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7화. (117/250)

117화.

“주인님. 보고드립니다.”

화륵.

오체투지를 한 밸스커드의 음성에 단상 위의 여인이 안광을 토해 내며 게슴츠레 눈을 떴다.

“그래. 움직임이 어떻더냐.”

여인이 말하는 대상.

일전 예의주시하라 일러 둔 이든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별다른 움직임은 없습니다. 다만….”

밸스커드가 바닥에 닿다시피 머릴 더욱 조아렸다.

“듀란드 공작이 저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쓸데없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훗….”

무엇이 그토록 재밌는지 여인의 입가가 살짝 말려 올라갔다.

단지 그뿐인 것을….

평소답지 주인의 모습에 밸스커드는 식은땀을 주체하지 못하며 삐질삐질 흘리고 있었다.

밸스커드가 재차 입을 떼기 전, 단상 위에 그녀가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친선 경기라. 재밌는 짓을 꾸몄구나.”

무저갱과도 같은 어두운 공간.

비록 보이진 않았으나, 밸스커드의 얼굴은 진즉에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쿵!!!

밸스커드는 곧장 바닥에 머릴 찍었다.

주룩.

어느 때보다 크게 울린 고통의 메아리. 그의 이마에 피가 주룩 새어 나오고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주인님. 제가 단단히 일러 뒀어야 하는데….”

그 모습에 단상 위에 여인이 흔치 않게 눈살을 찌푸리더니 혀를 차곤 입을 뗐다.

“밸스커드.”

“예. 주인님…!”

“앞으로 그 짓 좀 하지 마. 보기 안쓰럽다.”

“…네?”

“머리. 아프지도 않냐?”

“…….”

“전에도 말했지만, 되지도 않는 자해는 하지 마. 그거 버릇되면 안 좋다.”

밸스커드가 무안한 얼굴을 하며 살짝 고개만 숙였다.

“명, 명심하겠습니다. 주인님.”

하지만 이미 밸스커드에겐 관심도 없다는 듯, 허공으로 시선을 돌려버린 그녀는 찰나 눈을 감았다 뜨더니 잠시 뒤 입을 뗐다.

“흠…. 그보다 의외로구나.”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아슬란 황제 말이다.”

“……?”

밸스커드의 홍안이 의아한 빛으로 채워졌다. 듀란드 공작에 관해 얘기를 나누던 중에 갑자기 아슬란 황제라니?

그 의문을 해소해 주겠다는 듯, 여인이 입을 재차 뗐다.

“친선 경기. 듀란드 혼자서 꾸민 짓이 아니다. 아슬란 황제가 뒤에서 명한 것이더구나.”

“아, 아슬란 황제가 말입니까?”

듀란드 공작이 꾸미고 있는 기사 아카데미와 유니콘 무관 학교 간의 친선 경기.

겉으론 그럴듯해 보이는 행사지만, 속내는 필시 유니콘 길드를 매장하기 위한 꿍꿍이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걸 명한 사람이 아슬란 황제라고…?

밸스커드가 아는 선에선 아슬란 황제는 곧 죽어도 백성을 위하는 자였다.

그런 이가 평민들의 유일한 출셋길이라 할 수 있는 유니콘 무관 학교를 매장시키려 든다고?

쉬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죽을 때가 되니 노망이라도 든 것인가….’

시기상으로 보면 미독에 중독된 아슬란 황제는 죽음이 코앞에 닥친 상황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이해가 가긴 하지만, 여전히 꺼림칙한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그때. 단상 위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상하지?”

“예. 제가 아는 선에선 아슬란 황제는 그런 짓을 꾸밀 위인이 되질 못합니다.”

“그래서 내가 그를 좀 더 들여다봤는데 말이야. 보이질 않는단 말이야.”

“…예? 보이지 않는다니요. 혹 이든이란 놈을 살피려 하셨을 때처럼 말입니까!?”

“흠. 이든 그놈처럼 아주 안 보이는 것은 아닌데, 몇몇 단편적인 일들은 보이질 않는구나.”

밸스커드가 꽤 당황한 얼굴을 했다. 지금껏 이런 경우가 한 번도 없다가 근래 부쩍 이런 일이 생기니, 주인이 걱정된 것이다.

하지만 그와는 달리 단상 위 여인의 얼굴은 꽤 후련해 보였다.

“하지만 확실히 알았다.”

“……?”

“이든. 그 아이에게 뭔가 있긴 있구나. 보이지 않는 아슬란 황제의 몇몇 단편적인 일들. 필시 이든 그놈과 관계된 일일 것이다.”

“…그럼. 이번 친선 경기 역시 아슬란 황제와 이든이 서로 짠 계획일 수도 있단 말씀이십니까?”

“그럴 수도.”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는 쉬이 볼 일이 아니었다.

듀란드 공작의 처지가 흡사 불 속에 뛰어드는 불나방 꼴이 아닌가.

밸스커드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주인님.”

“…응?”

“하명을. 미천한 제가 어찌하면 좋겠나이까…!”

“…….”

단상 위에 그녀가 게슴츠레 떴던 눈을 감았다.

그리고 한참 뒤.

화륵.

감았던 눈꺼풀 속에 감춰져 있던 안광이 재차 타오르더니, 그녀의 고혹적인 목소리가 이 공간을 빽빽이 채우며 울렸다.

“그냥 놔둬.”

“예! ……예?”

읍하던 밸스커드의 눈이 일순 휘둥그레졌다.

“그냥 놔두라고.”

“그, 그렇지만, 그리하면 듀란드 공작이 제 발로 함정에 빠지는 꼴이 아닙니까?”

“그렇지?”

“…그래도 그냥 지켜보라는 말씀이신지요?”

“응.”

“혹 어떤 연유로 그리 명하신 건지….”

“재밌잖아.”

“예…?”

“말 그대로야. 어차피 듀란드 그놈도 버리는 패 아니었어?”

“……!”

속마음을 들킨 밸스커드가 화들짝 놀라며 고갤 숙였다.

“레온하르트 영지의 전복 실패. 알짱거리던 유니콘 길드의 전복까지 실패한 마당에 더는 그놈의 쓰임새가 없긴 하지.”

“여, 역시… 주인님께선 진즉에 알고 계셨군요.”

“…버릴 패라면, 지금이 적기다.”

“주인님, 부족한 저에게 가르침을 주십시오. 어째서 지금이 적기이옵니까…!”

별것을 다 묻는다는 듯, 단상 위에 그녀가 심드렁한 표정을 했다.

“이든, 놈을 예의주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니더냐. 그 아이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그리고 정녕 우리에게 큰 걸림돌이 될 만한 아이인지 주시하거라.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무는 법. 궁지에 몰린 듀란드가 강수를 쓰게 되면 이든, 그 아이도 강수를 두지 않겠느냐?”

여인의 말에 밸스커드가 감격하며 재차 오체투지했다.

“과연!!! 주인님의 혜안은 제가 감히 따라갈 수가 없사옵니다.”

하지만 그런 그의 모습은 안중에도 없는지, 허공을 응시하던 단상 위 여인의 입가엔 어느새 미소가 걸려 있었다.

길고 긴 세월을 살아온 탓에 모든 것이 무료했던 그녀에게 흔치 않은 표정이었다.

“간만에 재미난 구경거리가 생겼구나. 정말 간만의 유희야. 후후….”

***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길고 고된 훈련이 반복될 때마다 아이들의 가슴속에도 빼곡히 자신감이 들어차고 있었다.

그리고 친선 경기를 코앞에 둔 어느 날이었다.

수도의 한 포목점.

새 옷으로 갈아입은 아이들의 얼굴은 연신 싱글벙글했다.

이는 교관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눈이 일제히 본인들이 입고 있는 무복을 향했다.

등에 길드 문양이 새겨진 검은 무복.

지금껏 개인 사복으로 지내 오다가 친선 경기를 앞두고 단체복을 맞추자는 이든의 고집 탓에 어쩔 수 없이 맞추게 된 것인데, 입어 보곤 다들 퍽 마음에 들어 하는 얼굴이었다.

“와 멋지다!”

“그러니까! 그리고 엄청 편해!”

입던 무복을 연신 신기하게 살피던 아이들의 시선이 힐끗 교관들을 향했다.

“교관님들 너무 멋져요!”

“맞아요!”

“그, 그래? 허허….”

무복을 입은 교관들이 쑥스러운지 저마다 볼을 긁적였다.

그때, 가장 큰 무복을 입은 발리스타가 아이들처럼 웃으며 입을 뗐다.

“이야! 이걸 이제야 입어 보네. 길드장님 입고 있을 때마다 항상 탐났었는데.”

“하하! 소원 성취했구만, 자네!”

저마다 만족스런 얼굴로 떠드는 이들을 뿌듯하게 바라보던 나이 지긋한 포목점 주인이 입을 뗐다.

“다들 마음에 들어 하니 내가 다 뿌듯하구먼, 그전에 입었던 옷은 내 따로 싸 줄 테니까. 지금 입고 있는 옷 그대로 가는 게 어떻겠나? 관심도 끌 겸 말이야.”

“관심이요…?”

의아한 얼굴을 하는 존슨의 물음에 포목점 주인이 혀를 찼다.

“으이구! 요 몇 달째 무관 학교 반응이 영 시원치 않다며. 이렇게라도 관심을 끌어서 학생 수도 좀 늘려야 하지 않겠어?”

“아! 확실히 그렇군요. 어때 다들?”

“저는 별로 상관없습니다. 오히려 좋은데요?”

“어, 나두.”

존슨이 묻자, 교관들이 저마다 동의하듯 고갤 끄덕였다.

새로 맞춘 무복도 멋들어지게 마음에 들겠다.

스스로 봐도 멋져 보이는 와중에 사람들 이목이 집중된 것을 마다할 이가 누가 있겠는가?

아이들 역시 상당히 들뜬 모습이고.

존슨이 고갤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반응은 뜨거웠다.

거리에 사람들이 줄지어 걷는 그들을 보며 저마다 눈길을 보낼 정도였으니까.

“음? 저 사람들 뭐야?”

“내가 물어보니까. 유니콘 무관 학교 사람들이라는구만!”

“유니콘 무관 학교? 거기 망한 거 아녔어?”

“망하긴 뭘 망해 이 사람아. 얼마 뒤에 유니콘 무관 학교랑 기사 아카데미랑 친선 경기한다고 써 붙은 거 못 봤어?”

“아니, 그런 게 있었다고!? 어쩐지…. 한 가닥 하는 사람들 같더라니 만, 무인들이었구먼!”

“그나저나 유니콘 단체복인가 본데. 아주 멋진걸?”

“그러게 말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우리 애도 그만둔다고 할 때 계속 보내는 건데 말이야.”

집중된 이목 속.

저마다 떠드는 사람들의 얘기를 슬쩍 들으며 의기양양하게 걷던 이들의 얼굴이 와락 구겨진 것은 잠시 뒤 들려온 대화 때문이었다.

“뭐야, 저것들.”

“…유니콘 무관 학교 아냐?”

“어째서?”

“저기 등에 문양. 유니콘 길드 거잖아. 발리스타 선배 보니까 확실하네. 얼마 전에 학교 때려치운다고 나갔더니만, 간 곳이 고작 유니콘 무관 학교에서 선생질이야?”

“설마 저게 단체복이라고 입은 거야?”

“꼴에 있어 보이겠다고 단체복까지 맞추셨나 보지.”

“다 망해 가는 학교 주제에.”

시시덕대며 웃던 아이들과 앞장서 걷던 교관들의 얼굴이 일순 굳었다.

고풍스러워 보이는 교복.

부티 나는 얼굴들.

들리든 말든 아무 상관 없다는 듯 떠들어 대는 기사 아카데미 학생들의 말이 비수와 같이 꽂혀 왔다.

발리스타가 참다 참다 놈들에게 달려들려던 그때.

총 교관 존슨이 발리스타의 팔을 꽉 잡았다.

존슨이 고갤 휘휘 저었다.

“그만둬. 싸워 봤자 우리만 손해야.”

“하지만 저 건방진 것들이 함부로 떠들어 대잖아요.”

“그래서. 저들과 드잡이질이라도 할 셈인가?”

“…그건. 일단 저지르고 반응 봐서….”

존슨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런 시답지 않은 것들 말에 일일이 토 달 필요 없어. 저들과 괜한 싸움 났다간 우리만 욕먹을걸세. 다 알 만한 사람이 그러나.”

“…하아!”

그럼에도 화가 풀리지 않는지 발리스타가 크게 한숨을 내쉬던 그때.

존슨이 재차 그를 불렀다.

“이보게.”

“…왜요.”

“뒤에 아이들을 보게.”

존슨의 말에 발리스타의 시선이 뒤에 아이들을 향했다.

아이들로 향하던 발리스타의 눈이 일순 커졌다.

“…어?”

잔뜩 기가 죽었을 것이라 예상했으나, 아이들이 보인 반응이 뜻밖이었다.

굳은 얼굴 속. 어느 때보다 날카로운 눈빛을 하고 있는 아이들이 보였다.

“애, 애들이….”

당황해하는 발리스타의 반응에 존슨이 나직이 입을 뗐다.

“…어차피 친선 경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어. 그때, 증명해 보이면 되는 거야. 우리의 가치를. 그리고 우리가 틀리지 않았음…!”

그의 말을 듣기라도 한 걸까.

교관과 아이들의 눈이 이채를 발하며 어느 때보다 맹렬히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눈빛만큼이나, 첨예한 칼날처럼 잔뜩 벼려져 있는 그들의 기세가 피부를 찌르듯이 느껴졌다.

그 순간.

발리스타 역시 그들처럼 마음을 다잡는다.

‘그래. 지금 마음껏 비웃어 둬라. 이제 곧 우리 유니콘이 비상하게 될 테니까…!’

주변에서 그 누가 뭐라 하든 신경 쓰지 않으며, 휘둘리지 않는다.

대지에 단단히 박힌 굳건한 거목처럼 말이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 증명해 보이는 것.

보무도 당당한 당찬 그들의 발걸음이 재차 앞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친선 경기 당일.

이들이 그토록 바라고 벼르던 그 날이 오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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