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기습으로 인한 듀란드의 사망은 황궁을 발칵 뒤집었다.
이에 아슬란 황제는 반란 때만큼이나 더없이 분개했다.
듀란드의 배후를 밝혀내지 못했다는 탓도 있지만, 그가 자백하려 하기 무섭게 입을 막아 낸 대처를 보면 대체 얼마나 많은 배후의 세작들이 황궁 곳곳에 뿌릴 내리고 있었는지 감히 상상조차 되질 않았다.
분명 듀란드를 기습하여 죽음에 이르게 한 이는 빙산의 일각일 터.
아슬란 황제는 칼리스테인 백작을 시켜 황궁 내 인사들을 면밀히 조사하여 혹시 모를 남은 세작들을 찾아내라 지시했다.
반란군을 소탕한 지 불과 며칠 전이었다. 황궁에 또다시 피바람이 불려 하고 있었다.
***
황궁에 남은 문제와는 별개로 남작의 작위를 받은 이든에겐 예정대로 저택과 보상금이 지급되었다.
관료 대신과 그들의 가족들이 거주하는 밀집 지역에, 저택답게 으리으리하다는 말이 더 없이 어울리는 엄청난 크기의 저택이었다.
그래서일까. 칼스테인 지부 소속 길드원들의 호위를 받으며 수도에 도착한 브라운과 메리는 저택 안에 들어선 뒤로 쩍 벌린 입을 다물 생각을 못 했다.
“여, 여기가… 우리 집이라고?”
“허어….”
살아 있는 동안에 이런 저택에 살게 될 줄 상상이나 했을까.
물론 전에 살던 칼스테인의 영지의 집도 절대 작은 편은 아니었지만, 지금 그들이 보고 있는 이 저택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조족지혈이었다.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비단 메리와 브라운뿐만은 아니었다.
이든을 대신해 그들의 자식 노릇을 톡톡히 해 주던 릴리도 그렇고, 그의 가족들을 여기까지 모셔와 준 유니콘 길드원의 반응 역시 매한가지였다.
“와… 세상에! 귀족들 사는 집이 으리으리하단 얘긴 귀가 닳도록 듣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톰슨이 이삿짐을 옮기다 말고 저택 구경에 넋을 놓았고, 로즈와 앙휄 그리고 리아 역시 저택을 꾸민 아름다운 가구들의 시선을 빼앗겨 있던 상태였다.
“언니!! 이, 이 화장대는 분명 그 장인분의 작품 맞죠?”
“맞아! 가구에 관해서라면 제국 제일이라 불리는 시몬스 장인의 작품이 분명해. 특히 이 꽃 문양은 그의 가문을 상징하는 거지. 절대 그가 아닌 이상 작품에 이 문양을 새길 순 없다고.”
“과연…!”
극도의 흥분 상태를 보이며 눈에 불을 켜고 집 구경을 해 대는 길드원들의 모습에 케인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분명 이삿짐 옮기는 데 힘을 보태겠다고 따라온 이들이 민폐 아닌 민폐를 끼치고 있으니 이든을 볼 낯이 없던 것이다.
결국, 보다못한 케인이 다 들리도록 헛기침을 했다.
“크, 크흠…!”
“……?”
길드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케인을 향했다.
‘왜 그러세요?’라고 말하는 길드원들의 표정에 케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 구경들 다 했으면 어서 짐들 옮기지. 일손 돕겠다고 왔으면서 뭣들 하는 거야?”
케인의 타박에 길드원들이 입을 삐죽 내밀곤 마저 짐을 옮기던 그때, 로즈가 조심히 입을 뗐다.
“…근데 이삿짐 옮길 필요가 있을까요?”
“음?”
“가구도 이미 다 비치되어 있겠다. 이전에 쓰던 게 필요하실까요?”
“음. 하긴.”
로즈의 말대로 이미 저택 안에는 다른 살림살이가 필요 없을 만큼 웬만한 가구는 다 배치되어 있었다.
케인 역시 그 점에 공감하며 가져온 가구를 어찌해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아마 필요할 겁니다.”
길드원들을 도와 일손을 거들던 이든이 둘의 대화에 불쑥 끼어들었다. 그가 재차 말을 이었다.
“제가 알기론 가져온 가구들은 부모님께서 신혼 때 장만하신 것들이라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정이 많이 들었던 탓에 무릅쓰고 가져온 것들일 겁니다.”
이든이 길드원들을 향해 정중히 고갤 숙였다.
“죄송합니다. 챙기지 않아도 되는 것들인데 괜히 여러분들만 고생시키게 되었습니다.
듣던 케인이 반색하며 고갤 저었다.
“그런 말 말게. 자네의 부모님께서 어떤 마음에 그러셨는지 충분히 이해하니까. 확실히 그런 것들은 버리시기 아까우셨을 테지.”
“그리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뭘.”
웃으며 고갤 끄덕이던 케인의 시선이 재차 저택 내부를 훑었다.
봐도 봐도 감탄스러운지 케인 역시 금세 넋을 놓아 버렸다.
“그나저나 정말 잘됐어.”
“……?”
“게럴드 지부장님께 들었네. 줄곧 부모님을 모시고 살고 싶었다고 말이야. 수도에 집을 구하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닌데, 그냥 집도 아니고 저택을 구하게 됐으니 참으로 잘 됐지. 부모님께서 아들을 참 잘 두셨어.”
이든의 입가가 살짝 올라갔다.
“그러니까요. 생각지도 못했는데 일이 잘 풀려서 다행입니다.”
“저기….”
그때, 내내 옆에서 대화를 듣던 로즈가 전부터 궁금했다는 듯 물었다.
“그런데 있잖아….”
“음?”
“이든은 유니콘 길드도 관두고, 앞으로 어떻게 지낼 생각이야?”
“글쎄요. 부모님을 모시면서 간간이 무관 학교에 들러 교관들과 아이들의 훈련에 도움을 줄까 합니다. 그리고 그간 소홀했던 제 개인 수련에 좀 더 박차를 가할까 합니다.”
“그렇구나…!”
아마 로즈는 이든과 호송을 함께 하던 때가 그리워 물었을 것이다.
그녀는 못내 아쉬운 표정을 짓다가 이내 털어 버리듯 활짝 웃으며 입을 뗐다.
“듣기론 폐하께 작위를 받았다면서?”
“예. 남작 작위를 받았습니다.”
“남작…!?”
“하긴 그 정도는 되니 이만한 저택을 덜컥 내주신 거겠지.”
로즈가 놀라 되묻고, 뒤이어 케인이 고갤 주억거리며 입을 뗐다.
일순 로즈가 퍽 당황한 얼굴로 진땀을 뺐다.
“자, 잠깐. 그러면 이든 남작님인데… 이, 이렇게 평소대로 반말해도… 되는 건…가요?”
이든이 피식 웃었다.
“제발 평소대로 대해 주십시오. 게다가 명예 작위라서 말만 남작이지 사실 하는 건 개뿔도 없어요.”
“그, 그래!? 그럼 다행이고. 하하!!!”
로즈가 어색하게 웃던 그때.
“그런데 말이야.”
자뭇 심각한 표정을 짓던 케인이 혹여 주변에 들릴까 조용히 말을 꺼냈다.
시답지 않은 얘기를 나눌 것이 아님을 알아챈 로즈가 눈치껏 빠져 주었다.
케인이 고맙다는 듯이 고갤 끄덕이곤 재차 말을 이었다.
“황실에 피바람이 불 예정이라는 소문이 있네. 사실인가?”
“예. 맞습니다.”
“무슨 일인지 말해 줄 수 있겠나?”
“세작 때문입니다.”
“세작?”
“듀란드의 배후가 있을 것이라 짐작한 폐하께서 칼스테인 백작을 시켜 그를 심문하던 중에 일급 범죄자 수용소를 관리하던 병사 중 하나가 듀란드가 입을 열려던 사이에 일시에 기습하여 입막음을 하곤 스스로 자결하였습니다. 자신들의 존재를 들킬까 봐 사방에 눈과 귀를 깔아 두었다는 얘긴데…. 분명 그 병사가 전부가 아닐 것이란 생각이겠죠. 저 역시 폐하의 생각과 같고요.”
“확실히…. 자네 말대로 내내 듀란드를 지켜봤단 얘긴데, 필시 세작이 한두 명은 아니겠지. 폐하께서 난감하게 됐군. 가뜩이나 영주들이 대거 죽어 제국의 전력을 하루빨리 보강해야 하는 상황인데, 곳곳에 숨어 둔 세작 때문에 일 처리가 까다롭게 되었어.”
“그것도 그거지만 진짜 문제는 따로 있습니다.”
“진짜 문제?”
“세작을 심어 둔 배후가 누군진 몰라도 저들에겐 지금이 절호의 기회일겁니다.”
“절호의 기회라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저들은 듀란드를 포섭하였습니다. 공작의 신분이었던 그를 유인하고 부렸을 정도면 어쭙잖은 단체가 아니라 필시 제국의 전복을 노리는 주변국의 소행이란 뜻인데…. 지금처럼 제국의 전력이 약해지고, 쉽사리 보강조차 할 수 없는 지금이야말로 저들에게 더없이 좋은 기회 아니겠습니까?”
듣던 케인의 얼굴에 점차 경악이 어리며 심각하게 굳었다.
“그, 그러니까… 자네 말은 설마… 곧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 그 말인가?”
이든 역시 못지않게 굳은 얼굴로 고갤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허어….”
사실 케인 역시 보통 일은 아닐 것이라 짐작은 했었다.
이는 비단 케인뿐만 아니라 각 영지의 지부장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데 전쟁이라니….
“아무래도 이 사실을 게럴드 길드장님께도 알려 드려야겠군.”
“네. 부탁드립니다.”
“그나저나 길드장님께서 제대로 일복이 나셨어. 엉겁결에 길드장이 되신 지 얼마나 됐다고 전란 대비라니.”
전쟁은 제국에게 있어 더 없는 위기였지만, 상업 전선 속에 뛰어든 굵직한 길드에겐 재차 크기를 불리고 도약할 수 있는 더 없는 기회이기도 했다.
그때, 이든이 머릴 긁적이며 미안한 얼굴을 했다.
그가 쭈볏거리듯 입을 뗐다.
“시국이 이런데 그만두겠단 저의 괜한 고집 탓에 여러분들께 짐만 안겨 드린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런 말 말게! 자넨 그간 최선을 다해서 유니콘을 위해 일해 주었어. 필시 하늘에 계시는 레스타드 길드장님께서도 자네의 업적에 상당히 뿌듯해하고 계실거야.”
“…그런가요?”
“그럼!”
케인이 이든의 등을 ‘팡’ 소리가 나도록 쳐 댔다.
“이 좋은 날에 내가 괜한 얘길 꺼냈구만. 자자, 어서 표정 풀라고. 유니콘의 뒷일은 이제 우리의 몫이야. 우리가 알아서 어련히 잘할까. 자네는 앞으로 자네의 길을 가면 그만이라고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
‘나의 길….’
듣던 이든의 입가가 살짝 올라갔다.
그가 줄곧 남들에게 강조하고 조언할 때마다 꺼내던 말을 케인이 그에게 그대로 돌려준 것이다.
이든이 웃으며 입을 뗐다.
“고맙습니다. 모두들….”
***
“주인님.”
오체투지를 한 벨스커드의 음성에 그의 앞에 나른한 얼굴로 앉아 있던 여인이 게슴츠레 눈을 떴다.
벨스커드가 재차 말을 이었다.
“자백하려던 듀란드 공작을 사살하였고, 이를 시행한 수족 역시 자결에 성공하였습니다.”
“알고 있다.”
당연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위대한 존재.
이 넓디넓은 대륙에 그녀의 시야가 닿지 않은 곳은 없었다.
벨스커드가 더욱 고갤 조아리며 입을 뗐다.
“그리고…. 아슬란이 저희가 심어둔 세작을 잡아내기 위해 대대적인 수색 작업에 착수하였다고 합니다.”
“그 역시 알고 있다. 머지않아 세작들이 줄줄이 잡혀 들어가겠지.”
“…….”
벨스커드의 고개가 살짝 들리곤 단상 위의 여인을 향했다.
“…모두 자결하라. 일러 둘까요?”
세작은 다시 심으면 그만이지만, 혹여 그들이 잡혀 자신들의 존재에 대해 까발리고 나면 그간 준비해 온 일을 그르칠 가능성이 컸다.
벨스커드가 주인의 명이 떨어지길 기다리고 한참 뒤. 그녀의 무거웠던 입이 천천히 열렸다.
“놔두어라.”
“…예!?”
전혀 예상치도 못한 대답이었던 걸까. 어찌나 당황했으면 평소 하지도 않던 실수까지 해 버렸다.
감히 저 위대한 존재 앞에서 되묻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는 무릅쓰고 되물었다.
“주, 주인님. 어찌하여 그들을 놔두라 명하신 것인지….”
“지금이야말로 더없는 적기다.”
답이 되어준 주인의 말에 벨스커드의 눈이 부릅 뜨였다.
그의 홍안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그 말씀은 설마….”
여인이 고갤 끄덕였다.
“이제 계획했던 일을 슬슬 실행에 옮길 때가 되었지.”
그녀의 이러한 결정을 얼마나 오랜 세월을 기다려 왔던가.
여인이 재차 입을 뗐다.
“벨스커드.”
주인의 부름에 벨스커드는 감읍한 얼굴을 하며 이 무저갱 같은 공간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외쳐 댔다.
“명령을.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주인님!!!”
“대륙 곳곳에 나의 수족들을 불러모으도록. 우리의 원대한 계획을 실행에 옮길 것인즉. 우선 주변국들부터 정리한다.”
“위대한 존재이자, 나의 주인이신 발레리안님의 명을 받드옵니다!!!”
벨스커드의 앞.
단상 위에 나른한 듯 앉아 있던 여인, 발레리안의 게슴츠레 뜬 눈에 귀화가 타올랐다.
주체하지 못하며 명멸을 반복해 대는 안광 속에 더없이 뜨겁고, 더없이 깊고, 더없이 서늘한. 끝을 알 수 없는 힘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