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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화. (111/250)

111화.

“뭐라 하셨소?”

듀란드 공작의 물음에 밸스커드가 조금 전 했던 말을 되풀이했다.

“아무것도 하지 말라 했소.”

“그 무슨…!”

한결같은 그의 대답에 듀란드가 발끈하다 말고 말끝을 흐렸다.

필시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무슨 일인지 물어도 되겠소?”

“그분의 뜻이오.”

“그분…!?”

듀란드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단둘만 있는 이 자리에.

눈앞에 저 오만한 사내가 ‘그분’이라며 존칭을 쓸 이는 단 한 사람.

아니, 단 한 존재밖에 없었다.

위대한 존재….

듀란드의 등이 어느새 식은땀으로 푹 젖었다.

“그, 그분께서 직접 하명하신 일이란 말입니까?”

“그렇소.”

“…그분의 뜻이라면 응당 따라야지요. 헌데….”

“선뜻 이해가 가지 않겠지. 이해하오. 나 역시 그랬으니까….”

“흠.”

“하나. 셀 수 없이 오랜 세월. 오직 한길만 보고 걸으신 분의 뜻이오. 필시 큰 뜻이 있을 것이요.”

“그렇지요. 당연히 그럴 것인데. 레온하르트 영지는 그렇다 해도… 이든, 그 건방진 놈을 내버려 두라 하신 것만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소.”

“…….”

듣던 밸스커드는 딱히 아무런 답이 없었다.

이든을 예의주시하라 했던 그분의 뜻. 자신 역시 그 깊은 의중을 파악하는 데는 실패한 것이다.

하지만 의중을 모른다고 하여 감히 주인의 뜻을 의심할 수는 없는 일.

밸스커드가 단호히 입을 뗐다.

“먼 미래마저 내다보듯 하시는 분이오. 그러니 공작께선 그냥 따르시기만 하면 그만이오.”

듣던 듀란드의 속에서 무언가 울컥 끓어올랐다.

‘이놈이…!’

조금 전 밸스커드가 내뱉은 말.

궁금한 것은 알겠는데, 닥치고 따라라. 그의 속뜻은 그것이었다.

듀란드 공작은 대놓고는 아니지만, 속으로 이를 갈 수밖에 없었다.

왜 아니겠는가.

그 자신은 명실상부 아슬란이란 제국의 이인자였다.

아니, 긴 시간 심혈을 기울여 미독에 중독시킨 황제의 죽음마저 코앞에 둔 지금.

말이 이인자지 이제 곧 제국 일인에 자리에 오를 순간이 당도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한낱 국왕 주제에…!’

제아무리 그분의 가장 가까운 수족이라지만, 그전에 어디 변방에 처박힌 왕국의 국왕이었다.

그런 놈이 자신 앞에서 고갤 빳빳이 들고 명령 내리듯 하고 있으니 듀란드의 입장에선 속이 뒤틀릴 수밖에.

그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밸스커드는 무심한 얼굴로 앞에 놓인 찻잔을 비웠다.

탁.

단번에 홀짝 비워진 찻잔이 탁자 앞에 놓였다.

할 말은 다 전했다는 듯 밸스커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륵.

일어선 그의 몸이 차츰 연기처럼 화해진다.

그의 몸이 점차 흐려져 가는 찰나.

밸스커드가 입을 뗐다.

“명심하오.”

듀란드의 시선이 재차 그에게 닿았다.

밸스커드가 마저 말을 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마시오. 따로 명이 있기까지 자중하고 또 자중하시오. 이것은 오로지 그분의 뜻. 난 분명 여러 번 말했소. 새겨듣는 것이 좋을 거요….”

“…….”

화륵.

희미하던 그의 몸이 완전히 사라지던 그 순간까지.

같은 뜻의 말을 되풀이하듯 여러번 읊어 대던 밸스커드의 홍안이 일순 붉게 타오르며 별안간 훅 사라졌다.

빠득.

참고 참아 왔던 것이 폭발하듯.

정적이 휩쓴 방 안에 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홀로 있는 이 공간.

그가 새기듯 혼자 중얼거렸다.

“…건방진.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웃기는 소리. 제국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오로지 내 선에 해결할 것이다. 밸스커드…!”

짓씹듯 차가운 음성을 내뱉던 그의 눈엔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한 흉흉한 기세가 일고 있었다.

***

꿀꺽.

하도 조용한 탓에 침 넘어가는 소리마저 똑똑히 들린다.

“…….”

한참의 정적 끝에.

비로소 이든의 무거웠던 입이 열렸다.

“…시작하죠.”

오직 그 한마디만 기다렸다는 듯 카르엘이 결의의 찬 눈으로 고갤 끄덕였다.

“네!”

그녀의 손에 들린 보고서가 이든 앞에 놓였다.

쿵.

잠시 뒤, 앞에 놓인 서류에 찍히는 길드의 직인.

천마 무관 학교.

세간엔 유니콘 무관 학교라 불리는 곳.

기나긴 준비 끝에 유니콘 길드의 신사업이 비로소 첫발을 떼는 순간이었다.

다시 보고서를 받아 든 카르엘이 확신에 찬 얼굴로 입을 뗐다.

“오랜 시간 준비했으니, 필시 반응이 뜨거울 겁니다.”

“그래야죠. 그래야만 하고 말고요.”

완벽하지 않으면 시작도 하지 않는다.

이든의 고집 탓에 무관 학교가 지어진 지 어느덧 한 달이란 시간이 흘렀건만, 진즉에 시작했어야 할 신사업을 미루고 또 미뤄 왔던 그였다.

하지만….

이젠 모든 준비가 끝났단 생각이 든 것인지 이든 역시 고민 끝에 서류에 직인을 찍은 것이다.

이젠 정말로 개시만 남은 상황.

연신 고갤 주억거리던 이든이 다시 한참 뒤에 입을 뗐다.

“반드시 제대로 해내야만 합니다.”

“네! 반드시 그럴 겁….”

“거기에 쏟아부은 돈이 얼만데.”

“…네?”

결의에 차 있던 그녀의 눈동자가 차츰 의아한 빛으로 물든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든은 상관없다는 듯 연신 쫑알댔다.

“부지 사들이고. 어!? 건물 증축하고 어!? 거기에 쏟아부은 길드 예산이 얼만데. 무조건 성공해야죠. 무조건. 안 그러면 그땐 그냥 다 같이 죽는 거야 그냥.”

“…….”

길드장님….

같, 같이 죽다뇨…?

전 같이 죽기 싫은데요.

카르엘의 안색이 어느새 하얗게 질려 있었다.

***

수도한 가운데.

이 드넓은 도시에 유독 사람들이 북적북적한 곳이 있다.

모여 있는 모든 이목이 한곳을 향했다.

“오늘이 그 날이라지?”

“그렇다는구먼. 그나저나 참 대단허이….”

“으, 으응.”

대체 거기에 무엇이 있길래 하나같이 저리도 신기한 듯 바라보고 있는 걸까.

잠시 뒤.

쿠구구궁.

용사비등한 필체로 천마 무관 학교라 쓰인 현판이 내걸린 대문이 차츰. 차츰 열렸다.

그리고.

“일도오오오오오옹! 차렷!!!!”

척.

한 사내의 쩌렁쩌렁한 외침에 대문 양옆으로 대열을 갖춘 이들이 일순 허리를 빳빳이 세웠다.

“오오오…!”

곳곳에서 탄성이 쏟아졌다.

활짝 열린 대문으로 보이는 누군가의 모습.

유니콘 길드의 문양이 수놓아진 장포로 삐까번쩍하게 한껏 멋을 낸 수려한 사내가 한가운데 서 있었다.

“음.”

중앙의 있던 사내.

유니콘 길드장, 이든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고갤 끄덕였다.

그것을 신호로.

대문 양옆에 도열해 있던 교두들이 다 울리도록 손뼉을 쳤다.

짝짝!!!

“어서 오십셔!!!!!!!!!”

“…….”

심혈을 기울여 준비했단 개업식이 이것이다.

만족스럽단 표정이 만연한 이든과 달리 그 옆의 카르엘은 부끄러워 차마 고갤 들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이 자리가 창피하다 한들 이대로 가만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

그녀도 맡은 일을 해내야 했다.

“시작하시죠.”

카르엘이 신호를 주자 대기하고 있던 사무관들이 쏟아져 나오며 미리 마련해둔 탁자 앞에 착석했다.

앉은 사무관들이 눈을 빛내며 입을 뗐다.

“자자, 유니콘 무관 학교. 신청서 받도록 하겠습니다!!!”

교두들이 일제히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기사가 되길 꿈꿔 왔지만, 사정상 자녀들에게 교육을 시키지 못했던 분들. 지금이 기회입니다. 자녀분들의 그 꿈! 우리가 실현시켜 드립니다!”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녀!”

“아니지. 날마다 받을 수 있을 때 받아야지 이 사람아!!!”

티격태격대는 소란 속에.

기다렸다는 듯 사람들이 쏟아져 달려오고 있었다.

“우리 애들 이름부터 적어 주쇼!!!”

“여기, 여기 우리 애 이름도!!!”

반응은 뜨거웠다. 순조로운 출발이었다.

차락.

서류를 넘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좀 전에 부끄러운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카르엘이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세상에….”

“어떻습니까?”

이든의 물음에 꼼꼼히 검토하던 그녀에게서 밝은 음성이 터져 나왔다.

“어떻냐고요? 말도 안 되게 엄청난 반응이에요.”

“그래요? 어느 정도인데요…?”

덩달아 이든까지 기대에 찬 표정을 지었다.

카르엘이 한 번 더 서류를 쓱 훑더니 재차 입을 뗐다.

“첫날 총 이백여 명이 입관을 신청했습니다!”

“흠.”

“음? 길드장님, 별로 기쁘지 않으셔요?”

이든의 미적지근한 반응에 카르엘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이든이 순순히 고갤 끄덕였다.

“적은 수는 아니긴 한데…. 조금 아쉬운 감이 없지 않아 있군요. 투자 비용과 비교하면 기대했던 것보다 턱없이 적습니다.”

“아….”

하긴.

단지 이백여 명의 명단만 보고 많다고 생각했는데, 그의 말을 듣고 보니 납득하는 그녀였다.

이든이 이해가 안 간다는 투로 물었다.

“뭣 때문에 그럴까요? 분명 한 달씩이나 개시를 미뤄 가며 교두들의 훈련을 보여 주며 홍보했는데 말이죠.”

듣던 카르엘마저 고민을 거듭하던 중 무언가 떠오른 것인지 그녀가 문득 입을 뗐다.

“…눈치가 보여서 아닐까요?”

“눈치요? 누구의 눈치를 본단 말입니까?”

“무관 학교 근처에 뭐가 있었는지 그새 잊으셨어요?”

“…설마.”

카르엘이 고갤 주억거렸다.

“맞아요. 분명 사람들은 기사 아카데미의 눈치를 보고 있는 거예요.”

“…….”

잊고 있었던 것이 떠오르자, 금세 이해가 갔다.

기사 아카데미.

수도에선 황실 다음으로 가장 강한 영향력을 가진 그곳.

평민들은 언감생심 꿈도 못 꾸는 그곳이라지만, 그렇다고 눈치가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기사 아카데미는 그 명성과 영향력답게 수도의 수많은 사업체와 연줄이 닿아 있다.

그리고 아카데미의 규모를 생각하면, 사업체와 관계된 사람들의 수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굉장히 많을 것이다.

제아무리 자신의 자녀가 신분의 상승을 꿈꾸며 기사가 되길 희망한다 한들 기사 아카데미와 연이 닿아 있는 이상, 무관 학교에 입관을 신청하는 데 부담이 느껴질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물론 예상했던 반응이지만, 그래도 눈앞에 현실을 제대로 마주하니 생각보다 더욱 심각했다.

“난감하군요.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눈치를 볼 줄은….”

“그래도 첫날 이백여 명이 입관을 신청했으니까. 차차 나아지지 않을까요?”

이든이 고갤 저었다.

“첫 끗발이 개 끗발이지만, 시작부터 개 끗발이어선 안됩니다.”

“…어쩌죠?”

문득 카르엘까지 슬금슬금 불안이 밀려오던 그때.

이든이 넌지시 입을 뗐다.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닌데….”

카르엘의 눈이 번쩍 뜨였다.

“방도가 있으세요!?”

“…있긴 한데, 당장은 쓸 수 없습니다.”

“어째서요?”

“왜냐하면….”

말끝을 흐리던 이든의 얼굴에 고심의 흔적이 각인됐다.

“저쪽에서 먼저 반응을 해 줘야 하거든요.”

정확한 대답은 없었지만, 무엇을 지칭하는지 모를 만큼 그녀는 바보가 아니었다.

“저쪽이라면….”

이든이 고갤 주억거렸다.

“네. 기사 아카데미에서 먼저 나서 준다면 쉽게 풀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아무런 반응이 없는데요?”

“아마 앞으로 계속 없을 겁니다.”

“그럼…. 어쩌죠?”

걱정이 한가득한 카르엘의 물음에 이든이 씩 웃어 보였다.

“일단 기다려 보세요. 내키지는 않지만, 이럴 때 쓰란 것이 인맥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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