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0화. (120/250)

120화.

“멀리, 잘할 수 있지!?”

“…네!”

총교관 존슨의 물음에 대련 첫 번째 순번인 멀리는 천천히 고갤 끄덕였다.

앙다문 입술.

빛나는 눈엔 나이답지 않은 투기가 비치고 있었다.

존슨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그사이 정말 많이도 컸군.’

고작 삼 개월. 그 사이에 아이들은 정말이지 훌쩍 커 버렸다.

단지 키만 큰 것이 아니라. 사람 자체가 성장했다.

‘정말이지.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존슨의 시선이 멀리에게서 귀빈석에 앉은 이든에게 옮겨졌다.

처음 길드장에게 친선 경기 얘길 들었을 땐, 이 아이들에겐 도무지 무리라고 생각했다.

상식적으로 고작 삼 개월만 가지고 기사 아카데미의 아이들을 따라잡을 순 없다 여겼다.

비단 존슨뿐일까.

다른 교관들 역시 그와 생각이 다르지 않았다.

저들이 누군가.

하나같이 대대로 잘나가는 집안에, 어렸을 때부터 뛰어난 기사들에게 버릇처럼 훈련을 받아와 검술을 일상처럼 연마하며 체화시킨 아이들이다.

물론 저들 역시 아직 어린애들이고 실전이란 부분엔 많은 변수가 있기 마련이지만, ‘경지’라는 부분 그 자체만 본다면 어중이떠중이 용병들보다 나은 것이 저들이고, 특히나 무도대회 본선 진출자들인 만큼 동 나이대엔 적수가 없다 여겨지는 것이 바로 기사 아카데미의 학생들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말도 안되는 대련이라고 생각했었다.

불과 삼 개월 전까지만 해도 검조차 제대로 쥐지 못하던 코흘리개들이 무슨 수로 기사 아카데미 학생들을 이기겠는가.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시작!!!!”

진행자의 외침과 동시에 멀린의 몸이 쏜살같이 달려들었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멀린이 휘두른 목검에 상대였던 기사 아카데미 학생이 막지도 못하고 경기장 밖으로 떨어지며 나자빠진 것.

“…….”

순간 정적이 일었다.

모든 것을 지켜보던 관객도.

뒤에서 응원하던 교관도.

부릅뜬 눈으로 대련을 지켜보던 진행자도.

심지어 멀린 그 자신조차 이 상황을 이해 못 하는 얼굴이었다.

멀린이 연신 눈을 뻐끔거리더니 중얼거렸다.

“뭐, 뭐지…?”

그리고 그 순간.

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관객석에서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나왔다.

이전까지는 비교를 불허할, 천지가 진동할 만한 정말 엄청난 함성이 말이다.

그 소리에 넋을 놓고 얼어붙어 있던 진행자가 퍼뜩 정신을 차리곤 경기를 중단시켰다.

진행자가 쩌렁쩌렁 외쳤다.

“첫번째 대련 유니콘 무관 학교의 멀린 승!!!!”

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함성에 가려져 진행자의 목소리가 들릴 리 만무했지만, 휘적휘적 유유히 경기장 밖으로 내려가는 멀린의 모습에 대련 결과가 어찌 되었는지는 굳이 들을 필요가 없었다.

아니, 들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결과가 어떤지는 두 눈으로 모두가 확인했으니까.

“…….”

내려오는 멀린의 모습에 아이들과 교관들이 넋을 놓았다.

보통 경기가 끝나고 내려오면 달려들어 잘했다. 수고했다는 말이 먼저 나오길 마련인데, 누구도 먼저 쉬이 입을 떼지 않았다.

결국엔 내려온 멀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겼네?”

끄덕.

저마다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조금 전 멀린이 보인 모습에 충격에서 쉬이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때, 교관 중 하나가 먼저 입을 뗐다.

“…어, 어떻게 한 거?”

잘했다.

수고했다. 라는 말이 아닌.

어떻게 한 거냐는 얘기부터 불쑥 튀어나온다.

멀린이 머릴 긁적였다.

“그냥 평소대로 했는데요…?”

“…평소대로 했다고?”

“…네.”

“허….”

저 콧대 높은 기사 아카데미 놈들을 상대로 첫 경기에서 보란 듯이 승리하여 초반에 선취점을 따냈으니, 방방 뛰며 기뻐해야 하는데.

분명 그게 맞는 건데.

결과가 어느 정도 상식선에서 이해가 가야 말이지….

그래, 분명 우연일 것이다.

그냥 하늘이 굽어살피셔서 일어난 기적이리라.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두 번째 경기도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면 이걸 우연이라고 할 수가 있을까?

“우아아아아아아아아아!!!!!!!”

재차 울려 오는 함성.

그리고. 교관들과 아이들이 넋 나간 얼굴로 누군가에게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두 번째 대련을 마치고 내려온 아이가 멀린이 그랬던 것처럼 머릴 긁적이며 내려왔다.

“이게 되네?”

“…….”

그래?

일순 교관들의 눈에 환희가 들어찼다.

그리고 깨달았다.

우연이 아니라고.

기적 같은 것이 아니라고.

순수히 아이들이 이뤄 낸 노력에서 빚어진 결과라고.

교관들이 일제히 뛰어들어 소릴 질러 댔다.

“이야아아아아아아아!!!”

“아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그, 그러게 말이야! 미친. 이게 말이 돼!?”

교관들뿐이랴.

아이들의 반응 역시 교관들과 마찬가지였다.

아이들마저 일제히 달려들며 저마다 고래고래 외쳐 댔다.

“야! 대박이다. 너는 어떻게 한 거야!?”

“…평소대로?”

“이야아아아아아, 평소대로래!!!”

교관들도, 아이들도.

모두가 하나같이 지금의 결과에 정신들을 놓은 모습들이었다.

두 번 연속으로 점수를 따내 열광의 도가니인 유니콘 무관 학교와 달리, 기사 아카데미 측은 이들과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그곳에 대기석에 있던 교수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그의 볼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푸들푸들 떨리고 있었다.

“대,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이게 대체…!!!”

불똥이 튀기는 듯한 교수의 살벌한 눈빛에 기사 아카데미 학생들은 차마 고갤 들지 못하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만만해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잔뜩 풀이 죽은 모습.

아이들을 한심하게 바라보던 교수의 눈이 반대편 유니콘 무관 학교 대기석으로 향했다.

왁자지껄 떠들며 난리 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더욱 속이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귀빈석에 있던 루시우스 교장의 눈과 마주친다.

교수의 표정은 만만치 않게 썩어들어 가고 있지만, 교장의 얼굴은 정말이지 금방이라 터질 것처럼 시뻘게져 있었다.

‘비, 빌어먹을…!’

가뜩이나 일전 레온하르트 영지 토벌 때 일으킨 물의로 자신을 바라보는 교장의 신임이 바닥까지 떨어진 상황이었다.

어떻게든 이를 만회하고자 먼저 나서겠다고 했건만, 이게 무슨 망신이란 말인가…!

매서운 눈을 하던 교수가 버럭 외쳤다.

“카일!!!!”

“예!!!”

“가서 이 망할 분위기를 반전 시키고 와라.”

“아, 알겠습니다!”

카일이 벌떡 일어나 경기장 쪽으로 나갔다.

카일이 입술을 짓씹으며 먼저 나갔던 멍청한 동료들을 향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리곤 맞은편에서 걸어 나오는 유니콘 무관 학교의 코흘리개들을 노려봤다. 그의 눈에 흉흉한 기세가 일었다.

카일이 속으로 몇 번이나 되뇌었다.

우연히 벌어진 기적으로 분수도 모르고 까불어 대는 저들의 코를 납작 눌러 주겠다고.

그리고 이 말도 안 되는 분위기를 꼭 반전시키겠노라고….

그렇게 다짐하고 다짐하며 나갔건만.

“시작!!!!!!!!!”

채애앵!!!

콰아아아아아앙!!!

쿠우우우우웅…!

“…꿱.”

“…….”

카일의 몸이 저만치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그리고 그를 날려 버린 유니콘 무관 학교의 아이가 어정쩡하게 서 있더니, 머릴 긁적이곤 경기장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재차 떠나갈 듯 경기장 가득 울리는 함성.

이것이 무려 세 번째다.

진행자가 넋이 나간 얼굴로 결과를 중얼거리다시피 했다.

“세 번째 유, 유니콘 승리….”

분위기는 걷잡을 수 없이 유니콘 쪽으로 유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곧바로 시작된 네 번째 경기 역시 별다른 이변(?)이랄 것도 없이 유니콘이 수월하게 승리를 가져가는 모습이 이어졌다.

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거센 함성이 울리며 고막을 때릴 듯이 울려 댔다.

연이은 유니콘 무관 학교 학생의 활약에 대신들은 말 그대로 입을 쩍 벌린 채 넋을 놓아 버렸다.

놀라움과 이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 한데 어우려져 있는 얼굴들이었다.

대신들이 하나둘씩 못 다물던 입을 움직여 댔다.

“이럴 수가…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러게나 말입니다. 유니콘 무관 학교의 수준이 이 정도였다니 말입니다.”

“유니콘 무관 학교의 수준이 이 정도라면 기사 아카데미라는 것이 단지 황실 기사가 되기 위한 과정 말고는 딱이 이점이랄 것이….”

옆에서 루시우스 교장이 빤히 듣고 있는데도 저마다 넋을 놓은 채 감탄하기 바쁘던 대신들의 입이 일순 꾹 다물어졌다.

어디서 이빨이 부서질 것처럼 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의 시선이 한쪽에 자리한 루시우스 교장을 향했다.

“이, 이이이…!!!!”

네 번째 경기까지 연달아 패배하자 루시우스의 눈은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색이 눈까지 번진 듯 말 그대로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불편한 기색을 넘어서 그야말로 악귀가 현신했다고 믿을 만큼 잔뜩 일그러진 얼굴이었다.

‘이, 이런 미친… 대체…!!! 이게 뭔 개 같은 경우란 말인가…!!!!’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화는 어느새 용암처럼 펄펄 끓어오르고 있었다.

원래 같았으면 경기 내내 한심한 꼴만 보이는 아이들을 향해 진작에 욕지거리를 내뱉곤 고래고래 소릴 질렀겠지만….

그의 앞에 떡하니 버티고 자리한 아슬란 황제 앞에서 그런 추태를 보일 수는 없었다.

아니, 추태를 떠나 황제 앞에 그런 불경한 짓을 보였다간, 함께 자리한 칼스테인 백작에게 바로 목이 날아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때, 루시우스의 눈이 일순 뒤돌아 못마땅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듀란드 공작과 마주쳤다.

불신이 역력한 그의 눈빛에 루시우스 교장은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씨발…!!!!’

속으로 연신 욕을 지껄이던 루시우스의 치켜뜬 눈이 문득 눈앞의 이든을 향했다.

가뜩이나 자신보다 앞자리에 앉은 그가 거슬렸던 루시우스였다.

한데.

연이은 승리에도 저리 태연한 모습을 보이는 이든이 그토록 거슬릴 수가 없었다.

루시우스의 서슬 퍼런 눈빛이 이든을 향하며 떨어지지 못할 때쯤.

묵묵히 자릴 지키던 칼스테인 백작이 비로소 입을 뗐다.

“정말 놀랍소. 이든 길드장.”

소란스러운 함성을 뚫고 나직이 들려온 그의 목소린 모든 대신과 황제에 귀에 똑똑히 들려왔다.

귀빈석에 이목을 한데 모은 칼스테인 백작이 말을 이었다.

“구면이지요. 우리.”

이든이 웃으며 고갤 끄덕였다.

“맞습니다. 일전에 백작님의 영지에서 열린 무도 대회 때, 그때 잠깐 봤었지요. 제가 난장을 피우지 않았습니까?”

이든의 말을 듣던 칼스테인이 옛 생각에 웃으며 고갤 끄덕였다.

“맞소. 그랬었지… 그때도 내심 놀랐었지. 눈이 보이지 않는 약점에도 불구하고 또래 아이들답지 않은 압도적인 강함. 일시에 달려든 드레이븐을 상대로도 어렵지 않게 제압한 노련함. 나를 앞에 두고 할 말은 했던 대담함. 모두가 정말 대단했었소.”

“그랬습니까?”

“지금도 그렇소.”

“……?”

이든이 고갤 갸웃거렸다.

칼스테인이 재차 입을 뗐다.

“그때와는 비교도 못 하게 강해지셨소. 그리고….”

칼스테인의 눈이 이번엔 경기장으로 향했다.

“너무도 훌륭히 키워 내셨소. 제자들을….”

이든과 대화를 나누는 지금 이 순간에도 경기장에서 활약하고 있는 유니콘 무관 학교의 아이들을 바라보는 칼스테인 백작의 눈엔 순수하게 감탄이 일렁였다.

그런 칼스테인의 말을 가만히 듣던 이든이 웃으며 조용히 입을 뗐다.

“제자가 아닙니다.”

“……?”

“저기 서 있는 아이들은, 그리고 아이들의 등을 받치고 있는 교관들은 제게 있어 그저 동료입니다.”

듣던 칼스테인의 눈에 일순 온화한 빛이 일었다.

참잠히 가라앉는 그의 눈동자가 호선을 그리며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짓는다.

“동료라. 과연….”

우아아아아아아아아!!!!!!

곧 재차 함성이 울려 왔다.

다섯 번째 경기 역시 유니콘의 아이들이 일수의 승리를 거머쥔 것이다.

이렇게까지 되면 우연이니 기적 따위로 볼 수 없었다.

아슬란이 스리슬쩍 물었다.

“말해 보게. 이든 길드장.”

“……?”

“대체 무슨 마법을 부린 겐가?”

황제의 물음에 이든이 살짝 웃었다.

“어떤 마법이었냐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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