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칼스테인이 부탁하는 어조로 물었지만, 이든은 영 달갑지 않단 반응이었다.
“죄송하지만, 개인적인 원한이 있어 그러긴 어렵겠습니다.”
그가 재차 듀란드를 향해 한 발짝 더 내딛던 그때.
“그는 내 장인이요. 한때나마 가족의 연을 맺었던 자로서 내가 마무리 짓고 싶소.”
“…….”
“…부탁하오.”
침중하게 가라앉은 음성이 재차 내딛던 이든의 걸음을 붙잡았다.
들려온 칼스테인의 음성엔 수많은 감정이 교차하며 뒤엉켜 있었다.
저 흉수에게 레스타드 길드장을 보낼 수밖에 없었던 이든의 분노 역시 걷잡을 수 없이 컸지만, 칼스테인만큼 심경이 복잡하진 않을 것이다.
한참 고민하던 이든이 고갤 주억거렸다.
“좋습니다.”
“고맙소.”
“단.”
“……?”
“그냥 죽여서는 안 됩니다. 공작의 배후에 다른 누군가가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 배후의 자백을 받아 내야 합니다.”
“…배후가 있단 말이오?”
“예상일뿐이지만,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이, 이이…!! 닥쳐라, 이놈들……!!!”
자신을 두고 마무리니 어쩌니 대화를 주고받는 둘의 모습에 머리끝까지 분노가 치솟은 듀란드가 악을 썼다.
그리고 그의 감정을 대변하듯 그가 쥔 검에 일순 새파란 오러가 짙게 피어났다.
소드 익스퍼트의 경지.
지금은 정치가로서 모습에 더 가깝다 한들, 그 역시 칠 인의 기사 중 한 명. 젊은 시절엔 이름 꽤 날렸던 기사로 그 반열엔 거저 올라간 것이 아니다.
예전만큼은 아니더라도 쉬이 볼 실력은 아니란 것이다.
하나.
그 앞에 마주 선 칼스테인의 검에선 그보다 더 진하고, 크고, 형체가 뚜렷한 오러 블레이드가 구현되고 있었다.
제아무리 듀란드의 실력이 얕볼 수 없다 한들 칼스테인의 비할 바는 못되었다.
오러 블레이드를 피워 낸 칼스테인이 입을 뗐다.
“전력을 다해 덤비시오. 지금부터 당신을 장인이 아닌, 역적으로 대할 터이니.”
“역적…?”
듀란드의 눈에 핏발이 더욱 서며 붉게 충혈됐다.
“네놈이 무얼 안다고 날 역적이라 부르느냐!!!!!!!”
재차 고함을 내지른 듀란드가 바닥을 콱 밟고는 몸을 날려 칼스테인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칼스테인 검술에 원류인 듀란드 공작의 일격필살.
캉!!!!!
하지만.
듀란드가 쥔 검의 검신이 칼스테인의 오러 블레이드에 닿기 무섭게 반으로 갈라지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오랫동안 수련에 손을 놓은 그의 녹슨 실력은 칼스테인이란 거대한 벽을 결코 뛰어넘을 수 없던 것이다.
부러진 검신.
그리고.
동시에 오기만 남던 반란 역시 처참히 부러졌다.
모든 것이 끝났다 여긴 걸까.
털썩.
듀란드가 결국엔 주저앉았다.
“…결국, 이대로 끝났군.”
이제는 허탈함만 남은 그의 꿈.
칼스테인이 오러 블레이드를 거두곤 입을 뗐다.
“다 끝났소. 그대를 따르던 영주들도, 그리고 오랫동안 준비해 온 반란군 역시 전부 사라졌소. 이젠 죄를 인정하고 순순히 추포되시오.”
“아니. 그럴 순 없지.”
“……?”
“이대로 잡혀 능욕을 당할 바엔 차라리!”
그때, 듀란드가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가 그것을 입 안에 털어 넣고는 바로 깨물었다.
“죽음을 택하겠다…!!!!”
“뭣이!”
듀란드가 입 안에 털어 넣은 것.
다름 아닌 만약을 대비해 미리 준비해 둔 독약이었다.
일곱 걸음 떼기도 전에 급사한다는 맹독이 듀란드의 목을 타고 넘어가려던 그 순간.
“어딜!!!!!”
휘이이이익!!!!
어느새 쏜살같이 달려온 이든이 듀란드의 가슴팍 곳곳의 혈을 찔렀다.
슉슉슉.
이든의 손이 번개와 같이 쏘아지고, 혈에 침투된 마기가 듀란드의 목으로 넘어가려던 독을 역류시켰다.
“꾸웨에에엑!!!”
곧바로 듀란드는 검은 토사물을 뱉어 냈다.
더없이 빠른 조치였으나, 맹독답게 이미 어느 정도 몸에 독이 스며든 상태여서 그런지 그의 안색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칼스테인이 달려와 황급히 물었다.
“어찌 되었소…!”
이든이 그의 맥을 한번 짚더니 고갤 끄덕였다.
“생명에 지장은 없습니다.”
“다행이군.”
누가 듣는다면 목숨을 살리기 위한 성직자들의 고군분투로 들리겠지만, 실상은 전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의 죽음은 이미 예정된 수순.
다만 혹여 모를 듀란드의 배후를 알아내기 위한 것에 불과했다.
이든이 오들오들 떠는 듀란드를 밟아 넘어뜨리곤 비릿하게 웃었다.
“듀란드, 네놈의 입에서 차라리 죽여 달란 소리가 나오게 해 주지. 기대해도 좋을 거야.”
듣던 듀란드의 눈이 지진이 난 것처럼 더없이 크게 흔들렸다.
그렇게.
듀란드와 영주들의 반란은 한낱 꿈으로 마무리되었다.
한바탕 혈풍이 몰아쳤던 새벽이 지나고, 그날 아침.
소문은 해가 중천에 걸리기도 전에 급속히 퍼졌고, 수도는 발칵 뒤집혔다.
반란군들은 추포되어 모두 감옥으로 이송되었다.
물론 극히 일부만 잡아들였을 뿐.
대부분은 이미 수도 밖을 벗어나 도망간 상태였으나, 잡아들인 이들의 자백을 받다 보면 필시 꼬리가 밟히는 것은 금방이었다.
하나.
반란을 진압했다 하여 안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수도와 칼스테인 영지를 제외한 남은 영지가 하룻밤 새 주인을 잃은 무정부 상태가 되어 버렸다.
즉슨 이는 제국을 지키던 여섯 개 영지의 전력이 비게 되었단 말과도 같았다.
급보로 전서구를 보냈으니, 곧 그곳에서도 현 상황의 심각성을 알게 되는 것은 시간 문제일 터.
다시 안정화에 접어들려면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은 자명하게 되었다.
아슬란 제국의 큰 숙제가 남은 것이다.
***
“…….”
“…….”
유니콘 길드장의 집무실.
이든은 지금 합죽이가 되었다.
보일 리 없지만, 이든 그도 눈치라는 것이 영 없는 사람은 아니다.
그렇게 한참을 어색하게 굴던 이든이 조심히 입을 뗐다.
“저기, 카르엘 씨 일단 차부터 드시….”
“참 나.”
“…….”
이든이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 앞에 카르엘이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좀 더 찬바람이 불고 나서야, 카르엘이 재차 입을 뗐다.
“아니, 하….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어서. 새벽에 잠깐 나갔다 오신 게 바람을 쐬러 가신 게 아니라. 반란을 막으러 가셨다고요?”
“…….”
“그것도 수천 명의 반란군을 막으러?”
“…저 혼자 막은 건 아니….”
“그리고! 이미 예상했던 일이라고요?”
“…….”
“아니, 어떻게 우리 길드원들하고 한마디 상의도 없이! 네!?”
“…죄송합.”
“이게 죄송하다고 하면 끝날 일입니까!”
“…….”
평소 당당하던 길드장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이든이 고갤 숙였다.
그 모습에 카르엘이 팔짱을 풀곤 이든의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
또 다른 커다란 손이 덮쳐 와 이든의 손을 꼭 잡았….
“넌 치워.”
“눼.”
발리스타가 입을 삐죽 내밀곤 손을 치웠다.
이 상황에도 저리 장난질이 하고 싶을까.
카르엘이 치켜뜬 눈으로 이든과 발리스타를 바라보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무튼, 저흴 걱정해서 그런 것은 알지만, 다음엔 절대 혼자 나서시거나 그러지 마세요. 유니콘 길드가 다시 도약한 지 얼마나 됐다고. 길드장님마저 무슨 변고라도 생기면 어쩌시려고요…!”
조금 유난인 것도 있었지만, 카르엘의 걱정도 일리가 있는 것이었다.
카르엘과 발리스타.
그리고 그 뒤로 늘어선 길드원 모두를 향해 이든이 고갤 숙였다.
“이번 일로 길드원분들께 심려를 끼쳐 드려 너무 죄송합니다.”
주변에서 괜찮다.
우릴 걱정해서 그런 것 다 안다.
다음엔 그러지 말아 달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이든의 말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가 조금 망설이는 듯싶더니 재차 말을 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
사람들의 이목이 재차 이든을 향했다.
이든의 얼굴이 어느 때보다 무거워 보였다.
하지만.
한번 정한 결심에 망설임은 없어야 하는 법.
길드원들이 보는 앞에서 그가 더없이 환하게 웃으며 입을 뗐다.
“유니콘 길드장의 자릴 위임할까 합니다.”
“…네?”
“…뭐?”
“무슨…!!!”
발리스타가 이든이 앉은 방향으로 상체를 쭉 내밀었다.
그의 얼굴에 황당한 기색이 역력했다.
발리스타가 침까지 튀기며 큰 소리로 떠들어 댔다.
“아, 아니. 이든 형. 그게 무슨 말이요. 길드장 위임이라니…!?!?”
카르엘도 마찬가지로 상체를 내밀곤 끼어들었다.
“맞아요!!!! 길드장 위임이라니요. 유니콘 길드가 이제 막 잘되고 있는데!!!!”
날벼락 같은 그의 말에 하나같이들 유난을 떨며 이든에게 한마디씩 던져 댔다.
하지만 그 몰아치는 질문 세례 속에서도 이든의 얼굴은 평온하기만 했다.
그가 다시 입을 뗐다.
“유니콘의 길드장이 되었던 그 날부터 줄곧 생각해 오던 겁니다.”
“…….”
“레스타드 길드장님께서 이루신 이 유니콘을 어떻게든 되살리고 싶었거든요. 그리고…. 이제는 제 몫을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제 시작인데.”
“압니다. 때문에 더더욱 위임을 해야 하고요. 저보단 레스타드 길드장님과 오랜 세월 함께해 온 지부장님들이 이곳 유니콘을 더욱 잘 이끄실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
그럴듯한 이유였지만, 사실 이는 부차적인 것이었다.
이든이 재차 입을 뗐다.
“그리고 무엇보다…. 연로하신 부모님과 함께 남은 시간을 보내고 싶습니다.”
그가 길드장 자리를 위임하는 이유론 이것이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였다.
이든이 이렇게까지 말하니, 길드원들 역시 더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카르엘 씨.”
“…네.”
카르엘은 벌써부터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각 영지의 지부장님들을 호출해 주십시오. 중요한 사항이니만큼 최대한 빨리 와 달라 부탁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때, 이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길드원들을 향해 고갤 푹 숙였다.
마주한 길드원들 역시 저도 모르게 고갤 숙이곤 자연스레 이어진 정적 속.
그가 입을 뗐다.
“그간 부족한 저를 믿고 따라와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이 많은 사람을 앞에 두고도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다만.
사방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인사를 대신하고 있었다.
“여러분들과 함께 일할 수 있어서 정말 즐거웠습니다.”
이든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그답지 않던 더없이 따듯하고 밝은 미소였다.
***
끼이이이이.
황실 내 최하층 지하 감옥.
두꺼운 철문이 기이한 소릴 내며 열리고 누군가 들어왔다.
일순 미비한 빛이 열린 철문 틈을 통해 들어왔지만, 빛 한점 없던 이곳을 비추기엔 턱없이 모자란 양이었다.
당연히 들어온 이의 얼굴조차 보이지 않으니, 누가 들어왔는지 식별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건만….
“칼스테인, 자네인가….”
곧이어 들려온 매가리 없는 목소린 누가 들어왔는지, 다 알고 예상하는 듯했다.
그때.
화르륵.
일순 푸른 안광이 지하 감옥 안을 환하게 비추었다.
그러자 무저갱과도 같았던 감옥 내부가 어느 때보다 환하게 비추었다.
안광을 흩뿌리는 이.
칼스테인 백작의 타오르는 시선이 듀란드를 향했다.
한때나마 자신이 존경했던 장인.
하나.
지금은 팔다리가 쇠사슬에 묶인 채, 고문받은 흔적이 역력한 범죄인의 모습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게 듀란드를 한참이나 바라보던 칼스테인이 입을 뗐다.
“듀란드.”
“…….”
장인에 대한 예우 따윈 없다.
단지 이름만 불렀을 뿐인데.
음성에 서린 한기가 여실히 느껴졌다.
“생각은 바뀌었나?”
“…훗.”
듀란드의 입에서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없는 배후를 만들어 내서 자백을 하란 말인가. 이제 그만 날 놓아주게….”
마치 칼스테인 백작의 감정을 자극하려는 듯 듀란드의 힘없는 음성이 들려왔지만, 소용없었다.
칼스테인은 반란이 실패했을 당시, 듀란드가 독약을 집어삼키려 했다는 것에서부터 그의 뒤에 배후가 있음을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하나.
듀란드의 입은 무거웠다.
그 숱한 고문을 받고도 입 뻥끗하지 않았으니까.
이대로 가면 자백을 받기도 전에 듀란드의 기력이 쇠하여 죽을 지경이었다.
칼스테인의 안광이 일순 훅 꺼지며 사라졌다.
그리고 열린 철문 틈 사이로 나가는 그의 뒷모습만 어렴풋이 보였다.
나가기 전, 칼스테인이 고개만 살짝 돌려 입을 뗐다.
“당신을 직접 고문하여 자백을 받아 내겠다는 이가 있소. 아마…. 지금까지와는 다른 만만치 않은 고문이 될 거요.”
“…어떤 고문을 주더라도 내 대답은 같다.”
“생각할 시간을 주겠소. 그대가 편히 죽을 수 있는 기회는 지금뿐이오. 명심하시오.”
쿠웅.
칼스테인 백작이 나가고 철문이 닫혔다.
곧 사방에 어둠이 드리우며 정적이 안을 휩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