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읍하던 칼스테인 백작이 다시 고갤 들었을 때, 그를 바라보던 아슬란의 눈이 밝은 빛을 발했다.
부릅뜬 그의 눈에 일렁이는 빛은 순수한 감탄이었다.
아슬란 황제가 능청스럽게 그를 치켜세웠다.
“어째 안 본 사이에 더 젊어진 것 같으이.”
듣던 칼스테인 백작이 멋쩍은 얼굴을 했다.
“하하… 그렇습니까?”
“아니 평소에 뭐 좋은 거라도 챙겨 먹는 건가? 그런 거 있으면 혼자 먹지 말고 같이 좀 먹지.”
“그런 게 있었다면 진작 폐하께 드렸을 겁니다.”
“어련하실까. 아무튼, 축하하네. 그 나이, 그 경지에 한 걸음 더 나아갔다니 실로 대단허이.”
“모든 것이 폐하의 은공 덕분이옵니다.”
“웃기는 소리. 자네 스스로 노력한 덕이지.”
아슬란 황제가 자신의 바로 옆 빈자릴 툭툭 쳐 댔다.
“늙은이가 괜한 소릴 했군. 자자, 어서 와 앉게.”
“예.”
칼스테인 백작이 그곳으로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듀란드 공작과 눈을 마주치곤 살짝 고갤 숙여 보였다.
듀란드 역시 눈으로 인사를 건넸다.
자연스레 중앙에 황제를 필두로 듀란드 공작과 칼스테인 백작이 나란히 앉은 광경이 펼쳐졌다.
제국 실세라 할 수 있는 세 사람이 한자리에 모인 모습에 관객들과 대신들이 저마다 눈을 떼지 못했다.
예정에도 없던 칼스테인 백작의 등장에 뒤로 밀려난 루시우스 교장이 빠득 이를 갈았다.
칼스테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 불신이 가득 들어찼다.
‘…빌어먹을. 오자마자 홀로 관심을 독차지하는 꼴이라니.’
기사 아카데미에서 경기를 주최하고, 대회를 준비한 사람 역시 그 자신이었다.
당연히 관객들의 관심도, 귀빈들의 관심도 오롯이 자신에게 향했어야 옳았다.
한데.
황제의 오지랖과 칼스테인의 등장으로 뒷전으로 밀려났으니 오죽 열이 받았겠는가. 하나, 저들은 황실의 실세였다. 괜히 싫은 기색을 내서 들키다간 그의 입장만 곤란해질 것이다.
내내 황제와 칼스테인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루시우스의 표독스러운 눈이 경기장으로 옮겨졌다.
‘우리 아이들이 일방적으로 이기는 모습을 보이는 순간, 이들의 관심은 재차 나에게 돌아올 것이다…!’
루시우스의 눈에 흉흉한 기세가 일며 경기장을 바라보던 그때, 병사 한 명이 황제 곁으로 다가와 조용히 아뢰었다.
“폐하, 유니콘의 길드장이 왔습니다.”
듣던 아슬란 황제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걸렸다.
“이 친구, 드디어 왔구만.”
그리고 잠시 뒤, 병사의 안내를 받으며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착 감긴 눈의 맹인.
하나 훤칠한 키에 수려한 외모가 그를 도무지 초라하게 만들지 않았다.
검은 무복과 검은 장포로 멋들어지게 멋을 내곤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사내가 귀빈석에 앉은 모두의 이목을 붙잡았다.
들어선 이.
유니콘의 길드장 이든이 입을 뗐다.
“제가 너무 늦었습니다.”
아슬란 황제를 따라 이든을 향했던 칼스테인 백작의 눈에 강렬한 이채가 발했다.
이든을 훑던 칼스테인 백작이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읽히지가 않는다?’
줄곧 무미건조한 눈을 하던 칼스테인 백작의 눈이 처음으로 흔들린 순간이었다.
***
빠드득.
참고 참던 루시우스의 인내력이 기어코 폭발했다.
경기장 자체가 원체 소란스러운 탓에 들릴 리는 없겠지만, 그는 소리가 들리건 말건 상관없이 대놓고 이를 갈아 댔다.
‘빌어먹을…!’
루시우스의 핏발 선 눈이 자신의 바로 앞, 한 사내를 향했다.
‘내가. 이 내가…. 저놈보다 뒷전이라고…!?’
그의 시선은 아까부터 줄곧 한 사내의 등 뒤를 향해있었다.
그 뒷모습의 주인.
다름 아닌, 조금 전 모습을 드러냈던 이든을 향해서였다.
가뜩이나 칼스테인에게 관심을 뺏겨 열이 잔뜩 올라 있던 상황에 이든 까지 합세해서는 아슬란 황제가 명하여 새로 마련한 앞자리에 떡하니 앉아버렸으니,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그의 두 주먹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고, 손등에 솟은 핏대는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았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이든과 아슬란 황제는 연신 싱글벙글대며 루시우스의 속을 있는 대로 뒤집어 놓고 있었다.
“그나저나 이든 길드장.”
“예. 폐하.”
“친선 경기를 위해 많은 준비를 했다고 들었네. 이제 곧 있으면 경기가 시작되는데, 결과가 어찌 될 것이라 보는가?”
뒤에서 이를 갈던 루시우스의 눈썹이 순간 움찔했다.
듣던 이든도 천천히 입을 뗐다.
“글쎄요. 기사 아카데미야 워낙 명성이 자자했으니까요. 기사 아카데미의 교육 수준이 어디 보통 수준입니까.”
잠자코 듣던 루시우스가 동의하듯 고갤 끄덕였다.
“게다가 그 교육을 받는 학생들 역시 무도 대회 본선까지 진출했던 아이들이니 실력도 출중할 것이고요. 동 나이대에선 필시 대적할 만한 또래는 없을 겁니다.”
‘그럼, 그럼. 그래도 제 분수는 알고 있군.’
루시우스가 재차 크게 고갤 끄덕이던 그 순간.
그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진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이든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걸렸다.
“기사 아카데미의 수준은 더없이 훌륭합니다만.”
‘다만?’
“저희가 질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뭣이…!’
루시우스의 눈에 재차 핏발이 섰다. 선 핏발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 충혈되어 있었고. 푸들푸들 떨리는 볼은 분노하는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슬란 황제가 흥미롭단 얼굴로 입을 뗐다.
“호오. 꽤 자신만만하구먼. 이는즉슨 그간 삼 개월간 최선을 다해 준비했다는 뜻일 텐데. 맞는가?”
이든이 천천히 고갤 끄덕였다.
그때, 관객석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착 감긴 눈이 경기장 쪽으로 옮겨졌다.
그의 기감이 어느새 경기장 안으로 들어서고 있는 아이들과 교관들을 향했다.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제가 봐도 아이들은 정말이지 놀랄 만큼 성장했거든요.”
이든을 향한 루시우스의 핏발 선 눈을 제외한 모두의 시선이 이든을 따라 경기장으로 향했다.
어느새 경기장에 마주 선 유니콘 무관 학교 학생들과 기사 아카데미의 학생들이 보였다.
***
꿀꺽.
경기장에 선 유니콘 무관 학교 아이들이 연신 마른침을 삼켰다.
기사 아카데미 앞에 문전성시를 이루던 사람들을 봤을 때도 상당히 떨렸지만, 막상 경기장 안에 들어오니 그건 새 발의 피였다.
경기장에 관객석을 가득 채운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기 무섭게 비교 불가한 긴장이 아이들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었다.
머릿속이 새하얘지며, 고막을 울리던 관객들의 소음에 귀가 멎을 듯하던 그 순간.
“풉.”
“병신들.”
함성을 뚫고 귓가에 울리는 불신 어린 소리가 건너편에서 들려왔다.
아이들의 흔들리는 눈이 소리가 들려오던 곳을 향했다.
그곳엔 기사 아카데미의 학생들이 여유로운 얼굴로 시시덕대며 유니콘 무관 학교의 아이들을 향해 비아냥대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재차 입을 뗐다.
“겁먹은 꼬락서니들 하고는.”
“너무 그러지 마라. 교장 선생님 말씀 못 들었어? 살살 하라잖아. 살살. 너무 금방 끝나면 안 된다고.”
동료의 말을 듣던 또 다른 아카데미의 학생이 미간을 찌푸렸다.
“저런 천것들하고 손 섞는답시고 여기 올라온 것도 쪽팔려 죽겠는데, 적당히 봐주면서 하라고?”
“야야, 다 들리겠다. 쟤들 울기 직전인 것 안 보여?”
“크큭. 울라면 울라지. 이따 대련하다 무섭다고 바지에 오줌 싸지나 마라. 겁쟁이들~”
아카데미 학생들이 내뱉는 말이 비수가 되어 아이들의 가슴을 후벼 파던 그때.
아이들의 머리 위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경 쓰지 마.”
발리스타였다.
“…교관님?”
“너희도 알지? 나 기사 아카데미 출신이었던 것. 내가 거기 다녀 봐서 아는데. 장담한다. 지금 기사 아카데미 1학년 중에 너희만 한 애들? 결단코 없다. 길드장님 말씀대로 지난 삼 개월 동안 너희들은 말도 안 되게 강해졌어. 그러니까 자신감을 갖고 보여 줘. 그리고… 저 재수 없는 새끼들 눈에서 눈물 쏙 빠지게 만들어 버려.”
발리스타의 얘길 듣던 아이들의 흔들리던 눈이 차츰 멎으며 안정을 찾기 시작한다.
제크와 아이들이 고갤 끄덕였다.
“네, 교관님…!”
그리고.
안정을 찾은 아이들의 눈이 기사 아카데미 학생들을 뚫어지라 응시한다.
허공에서 맞부딪치는 각자의 시선들.
불꽃마저 튀는 듯했던 그들의 시선이 옮겨진 것은 잠시 뒤 들려온 소리에서였다.
“모두 주목해 주시오!!!!”
유니콘 무관 학교와 기사 아카데미 학생들 사이에 선 진행자의 목소리였다.
“지금부터 기사 아카데미와 유니콘 무관 학교의 친선 경기를 시작하도록 하겠소. 토너먼트식이 아닌, 열 명 대 열 명의 대결로 더 많이 승리한 쪽이 우승하는 방식이오! 출전 순서는 사전에 각자 기관에서 제출한 순번으로 차례로 진행토록 하겠소! 그럼. 기사 아카데미 대 유니콘 무관 학교의 친선 경기를 시작하도록 하겠소!!!!”
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진행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관객석에서 우레와 같이 함성이 쏟아져 나왔다.
***
“시작하는구만.”
아슬란의 말에 이든이 살짝 고갤 끄덕였다.
“그렇군요.”
“옆에서 말해 주지 않아도 괜찮겠나?”
이든이 고갤 저었다.
“괜찮습니다.”
“음?”
아슬란 황제는 눈이 보이지 않는 이든을 대신해 상황을 설명해 주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괜찮다니?
‘그럼 대체 어찌 관람하려고….’
곧이어 경기가 시작되고.
연신 갸웃거리던 아슬란 황제의 의문이 해소된 것은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재차 떠나갈 듯 울리는 함성에 아슬란의 눈이 곧바로 경기장으로 향했다.
경기장 쪽으로 시선을 돌렸던그는 어느새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그가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연신 입만 뻐끔거렸다.
“아, 아니… 이, 이게 대체… 무슨…!!!”
기겁하다시피 한 황제의 얼굴.
그리고 그의 옆 무미건조하던 칼스테인 백작의 얼굴 역시 흔치 않은 표정 변화가 일었다.
‘…어찌 이럴 수가.’
무엇을 봤길래 저럴까.
칼스테인 백작의 표정은 흡사 넋이라도 나간 듯 보였다.
그때.
벌떡…!
“이, 이이…!”
뒤에서 들려오는 이를 가는 소리에 칼스테인 백작의 눈이 힐끗 뒤로 향했다.
거기엔 기사 아카데미의 루시우스의 교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채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며 붉으락푸르락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가 이마에 핏대를 그득 세우며, 얼굴을 있는 대로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멍청한 놈, 대체 뭐 하는 짓이야…!!!!’
화등잔만 해진 눈.
이마의 핏대만큼이나, 핏발 가득 선 루시우스의 눈이 향한 곳.
그곳엔 기사 아카데미의 학생이 경기장 밖을 나뒹굴며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훗.’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훤히 다 알고 있다는 듯, 이든의 입가가 스리슬쩍 올라갔다.
‘벌써 놀라긴 이르지.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귀빈석에 자리한 이든의 얼굴에 기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