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6화. (126/250)

126화.

평소 황족들이 침소에 든 시간이면 신하들과 궁녀들은 그들이 혹여 잠에서 깨지 않도록 묵언 수행처럼 침묵하려 노력했다.

하여 황궁도 이 시간만큼은 쥐죽은 듯이 조용하기 마련이건만….

깊은 새벽.

신하들과 궁녀들이 내지르는 단말마의 비명이 황궁 내 사방팔방에서 들려왔다.

“꺄아아아아아악!!!!”

“끄헉…!!!!”

시간이 시간인 만큼 황궁 내부를 미비하게 밝히는 마법 조명 아래. 피를 흘리며 처참히 죽어간 모습에 사람들이 곳곳에 널브러져 있었다.

이미 참혹할 대로 참혹한 현장이건만, 비명은 쉬지 않고 들려오더니 이내 황제의 침소와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황궁 안 참상을 만들어 낸 당사자.

듀란드 공작이 침소 앞을 막아선 궁녀를 향해 재차 검을 휘둘렀다.

“꺼져라. 천한 것!!!”

푸른 오러가 맺힌 듀란드 공작의 검이 휘둘러지고, 미처 도망치지 못했던 궁녀의 몸이 반듯하게 갈려지며 사방에 피를 뿌려 댔다.

신하고, 궁녀고, 궁의 내부를 지키던 병사할 것 없이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향해 검을 휘둘러대는 듀란드의 모습은 흡사 광인(狂人)을 연상케 했다.

뻐어엉!!!!

갈라지는 시신을 밀어내고 황제의 침소를 걷어찬 듀란드가 내부를 훑고는 빠드득 이를 갈았다.

“이 망할 노인네가 그새 내뺐군!”

밀고 들어간 침소에 아슬란 황제가 없는 것을 확인한 듀란드 공작이 다시 밖으로 나오곤 주변을 훑었다.

마치 먹잇감을 찾는 맹수처럼 이글거리는 눈으로 갈라진 양쪽 길을 번갈아 바라보던 듀란드 공작이 뒤에 자신을 따라나선 반란군들을 향해 입을 뗐다.

“너희들은 황제의 집무실과 태자의 침소를 뒤지도록. 나는 대전으로 간다.”

“예!!!!”

듀란드의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반란군들이 읍하며 각각 흩어져 바삐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홀로 남은 듀란드는 황제의 용좌가 있는 대전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다른 길목과 달리 대전으로 가는 길목은 병사들이 보이지 않고 을씨년스러울 만큼 조용했다.

그리고 듀란드는 그 점을 의심했다.

새벽에 대전이 운영될 리는 없겠지만, 혹여 모르니 소수의 인원은 배치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침소와 다른 곳은 다 병사들을 배치해 놓고 이곳은 아무도 없다?

물론 지레 겁을 먹은 병사들이 미리 내뺐을 수도 있다.

하지만.

듀란드는 이것이 얄팍한 눈속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끼이이이이.

듀란드의 손끝에서 열리는 대전의 문이 기이한 소릴 내며 차츰 열렸다.

그리고.

쿠르르릉!!!

일순 번쩍인 번개와 함께, 용좌에 앉아 있는 이가 보였다.

듀란드가 씨익, 함지박만 한 미소를 지으며 대전 안으로 들어섰다.

들어선 그가 더없이 음산한 음성을 내뱉었다.

“역시 이곳에 계셨군요. 폐하….”

듀란드의 광기 어린 눈이 향한 곳.

거기엔 아슬란 황제가 용좌에 앉아 있었다.

아슬란이 듀란드를 노려보며 노기 어린 음성으로 그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듀란드…!”

쿠르르르릉!!!!

한때나마 가장 믿었던 수족에게 배신당한 그의 심경을 대변하는 걸까. 어두컴컴한 하늘에 재차 벼락이 쳤다.

창밖을 통해 번쩍거리는 빛이 찰나 대전을 휩쓸며 아슬란의 다시 얼굴을 비췄다.

이미 노쇠하여 예전에 그가 아니라 한들, 제국을 세운 황제의 위엄은 쉽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마치 이를 증명하듯 주름진 눈가에 감추어진 눈빛이 위엄을 토해 내며 듀란드를 굽어보고 있었으니까.

하나.

그런 아슬란의 위엄도 듀란드의 눈에 비친 광기를 몰아내기엔 역부족이었던 모양이다.

터벅. 터벅.

듀란드가 서슬이 퍼런 눈을 하며 검을 축 늘어뜨리곤 용좌 가까이 걸어갔다.

어느새 용좌가 있는 단상 앞에 선 듀란드가 요리조리 눈알만 굴려 댔다.

무언가 한참을 찾던 듀란드가 나직이 입을 뗐다.

“보이질 않는군요.”

“…….”

“태자, 어디에 두셨습니까?”

“놈!!!!!”

쿠르르릉!!!!

대전에 아슬란의 노기가 쩌렁쩌렁 울렸다.

“듀란드, 네가 진정 미쳤구나! 네놈은 나를 배신하는 것도 모자라서, 능멸마저 하려는 게야!!!!!”

목에 핏대까지 세운 채 소리를 질러 대는 아슬란의 노기를 정면으로 받고도 듀란드의 표정은 더없이 차분하기만 했다.

하나, 차분한 것은 표정만일 뿐.

아슬란을 바라보는 눈빛의 광기는 여전히 넘실거리다 못해 차서 넘칠 듯했다.

듀란드가 한숨을 한번 푹 내쉬곤 심드렁한 얼굴로 입을 뗐다.

“…그러게 진작 죽었으면 나도 편하고 자네도 이리 능멸당하지 않고 좋았지 않나?”

“…뭐라고?”

지금, 이 순간부터 황제에 대한 존중 따위는 없다는 듯 입을 떼는 듀란드의 모습에 아슬란이 황망한 얼굴로 되물었다.

듀란드가 말을 이었다.

“내 지난 수십 년간 동안 네놈 목에 독을 풀었다. 자네도 알고 있지 않았나? 이미 중독될 대로 중독되어 서서히 죽어 가고 있는 몸 상태란 걸. 근데…. 어째서지?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 있는 거지? 이미 몇 개월 전에 진작 죽어야 했거늘. 어찌 그 명줄을 이어 가는 것이지? 말해 봐라. 아슬란, 네놈의 명줄을 아직 이승에 붙잡아 둔 배후가 누구냐.”

“이놈! 그 입 닥치지 못할까!!!!!”

휘이이이이이이익!!!!

그때였다.

단상 위 용좌에 앉아 있던 아슬란이 기어코 검을 뽑아 몸을 날리곤 듀란드를 향해 있는 힘껏 휘둘렀다.

채애애애애애애앵!!!!!

검과 검이 맞부딪치며 대전에 금속음이 가득 울렸다.

지금의 일격은 현재의 아슬란 황제가 펼칠 수 있었던 가장 강한 일격 피살이었을 것이다.

하나.

조금 전 아슬란의 일 초는 듀란드에게 어떤 위협도 되질 못했다.

노쇠한 몸에서 나오는 힘이 위협이 돼 봤자 얼마나 되겠는가.

아슬란의 검을 너무도 가볍게 막아 낸 듀란드가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그 순간.

“……!”

팽그르르르르르. 철컹.

아슬란이 쥐었던 검이 튕겨 나가며 대전의 바닥을 나뒹굴었다.

처억.

그리고 쳐 내던 듀란드의 검이 이젠 아슬란 목을 겨누고 있었다.

듀란드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을 했다.

“어이가 없군. 늙은 나도 나지만, 자네는 정말이지. 엉망이구만.”

“…뭐?”

“과거 제국을 일통했던 영웅은 어디 있지? 과거 제국을 호령하던 제왕은 어딨는 것이냐?”

“…큿!”

“이렇게까지 나약해졌다니. 내 지난 노고가 헛수고라 느껴질 만큼 아주 약해 빠졌어. 이 정도일 줄 알았다면 마냥 미독만 풀면서 죽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라, 진즉에 이렇게 나서서 자네를 죽일 것을… 아니 그런가? 아슬란.”

“이, 이놈…!”

그때, 아슬란을 향해 더없이 차가운 표정을 하던 그의 입가 한쪽이 삐죽 올라갔다.

“그래도 꼴에 침소에 숨어 있지 않고 용좌에 앉아 있던 것은 칭찬해 주지. 하기사 최후를 맞이할 장소로 이곳만 한 곳도 없긴 하지.”

“더 이상의 능멸은 나 역시 사절이다. 죽이려면 어서 죽이거라…!!!!”

아슬란의 일갈에 듀란드의 광기 어린 눈에 일순 이채가 번쩍였다.

“그렇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다.”

휘익.

듀란드의 검이 아슬란의 목을 단칼에 베어 내기 위해 뒤로 젖혀지려던 그 순간.

“안 됩니다!!!!!”

어디선가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슬란의 목을 향해 떨어지려던 듀란드의 검이 덜컥 멈추었다.

듀란드의 시선이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했다.

거기엔 줄곧 용좌 뒤에 숨어 있던 태자가 바르르 떤 채 걸어 나오고 있었다.

“태자, 거기 있었군.”

듀란드가 아슬란의 몸을 밀어내곤 태자를 향해 걸음을 옮기던 그 순간, 아슬란이 듀란드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곤 버티고 앉았다.

“이놈, 태자는 내버려 두어라. 죽이려면 날 죽여라!!!!”

“귀찮게 굴긴.”

하지만 노쇠하고 병든 몸으로 그를 막기엔 역부족인 듯 듀란드의 발길질 한 번에 아슬란의 몸이 재차 바닥을 나뒹굴었다.

쿵.

“억!!!”

“폐하…!!!!!”

태자가 뒹굴며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아슬란을 향해 달려가려던 그 순간.

듀란드의 검이 태자를 막아섰다.

태자의 눈이 재차 공포에 젖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대, 대체…. 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듀란드가 피식 웃었다.

“왜 이러냐고?”

“…….”

“바로 이 몸이 황위에 더 없이 어울리기 때문이지. 너희 아슬란 놈들에게 이 용좌는 너무도 과분하다. 다 늙은 저놈도, 그리고 새파랗게 어린 네놈에게도…!”

듀란드가 검을 높게 치켜세웠다.

휘익!

“이제 이 세상은 듀란드 가문의 것이 될 것이다!!!!”

대전을 울리는 그의 음성과 함께 그가 쥔 검이 어린 태자를 향해 그어지려던 그때였다.

휘이이이이이이익!

한 인형(人形)이 쏜살같이 날아와 듀란드의 검을 막아선 것이다.

채애애애애애앵!!!!

재차 대전을 가득 메운 금속음.

자신의 검을 막아 낸 이를 바라보던 듀란드의 눈이 부릅 뜨였다.

“…칼스테인, 네놈이 이곳에 어떻게…!”

듀란드의 검을 막아선 이.

다름 아닌 수비대를 이끌고 반란군을 막아 내던 칼스테인이었다.

그가 어찌 반란군을 뒤로하고 이곳까지 왔는지 채 의문이 가시기도 전. 칼스테인 백작이 검에 힘을 주어 듀란드를 멀찍이 밀어냈다.

주룩.

“윽!”

일 장 가까이 듀란드를 밀어낸 칼스테인이 조용히 입을 뗐다.

“이제 다 끝났소. 듀란드 공작.”

“다 끝나다니 무슨.”

“당신의 반란은 실패했소.”

“뭐라고…?”

“밖의 반란군 역시 모조리 제압되었고, 궁 안에 들어선 당신의 수하들 역시 모조리 잡혔소.”

“웃기는 소리…!!!!”

“뭣하면 직접 확인해 보시오. 창밖의 상황을.”

“……!”

듀란드의 눈이 부릅 뜨였다.

확실히 칼스테인의 말을 듣고 보니 바깥에 소란이 일절 들리지 않았다.

제아무리 황궁 수비대의 제압이 끝났다 한들 수천의 기척은 지운다고 지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듀란드가 황급히 창가 쪽으로 달려가 밖을 내다보았다.

그의 눈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크게 흔들렸다.

“이, 이럴 수가… 어떻게…. 어떻게 이런 일이!!!!”

창밖을 내려다보던 듀란드의 시야가 담아 낸 장면은 그야말로 처참했다.

사방에 가득히 쌓인 반란군들의 시신혈해가 가장 먼저 눈에 띄었고, 꽁지 빠지게 도망가다가 황궁 수비대에게 붙잡히는 반란군들의 뒷모습도 들어오고 있었다.

몇 되지도 않는 수비대에게 반란군들이 도망가는 모습도 이해가 가질 않았지만, 무엇보다 그를 의아하게 한 것은 그 많던 반란군들을 누가 저리 몰살했냐는 것이었다.

“설마…!”

듀란드가 기겁한 얼굴로 칼스테인을 향해 고갤 홱 돌렸다.

“네놈이냐. 네놈이 저리 만든 것이야…!?”

듀란드가 저리 말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의 기준에서 저런 말도 안 되는 일을 저질렀을 만한 사람은 오직 칼스테인 하나밖에 없었으니까.

하나 칼스테인 백작은 아니라는 듯 고갤 저었다.

“내 검에 저리된 놈들도 있기야 하지만, 저 사달을 낸 것은 내가 아니오.”

“하면…. 대체, 대체 누가 그랬단 말인가…!”

“나다.”

그때, 대전의 입구 쪽 먼발치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듀란드의 고개가 자연스레 그곳으로 돌려졌다.

“네, 네놈은….”

듀란드의 시선이 향한 곳.

거기엔 착 감긴 눈에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채 섬뜩하게 웃고 있는 한 사내가 있었다.

대전 문 앞에 서 있던 사내는 휘적휘적 걸어오며 코를 킁킁거렸다.

“어디서 구린내가 이리 진동을 하나 했더니 여기 있었소? 듀란드 공작.”

듀란드가 입술을 짓씹으며 걸어오는 이의 이름을 내뱉었다.

“…이든…!”

“미안하게 됐군. 꽤 오랫동안 반란을 준비해 왔던 것 같은데, 한순간에 물거품으로 만들어서 말이야.”

“…네놈 짓이었구나.”

“그래. 내가 했지. 식후 운동 겸으로 아주 좋더군.”

신경을 박박 긁어 대는 이든의 조롱에 듀란드의 눈엔 어느새 핏발이 가득 서 있었다.

“…유니콘! 이 망할 놈의 유니콘!!!! 왜 자꾸만 유니콘은 알짱대서는 내 계획을 망치는 것이야!!!!”

듀란드는 피를 토해낼 것처럼 고함을 내질러댔다.

“이제 코앞이었다. 수십 년간 준비해 온 내 원대한 계획을 완수할 순간이 코앞이었던 말이다! 한데… 왜 네놈이 또 끼어드는 것이야!!!! 대체 왜!!!!”

격분한 그의 심정이 메아리치며 대전을 쩌렁쩌렁 울려 댔다.

듣던 이든의 얼굴이 더욱 차갑게 굳었다.

“각오했어야지.”

“…….”

“레스타드 길드장님을 죽였던 순간, 네놈의 계획이 틀어지는 것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그리고… 네놈의 죽음 역시도…!”

이든이 더없이 진한 살기를 피우며 피로 흥건히 적셔진 흑색 검을 쥔 채로 듀란드를 향해 한 발짝 걸음을 떼려던 그 순간이었다.

“이든 길드장.”

들려온 칼스테인의 음성에 이든의 걸음이 멈추어졌다.

“……?”

“듀란드 공작과의 결착. 내가 마무리해도 되겠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