그 안에 불어넣었던 기운을 삼매진화로 화해 미독을 태운다?
누가 들으면 미친 짓이라며 멱살을 잡고서라도 말릴 초고난도의 작업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지금도 아슬란 황제의 몸을 갉아 먹고 있는 미독을 멈추게 할 유일한 방법이었다.
“…….”
이든을 통해 모든 것을 대략적으로 들은 아슬란 황제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조금 전 방도를 다급히 묻던 모습은 없고, 그의 눈엔 난감한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왜 아닐까?
자칫 잘못하면 한 달이 아니라 당장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당혹스러울 만하지.
아슬란의 시선이 옆의 손자를 향했다.
그가 무릎 쓰고 살날을 늘리려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녀석.
혹여 잘못돼 자신이 죽는다면….
남은 이 핏덩이 같은 손자는 어찌 되는 것인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하지만….
이대로 놔두기엔 당장 그에게 남은 시간 또한 턱없이 부족한 것은 마찬가지 아니던가.
아슬란 황제가 머뭇거리는 사이.
이든이 먼저 입을 뗐다.
“고민이 많이 될 것으로 압니다.”
아슬란 황제가 솔직하게 고갤 주억거렸다.
이든이 재차 말을 이었다.
“저 역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여 제안한 겁니다. 게다가…. 위험부담이 큰 것과 별개로 무조건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고요.”
아슬란 황제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크게 내뱉었다.
“하아…. 어렵구만….”
“그럴 겁니다.”
이든은 재촉하지 않았다.
그 역시 이 선택이 얼마나 고민될지 이해하니까.
이든이 다시 입을 뗐다.
“당장에 결정이 어렵다면 나중에 기별을 주십시오. 단 중독 상태가 심각하니 최대한 빨리 결정하셔야 합니다.”
이든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그때.
앞의 아슬란 황제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하겠네.”
“네?”
“하겠다고 했네….”
말하는 와중에도 여전히 고민이 묻어 나온다.
하지만….
아슬란 황제는 알고 있었다.
지금이 손자의 막막한 앞날을 밝혀 줄 기회라는 것을.
위험부담이 크다지만, 더는 망설일 수 없다는 것을.
찰나, 전투를 앞둔 백전노장의 그것처럼.
아슬란 황제의 눈빛에 단호한 빛이 어렸다.
“아까와 같이 팔을 내밀면 되겠나?”
마음속에 결심이 서자, 목소리에도 굳은 힘이 실렸다.
이든이 살짝 웃었다.
“네.”
“시간 끌 것 있겠나? 바로 시작하세.”
“그전에.”
“응?”
이든의 고개가 다시 아슬란 황제 옆에 손자를 향했다.
“태자를 다른 곳에 보내시지요. 아이가 보기 힘든 것은 둘째치고 누구에게도 방해를 받아선 안 됩니다. 이 시간부로 모두 침소에 들이지 말아라 명하십시오.”
“으음. 알겠네.”
고갤 끄덕인 아슬란 황제가 문밖에 있던 신하를 불렀다.
“밖에 있는가.”
아슬란 황제의 입이 떨어지기 무섭게 조금 전 들어왔던 신하가 기다렸다는 듯 부리나케 달려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폐하!”
“태자를 방으로 돌려보내게.”
“예!”
“그리고!”
황자의 손을 잡고 걸음을 옮기던 신하가 우뚝 멈추어 섰다.
“예. 폐하…!?”
일순 황제의 얼굴을 힐끗 마주했던 신하가 당혹스런 얼굴을 했다.
그의 흔들리는 시선이 닿은 곳.
화르륵.
거기에 아슬란 황제의 눈에서 생을 향한 투지를 불태우며 빛을 내고 있었다.
“명심하게. 이곳에 아무도 들여서는 안 되네. 절대로! 알겠는가?”
“예…! 명심하겠습니다.”
신하가 태자와 함께 나가고, 문단속을 확실히 하고 나서야 아슬란 황제가 자신의 팔을 내밀었다.
스윽.
“자, 시작하세.”
끄덕.
이든이 고갤 끄덕이곤 황제가 내민 맥문을 짚었다.
스스스스….
그의 단전의 마기가 아슬란 황제의 맥문을 짚은 손끝에서 피어오른다. 하지만.
그의 맥에 스며드는 것은 마기가 아닌, 삼매진화로 정화시킨 순수한 진기.
아슬란 황제의 체내에 스며들기 전 한 번의 삼매진화.
그리고….
스으으으으으!
스며들기 무섭게 순수화된 진기가 황제의 맥을 타고 다시 구석구석을 살피기 시작한다.
마치 그의 안에 천라망을 구축하듯.
이든의 진기가 아슬란의 전신을 지배했다.
‘역시… 신체 대부분이 망가진 상태다. 더 이상의 중독을 막기 위해선 그의 몸 안에 미독을 박멸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기 위해선…!
이든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그 순간.
아슬란 황제의 맥을 타고 흐르는 그의 진기가 두 번째 삼매진화를 피운다.
화아아아아악!!!!
삼매진화는 진기의 불꽃.
즉. 이 불꽃으로 아슬란 황제의 몸 안에 미독을 태워 버릴 심상인 것이다.
“크윽…!”
이든의 진기가 맥 안에서 불꽃으로 화하기 무섭게 아슬란 황제가 눈살을 찌푸리며 침음성을 흘렸다.
몸 안에 불덩이가 그을리는 듯한 느낌일 테니 그 반응 역시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 고통을 모를 리 없는 이든이 입을 열었다.
“무조건 참으셔야 합니다. 이빨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악물고 버티세요. 신음을 내는 것도 되도록 참으시고요.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아슬란 황제가 대답 대신 고갤 주억거렸다.
말을 마친 이든의 진기가 다시 맥을 타고 그의 전신을 훑으며 숨어 있는 미독을 찾아 박멸하기 시작했다.
화륵.
화륵.
화르륵.
신중하면서도 신속하게.
조심하면서도 결단력 있게.
미독이 보이는 족족 삼매진화를 태워 버린다.
고도의 집중력을 필요로 하는 이 일련의 작업들이 찰나의 순간에 이루어졌다.
가히 전생의 정점을 보았던 이든이기에, 오직 그만이 시도할 수 있는 대범한 작업.
하지만….
단지 대범만 해선 안 된다.
아슬란 황제의 상태는 당연히 정상이 아니었다.
해서 그가 버틸 수 있는 진기의 화력도 낮은 편이었다.
미독 자체에 없애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자칫 힘 조절에 실수하다간 미독을 다 태워 없애기도 전에 황제가 주화입마에 빠질 수도 있음을 경시해선 안 되었다.
신중하고.
또 신중하게….
하지만 신중에 치우친 나머지 작업 속도가 느려서도 안 된다.
황제의 체력은 이 험난한 작업을 버티기엔 너무도 약하다.
더없이 빠르게…!!!
신중하고도 빠른, 신속하면서도 정확한 이 모든 고도의 작업이….
짧은 순간에 모든 것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어느새 이든의 이마는 구슬땀으로 젖어 있었다.
“크읍….”
질끈 깨문 아슬란 황제의 입술엔 주룩 피가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참고, 또 참아 낸다.
자신도 자신이지만,
이 모든 것을 해내고 있는 이든 역시 얼마나 힘든지 알고 있기에…!
얼마나 지났을까.
실제 시간은 찰나지만,
고통을 수반한 이 과정들은 시간을 느끼는 감각마저 무뎌질 만큼 길게 다가왔다.
그때.
“후우….”
조금은 지친 듯.
이든이 어느 때보다 길게 숨을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