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이든의 입에서 매가리라곤 느껴지지 않는 가라앉은 음성이 내뱉어졌다.
“끝났습니다.”
“하아….”
입술을 있는 힘껏 깨물던 아슬란 황제의 입에서도 기어코 한숨이 새어 나왔다.
미독을 없앤 사람도.
그리고 받는 사람도 진을 빼게 만드는 작업이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고생은 나보다 자네가 한 것 같으이….”
이든 못지않게 구슬땀을 흘린 아슬란 황제의 시선이 이든을 향했다.
착 감긴 눈 밑으로, 피로로 거무튀튀한 것이 얼마나 힘든 작업이었는지 몸소 보여 주고 있었다.
“일단 폐하의 몸 안의 미독은 모두 제거한 상태입니다.”
“저, 정말인가…!?”
“네. 몸이 더는 나빠지진 않겠지만,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몸 안에 괴사는 이미 상당 부분 진행된 상태입니다. 기껏해야 조금 더 수명을 늘렸을 뿐입니다.”
“…그렇군.”
내심 기대했건만….
하지만 착잡해 보이던 기색도 잠시.
황제의 주름진 입가에 살짝 미소가 지어졌다.
‘그래도…. 이만한 것이 어딘가. 이것도 더할 나위 없는 큰 성과다.’
고작 한 달 정도 남은 수명이었다.
아니, 사실 말이 한 달이지.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슬란 황제가 눈을 감고 자신의 몸을 살폈다.
이미 중독될 대로 중독된 몸.
몸이 좋지 않은 것은 여전했지만, 확실히 눈앞의 청년 말대로 더는 악화하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 예로.
그의 배꼽 부분.
사력을 다하며 미독과 맞서 싸우던 그의 마나도 어느새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지 않은가?
내내 가까이 다가온 죽음에 시달리다 보니, 이 정도만 해도 온몸이 날아갈 듯 가벼웠다.
보일 리 만무했지만, 그래도….
꾸벅.
아슬란 황제가 앞에 이든에게 고갤 푹 숙였다.
대국의 황제가 같은 황제도 아닌, 일개 길드장에게 고갤 숙였다.
누군가 봤다면 놀라 까무러칠 만한 장면이었지만, 정작 고갤 숙인 당사자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다.
아슬란 황제가 그대로 고갤 숙인 채 입을 열었다.
“진심으로 감사드리네….”
“…….”
황제가 보일 수 있는, 아니 누군가에겐 절대 보여선 안 되는 그가 할 수 있는 진심을 담은 감사의 말.
묵묵히 그의 목소릴 듣던 이든의 고개가 모로 꺾였다.
까딱.
아슬란의 눈이 위로 치켜뜨며 이든을 향했다.
그런데….
왜지?
옆으로 꺾인 고개에서 그의 얼굴이 더없이 심술 맞아 보이는 것은…?
이든이 입을 열었다.
“뭐 하신 겁니까?”
“…가, 감사의 인사를 드렸네.”
“…고개라도 숙이신 겁니까?”
“그, 그렇네만….”
이든이 눈살을 찌푸렸다.
“전 눈이 안 보이는데요?”
“아…! 믿어도 되네. 정말 숙였….”
이든이 손을 휘휘 저으며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아니, 그게 아니라. 맨입으로?”
으, 응…?
이든이 화들짝 놀란 듯 시늉을 했다.
“아니 설마 진짜 고맙다. 한마디로 땡 하고 넘어가려 했던 건 아니시죠? 제가 그리 개고생을 했는데, 에이 설마!? 제국의 황제인데?”
“혹…. 뭔가를 원하…. 는가?”
왠지 잘못 걸린 거 같은데…?
아슬란 황제의 안색이 대번에 창백해졌다.
이든이 양손을 깍지를 낀 채 뒤통수에 기대며 가슴을 한껏 내밀었다.
“아니 뭐~ 뭔가를 바라는 것은 아니고요. 그냥 다른 것도 아니고 수명을 늘려 드렸는데 수. 명.”
“그, 그렇지?”
이든이 휘파람까지 보며 먼 산을 바라봤다.
근데, 눈도 안 보이는데 구태여 먼 산을…?
“뭐 작은 성의 같은 것을 바라는 건 아니고요. 그 하핫! 그 뭐시냐. 이번에 저희 길드에서 신사업으로 시작하는 무관 학교 있잖아요. 그거에 대한 황제 폐하의 친필 인증서가 있으면 좋겠다~ 싶네요? 뭐, 이 기관은 제국에서 인정한 국가 공인 시설입니다. 이 정도…? 뒤에 폐하 성함 적는 거 잊지 마시고! 뭐 또 그 뒤에 옥쇄로 직인까지 찍어 주시면 더 좋구요…?”
원하는 거 있네.
아슬란 황제가 진땀을 빼며 웃었다.
“하, 하하…. 그, 그거야 뭐 어렵지 않지. 그거면 되겠는가?”
“아! 그리고요. 이번에 칼스테인 영지에 계시는 저희 부모님을 수도로 모셔 오고 싶은데, 제가 돈이 없네요. 수도의 땅값이 원체 비싸잖습니까. 그렇죠?”
“그, 그치 많이 비싸긴 하지….”
“그래서 말인데 혹시….”
이든이 검지와 엄지를 동그랗게 말아 올렸다.
“빌려주실 수…. 아 뭐, 주면 더 좋고요! 하핫!”
“…….”
없긴.
바라는 거 더럽게 많네.
아슬란 황제의 얼굴이 한껏 굳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단단히 걸린 것을….
황제가 고갤 주억거렸다.
“알았네. 내 물심양면 돕겠네…!”
“그 있잖아요.”
“하아… 또 뭔가…!”
“이왕 도와주실 거면 출퇴근 좀 편하게 수도 중심부 땅값만큼 지원해 주시면 더 좋구요. 하핫!”
급기야 아슬란 황제의 얼굴에 인상이 가득 써졌다.
‘아 제발 좀!!!!’
적당히를 몰라. 적당히를!!!
***
탁.
황제의 침소에서 나온 이든의 얼굴은 자못 심각해 보였다.
이든이 조금 전 황제의 얘길 떠올렸다.
-…그간 내가 너무 안일했어. 짧은 시간이지만, 어렵게 얻은 기회인 만큼, 난 이제부터 황위를 계승할 손자에게 방해되는 정적들을 하나씩 제거해 갈 생각이네. 나를 봐서 알겠지만, 우리의 추측대로 황실을 좀먹는 세력과 유니콘 길드에 마수를 뻗치는 이 둘이 공통된 세력이라면 저들이 움직이기 전에, 우리가 먼저 손을 쓰는 것이 보다 이로울 걸세. 해서… 자넨 이제 앞으로 어찌 움직일 생각인가?
황제의 추측은 맞을 것이다.
아니, 더없이 확실하다.
그의 생각과 이든 본인 생각이 일맥상통한 것을 보면 더 볼 필요도 없다.
하지만….
그것이 황제와 손을 잡을 만한 이유가 될까?
쉬이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고민이 아니었다. 때문에 황제의 몸에 미독을 풀고 황실에까지 마수를 뻗쳤을 유력한 용의자인 듀란드 공작에 관해서도 함구하지 않았던가….
‘어쩐다…. 잡아? 말어?’
물론 아슬란 황제는 충분히 생각할 수 있을 만한 말미를 주었다.
다만, 한 가지 걱정이 되는 것은 황제의 사후다.
인연이란 것은 쳐 낸다고 하여 쉽게 쳐 낼 수 있지 않고, 생각보다 질긴 법이다.
‘…당장에야 황제와 손을 잡고 그 의문의 세력을 찾아 없앤다면, 일이 조금 더 수월하게 풀리겠지. 하지만….’
황제가 죽고 나면 그의 후계자인 태자는 어찌 되는가?
좋든 싫든 간에 이든, 본인이 떠안게 될 불상사마저 생길 수도 있다.
고민을 하던 이든이 연신 턱을 매만졌다.
‘만약 손을 잡는다면 가장 우선시해야 할 것은 뭐라 해도 황자를 책임질 충신이다. 그리고 그것과 가장 어울리는 인물은 내가 아는 선에선 뭐니 뭐니 해도….’
그때, 중얼거리며 길을 걷던 이든의 뒤로 기척 하나가 다가왔다.
“여기 계셨구려. 이든 길드장.”
나이가 꽤 지긋해 보이는 노년의 목소리.
자신을 부르는 그 소리에 이든의 발걸음이 덜컥 멈추었다.
“…누구신지요?”
이든의 물음에 뒤에 선 이가 허허실실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왜일까.
웃고 있는 듯한 그의 입술이 미묘하게 뒤틀렸다.
마치….
비웃는 듯한 비릿한 미소였다.
이든에게 다가온 이가 입을 열었다.
“본인은 듀란드 공작이라고 하오. 혹 들어 본 적 있으시오?”
소개를 듣던 이든의 얼굴에 묘한 감정이 떠올랐다.
철천지원수를 앞에 둔 복잡미묘한 얼굴.
차갑게 식어 가라앉았던 그의 얼굴에 일순 입꼬리가 말아 올라간다.
이든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알다마다요. 제가 어찌 공작님의 존함을 듣지 못했겠습니까?”
‘이것 봐라…?’
이든의 말을 듣던 듀란드 공작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공작인 자신을 앞에 두고도 고갤 빳빳하게 들고 있는 저자의 건방진 태도 때문에?
아니, 그런 것이 아니었다.
조금 전, 이든의 말이 묘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이름을 어디서 들었단 뜻이었을까. 세간에 거론되는 이름을 들었다는 말인지, 아니면….
레스타드 길드장을 시해했던 자들의 자백을 통해 들었다는 말인지 도통 의미를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불편한 기색을 지운 듀란드 공작이 입술을 말아 올렸다.
그의 얼굴에 다시금 뒤틀린 듯 비릿한 웃음이 표정으로 새겨졌다.
듀란드 공작이 능청스럽게 맞받아쳤다.
“명성 자자한 유니콘 길드장께서 이 나를 아신다니 참으로 영광이오.”
이든을 앞에 두고도 저리 여유를 부릴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몇 없을 것이다.
듀란드 공작이 저토록 여유를 부릴 수 있는 이유.
다름 아닌 이곳은 황궁 안이 아니던가?
다른 곳이라면 몰라도 이곳은 보는 눈이 많은 곳이다.
제아무리 눈앞에 이든이란 사내가 소문대로 막 나가는 자라 하여도, 황궁 안에서까지 막 나갈 만큼 안하무인은 아닐 것이다….
듀란드 공작은 그리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재차 말을 이었다.
“보아하니 폐하와 꽤 긴 시간 동안 얘기를 나누는 듯 보이던데. 뭔가 긴말한 대화라도 주고받은 것이오?”
마치 떠보는 듯한 말투였다.
달리 숨길 것도 없다는 듯 이든이 고갤 끄덕였다.
“예. 아주 영양가 있는 대화를 나눴지요.”
“호오…. 그래요? 어떤 대화인지 살짝 귀띔해 주실 수 있겠소? 이래 봬도 내가 나랏일의 신경을 꽤 많이 쓰는 사람이라. 폐하의 걱정이 곧 내 걱정이라서 말이오.”
“아! 그것이 말입니다.”
이든의 무미건조한 표정에 다시금 알 수 없는 웃음이 새겨진다.
저벅저벅.
이든이 성큼성큼 걸어가 듀란드 공작 바로 코앞까지 다가갔다.
그가 듀란드 공작의 귓가에 대곤 목소릴 낮춰 그만 들릴 듯한 음성을 내뱉었다.
“폐하께서… 제국의 앞날에 대해 참으로 걱정이 많으십니다. 저 또한 그분의 걱정에 심히 동감하는 바이고요.”
‘…뭐라고?’
듀란드 공작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크게 요동쳤다.
‘뭐지 방금 저 말뜻은…?’
일순 듀란드의 머릿속에 오만가지 생각이 몰려왔다.
‘설마…. 황제가 내 계획을 알아차린 것인가. 아니, 그럴 리가. 내가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공을 들여 미독을 먹여 왔는데. 하면….’
듀란드가 생각을 곱씹던 그때.
“공작님께서도 고민이 많으실 줄 압니다. 그럼 전 용무가 바빠서 이만….”
묘한 말을 남긴 이든이 몸을 홱 돌려 재차 걸음을 옮겼다.
성큼성큼 걷던 이든은 이미 저만치 멀어졌건만….
심각한 고민이라도 빠진 것처럼 내내 얼어붙어 있던 듀란드의 입이 일순 열리며 이미 저 멀리 떨어진 이든을 불러 세웠다.
“유니콘 길드장.”
이에 이든의 걸음도 따라 멈추었다.
“……?”
“길드장께서 신사업으로 벌이는 그 무관 학교, 과연 잘되리라 보시오?”
듀란드의 물음에 이든이 입술을 비릿하게 말아 올렸다.
“백 마디 말보다 한 번의 증명이 의미 있는 법 아니겠습니까. 듀란드 공작님께도 보여 드리지요. 유니콘 길드가 다시 비상하는 모습을….”
참으로 이상했다.
저 멀리 떨어져 있는데, 저 이든이란 자의 목소리가 귀에 박히듯 똑똑히 들어온다.
빠득.
듣던 듀란드 공작이 다 들리도록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이, 이이이 건방진…!’
그러거나 말거나.
재차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던 이든은 어느새 아까보다 훨씬 더 멀어져 있었다.
***
황궁에서의 모든 일정이 끝났다.
수도 본부로 돌아온 이든과 카르엘은 입을 쩍 벌릴 수밖에 없었다.
단 하루 자릴 비웠을 뿐이건만, 그들 앞으로 그간 산적한 일들이 몰아닥쳤다.
덩달아 함께 돌아온 카르엘까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던 그때.
불현듯 이든이 옆에 있던 카르엘을 불렀다.
“카르엘 씨.”
“예, 길드장님?”
“서신을 하나 써 주시겠습니까?”
“아, 네. 물론입니다. 그런데… 누구한테?”
마저 생각을 정리하듯 묵묵히 있던 이든의 입이 잠시 뒤 재차 열렸다.
“아슬란 황제에게 보내 주십시오.”
“아 네. 아슬란 황제….”
말끝은 흐리던 카르엘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이든을 바라보았다.
“저… 기, 길드장님. 아, 아슬란 황제 폐하께요…?”
이든이 고갤 끄덕였다.
“네. 아주 중요한 내용입니다. 해서… 아슬란 황제만이 볼 수 있는 특급 배송으로 부탁합니다.”
“특급 배송이라 하시면…?”
“제가 직접 합니다.”
이든의 입가에 묘한 웃음이 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