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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화. (123/250)

123화.

그간 얼마나 지루하던 인고의 시간이었던가.

‘미독’으로 점차 죽어 가는 황제.

그리고 아직 새파랗게 어린 태자.

아슬란 황제만 죽으면 듀란드 공작은 자연스레 권력의 중심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손꼽아 기다리던 그 순간이 이미 진즉에 왔어야 했건만.

무슨 수작을 부린 것인지 몰라도 아슬란 황제는 다 죽어 가는 꼴을 하면서도 꾸역꾸역 버티고 있었다.

참으로 잡초 같은 놈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아슬란의 죽음이 늦춰져 가는 마당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번 친선 경기의 결과로 자신의 입지까지 나락으로 떨어지다시피 나빠지고 있던 상황.

타개할 방법을 찾던 중에 밸스커드의 말은 그야말로 한 줄기 빛과 같았다.

“다 죽어 가는 황제와 서로 물고 뜯고 바쁜 놈들이 지배하는 곳이오. 이런 제국을 삼키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오…!”

“그렇소?”

하나.

왜인지 듀란드를 바라보는 밸스커드의 음성은 한없이 무미건조하기만 했다.

밸스커드가 재차 입을 뗐다.

“그럼 다른 식으로 묻겠소. 제국을 삼키는 일. 우리의 지원 일절 없이도 가능하겠소?”

듀란드의 눈이 부릅 뜨였다.

전혀 예상치 못했다는 반응이었다.

제국을 손에 넣는 일이니 당연코 저들의 지원이 있을 거로 생각했다.

한데 아무런 지원도 없다니.

“그대들의 지원 일절 없이 말이오…?”

“그렇소.”

“어, 어째서… 그 역시 그분의 뜻이오…?”

“그분의 뜻이오.”

“이유가 무엇이오…?”

“그분의 군대는 마지막 순간을 위한 최후의 보루요. 이런 일에 쓸 수는 없소.”

듀란드에게 있어선 거사라 해도 부족하지 않은 더없이 중요한 일.

하나, 냉정히 생각해 보면 저들에게 제국의 분란은 관심 밖의 일임이 어찌 보면 당연했다.

듀란드 공작이 입을 꾹 다문 채 아무런 말이 없자, 한동안 정적이 방 안을 휩쓸었다.

그 삭막하고 건조한 분위기 속에 밸스커드가 먼저 입을 뗐다.

“불가능하오?”

재차 묻는 밸스커드의 물음에 한참을 말없이 침묵을 지키던 듀란드의 눈에 흉흉한 기세가 들어찼다.

어느새 살기로 번뜩이는 눈.

그 눈빛은 필시 다 죽어 가는 커다란 코끼리를 앞에 둔 한 마리의 맹수와 닮아 있었다.

이윽고 듀란드 공작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어차피 진즉에 이리 했어야 했다. 더 수세에 몰리기 전에… 움직여야 한다.’

미소 짓던 듀란드의 입가가 점차 차갑게 굳어 갔다.

그가 입을 뗐다.

“가능하오. 그리고 내 그분께 증명해 보이겠소. 이 듀란드가 얼마나 쓸모있는 자인지. 나의 힘만으로 이 제국을 집어삼키는 것을 보여 주겠단 말이오!”

듀란드 공작의 집무실에서 더없이 어두운 욕망이 꿈틀거리며 야욕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를 바라보는 밸스커드의 눈엔 흥미로운 빛이 역력해 보였다.

‘그래. 듀란드, 어디 한번 보여 봐라. 그리고 증명해 보아라. 네놈이 계속 쥐어야 할 패인지. 버려야 할 패인지…!’

밸스커드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 지, 꿈틀거리는 야욕을 숨기지 못하던 듀란드의 눈빛은 여전히 흉흉하게 번뜩이고 있었다.

***

시간은 재차 덧없이 흘러가는 듯했지만, 정치권은 어느 때보다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루시우스 교장은 친선 경기 결과에 관한 자신의 책임론을 놓고 청문회에 압박에 못 이겨 스스로 사퇴하였다.

그리고 당시 이 계획의 총 책임자였던 듀란드 공작이 궁지에 몰리기 무섭게 반대 진형의 관료들은 이때다 싶어 그를 물어뜯기에 바빴다.

유니콘의 승리가 백성들에게 ‘희망’을 남겼다면, 이들에겐 한바탕 ‘전쟁의 불씨’를 남긴 셈이었다.

황궁은 그야말로 혼돈의 도가니였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급작스럽게 이루어진 루시우스의 사퇴는 모든 귀족에게 더 큰 악영향을 끼쳤다.

바로 기사 아카데미 운영에 차질이 생긴 것이다.

루시우스가 급작스럽게 사퇴한 탓에 교장직에 관한 인수인계도 없다시피 한 것도 한몫했지만, 그보다는 이번 사태로 인해 스스로 교장직에 나서겠다는 이가 없어 루시우스를 대신할 마땅한 후임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에서였다.

결국, 기사 아카데미는 반강제적으로 조기 방학을 맞게 되었다.

늘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루는 유니콘 무관 학교와는 참으로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그리고.

결국엔 성사된 듀란드 공작의 청문회 전날.

황궁조차 보초를 서는 이를 제외하곤 인적이 없다시피 한 더없이 깊은 새벽.

톡톡.

아직 잠이 들지 않았던 듀란드 공작이 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리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왔군.’

그가 소리가 들린 곳으로 발을 떼자 예상했던 대로 전서구가 창 앞에 서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듀란드 공작이 더 가까이 다가가 전서구의 발에 걸린 쪽지를 확인했다.

쪽지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본대 수도의 진입. 동맹군 역시 모든 준비가 끝났음.

쪽지 안의 짧은 문구를 읽던 듀란드의 눈에 순간 이채가 발했다.

‘시작이군!’

그 순간.

듀란드는 곧바로 어딘가로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의 걸음이 향하는 곳.

다름 아닌 그의 갑옷이 걸려 있던 거치대였다.

다가온 그의 모습에 기다리며 꾸벅꾸벅 졸던 신하가 퍼뜩 정신을 차리곤 황급히 일어났다.

“고, 공작님, 오셨습니다!”

“…입히거라. 이제 곧 시작될 터이니.”

듣던 신하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꿀꺽.

“네, 네… 알겠습니다!”

황궁의 성벽 위.

보초를 서던 병사가 일순 손으로 눈을 비볐다.

그가 눈을 가느다랗게 뜨곤 재차 먼발치로 시선을 던졌다.

‘뭐, 뭐지…?’

그가 선 황궁의 성벽 너머, 수도의 큰길을 따라 대규모의 무리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꿈을 꾸는 건가?’

늦은 밤도 아닌, 평소에 인적이라곤 눈을 씻고 봐도 없던 새벽에 헤아리기조차 힘든 엄청난 수의 무리가 다가오는 것이 보이니, 병사로서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어리둥절해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리고.

점차 거리를 좁혀 오며 가까워지는 대규모의 무리.

그 먼발치를 주시하며 가느다랗게 뜨던 병사의 눈이 점차 크기를 부풀려 가며 이내 부릅 뜨였다.

점차 그 무리의 모습이 또렷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대, 대체 저건…!’

다가오는 무리들. 하나같이 갑옷을 걸치고 중무장한 기사들과 병사들의 모습이었다.

새벽에 뜬금없이 다가오는 대규모 병력이라니.

보초병이 이 상황을 알리기 위해 황급히 한쪽에 둔 뿔피리를 잡아 들려던 그때.

척.

우악스런 손 하나가 불쑥 튀어나와 보초병의 움직임을 가로막았다.

보초병이 당혹스러워하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대, 대장님?”

중얼거리다시피 한 보초병의 흔들리는 시선이 향한 곳.

거기엔 황궁 수비대장 맥스웰이 서늘한 표정으로 휘휘 고갤 젓고 있었다.

그리곤 자신의 입가로 치켜세운 검지를 가져다 대었다.

‘조용히 해라.’

황궁 수비 대장 맥스웰의 뜻은 그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차가운 안광이 경고하듯 명멸을 반복하고 있었다.

입 한번 잘못 뻥끗하는 순간, 너의 그 목도 날아갈 것이라고….

보초병이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저도 모르게 고갤 끄덕였다.

그리고.

대규모 병력은 어느새 황궁의 성문 앞까지 도착해 줄지어 서 있었다.

성문 앞에 모여든 병력들을 힐끗 바라보던 맥스웰이 성벽 안 밑으로 고갤 내밀어 성문의 출입을 담당하는 병사들을 향해 입을 뗐다.

“열어라.”

맥스웰의 입이 떨어지기 무섭게 병사들이 눈을 빛내곤 황궁의 성문을 열었다.

쿠구구궁.

적막 가득했던 새벽. 성문이 열리는 소리는 더욱 크게만 들려왔다.

그 웅장한 소리에 병사들이 조심조심 성문을 열던 그때.

저벅저벅.

정원을 가로지르며 한 인형이 유유히 걸어오고 있었다.

마치 황제처럼 휘황찬란한 갑옷을 온몸에 걸치곤 위엄을 뽐내며 걸어오는 이.

그와 눈이 마주친 맥스웰이 그를 향해 깊게 고갤 숙이곤 읍했다.

“음.”

걸어오는 이.

듀란드 공작이 맥스웰의 경례를 받고는 활짝 열린 성문 앞에 섰다.

어느새 활짝 열린 성문.

그를 발견한 대규모 병력의 선봉장들이 열린 성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서곤 말에서 내려와 듀란드 앞에 섰다.

“공작님을 뵙습니다.”

말에서 내린 선봉장들은 셋.

그들을 바라보던 듀란드 공작이 환하게 웃으며 그들을 반겼다.

“이곳까지 먼 걸음 하느라 다들 고생이 많았소.”

“아닙니다. 공작님께서 부르셨는데, 저희가 어찌 넋 놓고 가만있겠습니까?”

“맞습니다.”

“오히려 이번 거사에 저희를 포함시켜 주셔서 감읍할 따름입니다.”

“음!”

듣던 듀란드 공작이 더없이 만족스런 얼굴을 했다.

그의 시선이 닿은 눈앞에 선봉장들. 모두 하나같이 거물급의 인물들로 듀란드 공작과 함께 칠 인의 기사 중 하나라 불리는 영주들이었다.

칼스테인 백작을 제외한 남은 칠 인의 기사 전부가 수도에 모인 것이다.

바로 오늘 거사를 위해서.

그때, 본격적으로 거사에 나서기 전, 선봉장 중 하나가 입을 뗐다.

“칼스테인 백작은 어찌 되었습니까?”

칼스테인의 이름을 듣자마자 듀란드 공작은 눈살을 찌푸렸다.

“녀석에겐 아무 말도 안 했소. 수하들의 말에 따르면 친선 경기 이후, 자신의 영지로 돌아갔다더군. 어차피 그놈이 눈치채 봤자 계획에 방해만 될 것이오. 차라리 없는 게 낫지.”

‘하긴….’

듣던 영주들이 저마다 고갤 끄덕였다.

제국과 황제를 향한 칼스테인의 충성심은 그들 역시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칼스테인이 이 사실을 알았다면 필시 길길이 날뛰며 달려들 것이 뻔하였다.

그때, 또 다른 영주가 조금 불안한 듯한 얼굴로 입을 뗐다.

“한데… 후에 칼스테인 백작이 뒤늦게 소식을 듣고 뛰어오는 날엔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듀란드가 피식 웃었다.

“일이 다 끝난 뒤에 알아봤자 제깟 놈이 무슨 짓을 하겠소. 게다가… 난 그놈의 장인이오. 너무 걱정들 마시오.”

“음….”

공작의 얘긴 그럴듯했다.

칼스테인 백작이 이 일에 관한 소식을 들었을 땐, 이미 거사가 마무리되고 뒷정리까지 끝낸 후일 것이다.

게다가 그들의 우두머리인 듀란드 공작은 그의 장인어른이 아니던가.

제아무리 제국을 향한 충성심이 깊다 한들 자신의 장인이 일으킨 거사에 대해 토를 달진 못할 것이다. 칼스테인 백작의 후환에 대한 걱정이 사라지자, 재차 영주들의 눈에 첨예한 기세가 살아났다.

영주 중 또 다른 이가 입을 뗐다.

“황궁을 장악하면 곧바로 유니콘 길드를 공격할 예정이라 들었습니다.”

듀란드 공작이 고갤 끄덕였다.

“맞소. 무슨 짓으로 친선 경기 때 그런 결과를 만들어 냈는지 알 수 없으나, 기사 아카데미가 흔들리면 제국의 근간인 계급 체계 역시 흔들리는 것이오. 이 또한 바로잡을 필요가 있소.”

영주들이 동의하듯 저마다 고갤 끄덕였다.

“맞는 말씀입니다. 분수도 모르고 날뛰면 어떻게 되는지를 천한 것들에게 다시금 새겨 줄 필요가 있습니다.”

이렇게 서로의 뜻이 일맥상통하니, 거사를 일으키잔 듀란드의 뜻에 적극 동참하는 것이리라.

영주들의 뜻과 자신의 뜻이 일치함을 재차 확인한 듀란드 공작이 눈을 빛내곤 고갤 끄덕였다.

“자, 움직입시다.”

듀란드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영주들이 고갤 끄덕이곤, 성문 앞에 늘어선 자신의 병력들을 황궁 안으로 들여보내던 그때.

우르르르.

일순. 황궁 안쪽에서 수상한 움직임이 들려왔다.

듀란드와 반란 세력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곳을 향했다.

그들의 시선이 향한 곳.

거기엔 달려온 또 다른 황궁의 수비대가 황궁으로 향하는 길목을 지키며 막아서고 있었다.

길목을 지키는 이가 반란 세력들을 향해 쩌렁쩌렁 외쳤다.

“이놈들!!! 감히 이곳이 어디라고 불손한 움직임을 보이는 것이냐. 어서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지 못할까!!!!”

그 모습에 듀란드 공작은 헛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길목을 막아선 수비대의 수는 고작 이백 조금 넘어 보일 뿐이었다.

하나.

성문에 들어선 반란군의 숫자는 대충 훑어만 봐도 수천을 훌쩍 넘어 보였다.

게다가 아직 들어서지 못한 병력과, 듀란드 공작에 편에 서기로 한 황궁 내 수비대까지 합치면 병력의 숫자가 거진 일만에 가까우니, 막아선 수비대가 우습게 보일 수밖에….

듀란드가 타이르듯 입을 뗐다.

“고작 몇백으로 우리 거사 군 일 만을 어찌 막으려 하시는가. 내 자네들에게 제안하지. 조금 전 건방진 언사는 없던 일로 해 줄 터이니, 한풀 꺾인 황제는 뒤로하고 내 편에 서는 것이 어떤가!”

듀란드의 말을 듣던 수비대의 눈이 찰나 흔들렸다.

확실히 그의 말대로 고작 몇백의 숫자로 저 끝없는 반란군을 상대하기란 말도 안 돼 보였다.

하지만 왜일까.

흔들리던 동공이 가라앉으며 더없이 든든해 보이는 저들의 표정은.

그때, 수비대 뒤로 먼발치에서 누군가의 음성이 들려왔다.

“한번 내기해 보시겠습니까. 고작 수백으로 막을 수 있는지.”

필시 먼 곳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였다.

한데 마치 귓가에 대고 속삭이듯, 그 음성은 모든 반란군에게 똑똑히 박혀 들려오고 있었다.

듀란드 공작의 눈썹이 순간 움찔했다.

너무도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설마….”

듀란드 공작과 반란군의 시선이 일제히 향한 곳.

거기엔 양옆으로 갈라서는 수비대의 틈 사이로 유유히 걸어 나오는 한 중년인의 모습이 보였다.

제국의 소드 마스터.

제국 최강의 검이라 불리는 초인.

칼스테인 백작이 길목을 막아선 수비대 앞에 떡하니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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