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햇빛 한 점 들지 않는 어느 깊은 어둠 속.
중간 중간 벽에 내걸린 횃불이 이 어두운 공간을 밝히려 애쓰고 있으나, 무저갱과 다름없는 이곳을 비추기엔 턱없이 모자라 보였다.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며,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그야말로 무(無)의 공간.
스스스….
그곳에 새까만 로브를 덮어쓴 한 인형이 부지불식 나타났다.
어둠 속에 새까만 로브라….
기척은 느껴지되, 당연히 그 모습이 보일 리 없다.
하지만.
화르륵.
로브 속 붉게 타오르는 안광만큼은 숨길 수가 없었다.
저벅저벅….
익숙한 듯, 이 어두운 공간에서 보이지 않는 길을 따라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는 붉은 안광.
얼마나 크고 넓은 공간인지.
그 끝이 있기는 한 건지 의문이 들 만큼 한참을 걸었음에도 그는 여전히 걷고 또 걸었다.
덜컥.
그때,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움직이던 안광이 별안간 멈추었다.
이윽고 타오르던 그 붉은 안광이 차츰. 차츰 꺼지기 시작한다.
로브를 뒤집어쓴 이가 입을 열었다.
“위대하신 주인님을 뵙습니다.”
그때.
탁.
손가락이 튕기는 듯한 소리가 들리고.
화르륵.
별안간 어두운 공간 뒤편에 횃불 몇 개가 피어올랐다.
꽤 적지 않은 횃불이 켜졌건만, 그럼에도 이곳을 밝히기엔 턱없이 모자라 보였다.
하지만….
횃불 밑에 보이는 한 단상.
그리고 그 위에 마련된 거대한 의자.
그곳에 나른한 듯 몸을 기대어 앉은 이를 육안으로 확인하기엔 모자람이 없다.
이윽고
단상 위에서 그 모습만큼이나 나른한 음성이 새어 나왔다.
“…왔어?”
별안간 들려온 것은 여성의 목소리였다.
음색 자체는 더 없이 고혹적인 음성이었으나, 음성에 서린 한기는 이 무저갱 같은 공간을 살얼음판으로 만들고 있었다.
단상 밑, 로브를 뒤집어쓴 이가 이마가 땅에 닿도록 넙죽 엎드렸다.
“주인님,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옥체는 좀 어떠신지요….”
“네놈이 신경 쓸 것 없다.”
사내의 조심스러운 물음에도 불구하고 단상 위에서 들려온 것은 더없이 차디찬 음성이었다.
주인의 심기를 건드렸다 생각한 걸까.
핼쑥해진 사내의 이마가 재차 바닥에 쿵 닿았다.
“죄, 죄송합니다…! 미천한 것이 주인님께 괜한 참견을….”
그때, 단상 위의 여인이 사내의 말을 뚝 잘랐다.
“영양가 없는 대화는 집어치우지. 그래, 무슨 일로 왔지?”
“일전에 시키신 일에 대해 보고를 올리려 합니다.”
“일전의 일이라….”
턱을 매만지던 그녀가 불쑥 먼저 화제를 꺼냈다.
“혹 스파토이까지 내어 줬음에도 유니콘 길드장을 죽이는 데 실패한 일을 말하는 것이냐.”
“……!”
로브 속 사내의 붉은 홍안이 부릅 뜨였다.
단상 위에서 영 탐탁지 않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쯧. 꼬리 밟힐 짓을 했구나. 멍청한 것.”
듣던 로브 속 붉은 안광이 당황한 듯 흔들렸다.
눈앞의 그의 주인이 불쑥 꺼낸 말. 그가 보고하려던 내용과 일맥상통했기 때문이다.
그때,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던 로브의 사내가 공간에 소리가 울리도록 바닥에 이마를 내리찍었다.
쿠웅!!!
“주,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애초에 모든 것을 훤히 꿰뚫어 보고 계신 분에게 보고라니….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생각이었다.
애초에 잘못부터 빌었어야 할 일이었다.
로브의 사내가 재차 머리를 찍으려던 순간.
여인을 손을 휘이 저었다.
그러자 재차 바닥을 향하던 그의 이마가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가로막히듯 덜컥 멈추었다.
“되지도 않는 자해는 그만하고.”
“…소, 송구합니다.”
“말해 봐. 어떤 꼬맹이야?”
나른한 듯 게슴츠레 보이던 그녀의 눈동자에서 일순 호기심이 비췄다.
그 흔치 않은 모습에 로브 속 사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셀 수 없을, 너무도 오랜 세월을 살아왔기에 그녀에게 있어 세상은 모든 것이 따분함 그 자체였다.
그런 그녀가 이번 일에 흥미를 보인 것이다.
로브의 사내가 재차 넙죽 숙이며 물었다.
“꼬맹이라 하시면…. 혹, 유니콘 길드의 새 길드장을 말하는 것인지요?”
그녀는 미동도 않고 단지 입만 뻐끔거렸다.
“맞아. 이름이….”
“이든이란 자입니다.”
“이든, 이든이라….”
그녀의 게슴츠레하던 눈이 살짝 감겼다.
착 가라앉은 눈동자.
하지만 이내 그녀의 눈에 의아한 빛이 떠오른다.
“이상하군.”
“…무, 무엇이 이상하단 말씀이시온지….”
“보이지가 않는다.”
“…예?”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이었다.
로브의 사내가 재차 물었다.
“무엇이 보이지 않는단 말씀이시옵니까?”
“…이든. 그자의 모든 것이 말이다.”
“…예?”
단상 위, 여인의 말을 듣던 사내의 안광이 크게 흔들리며 일순 당혹스러운 기색이 역력히 피어났다.
납죽 엎드렸던 그의 시선이 힐끗 단상 위의 여인을 향했다.
그녀가 누구인가.
능히 신과 필적한 존재.
아니, 신이라 불리어도 손색없는 위대한 존재가 아니던가.
그렇기에 그의 주인이라 불리는 저 여인은 모르는 것이 없었다.
대륙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라면 손바닥 안을 들여다보듯 훤히 꿰뚫어 보던 것이 바로 그녀가 아니던가?
조금 전 보고를 올리기 전에도 그렇고, 이 세상에 발을 붙이고 사는 생명체라면 결단코 그녀의 천리안을 피해 갈 수 없는 법이건만.
보이지가 않는다고…?
로브의 사내가 재차 확인하듯 물었다.
“주인님. 혹… 이든 그자가 들여다보이지 않는단 말씀입니까?”
묻던 사내가 일순 화들짝 놀랐다.
조금 전 그의 물음이 자칫 그녀의 능력을 의심하는 듯한 투에서였다.
하지만 그의 걱정과는 달리 단상위에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는 얼굴이었다.
아니, 애초에 표정이란 것이 있을까. 의심될 정도로 무미건조한 얼굴.
그런 그녀의 얼굴에 흔치 않게 눈살이 찌푸려졌다.
“하다 하다 능력에까지 이상이 생겼나? 그럴 리가 없는데.”
톡톡.
그녀가 손가락으로 자신의 골을 두드렸다.
그리곤 재차 가라앉는 그녀의 눈동자.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가 눈을 뜨곤 고갤 저었다.
“역시 안 되는군. 다른 이들은 훤히 다 보이는 것이 능력에 이상이 생긴 것은 아니고. 이든, 그놈만 보려 하면 안개가 낀 듯 보이지 않는단 말이지…. 대체 뭐지? 나와 같은 부류는 아닐 거고 말이야.”
“서, 설마…! 그러니까 주인님 말씀은…. 그자 역시 드, 드래곤일 수 있다는 그 말씀입니까?”
사내의 물음에 여인은 고갤 저었다.
“아니, 그럴 리가 없다. 그랬다면 애초에 내가 몰랐을 리가 없지….”
말끝을 흐리던 여인의 게슴츠레한 눈이 일순 번쩍이며 차디찬 한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 모습에 로브의 사내가 저도 모르게 바르르 떨며 움츠러들었다.
차가운 광망을 토해 내던 여인이 재차 입을 열었다.
“…그리고 절대 그래서도 안 되고. 레온하르트 그 새끼만 해도 골치 아픈데, 나 같은 놈이 한 놈 더 있다고? 생각만 해도 끔찍하군.”
차가운 눈빛만큼이나, 내뱉어지는 음성 또한 서늘하기 짝이 없다.
깊숙이 머릴 조아리던 로브의 사내가 그녀를 달래듯 조심히 말을 꺼냈다.
“겨, 결단코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주인님.”
“…….”
“누가 뭐래도 이 세상에 위대한 존재는 오직 주인님 한 분이어야만 하니까요…!”
“흠.”
사내의 말에 마음이 풀린 걸까.
여인의 눈이 토해 내던 차디찬 안광이 차츰 가라앉는다.
다시 게슴츠레한 눈으로 돌아온 그녀가 다시 나른한 얼굴로 고갤 주억거렸다.
“그래야지. 그래야 하고말고. 온 세상천지에 나 같은 놈은 하나면 충분하지. 그것 하나만 바라보며 개고생을 했는데 말이야.”
“…….”
한기가 걷히자 바르르 떨리던 사내의 몸도 차츰 안정을 되찾았다.
그때, 여인이 재차 입을 뗐다.
“레온하르트 영지와 관련해서 앞으로 모든 행동을 자중하도록.”
“예…!? 아, 예. 명을 받듭니다.”
“음.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이군.”
속마음을 들킨 로브의 사내가 황급히 고갤 조아렸다.
“그, 그것이 아니오라. 레온하르트 영지에 관해 황급히 처리하실 것으로 예상했는데…. 너무 뜻밖이오라.”
“레온하르트 영지. 거기 어차피 지금 엘프들이 대신 지켜 주고 있잖아. 안 그래?”
“마, 맞습니다.”
“그런데 자네가 뭘 어쩌려고?”
“…그, 그것이… 몬스터와 군사를 동원하면 필시 성공할 것이라….”
“쯧.”
사내의 말을 듣던 여인이 혀를 찼다.
당황한 로브의 사내가 황급히 바닥에 머릴 박았다.
쿠웅.
“누 백 년간 세상과 단절한 채 평화를 누린 놈들이라지만, 엘프란 종족은 그리 쉬이 상대할 놈들이 아니다. 군사들을 허무하게 잃은 셈이냐?”
“소, 송구합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죽을죄까지는 아니고, 그냥 멍청하다 싶어서.”
“…소, 송구합니다.”
“후우….”
단상 위의 여인이 한숨을 크게 내뱉었다.
한기를 토해 내던 그녀의 게슴츠레한 안광이 일순 허공을 향했다.
내내 얼음장 같던 목소리가 아닌 허탈한 듯 낯선 음성이 울렸다.
“운명이란 참으로 기이하지.”
“…….”
“레온하르트. 그놈의 숨을 마저 꺾을 순간이 눈앞에 도래했거늘….”
“……!”
“하늘이 돕는 것인지, 상황이 돕는 것인지. 마치 주변이 기를 쓰듯 그를 지켜 주는 모양새가 아니더냐.”
부르르….
로브를 뒤집어쓴 사내의 몸이 바르르 떨렸다.
주인의 음성에 딱히 한기나, 서슬퍼런 살기가 섞인 것은 아니었다.
단지 허탈한 듯한 음성이었으나, 오히려 평소 그의 주인이 보이던 모습과 다른 괴리감이 그를 더욱 공포로 몰아넣고 있었다.
“후후….”
그때, 단상 위에서 초연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난데없는 주인의 웃음소리에 사내의 몸은 더욱 공포에 절어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우습군. 오래된 숙원을 코앞에 두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금 내 꼴이….”
“주, 주인님…!”
“그렇지 않은가. 레온하르트, 그도 그지만. 나 역시 정상인 것은 아니니…. 아닌가, 그놈이 더 심하려나?”
“어,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위대한 나의 주인이시여! 속히 쾌차하셔서 세상을 온전히 발아래 두셔야 합니다…!”
“…그래. 그래야지. 무조건 그래야만 하고말고.”
같은 말을 연이어 되뇌던 그녀의 눈이 단상 밑 사내로 향했다.
“밸스커드.”
“예. 주인님!”
“너에게 새 임무를 내리마.”
“하명하십시오. 위대한 존재이시여…!”
“이든, 그놈을 예의주시하도록.”
“예!?”
전혀 예상 밖의 명령이었다.
단상 위의 여인이 재차 입을 뗐다.
“그놈이 무엇을 하는지. 어디에 있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낱낱이 보고하도록.”
“그자를 처리하는 것이 아니오라. 동태만 살피라 그 말씀이신지요.”
“그래. 그리고 후에 내가 따로 명령을 내리거든 그를 나에게 데려오라.”
듣던 로브의 사내, 밸스커드가 재차 고갤 숙이며 물었다.
“혹… 어떤 연유에서 그를 보고자 하시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신지요.”
오체투지한 밸스커드의 물음에 여인이 턱을 괸 채 나른한 눈빛과 함께 입술을 말아 올렸다.
“글쎄… 그냥 노망난 드래곤의 유희 정도로 해 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