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크, 크흠.”
아슬란 황제가 멋쩍은 얼굴을 했다.
조르르르….
그가 탁자에 놓인 잔 두 개에 따듯한 차를 따랐다.
모락모락 나는 김에 차향이 뒤섞여 올라오는데, 품질 좋은 찻잎을 우렸는지 그 향이 일품이었다.
“자자, 어서 들게. 황실에서 중하게 관리하는 잎으로 우린 차일세. 자네 입에도 맞을 거야.”
아슬란 황제가 어서 들라는 식으로 찻잔을 슥 밀었다.
이든이 고갤 끄덕이곤 열기가 느껴지는 잔으로 손을 가져다 댔다.
“향이 좋군요.”
“그렇지?”
이든의 대답에 아슬란이 미소 지으며 찻잔을 입으로 가져다 대던 그때.
“그래서.”
“…으, 응?”
문득 재차 들려온 이든의 목소리에 아슬란이 제 발 저린 것처럼 멈칫했다.
“명예 작위 말입니다.”
꿀꺽.
아슬란 황제가 마른침을 삼켰다.
‘역시 그 말부터 꺼낼 줄 알았지….’
그가 모른 척 시치미 떼며 입을 열었다.
“음? 아아… 그거 말인가? 그냥 내 작은 성의 표시일세. 너무 마음 쓰지 않아도 돼. 나라를 위해 헌신한 이들에게 주는 일종의 명예직 같은 그런 거니까. 대단할 거 하나 없는 걸세. 하하… 딱히 귀찮은 일같은 건 없을 테니 안심해도 되네.”
달리 묻지도 않았는데 미리 준비한 것처럼 술술 불어 댄다.
이든이 고갤 주억거렸다,
“그렇군요.”
“그렇지!”
“…뭐, 폐하의 말씀을 다 믿는 건 아닙니다. 분명 귀찮은 일 한두 가지는 시키시겠죠.”
“끄응….”
허를 찔렀는지 아슬란이 침음성을 흘리다 이내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였다.
조금 전 이든의 말 때문이었다. 시키더라도 ‘일 한두 가지’ 이상은 하지 않겠다는 속뜻을 내비쳤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 현재 이든은 칼스테인 백작만큼이나 제국의 큰 전력이 될 수 있는 존재였다.
다름 아닌 그 역시 ‘소드 마스터’라는 초인이 아닌가?
제국 역사상 두 명의 소드 마스터를 보유한 것은 전무후무했다.
게다가 그냥 소드 마스터인가.
칼스테인 백작이 현재에 이르러 이룩해 낸 그 경지를 약관도 안 된 젊은 나이에 도달했다.
훗날엔 얼마나 더 강해질지 상상이 가지 않을 인재 중의 인재였다.
당연히 욕심이 날 수밖에 없었다.
하나, 완고하다 싶을 만큼 황실 일에 개입하기를 원치 않아 하니 예상했던 일이긴 했지만, 못내 아쉬운 것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이만하면 큰 성과야.’
하지만 아슬란은 크게 실망하진 않았다. 어찌 됐든 간에 한두 번 정도는 그에게 뭔가를 부탁할 수 있다는 것 아닌가.
이는 필시 자신의 사후에 어린 태자에게 큰 힘이 되어 줄 것이 분명했다.
아슬란이 웃으며 재차 입을 떼려던 그때.
“…아, 그리고.”
“아 맞다.”
불현듯 이든이 말문을 열었다.
황제의 입이 열리다 말고 재차 절로 다물어졌다.
“응?”
“그… 보상으로 주신다는 그 돈 말입니다.”
“아아… 그거?”
이 말이 왜 안 나오나 했다.
이미 이든의 관해선 훤히 꿰뚫고 있던 그였다.
“정확히 얼마나 주시는 건가요?”
“…….”
이리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볼 줄이야.
아슬란의 표정이 찰나 굳다가 허허 웃으며 입을 뗐다.
“그것은 왜? 요즘 돈이 궁한가?”
“…네. 좀?”
“…그, 그래?”
그냥 해 본 말이었는데, 진짜 궁했을 줄이야. 하지만 선뜻 이해가 가질 않는지 아슬란이 말을 이었다.
“그래도 다른 곳도 아닌 유니콘의 길드장인데, 돈 걱정은 사실 없지 않나?”
“관뒀는데요.”
“아아… 관둬….”
아슬란이 화들짝 놀라며 되물었다.
“뭐!? 관둬!?”
이든의 유니콘 길드장이란 직책은 언젠가는 쓸데가 있을 크나큰 패였다.
그가 이리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네.”
“대체 왜?”
“연로하신 부모님이 있습니다. 그간 바쁘게 지내 온 탓에 소홀했던 것 같아 이번 참에 아들 노릇 좀 제대로 하고 싶어서요.”
“하긴. 그런 이유라면 나 역시 이해는 가네….”
말끝을 흐리던 아슬란 황제가 웃으며 재차 말을 이었다.
“내 자네 가족들이 앞으로 생활하는 데 문제없이 챙겨 주도록 하지. 물론 공짜는 아니고.”
“한두 번 부려먹는 거론 부족하시단 말씀이군요.”
“훗. 그게 그렇게 되나?”
이만하면 각자 원하는 결과를 끌어낸 것이다.
황제와 이든 모두 만족스런 얼굴로 앞에 놓인 찻잔을 들던 그때였다.
일순 이든이 눈살을 찌푸렸다.
“음?”
“또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겐가?”
“그건 아니고….”
“……?”
“밖에 뭔가 문제가 생긴 모양입니다. 소란이….”
“음? 밖에? 난 아무것도 들리진 않네만….”
그는 듣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다.
이는 이곳에서 멀리 떨어진 곳.
온전히 이든만 들을 수 있는 그의 천라지망 내에서 일어난 소란이었기 때문이다.
아슬란이 내내 의아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사이, 가만히 듣던 이든이 한참 뒤에야 입을 뗐다.
“…아무래도 폐하께서 나서야 진정될 듯싶습니다.”
“대체 무슨 일이길래….”
“칼스테인 백작께서 상당히 곤욕을 치르고 계신 듯합니다.”
“칼스테인 백작이?”
“들리는 대화가… 아무래도 백작님의 부인 되시는 분께서 오신 듯합니다.”
“리안나가?”
평소 리안나의 성정에 대해선 아슬란 그 역시 아는 바가 있었다.
황제인 자신 앞에서까지 그 악명만큼이나 경우 없는 짓을 한 적은 없지만, 들리는 소문까진 어찌할 수 없었다.
대충 어떤 일인지 짐작이 가는 걸까. 아슬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밑에서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 만하군. 내려가 봐야겠네.”
“폐하께서 직접 말입니까?”
“나와 태자도 구해 줬는데 이것 하나 못 해 줄까. 아무래도 칼스테인의 평화는 내가 지켜 줘야겠군. 이든, 자네가 날 좀 도와주세.”
“그 한두 번에 포함되는 겁니까?”
“아니.”
“…….”
이든이 입맛을 다셨다.
***
주름진 눈가, 허허실실한 얼굴까지. 자칫 인자하게만 보일 수 있는 얼굴이지만, 리안나가 마주한 그의 눈빛은 그녀가 알던 황제의 그것과는 전혀 달랐다.
반란이란 위험을 걷어낸 제왕의 위엄이 거기 있었다.
아슬란이 손을 휘저었다.
일순 리안나를 포위했던 병사들이 일제히 물러났다.
느릿하게 다가오던 아슬란이 먼저 입을 뗐다.
“그래, 자네 이름이 리안나였지. 어린 시절 잠깐 본 뒤로 오래간만이구나. 해서 이곳은 어쩐 일인고?”
아슬란의 물음에 리안나가 숙였던 고갤 들었다.
찰나 당황했던 기색은 온데간데없이 그녀가 당당한 표정으로 본론을 꺼냈다.
“제 아버지를 뵈러 왔습니다.”
“네 아비를?”
“예.”
아슬란이 수염을 쓸며 잠시 뜸을 들이곤 입을 뗐다.
“그건 조금 곤란하겠구나.”
“예?”
당연히 허락이 떨어질 줄 알았건만, 리안나가 퍽 당황한 얼굴을 했다.
“네 아비는 현재 수감 중이다.”
“…….”
“이유는 알고 있겠지?”
“…압니다.”
“알고 있는데도 네 아비를 보러 왔다고?”
“폐하, 송구하지만 아뢸 말씀이….”
짐짓 놀란 척하며 묻는 그의 말투에 리안나가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며 입을 뗐던 그때, 아슬란을 손을 들어 그녀의 말을 막았다.
일순 리안나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폐하…?”
“네년이 아직 상황파악을 하지 못하였구나.”
‘네년…!?’
생각지도 못한 말에 리안나가 따지려 들던 그때.
“폐하!!! 어찌 그런 말씀을….”
“닥쳐라!!!!!!”
일순 아슬란의 호통이 응접실의 쩌렁쩌렁 울리며 메아리쳤다.
도무지 노쇠한 몸에서 나온 것이라곤 믿기지 않을 엄청난 크기의 목소리였다.
감히 황제 앞에서 쏘아붙이려던 리안나의 눈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요동을 쳤다.
왜 아니겠는가.
황제 다음가는 권력의 아버지 밑에서 옥이야 금이야 자라온 그녀였다.
이따금 그의 남편인 칼스테인이 그녀에게 버럭 화를 내는 경우는 있었어도, 대놓고 면전에 대고 이런 취급을 받아 온 적은 결단코 없었다.
벼락처럼 내뱉었던 자신의 호통에 이목이 쏠린 가운데, 아슬란이 재차 입을 뗐다.
“내 반란군을 막아 낸 칼스테인 백작의 공을 생각하여 네년을 살려 두려 했거늘. 감히 여기가 어느 안전이라고 행패를 부리느냐!”
“…폐, 폐하…!”
“네년도 네 아비랑 같이 목이라도 잘리고 싶은 게냐?”
“……!”
리안나의 안색이 절로 새하얗게 질렸다.
“폐, 폐하…! 목, 목이 잘리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영주들과 군을 일으켜 나와 태자를 죽이고 황위에 오르려 했던 놈이다. 설마하니 내가 네년 아비를 살려 둘 줄 알았더냐?”
“폐, 폐하…!”
“아비를 보고 싶다? 그게 정 소원이라면 내 네년도 옥에 처넣어 주면 되겠구나?”
사태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리안나가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폐, 폐하…! 제가 어리석어서…!”
리안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아슬란의 시선이 뒤쪽에 선 한 사람을 향했다.
“황실 수비 대장, 이든 남작!”
“…예?”
듣던 이든도, 옆에 있던 칼스테인 백작 역시 덩달아 당황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더욱 가관이었던 것은 울면서 아슬란의 바짓가랑이를 붙잡던 리안나의 표정이었다.
힐끗 이든을 바라보던 그녀의 얼굴이 썩어 문드러지고 있었다.
맹인 이든.
어린 시절 칼라슈의 몸을 상하게 했던 아이를 그녀가 잊을 리가 없었다.
집중된 이목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이든과 아슬란을 번갈아 보던 그때.
아슬란이 재차 말을 이었다.
“여기 이 건방진 년을 듀란드가 있는 일급 범죄 시설에 가두게! 내 듀란드와 이년을 본보기로 삼아 반역죄가 얼마나 큰 죄인지 엄중히 벌을 내릴 것이야!!!”
“…….”
보통 황제가 명령을 내리면, 명을 받드는 이는 곧장 읍하며 이행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모습이라지만, 이든은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여전히 상황파악을 못 하는 표정이었다.
아슬란이 눈살을 찌푸리곤 재차 입을 뗐다.
“뭣 하는가. 어서 이 반역자의 혈육을 옥에 가두지 않고! ”
“아, 아아…. 예!”
돌아가는 상황이 상황인지라 이든 역시 저도 모르게 대답하고 말았다.
물론 이 역시 이든을 어떻게든 붙잡기 위한 아슬란 황제의 얄팍한 수에 불과했지만.
이든이 병사들을 향해 입을 뗐다.
“병사들은 죄인 리안나를 일급 수용시설에 가두도록.”
“아, 아아! 예!!!”
병사들마저 얼떨결에 이든의 명을 받곤 리안나를 포박하여 수용소로 끌고 가다시피 했다.
리안나가 울고 불며 소리쳐 댔다.
“폐하! 폐하!!!!!!!! 살려 주십시오. 폐하!!!! 폐하!!!!!!!!!!!!!!!!”
끌려가는 리안나를 바라보며 칼라슈와 제인은 시커멓게 죽은 얼굴을 하였다.
칼라슈가 소리가 나도록 무릎을 꿇었다.
“폐, 폐하!!!! 저희 어머니의 불충을 용서해 주십시오!!!”
제인도 곧바로 무릎을 꿇었다.
그녀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빌다시피 했다.
“폐하! 저희 어머니를 살려 주세요…!!!! 소녀를 보아서 부탁드려요. 폐하!!!!”
칼스테인 백작마저 퍼뜩 정신을 차리곤 자녀들을 따라 합세하려던 그때, 아슬란이 그의 팔을 붙잡았다.
칼스테인이 당황한 표정을 했다.
“폐, 폐하…?”
“다들 일어나거라.”
조금 전 노기 띤 음성과는 상반된 온화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칼라슈와 제인이 고갤 들어 어리둥절한 눈으로 아슬란을 바라보았다.
급기야 아슬란이 칼라슈와 제인까지 붙잡아 일으켰다.
“너희 어미 때문에 아비가 고생하는 거 같아. 내 한번 겁을 주는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까지 할 필요 없다.”
“아…!”
아이들의 표정이 그제야 밝아졌다. 아슬란이 말을 이었다.
“하나.”
“…….”
“너희 할애비가 저지른 잘못은 결코 덮을 수가 없는 것. 내 리안나는 절대 건드리지 않을 것인즉, 할애비가 저지른 죗값에 대한 처벌은 받아들이거라. 내 말 알겠느냐?”
“예. 폐하….”
“예. 폐하….”
칼라슈와 제인의 시선이 끌려가는 리안나를 향했다.
끌려가는 그녀의 모습이 그토록 처참할 수가 없었지만, 어머니의 목숨을 보전한 것만으로도 참으로 다행이었다.
***
“이것 놔라!!!! 이것 놔!!!!!”
아슬란이 안 보이기 무섭게 리안나는 병사들을 뿌리치려 애썼지만, 역부족이었다. 리안나가 고갤 뒤로 돌려 따라오는 이든을 향했다.
그녀의 눈이 표독스럽게 변하더니 이내 이든을 향해 쏘아붙였다.
“천한 것이…. 어쩌다 운이 좋아 작위를 얻었다고 오만방자해졌구나!”
“…….”
이든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냥 사람이 이렇게 한결같을 수가 있구나 하며 내심 감탄하던 중이었다.
리안나는 수용소에 끌려가는 내내 이든을 향해 쉬지 않고 쏘아붙였다.
“내 사람을 시켜 네놈을 병신 정도가 아니라 그냥 생매장을 했어야 했다…!!!!!! 네놈의 그 어미·아비도 함께 묻어 버렸어야 했어!!!!”
우뚝.
그때, 이든의 걸음이 덜컥 멈추었다.
병사들의 걸음도 덩달아 멈췄다.
이든의 얼굴에 차츰 그림자가 드리워지자 그 모습에 리안나가 소리 내어 웃었다.
“훗. 이제야 열이 오르나 보군. 내가 네놈 부모에게 욕이라도 보이니 참을 수 없는 모양이지!?”
씩.
듣던 이든이 불현듯 씩 웃었다.
‘그냥 넘어가려 했더니만, 이런 식으로 복수할 줄은 몰랐는데….’
그때, 이든이 불쑥 말을 꺼냈다.
“네년 아비를 보고 싶다 했나?”
“뭣이… 네년!?!?! 감히 네놈까지 나에게 년이라 하는 것이냐!!!!!”
“보여 주지. 네년의 아비 꼴을.”
이런 우연도 없다.
마침 이든이 멈춰 선 곳이 듀란드가 수감된 곳이었으니까.
눈치를 보던 병사 한 명이 황급히 그곳의 철문을 열었다.
끼이이이….
기이한 소리가 울리고.
굳게 닫혀 있던 철문 하나가 점차 열렸다.
그러자.
그곳에 처참히 망가진 듀란드의 모습이 보였다.
리안나의 안색이 대번에 까맣게 죽었다.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