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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화. (122/250)

122화.

아슬란 황제의 얼굴은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는 표정이었다.

그사이, 자리에서 일어난 이든이 들어왔던 길로 되돌아 나가 칼스테인 백작을 지나치던 그때.

그의 바로 옆에서 멈춰 선 이든이 조용히 입을 뗐다.

“백작님.”

“……?”

“저는 백작님을 믿습니다. 해서 백작님이 근처에 있다는 것을 알고도 모른 척하였던 것입니다. 부디 올바른 선택 부탁드립니다.”

“올바른 선택이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남은 얘기는 폐하께서 해 주실 겁니다. 그럼.”

그 말을 마지막으로, 이든은 가볍게 고갤 숙인 뒤 곧바로 걸음을 옮겼다.

칼스테인 백작이 조금은 넋 나간 듯한 얼굴로 이든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그때.

아슬란의 목소리가 그의 시선을 붙잡았다.

“조용한 데로 가서 마저 얘기 나누지. 내 긴히 자네에게 할 말이 있네.”

“…….”

***

“그 말이… 정녕 사실입니까?”

황제의 집무실.

얘기를 듣던 칼스테인 백작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평소 표정 변화가 거의 없다시피 하던 그에게 흔치 않은 모습이었다.

아슬란 황제가 침중하게 가라앉은 얼굴로 천천히 고갤 끄덕였다.

그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사실일세.”

“그, 그런… 듀란드 공작이 그런 짓을….”

칼스테인 백작의 얼굴이 한 차례 더 넋이 나갔다.

매가리가 사라지며 그의 몸에 힘이 쫙 풀린 듯 보였다.

예상했던 반응이었고 어차피 진즉에 꺼내야 할 얘기였지만, 막상 칼스테인 백작의 지금 모습을 마주하니 아슬란 황제 역시 덩달아 착잡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씁쓸한 마음으로 말없이 찻잔 표면을 쓸어 대며 만지작거리던 아슬란 황제가 재차 입을 뗀 것은 한참 뒤였다.

“황궁은 이미 저들의 영향력 아래 상당 부분 잠식되었을걸세. 물론 정확한 파악은 안 되었지만, 주동자가 듀란드 공작인 만큼 그 규모는 이미 상당할 테지.”

“…제게 지금 이런 말씀을 하신 이유가 뭡니까?”

“지금이 아니면 더는 자네에게 말할 기회가 없을 것 같으니까. 내게 남은 시간이라곤 기껏해야 길어야 아홉 달… 내 몸에 독을 풀고 멀쩡히 돌아다니는 황실의 적폐들을 척살하고 황실을 안정시키기엔 힘도, 시간도 턱없이 부족해.”

칼스테인 백작의 흔들리는 동공이 아슬란 황제를 향했다.

과거, 제국을 호령하던 젊은 시절의 모습은 온데간데없는.

초라하고, 볼품없는 노인의 모습만 남은 이가 거기에 있었다.

그 눈빛에 아슬란 황제는 씁쓸히 웃고는 재차 말을 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걱정인 것은….”

“……?”

“바로 어린 태자일세.”

“…태자.”

“그래. 설령 적폐들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한들 내가 죽고 나면 그것이 무슨 소용인가. 아직 어린 태자는 아수라장이 된 황궁을 안정시킬 만한 힘이 없어.”

찻잔에 담긴, 진즉에 식어 버린 물의 표면을 가만히 응시하던 아슬란의 가라앉은 눈이 문득 칼스테인 백작을 향했다.

지금까지의 모든 대화는 칼스테인 백작을 설득시키기 위한 밑밥이나 다름없었다.

그가 천천히 본론을 꺼내었다.

“칼스테인 백작.”

“…예. 폐하.”

“날 도와줄 수 있겠나…?”

“…….”

“황실의 적폐를 몰아내고, 더 나아가… 우리 태자를 지켜 줄 수 있겠나?”

칼스테인. 그 역시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었다. 황제가 따로 자리까지 마련하며 자신에게 지금까지의 얘기들을 꺼낸 이유를….

그럼에도 그는 쉬이 답할 수가 없었다.

황실을 어지럽히는 이가 자신과 아무 관계 없는 사람이었다면 당장에 달려가 그들을 벌했을 것이다.

하지만.

황제가 말하는 적폐의 주동자는 듀란드 공작이었다.

그가 누구인가.

그 자신의 장인 되는 사람 아닌가.

칼스테인 백작이 짓씹듯 나직이 말을 꺼냈다.

“너무도 무모하셨습니다.”

“…….”

“사사롭게는 전 듀란드 공작의 사위 되는 사람입니다. 그걸 빤히 아시면서 제가 무슨 짓을 할 줄 알고요…!!!”

일순 감정이 격해졌던 걸까.

칼스테인의 목소리가 절로 커졌다.

하지만.

그런 그를 바라보는 아슬란 황제의 얼굴은 여전히 온화하기만 했다.

“자넬 믿으니까.”

“……!”

듣던 칼스테인 백작의 눈이 부릅 뜨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아슬란 황제가 작게 웃으며 눈가의 주름이 졌다.

그리고 차츰 펴지는 눈가의 주름. 그의 눈이 칼스테인 백작에게서 떼어지고 재차 찻잔 안으로 향했다.

황제의 눈동자가 맑은 물 표면에 비치며 떠올랐지만, 그가 바라보는 것은 단지 그 안에 담긴 물이 아니었다.

그가 바라보는 것.

그리고 그가 떠올리는 것.

그것은 아마도 먼 과거.

한참이나 그 안을 공허이 바라보던 아슬란 황제가 문득 화제를 돌렸다.

“이따금 난 옛일을 떠올리네. 제국이 세워지기 이전, 그때의 난 지금 자네의 나이쯤이었고, 자네는 혈기왕성한 청년이었지. 그때도 그랬지. 실종된 레오하르트 공작과 더불어 가장 믿을 만한 동료가 바로 자네였어. 왜인지 아나?”

“…모르겠습니다.”

“전쟁터 한가운데에서 모두가 몸을 사릴 때 레온하르트와 자네만큼은 달랐거든. 나와 함께 선봉에서 적들을 베고 넘으며 병사들을 이끌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네. 스스로 희생하길 주저하지 않는 것. 그런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거든. 그래서 내 오래토록 자네를 신임하고 믿는 것일세.”

“…….”

“하여 내 이리 자네에게 위험을 무릅쓰고 청하는 것일세. 이 나를, 아니 더 나아가 부패한 이 나라를 구해 줄 수 있겠나…?”

일순 아스란 황제가 칼스테인 백작을 향해 고갤 숙였다.

칼스테인 백작이 화들짝 놀라며 황급히 그의 어깰 붙잡고 일으켰다.

“이러지 마십시오. 제국의 황제이십니다. 어찌 저에게 고갤 숙이십니까! 폐하, 어서 고갤 드십시오. 어서요!”

하지만 아슬란 황제의 숙여진 고개는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아슬란이 재차 입을 뗐다.

“…부디 이 미련한 나를 외면하지 말아 주게…!”

“폐하…!”

지금의 아슬란을 말리는 법은 단지 그를 강제로 붙잡고 일으키는 것 따위가 아니었다.

방법은 오직 하나.

일순 칼스테인 백작의 눈에 미묘한 감정이 비쳤다.

‘내 운명도 참으로 기구하구나. 가족과 나라 중의 하나를 택해야 한다니….’

하지만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칼스테인 백작이 아슬란의 어깨에서 손을 떼곤 한쪽 무릎을 굽혔다.

황제를 향해 고개마저 숙인 그의 목소리가 조용하지만 더없이 강인하게 그의 집무실에 울렸다.

“…신 칼스테인. 폐하의 뜻을 받드옵니다.”

아슬란이 더없이 기쁜 얼굴로 칼스테인의 손을 맞잡았다.

“정말인가, 정말… 그리 결단을 내려 준 것인가. 자네…!”

“명령만 내리십시오. 소신, 앞장서 황실을 어지럽히는 저 무도한 자들을 단칼에 단죄하겠나이다!”

아슬란 황제의 손에 제국 최강의 검이 쥐어지는 순간이었다.

***

유니콘 무관 학교의 연무장.

해는 이미 중천에 걸렸고, 진즉에 오후 훈련이 시작돼야 할 시간.

그런데 훈련은커녕 가득 들어선 인파로 그 넓은 연무장엔 발 디딜 틈이라곤 없어 보였다.

그리고 연무장에 미리 깔아 놓은 탁자에는 사무관들 수십이 줄지어 앉아 문전성시를 이루며 들어서는 사람들의 신청서를 받고 있었다.

“자자, 줄 서십쇼. 줄!”

“아직 멀었습니까!?”

“너무 많다고 중간에 자를 일 없으니까. 조금만 참고 기다려 주십시오!!!”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더니 그 얘기가 딱이었다.

매년 실시되는 무도 대회보다 더 큰 관심을 받았던 유니콘 대 기사 아카데미의 친선 경기.

대부분 사람들의 예상과는 빗나간 그때의 결과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더없이 빠르게 전 영지에 고루 퍼졌다.

그리고.

유니콘 무관 학교는 유례없는 대호황을 맞았다.

분주히 손님들을 맞는 사무관들을 바라보며 카르엘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의 옆에 있던 이든이 넌지시 물었다.

“어떻습니까?”

“어떻냐고요?”

“네.”

“보고도 모르시겠어요?”

‘…전 못 보는데요.’

뭐, 기감에 잡히는 기척도 그렇고, 사방에서 아우성치는 사람들의 소리도 그렇고.

딱히 몰라서 물어본 것은 아니지만.

이든은 멋쩍은 얼굴로 머리만 긁적여댔다.

그리고 그의 옆에 카르엘은 자신이 한 말실수 따윈 안중에도 없는지 연신 사방을 훑으며 입을 놀려 댔다.

“…한마디로.”

“한마디로?”

“대박이라고요. 대박!!!! 완전 초대박!!! 세상에!!! 예전에 길드장님이 무관 학교 세운다 했을 땐 반신반의했다가, 학생들 열 명만 남았단 말 들었을 땐 유니콘 길드도 이대로 쫄딱 망하는구나 싶었거든요? 근데… 아니에요. 진짜 이대로라면 말도 안 되게 초대박이라고요…!!!”

“…….”

쿡쿡 쑤셔 대는 비수 같은 말이 중간에 몇 번 날아든 것 같지만, 뭐 아무렴 어떤가.

어찌 됐든 대박 났다는데.

이든의 얼굴에도 더없이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예상했던 결과이긴 하지만, 저 역시 이토록 반응이 뜨거운 줄 몰랐습니다.”

이든의 말을 듣던 카르엘이 웃으며 대답했다.

“뜨거울 수밖에요.”

“음?”

“다른 곳도 아닌, 기사 아카데미를 상대로 압도적인 승리를 따낸 거잖아요. 그리고 가만 얘길 들어보니까 수도뿐만 아니라, 다른 영지에서 온 사람들도 제법 있어요.”

“그래요?”

“네. 수도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다른 영지에서 올 사람들까지 생각하면 아무래도 요 며칠 동안은 입관생들 받느라 정신이 없겠는데요?”

“그렇군요.”

“그리고 길드장님께서 아실는지 모르겠지만, 여기 모인 사람들 모두가 하나같이 다 평민분들이에요. 이 말이 뜻하는 게 뭔지 알아요?”

“글쎄요. 뭡니까?”

“…길드장님께서 희망을 주셨다는 거예요. 이들에게.”

“희망?”

“…여깄는 모두 제 자식들이 기사가 된다는 생각 같은 건 하지도 못했을 거예요. 헛된 꿈이라 여겼겠죠. 설령 재능이 있어도 가르칠 만한 여건조차 안됐을 거고요. 하지만….”

카르엘의 시선이 모인 사람들의 얼굴을 훑었다.

그리고 유심히 그들의 눈을 바라봤다.

“사람들의 눈에 희망이 보여요. 제 자식들도 될 수 있다고. 마냥 헛된 꿈만은 아니었다는 희망 말이에요…!”

마치 제 일인 것처럼 기뻐하며 떠들어 대는 카르엘의 모습에 이든 역시 비로소 실감이 되었다.

자신이 어떤 일을 벌였는지.

그리고 그 일이 사람들에게 어떤 희망의 말을 남겼는지.

하나.

아직 마냥 기뻐하기엔 일렀다.

그에겐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기에.

환하게 미소 짓던 이든의 얼굴이 다시 찬찬히 굳어 갔다.

‘듀란드 공작, 이젠 네놈 차례다.’

레스타드 길드장을 살해한 흉수.

듀란드 공작을 벌해야 할 순간이 남은 것이다.

***

벌컥벌컥.

쾅.

듀란드 공작이 한 손에 쥔 잔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연달아 몇 잔이나 마신 걸까.

얼굴은 새빨개져 이미 얼큰하게 취해 보이기까지 했다.

바득.

그가 소리가 나도록 이를 갈았다.

“이든… 이 개자식!”

유니콘 길드와 이든은 그에게 줄곧 눈엣가시였다.

앞에서 계획을 방해해대는 날파리 같은 존재.

허나.

친선 경기가 남긴 말도 안 되는 결과로 이 일을 계획한 본인의 입지까지 곤란해졌다.

오늘 청문회만 해도 그렇다.

루시우스가 교장직에 적합한 인물인지에 관한 청문회에서 듀란드 그 자신마저 싸잡아 공격해 대던 대신들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단지 눈엣가시에 불과했던 유니콘 길드란 존재가 이제는 자신의 발목까지 잡고 늘어지며 곤란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잔을 쥔 듀란드의 손이 부르르 떨리다가 이내 화풀이라도 하듯 쥐었던 술잔을 그대로 벽에 내팽개쳤다.

쨍그랑.

술잔이 벽에 부딪히며 기분 나쁜 금속음을 냈지만, 전혀 안중에도 없던 그때.

스르르.

“기분이 매우 언짢아 보이오.”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듀란드의 이글거리던 눈이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했다.

“…밸스커드 님이 여긴 어쩐 일로.”

듀란드의 속뜻은 ‘도와주지도 않을 것 뭣 하러 왔냐’라는 말과도 같았다.

밸스커드가 로브를 뒤로 젖히곤 어깰 으쓱여 보였다.

“꼭 별일 있어야만 오는 건 아니니….”

밸스커드는 듀란드가 내팽개쳤던 잔을 주워 들곤 듀란드가 있던 탁자 앞에 마주 앉았다.

그가 주워 온 잔에 남은 술을 따랐다.

술을 한 모금 들이켠 밸스커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참으로 독한 것도 드시오.”

“놀리러 온 것이면 가시오. 지금 기분이 썩 좋지 못하오.”

“뭐, 놀리자고 온 것은 아니오.”

“…….”

“그분의 명이 떨어졌소.”

“그분의!?”

듀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분’의 뜻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자연스레 취기가 날아가고 정신이 바짝 들었다.

밸스커드가 입을 뗐다.

“그간 참느라 고생 많았소. 한번…. 날뛰어 보시오.”

“그 말인즉.”

듀란드의 눈이 더없이 커졌다.

그리고.

분노로 이글거리던 그 눈 안에 더없는 환희가 들어찼다.

그리고 마주한 밸스커드의 홍안이 타오르듯 이글거렸다.

그가 입을 뗐다.

“듀란드 공작, 이 제국을 집어삼키실 수 있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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