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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화. (134/250)

134화.

타고난 체격으로 태생부터 천생 무인이라 볼 수 있는 발리스타와 달리, 릴리는 무공을 익힌 몸이란 생각이 전혀 들지 않을 만큼 무(武)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물론 남자와 여자는 타고난 근력이 다를 수밖에 없고, 이 때문에 무공을 수련하는 데 있어 여성보단 남성이 유리한 것은 사실이지만, 성별을 떠나서 같은 여자끼리 비교해도 릴리의 신체는 훨씬 가녀린 편에 속했다.

그냥 적당히 키에 검을 쥘 힘이나 있을까 싶은 마른 몸. 발리스타가 본 릴리의 첫인상이 딱 그랬다.

하나.

발리스타는 몰랐다.

릴리의 저 가녀린 몸이 사실은 압축된 근육이란 것을.

그리고.

그녀가 이든에게 무공을 사사한 뒤로 하루도 게을러 본 적이 없다는 것을.

슈우우우우우욱!

땅을 박찬 릴리의 신형이 엿가락처럼 늘어나더니 어느새 발리스타의 뒤를 점했다.

그녀가 쥔 흑색 검이 재차 잔영을 일으키며 발리스타의 숨통을 노리며 쏘아졌다.

발리스타가 이를 악물었다.

“아 진짜! 적당히 좀 하라고!!!!”

발리스타가 악에 받친 듯 소릴 지르곤 재차 몸을 날려 바닥을 굴렀다.

휘이이이익.

두 번째 나려타곤.

뒤를 잡히기 무섭게 있는 힘을 다해 몸을 날려 피했건만, 어느새 그의 등엔 릴리가 휘둘렀던 검으로 인해 새겨진 흔적들로 가득했다.

팟!!!

타박.

바닥을 구르기 무섭게 땅을 짚고 일어나 릴리를 향해 검을 치켜세운 발리스타가 연신 거친 숨을 토해 냈다.

“후욱. 후욱…!”

주룩.

흐르는 땀에 축축해진 건지. 아니면 조금 전 당했던 상처에서 흐르는 피로 등 뒤가 푹 젖은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로 릴리를 마주한 채 선 발리스타는 조금 전 여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긴장한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그래서일까.

꾸우욱….

검을 쥔 발리스타의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추욱 검을 늘어뜨린 채 편안해 보이는 릴리와는 너무도 상반된 모습이었다.

릴리가 눈살을 찌푸렸다.

“몸이 그렇게 굳어서 검을 제대로 휘두를 수나 있겠어?”

맞는 말이었다.

검술의 기본은 강한 하체에서 나오는 반탄력과 이완된 상체에서 나오는 검 끝의 유려함이다.

하체는 무겁게.

검을 쥔 상체 쪽은 나른한 듯 더없이 가볍게.

스승인 이든이 줄곧 강조하던 그것이었다. 그리고 릴리는 그것을 곧이곧대로 잘 실천하는 중이었고.

하지만 발리스타는 하체와 상체. 심지어 검을 쥔 손까지 긴장으로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릴리의 시선에서 현재 발리스타의 상태는 제대로 된 검술이 나올 수가 없는 모습이었다.

뜨끔한 발리스타가 시치미 떼듯 말했다.

“아, 아직 몸이 덜 풀려서 그래!”

“그래?”

“그래!”

“그럼 그렇게 알고 다시 간다?”

“…어?”

자, 잠깐…!

이란 말이 입 밖으로 채 꺼내지기도 전.

쭈욱 늘어난 릴리의 신형이 단숨에 발리스타의 코앞까지 당도했다.

식겁한 발리스타가 저도 모르게 쥔 대검을 휘둘러 댔다.

후우웅!!! 후우우우웅!!!!

긴장한 와중에도 타고난 힘은 어쩔 수 없는지 마구 휘두르는 그 순간에도 느껴지는 풍압은 필시 예사의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리 강한 힘이라도 맞추지 못하면 무용지물.

발리스타의 마구잡이식 공격을 가볍게 피한 릴리가 쥔 검을 재차 흔들었다.

스으으.

다시금 그녀의 손에서 펼쳐진 흑색 검의 잔영들.

그리고 그 검에서 피어나는 음마심공의 마기가 잔영을 따라 움직이며 작은 파장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 파장은.

점차 하나의 형태로 표현됐다.

오래전.

‘검’ 그 자체로만 본다면 무진과 동수라 해도 부족함 없던 신교의 장로이자, 검제라 불렸던 한 여인.

옥설화가 그랬던 것처럼.

한 송이의 꽃을 피워낸 릴리의 위화마검이 발리스타의 눈앞에서 개화를 일으켰다.

화아아아아.

릴리가 피워 낸 검은 꽃을 마주한 발리스타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녀가 일으켰던 사방을 채우던 검의 잔영이 흩날리는 꽃잎으로 화하며 발리스타를 향해 휘몰아치듯 덮쳐 오고 있던 것이다.

검은 꽃이라.

넋을 놓을 듯 아름다워 보이면서도 동시에 섬뜩한 느낌을 주는 것은 왜일까.

이유는 간단했다.

그 꽃잎에서 느껴지는 살기가 필시 자신의 목숨을 노리며 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줄곧 나려타곤까지 불사하며 몸을 날렸던 발리스타가 얼어붙은 듯 자리에서 꼼짝을 못 했다.

‘…도, 도망쳐야 하는데 이, 이게 대체…!’

평생 겁이라는 것을 모르다시피 살아온 발리스타는 스스로의 상태를 이해하지 못했다.

천재라는 그 칼라슈와 대련했을 적에도 이렇게 겁먹었던 적이 있던가?

심지어 레온하르트 영지의 토벌 때도 지금보다 한참이나 경지가 낮았지만, 죽음을 무릅쓰고 몬스터와 싸웠었다.

‘그런데 겨우 저런 애한테 내가 겁을 먹었다고…!?’

뿌득.

발리스타가 이를 갈았다.

‘말도 안 돼. 나 발리스타라고!!!’

그의 몸에 재차 힘이 들어갔다.

하나.

조금 전 힘이 들어갔을 때와는 상반된 기세가 느껴졌다.

몰려오는 긴장으로 몸에 힘이 들어가 굳은 것이 아니라.

백사장을 휩쓰는 파도처럼 주체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이 발리스타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대검에 피어오른 가시화된 마기에도 영향을 주기 마련이었다.

쿠웅!

발리스타가 오른쪽 다릴 내딛자.

‘쿵’하는 소리와 함께 땅이 울렸다.

장룡의 마룡검격의 일초식.

이윽고 피어오른 마기가 용의 머리의 형태로 변화한다.

그리고.

쿠오오오오오오!!!

오름을 하는 용의 굉음이 천둥처럼 울리며 쏟아져 내려오는 검은 꽃잎을 향해 태풍처럼 나아간다.

쿠르르르르르르릉!!!!

떨어지는 검은 꽃잎이 무너지며 가루가 되어 흩어진다.

하나.

릴리의 위화마검 역시 마룡검격에 절대 뒤지지 않는 지고한 신공.

개화했던 검은 꽃을 향해 나아갔던 검은 용 역시 천천히 형체가 무너져 갔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힘과 힘의 충돌이 불러온 것은 고막을 울리는 거대한 폭음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선 연무장에 모래폭풍이 휩쓸며 무너져 내렸다.

“…후욱…! 후욱…!”

“하아…하아…!”

온 힘을 쏟아 낸 릴리와 발리스타가 연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한바탕 소란을 일으킨 탓이었을까.

어느새 연무장 주변엔 둘의 생사결을 지켜보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입관생들은 눈을 반짝였고, 교관들은 어린 두 친구가 보여 준 신위에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내내 굳게 닫혀 있던 이든의 입이 비로소 열렸다.

“그만.”

서로 죽일 듯이 노려보던 릴리와 발리스타의 시선이 일순 이든을 향했다.

첨예하게 대립하던 둘의 기세가 덩달아 사그라들었다.

이든이 천천히 걸어와 둘 사이에 섰다. 그러곤 발리스타를 향해 고갤 돌리며 씩 웃었다.

“이제야 맘에 드는 모습을 보이는군.”

듣던 발리스타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그가 고래고래 소릴 질렀다.

“맘에 들어!? 마암에 들어!?!? 나 방금 뒤질 뻔했던 것 못 봤소!?!?”

“안 보이는 사람한테 그렇게 물어봤자 대답은 뻔한 거 아니냐?”

“그걸 말이라고…!”

“아무튼.”

이든이 발리스타의 말을 뚝 자르곤 재차 입을 뗐다.

“너도 느꼈지?”

“……?”

“생사의 갈림길에서 느꼈던 각성 말이야.”

“…….”

느꼈냐고?

느꼈지.

누구보다 발리스타 그 자신이 톡톡히 느꼈다.

그리고 비로소 이든이 했던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무도(武道)를 걷는 자로 하여금 눈에 띌 만큼 큰 성장은 바로 조금 전과 같은 생사결에서 오는 법임을….

꾸준한 수련도 성장을 가져오지만, 그것은 밑거름에 가깝다.

저승길 문턱을 왔다 갔다 하는 실전이야말로 초식의 완성도를 높이는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있었다.

발리스타가 입을 뗐다.

“그런데 말이오. 난 일전 토벌에 참여하였을 때도 목숨을 위태할 뻔한 실전을 겪었소. 그런데 그때는 왜 성장을 못 한 거지?”

“그땐 지금과 같지 않았지.”

“응?”

“내가 도중에 개입했잖아.”

“아…. 그래서.”

“그리고 무엇보다 당시의 너와 레온하르트 영지에서 오크 무리들을 이끌던 대장 놈하곤 실력의 격차가 너무 컸다. 일방적으로 밀리는 싸움에서 무엇을 느끼고 무슨 성장을 해. 성장도 주고받는 혈투에서 오는 거지. 자칫 눈 깜빡할 사이에 목숨이 날아가는 상황에 성장은 얼어 죽을.”

“그런가?”

“그리고.”

“……?”

“너 검술도 독학했다며, 아카데미에서도 가르치기야 하겠지만, 해 봤자 기본 검술 아니야?”

“마, 맞소….”

“뭐, 그럼 성장할 건덕지도 없던 형편 없던 실력이었단 뜻이겠지.”

“거, 너무 말을 막 하시네.”

입을 삐죽 내밀고 툴툴거리는 발리스타의 목소리에 이든이 피식 웃었다.

“아무튼, 릴리도 그리고 발리스타 너도 고생 많았어. 둘 다 꽤 성장한 것 같아서 뿌듯하군.”

“거, 두 번 좋아하면 아주 사람 죽겠네. 아주!”

웃던 이든이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어떻게 알았어?”

“…뭐, 뭐가?”

“와, 귀신이네. 이거?”

“아, 왜 또! 뭐! 사람 불안하게!”

쏘아붙이는 발리스타의 물음에 이든이 환하게 웃었다.

그리곤 대뜸 무게를 잡았다.

“발리스타, 난 말이지. 너의 성장이 너무나도 기쁘다.”

“…고, 고맙소. 근데 그게 뭐….”

“그래서 말인데.”

꿀꺽.

서, 설마 이 양반이….

이든의 입에서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 예상이 갔던 걸까.

발리스타의 동공이 어느새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요동을 쳤다.

“계속하자.”

“뭘….”

“생사결.”

“…그게 무슨 말이야. 서, 설마 오늘 했던 이 무식한 싸움…?”

끄덕.

“…에이! 농담도.”

“…….”

“…정말?”

“정말.”

“그러다 죽으면…?”

“네가 강해지면 안 죽어.”

“그러다 형 제자가 죽으면…?”

“내 제자가 강해지면 안 죽어.”

“이, 이이 미친…!”

빠악!

험한 말이 나오기 무섭게 이든의 검집이 발리스타의 머리 위로 뚝 떨어졌다.

아직 혹이 다 아물지도 않았건만, 혹 위에 혹이 재차 자랐다.

이든이 ‘쯧’ 소릴 내며 릴리를 향해 고갤 돌렸다.

“릴리.”

“네…!”

“앞으로 이곳에서 지내거라.”

“네!? 여기에서요…!?”

앞에 발리스타와 생사결은 그녀 역시 대화를 들으며 예상했던 바였다.

한데 여기서 지내라니?

놀란 릴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뭘 그렇게 놀라? 왜? 어머니 아버지랑 떨어져 지내는 것 때문에?”

“…그, 그것도 그렇고 왜 여기서 지내라 하신 것인지 선뜻 이해가 안 가서….”

“너 지금 백수잖아.”

“…….”

“돈 벌어야지?”

“…그, 그것 때문에 여, 여길…!”

“어허! 그것 때문이라니! 그리고 이 스승이 지금 일자리까지 알아봐 줬거늘 감사하다고 못할망정!”

“…….”

릴리는 속으로 생각했다.

돈 때문이다. 틀림없이 돈 때문이라고.

물론 그녀의 예상은 적중했다.

저택과 막대한 재물을 쌓았지만, 이든에게 있어 지금의 릴리는 제자이기 이전, 수련만 하고 집에서 빈둥대는 식충이었다.

뭐, 그렇다고 느닷없이 내린 결정은 아니었지만….

칼스테인 영지에서 수도로 이사 온 이후로 릴리는 백수가 됐다.

물론 그전에 경력을 살려 수도의 사무관직을 할 수도 있었지만, 구태여 더 뽑을 필요가 없을 만큼 수도의 유니콘 본부는 사무관들이 넘칠 만큼 많았다.

물론 그렇다고 유니콘이 일손이 넘치느냐?

그것 또한 역시 아니었다.

유니콘 무관 학교가 그랬다.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는 입관생들과 달리 교관들의 숫자가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해서 이든은 줄곧 릴리에게 이곳을 소개해 주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게다가.

조금 전 발리스타와 릴리의 대련을 느끼면서 더더욱 확신했다.

이 일을 계기로 둘은 경쟁자가 될 터.

경쟁할 상대가 있다는 것은 필시 둘 모두에게 큰 성장을 줄 것이 분명했다.

“일단 교관으로 일하게 되면 무관 학교에서 숙식을 해결해야 하긴 하지만, 부모님을 뵙지 못하는 게 정 아쉬우면 왔다 갔다 하면 되잖아. 어차피 집도 코앞이겠다.”

“그래도 될까요?”

“안 될 건 또 뭐 있냐.”

“알겠습니다. 그럼 해 볼게요!!!”

그리도 좋을까.

릴리와 발리스타의 큰 폭의 성장이 기대되는 모양인지 이든이 흐뭇하게 웃었다.

지켜보던 교관들과 입관생 아이들 역시 릴리를 금세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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