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1화. (121/250)

121화.

“바로 끈기라는 마법이지요.”

“…….”

뻔하디뻔한 이든의 대답을 듣던 아슬란 황제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나 참, 자네도 그 소린가?”

“……?”

이든이 고갤 갸웃거리더니 물었다.

“저 말고 이리 말한 사람이 또 있습니까?”

이든의 물음에 아슬란이 다른 한 사람을 쏘아봤다.

“자네 옆에 앉은 양반이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이 말했지. 칼스테인 백작이라고.”

“…크흠.”

칼스테인 백작이 멋쩍은 얼굴로 괜한 헛기침을 했다.

나란히 앉은 이든과 칼스테인을 번갈아 보며 아슬란 황제는 대 빨 나온 입으로 툴툴거렸다.

“아무튼, 잘난 것들은 어디서 배워 오기라도 하는 것인지. 어째 하나같이들 똑같이들 말하는지. 에잉!”

아슬란 황제의 구시렁대는 소리에 이든 역시 멋쩍은 얼굴로 볼만 긁적였다.

사실 이에 대해선 말 못 할 비밀이 있었다.

제아무리 이든이라 해도 삼 개월 만에 아이들을 이 정도까지 성장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는 천마 할애비가 와도 안 되는 것이다.

물론 어느 정도 동수를 이루게 하는 것까진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간에 유니콘 무관 학교를 알리고, 입관생들을 폭발적으로 늘리기 위해선 동수를 이루는 모습을 보이는 것만 가지고는 턱도 없었다.

무슨 수를 써서든 친선 경기에서 압도적인 기량 차이로 승리는 모습을 보여 줘야만 했던 상황.

그때, 이든의 기감이 경기장에서 활약하고 있던 아이들의 단전을 훑었다.

아이들의 단전에서 미약하지만, 강대한 힘을 품고 있는 기운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 기운의 정체는 다름 아닌 ‘마기’였다.

심법부터 검법. 그리고 보법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마인들의 훈련을 따랐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다만.

고작 삼 개월 만에 단전에 저만큼의 마기를 쌓는다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이든은 운에 맡기잔 생각으로 한 가지 꾀를 내었다.

그것은 바로….

‘세계수 열매.’

일전 레온하르트 영지의 엘프 숲에서 그가 취했던 대환단과 같은 기운을 품던 그것 말이다.

그 영약을 아이들에게 먹이자고….

물론 이를 얻는 데까지의 과정은 절대 순탄치만은 않았다.

친선 경기 전, 이든은 레온하르트 영지의 지부 상황도 살필 겸, 엘프 숲에 한번 더 들른 적이 있었다.

당시 엘프 왕 갤러하드는 이든을 보자마자 열렬히 반가워하더니, 세계수 열매 얘기가 나오자 곧바로 정색했다.

-뭐? 세계수 열매를 하나 더 달라고!?

-어찌 안 되겠습니까?

-미안하네. 자네도 알고 있지 않은가. 내가 아무리 여기의 왕이라곤 하나, 세계수 열매는 내 마음대로 주고 그럴 수 없다는 걸 말일세.

다음 날.

-어허. 자네 왜 그런가. 안 된다니까 왜 자꾸만 억지를 부리는가!

그다음 날도.

-…하아. 유니콘 길드장 자리는 그리도 할 일이 없나? 안 된다는데, 왜 자꾸 찾아오나!

그다음, 다음 날도.

-안 돼.

그다음, 다음, 다음 날도.

-안 돼. 안 돼. 안 된다고!!!!!!

그렇게 몇 날 며칠을 끈질기게 달라붙어 괴롭힌 결과.

-여기 있네. 하나 이상은 못 줘. 얼른 가지고 꺼지게. 제발…! 딸 하나 때문에 이게 무슨 지랄 맞은 상황인지 원….

세계수 열매 하나를 얻을 수 있었다.

‘좀팽이 같은 양반, 몇 개만 더 주면 어디 덧나나.’

하지만.

아이들을 키우는 데는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

원체 열매 자체가 품고 있던 기운이 대단했던 탓에, 아이들 열 명이 나눠 먹어도 결코 부족하지 않았으니까.

물론 함께 고생해 준 교관들까지 나눠 주지 못한 것은 너무도 아쉬웠으나, 그래도 하나라도 얻은 덕분에 아이들의 내공은 비약적으로 상승할 수 있었다.

물론 섭취부터 기운을 온전히 흡수하는 데까지 이든이 운기조식을 이끌어 줬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운이 좋았지….’

운도 운이었지만, 거머리처럼 끈질기게 달라붙은 이든의 노력 탓도 있었다.

이것도 ‘끈기’라면 끈기일 것이다.

“우아아아아아아아아!!!!”

그때, 다시금 경기장이 떠나갈 듯 함성이 쏟아졌다.

“유니콘! 유니콘! 유니콘!!!!”

아홉 번째로 나간 아이가 상대를 단박에 곤죽으로 만들고는 경기장 밖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어느새 관객석에선 한마음 한뜻으로 유니콘이란 이름을 외치며 기적을 일으키고 있는 아이들을 응원하고 있었다.

기사 아카데미 대기석에 아이들은 차마 고갤 들지 못하곤, 경기 내내 땅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붉으락푸르락 시뻘개진 얼굴로 볼을 떨어 대던 교수는 이미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넋을 놓아 버렸다.

그사이, 마지막 차례가 다가오고 유니콘 무관 학교의 제크가 경기장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기사 아카데미의 교수가 중얼거리듯 입을 뗐다.

“…마지막. 나가라.”

“…….”

차라리 화라도 냈으면 악을 써서라도 싸웠으련만, 교수의 매가리 없는 목소리에 마지막 순번이었던 기사 아카데미 학생이 터덜터덜 경기장으로 들어섰다.

곧게 편 허리와 빛나는 눈을 하고있던 제크와는 달리 기사 아카데미 학생은 시작도 전부터 기가 잔뜩 죽은 얼굴이었다.

그리고 기사 아카데미 학생이 찰나 제크와 눈이 마주쳤다.

힐끗.

“…흐힉!”

제크의 빛나는 눈과 맞부딪친 기사 아카데미 학생이 황급히 고갤 숙였다.

‘끝났군.’

진행자는 저도 모르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니, 과연 진행자뿐일까.

이곳의 모두가 이미 결과를 예상하였다.

“경기 시작!!!!”

진행자의 외침과 동시에.

파아아아아아앗!!!!

보법을 밟은 제크가 공중으로 치솟았다.

일 장 이상 높이까지 뛰어오른 제크의 몸이 날갯짓하는 나비처럼 공중을 밟고 있었다.

그리고.

휘익…!

제크가 쥔 목검이 목전에 둔 기사 아카데미 학생을 향해 벌처럼 쏘아지려던 그 순간.

자칫 눈치채지 못하고 넘어갈 수도 있을, 점처럼 작은 한 조각의 마기가 제크의 목검 끝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마기의 가시화.

오러의 시작점이 아이가 쥔 목검에서 구현되고 있던 것이다.

그리고.

휘이이이이이이익!!!!

상대의 코앞까지 다가간 제크의 목검이 어느새 휘둘러졌다.

스으으으윽.

댕강.

제크의 일수를 막아 내려던 기사 아카데미 학생이 쥔 목검이 반듯하게 잘려 나가며 경기장 바닥을 나뒹굴었다.

일순 정적이 휩쓸고.

넋 놓고 잘린 목검 일부를 바라보던 진행자가 퍼뜩 정신을 차리곤 외쳤다.

“기, 기사 아카데미 측의 무기가 훼손되어 더는 경기 진행이 불가한바…!”

진행자가 더없이 큰 소리로 쩌렁쩌렁 외쳤다.

“유니콘 무관 학교의 승리로 친선 경기를 마친다!!!!”

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이전까지의 함성도 대단했지만, 지금에 비하면 새 발의 피나 다름없었다.

하늘이 떨어지고, 땅이 뒤흔들릴 함성이 경기장을 넘어 수도 전체에 울리는 듯했다.

그렇게 시작 전부터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유니콘 무관 학교와 기사 아카데미의 친선 경기는 시작한 지 반 시진도 채 되지 않아 10 대 0이라는 압도적인 차로 유니콘의 승리로 끝났다.

기다려 온 시간에 비해 싱겁게 끝났지만, 그날의 영광은 쉽게 가시지 않고 줄곧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수고했다. 모두.’

그리고 그날. 이든의 입가에도 흔치 않게 더없이 온화한 미소가 피었다.

***

“빌어먹을!!!”

욕을 지껄인 루시우스가 냅다 앞에 놓인 찻잔을 집어 던졌다.

쨍그랑!!!!

날아간 찻잔이 벽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났다.

그가 씩씩거리며 중얼거렸다.

“대체, 이 대체 무슨 망신이란 말인가. 완패라니. 저런…. 저런 말도 안 되는 것들에게 완패라니!!!”

쾅쾅쾅쾅!!!!

우지끈!!!!! 쿵!!!!

그럼에도 전혀 화가 풀리지 않은 지 그는 몇 번이고 주먹을 내려치더니 결국엔 눈앞에 탁자마저 부숴 버렸다.

“후우…후우…!!!”

루시우스가 치밀어 오르는 화를 주체하지 못하곤 연신 거친 숨을 내뱉던 그때.

끼익.

그의 집무실 문이 힘없이 열렸다.

루시우스의 핏발 선 눈이 자연스레 그곳을 향하다 들어온 이를 확인하고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 오셨습니까….”

그의 시선이 향한 곳.

거기엔 듀란드 공작이 차게 굳은 얼굴로 집무실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

별다른 말 없이 근처까지 온 듀란드 공작의 눈이 주변에 널브러진 루시우스의 화풀이가 남긴 잔해물들로 향했다.

듀란드가 천천히 입을 뗐다.

“…아주 잘했네.”

“…….”

“유례없던 역사를 썼어. 자네가….”

“…죄, 죄송합….”

“이게 죄송하단 말로 끝날 일인가…!!!!!”

핏대 선 듀란드의 목청에서 천둥과 같은 소리가 터져 나왔다.

“십 대 영일세. 십 대 영…!!! 무관 학교의 저 코흘리개들을 상대로 십 대 영으로 졌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루시우스가 고개만 푹 숙인 채 입을 꾹 다물던 그때, 듀란드에게서 차마 믿기지 않는 얘기가 나왔다.

“…어느 정도 각오는 하는 게 좋을걸세.”

“예…? 각오라니요?”

“…….”

듀란드가 대답이 없자 루시우스 재차 떼쓰듯 물었다.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고도 무사히 넘어갈 줄 알았나? 필시 황궁의 대신들이 자네를 걸고넘어질 걸세.”

“예!? 저를 걸고넘어지다니요?”

“자네도 알 것 아닌가. 귀족들에게 기사 아카데미가 어떤 상징성을 갖는지.”

“…….”

모를 리가 없지.

그것을 알기에 개천에서 났던 루시우스가 그토록 기를 써 가며 교장의 자리까지 올라가지 않았던가.

듀란드가 재차 말을 이었다.

“그것을 무너뜨렸으니 대신들이 가만히 있을 것 같나? 아마 곧 청문회도 열릴 테지. 자네가 교장직에 적합한 이인지 조사하기 위해서.”

“그, 그런…! 그럼 저는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앞으로 처신 잘하시게. 내 자네에게 해 줄 말은 그뿐일세.”

듀란드가 몸을 휙 돌려 밖으로 나가려던 그때.

“이대로 이렇게 그냥 가시면 어쩌십니까…!!!!”

루시우스가 황급히 입을 떼 돌아선 그의 걸음을 붙잡았다.

듀란드가 뒤돌아선 채 고개만 살짝 돌리곤 입을 열었다.

“자네만 믿고 이 일을 맡기고, 계획한 나 역시 입장이 곤란해졌네. 내 몸 하나 사리기 힘들어질 마당에 내가 자네까지 신경 써 줘야겠나?”

“…….”

“오늘 이후로 각자 알아서 잘 살아남도록 하세.”

“…….”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허망히 바라보던 루시우스의 눈이 질끈 감겼다.

“젠장… 젠장…!”

집무실에 그의 음성이 메아리처럼 몇 번이고 반복적으로 들려오고 있었다.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진 것이다.

***

친선 경기가 끝나고, 관객들과 귀빈들도 빠져나가 경기장 역시 한산해질 무렵.

단둘만 남아 대화를 나누던 중. 아슬란 황제가 불현듯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칼스테인 백작을 가까이 두라고?”

황제의 물음에 이든이 고갤 끄덕였다.

“예.”

“…그리 말하지 않아도 내 그를 제일 믿고 가까이 두고 있네만.”

“그 말이 아닙니다.”

“…응?”

“정말로 곁에 두시라 그 말입니다.”

“자세히 말해 보게. 정말로 곁에 두라니?”

“오늘을 기점으로 저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게 변할 겁니다.”

“저들이라면. 혹… 내 몸에 독을 푼 자들을 말하는 건가?”

“예.”

“어찌 그리 보는가.”

“듀란드 공작이 궁지에 몰렸기 때문입니다.”

“흠.”

“그리고 다른 이유로는.”

“음…?”

하지만 이든의 대답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말을 잇는 그의 모습에 아슬란의 눈썹이 살짝 움찔했다.

“저들이 눈치챘을 수도 있다는 겁니다.”

“무엇을 말인가.”

“폐하의 몸 상태 말입니다.”

“…….”

“일전 사교회 때, 폐하의 몸은 미독으로 인해 기껏해야 한 달 남짓한 시간만 남아 있던 상태였습니다.”

“그랬지….”

“그들이라고 그걸 몰랐을까요? 필시 치밀하게 계산하고 있었을 겁니다. 한데 그날 이후로 4개월가량 지난 것도 모자라. 오늘은 이렇게 공식 석상에도 모습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니까 자네 말은….”

이든이 천천히 끄덕였다.

“궁지에 몰린 쥐는 물기 마련입니다. 필시 듀란드 공작에게 이번 친선 경기 결과에 책임을 묻는 순간, 저들이 움직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칼스테인 백작을 옆에 두라?”

“예. 그리고…. 그때야말로 더없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기회다?”

“폐하의 몸에 독을 풀고, 황실을 어지럽히는 자들을 죄다 물색해 낼 절호의 기회 말입니다.”

“……!”

그때, 이든이 더없이 굳은 얼굴로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러니 칼스테인 백작을 옆에 두시고, 이 기회를 틈타 듀란드 공작을 더더욱 몰아붙이십시오. 그가 제정신이 아닌 상태를 틈타 무리한 선택을 하도록 흔들어야 합니다.”

“흔든다. 흔든다라….”

듣던 아슬란 황제의 주름진 눈가에 일순 빛이 발했다.

같은 말을 몇 번 되뇌던 그가 재차 입을 뗐다.

“내 무슨 말인지 알겠네.”

“그럼. 이만 자릴 비켜 드리지요.”

“음? 무슨 소린가. 비킨다니….”

말끝을 흐리던 아슬란 황제의 시선이 이든이 고갤 돌린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거기엔 칼스테인 백작이 놀란 얼굴로 서 있었다.

모든 대화를 엿들은 모양인 듯 보였다.

“폐하, 황공하오나. 조금 전 대화는 대체….”

칼스테인 백작의 눈이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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