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폐하께서?”
의아한 얼굴로 되묻는 듀란드 공작의 물음에 신하가 재차 고갤 숙이며 읍했다.
“그렇사옵니다. 급히 찾으시는 것이 긴히 할 얘기가 있으신 듯 보입니다.”
“그래?”
일전 사교회 때 이후로 자신을 찾는 횟수가 적었던 황제였다.
듀란드 딴엔 미독이 악화하여 몸에 이상이 생겼던 것이라 어림짐작했었다.
그런데 별안간 자신을 찾는다?
듀란드가 턱을 매만졌다.
‘유언?’
만약 죽음을 앞두고 유언을 남기는 것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였다.
“…….”
듀란드 공작이 한참이나 대답이 없자 읍하던 신하가 숙였던 고갤 살짝 올려 그를 힐끗 바라보았다.
“…공작님?”
듣던 듀란드가 천천히 고갤 끄덕였다.
“알겠네. 내 곧 폐하를 알현토록 하지. 그만 나가 보게.”
“예.”
대답을 듣던 신하가 재차 읍하며 총총걸음으로 뒤로 나갔다.
허공을 응시하던 듀란드의 얼굴에 일순 비릿한 미소가 지어졌다.
‘훗. 드디어 제국이 내 손에 들어오는 것인가.’
내내 감춰 왔던 그의 야망이 더 없이 불타오르는 순간이었….
…….
“예?”
…….
는 줄 알았는데.
아슬란 황제를 알현한 듀란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금 무어라 하셨습니까? 기사 아카데미와 유니콘 무관 학교에 친선 경기요?”
“그래. 어찌 생각하는가?”
“…아니, 그게… 허허.”
어찌 생각하긴. 어처구니가 없지.
듀란드가 연신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리고 차마 내뱉지 못한 그의 속마음을 시원하게 긁어 주듯 아슬란 황제가 먼저 입을 뗐다.
“어처구니가 없지?”
“그것이… 크흠.”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듀란드가 저도 모르게 헛기침을 했다.
아슬란 황제가 씩 웃었다.
“이해하네. 나도 그렇게 생각하거든.”
황제의 얼굴을 마주하던 듀란드 공작이 표정을 바로 하고는 물었다.
“…그런데 갑자기 기사 아카데미와 유니콘 무관 학교에 친선 경기라니. 무슨 생각이신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아슬란 황제가 능청스럽게 표정을 굳히며 눈을 빛냈다.
그 눈빛에 듀란드 공작이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이윽고 황제의 입에서 믿을 수 없는 얘기가 나왔다.
“왜긴. 너무 건방지지 않은가.”
“…예?”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듀란드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찰나 그의 반응을 살피던 황제가 재차 입을 뗐다.
“유니콘 길드장이 그때 뭐라고 했더라?”
“……?”
“주변국의 불안한 정세와 제국의 앞날을 위해 인재를 발굴할 목적으로 설립하였다… 뭐 그런 식으로 씨불이지 않던가?”
“그, 그랬죠.”
아슬란 황제가 피식 웃었다.
“훗. 웃기는 개소리 아닌가.”
“…예?”
“자네도 능청 그만 떨고 솔직히 말해 보게. 정녕 유니콘 길드장이 순수하게 그 목적으로 무관 학교를 설립했을 것이라 생각하나?”
그럴 리가.
듀란드 공작 역시 이든의 본래 목적이 무언지 이미 진즉에 파악하고 있었다.
당시 조찬 때도 이든의 연설을 듣고 뱀 같은 놈이라며 얕잡아 보지 않았던가.
하나.
지금 그가 가장 이해가 안 가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듀란드의 시선이 아슬란 황제의 속내를 살피려는 듯 그의 얼굴을 꿰뚫듯 바라보았다.
‘…대체 무슨 꿍꿍인지.’
“이보게.”
“…….”
“이보게 공작, 내 말 듣고 있는 겐가?”
듀란드가 화들짝 놀라며 입을 뗐다.
“아, 아아 예. 듣고 있습니다. 폐하.”
듀란드의 반응에 아슬란이 의외란 표정을 했다.
“아니,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길래 그리 한참을 멍하니 있는 게야.”
“죄, 죄송합니다.”
“자네 설마…?”
‘응…!?’
말끝을 흐리는 그의 모습에 듀란드가 마른침을 삼키며 황제를 마주했다.
“나처럼 노망이라도 든 겐가?”
“…….”
“낄낄.”
“…하하. 노망이라니요. 폐하께서 얼마나 정정하신데요.”
“그치?”
“그럼요. 하하.”
“껄껄!”
듀란드가 의아한 눈으로 아슬란 황제를 바라보았다.
‘이 노인네가 정말 노망이라도 든 것인가.’
그때, 나이에 맞지 않게 천진하게 웃던 황제가 재차 입을 뗐다.
“그래서 자네는 어찌 생각하나. 유니콘 길드장이 무관 학교를 세운 진짜 목적 말일세.”
“…….”
잠시 침묵을 유지하던 듀란드가 목을 가다듬곤 천천히 입을 뗐다.
“그야. 지금의 계급 체계를 무너뜨리기 위한 얄팍한 수작이 아니겠습니까?”
“맞아. 더없이 맞는 말이야. 해서 무관 학교가 현 계급 체계에 변화를 줄 것이라 보는가.”
“아니요.”
듀란드의 대답은 더없이 단호했다.
그가 재차 입을 뗐다.
“결단코 그럴 리는 없을 겁니다.”
“호오. 어찌 생각하는가!?”
“…유니콘 무관 학교에 입관을 희망하는 이들은 결국엔 평민입니다. 수도에 살아가는 평민들 중 기사 아카데미의 눈치를 보지 않는 이들이 있겠습니까?”
“그렇지. 그렇고말고….”
황제가 희미하게 웃었다.
기쁜지, 슬픈지 도무지 감정을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이도 잠시.
아슬란 황제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일순 변한 그 눈빛에 듀란드 공작이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한데 말이야. 노심초사일지도 모르지만. 난 자꾸 저 유니콘 무관 학교가 거슬린단 말이지.”
“그랬습니까?”
듀란드가 의외란 얼굴을 했다.
일전 사교회 때 이든 길드장에게 보이던 모습도 그렇고.
모두의 면담까지 거절하며 이든 그와 독대까지 하지 않았던가.
한데 저리 몹쓸 듯이 생각하는 황제의 모습이라니….
너무 의외였던 것.
이윽고 아슬란 황제의 입에서 믿을 수 없는 말이 나왔다.
“해서 말인데. 저 무관 학교를 치워 줄 수 없겠나?”
“…예!? 지금 무어라 하셨습니까?”
되묻는 듀란드의 모습에 아슬란 황제가 탐탁지 않은 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못 들은 겐가? 무관 학교를 치우잔 말이야. 벌써 귀까지 먹어서야. 에잉. 쯧!”
뒤에 이상한 말이 붙긴 했지만, 아무튼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죽음이 가까워져서 그런지 근래 들어 백성을 위하는 잔걱정이 많았던 그였다.
그런데….
그런 백성들. 평민들의 유일한 신분 상승의 기회라 할 수 있는 유니콘 무관 학교를 치워 내라…!?
듀란드는 속으로 조소를 흘렸다.
‘결국 당신도 남들과 같은 권력자였군.’
간만에 마음에 드는 황제의 모습이었다.
하나.
이도 잠시. 무슨 수로 무관 학교를 치워낸단 말인가.
듀란드가 입을 뗐다.
“하지만 여긴 수도입니다. 무관 학교를 치워 내기엔 보는 눈이 너무 많지 않습니까?”
“내 말뜻을 잘못 이해했구먼. 자네.”
“예?”
“설마 내가 무력으로 진압하란 의중으로 말했겠는가. 정당한 방법으로 버티지 못하게 만들어야지. 예를 들면 무관 학교가 별 볼 일 없단 소문이 퍼지게끔 말이야.”
일순 듀란드의 눈이 부릅 뜨였다.
“혹 조금 전 말씀하셨던 그 친선 경기로…?”
“그렇지!”
“…….”
아슬란 황제가 짐짓 고민하는 척하더니 한참 뒤에 입을 뗐다.
“얼마 전 무도 대회가 열렸으니, 그것은 내년을 기약해야 할 일이고. 아예 이참에 무도 대회가 열리기 전에 짓밟아 버리는 것은 어떤가?”
듣던 듀란드 공작이 넋이라도 나간 것처럼 입을 쩍 벌렸다.
“…….”
정처 없이 걷던 듀란드 공작의 걸음이 불현듯 멈추었다.
그의 얼굴엔 수심이 깊어 보였다.
그가 조금 전 황제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듀란드, 자네가 나서서 기사 아카데미와 유니콘 무관 학교 간에 친선 경기를 주선해 주게. 무관 학교 애들이라고 해 봤자 코흘리개들일 테니 아카데미의 1학년과 붙이는 것이 좋겠군. 해 봤자 한두 살 차이 아닌가?
-그렇긴 합니다만, 저들이 받아들이겠습니까?
-저들이라면 누가 말인가.
-아카데미와 무관 학교 둘 다 말입니다. 아카데미야 말할 것도 없고, 유니콘 길드장도 승낙하지 않을 것 같은데요.
-과연 그럴까?
-……?
-기사 아카데미의 교장이야 나나 자네가 구슬리면 금세 넘어올 테고, 유니콘 길드장이야… 그 친구 성격에 제의를 받고도 꼬리를 말고 도망칠 것 같나?
-흠….
-난 아니라고 보네. 빈 수레가 요란한 법 아니던가. 필시 겁먹은 똥개처럼 으르렁 짖어 대며 달려들 걸세. 어떤가. 한번 계획해 보겠나?
가만 서서 허공을 응시하던 듀란드가 침음성을 흘렸다.
‘정말 노망이라도 든 건가.’
하나.
노망이건 노망이 아니든 간에 중요한 건 그것이 아니었다.
황제 역시 유니콘 길드를 눈엣가시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눈엣가리를 치워 버릴 수 있는 기회를 자신에게 일임했다는 것이 뜻밖이었다.
‘흐음. 아슬란의 뜻이 그렇단 말이지.’
별안간 듀란드 공작이 피식 웃었다.
“훗.”
그의 눈이 일순 날카로운 빛을 발하는 듯했다.
‘나대지 말라는 밸스커드 놈의 말이 거슬렸는데, 이렇게 된다면 명분이 생긴 것 아닌가.’
이윽고 그의 얼굴이 차디차게 굳었다.
‘이든. 내 네놈의 그 재수 없는 낯짝을 울상으로 만들어 주마…!’
듀란드의 머릿속에 거대한 음모가 세워지는 순간이었다.
***
파앙!!!
이든이 내지른 주먹 끝에서 발산된 기파가 바람을 가르고 나아갔다.
쾅!!! 후드득.
곧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오고, 파편이 사방에 비산하며 떨어졌다.
그의 움직임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이든이 보법을 밟으며 연달아 주먹을 내질렀다.
콰광쾅쾅콰아앙!!!
이윽고 조금 전보다 훨씬 많은 파편이 떨어졌지만, 엄청난 폭음에 가려 들리지도 않았다.
후우우우…
그가 서 있던 연무장 중앙에 먼지 바람이 일었으나, 이든이 숨을 한번 내뱉자, 먼지가 씻은 듯이 걷혔다.
‘아수라흑룡권.’
이든의 주변에 너무도 많은 돌무더기가 널브러져 있었다.
그의 초식이 지나갔던 자리엔 집채만 한 바위들이 굳건히 버티고 있었으나, 이젠 한낱 쓰레기더미에 지나지 않게 된 것.
그야말로 신기의 가까운 권법이지었지만, 이든의 표정은 영 탐탁지 않아 보였다.
‘아쉬워.’
이든이 한숨을 푹 내뱉었다.
‘과거의 경지에 거의 근접했다지만, 이 정도론 아직 반푼이에 불과해.’
신위였으나, 과거 그 자신을 떠올리면 뭔가 영 아쉬운 그였다.
과거, 지금의 경지였다면 부스러기도 남지 않았어야 한다.
아수라흑룡권이라는 이름에서 오는 위엄답게 먼지처럼 사라졌어야 옳다.
하나.
그것도 눈이 보일 때나 가능한 일. 기감으로 느끼고 무공을 구사하여 정확한 타격을 주는 것조차 어려운 일인데.
특히나 바윗덩이같이 기척이라는 것 자체가 없어 기감으로 느끼지 못하는 경우엔 더더욱 정확한 타격이 어렵다.
그나마 그의 지고한 경지가 사방팔방에 엄청난 양의 기파를 발산시켜 기의 흐름이 미묘하게 어긋나는 곳을 기감으로 재차 잡아내어 위치를 파악했기에 지금과 같은 무공의 구사가 가능했던 것이지만.
이리하면 크나큰 문제가 하나 생긴다.
바로.
약점을 파악할 수 없다는 것.
만에 하나 그보다 강한 상대를 만난다면, 그리고 지고한 그조차 기척을 잡아낼 수 없는 이라면?
지금까지 기감으로 위치를 잡아내던 방식은 통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조금 전 훈련처럼 차선책이 있긴 했지만, 너무 번거롭다.
물론….
이든, 그 이상의 경지에 오른 이가 이곳에 있을는지는 모르겠지만.
하나, 이든의 머릿속에 한 사람 떠오른 이가 있기는 했다.
칼스테인 백작.
3년 전에 무도 대회에서 잠깐 마주쳤을 때도 그의 기량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그였다.
물론 당시에 이든은 지금과 같은 경지는 아니었다.
신검합일에도 살짝 못 미쳤었던 경지.
다만 어렴풋이 느껴지는 것은 하나 있었다.
‘…당시의 그가 이전 생의 맹주쯤 됐으려나. 지금은 어느 정도일지.’
이든은 곧바로 가부좌를 틀었다.
단지 운공을 위해서라기보단,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서였다.
‘사방이 적이나 다름없는 아슬란 황제에게 더없이 필요한 이는 칼스테인 백작밖엔 없지… 다음에 황제를 만날 땐 칼스테인 백작을 중히 여기시라 말씀드려야겠군. 뭐, 어련히 잘하겠지만.’
고심하던 이든이 문득 가부좌를 풀고는 한곳으로 고갤 돌렸다.
이든이 입을 뗐다.
“뭐 해? 치워야지.”
“으, 응…!!!”
한쪽에서 이든의 신위를 넋 놓고 구경하던 발리스타가 재빨리 달려와 이든 주변에 널브러진 돌무더기를 치웠다.
그 움직임이 어찌나 빠르고 날랜지 연무장에 늘어져 있던 파편들이 치워지며 금세 말끔해졌다.
청소를 끝낸 발리스타가 입을 열었다.
“저, 저기 이든 형. 혹시 말이오… 나에게도 그것들 가르쳐 줄 수 있소…?”
“뭘.”
“…형이 보여 준 방금 그런 것들 말이오. 전에도 말했지만, 난 형만큼 강해지고 싶소. 물론 내키지는 않겠지만 이런 부족한 날… 가르쳐 주시오. 형님!”
형님이란 소리까지 듣던 이든이 별안간 씩 웃었다.
발리스타를 처음 만났을 때도 느꼈지만, 지금도 그렇다.
‘우직한 듯하면서 섬세한 성격. 그리고 그 안에 꿈틀대는 힘과 재능. 과연 장룡과 너무 닮았어.’
이든이 엉덩이를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어.”
“저, 정말!?”
냉큼 환해진 발리스타의 얼굴.
하지만 이든의 얼굴은 스승의 그것처럼 단호하며 위엄으로 넘쳤다.
“너에게 딱 맞는 무공이 있지.”
“오…!”
“하지만 만만치 않은 무공이니 꽤 고생해야 할 거다. 이 시간부로 물리기 없기다. 알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