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대마법사 듀크의 진두지휘 속에서 꿋꿋이 수성을 해 오던 듀란드 영지에 난데없이 위기가 들이닥쳤다.
공세를 펼치던 적들의 숫자가 하룻밤 새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것이 그 이유였다.
위기 이전에도 적의 숫자가 결코 적은 편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물밀 듯 밀려온다는 말이 더 없이 어울릴 정도로 심각했다.
하지만 단지 저들의 숫자가 늘어났다고 해서 위기가 찾아온 것은 결코 아니었다.
저들이 진정 위험한 이유는 다름 아닌 쉬지 않고 몰려온다는 것에 있었다.
정말로 단 한시도 쉬지 않고 말이다.
사람이라면 응당 쉬어야 한다.
목숨이 오가는 전쟁터라고 이는 다르지 않은 법이다.
하나. 그것은 말 그대로 ‘사람’일 경우에 한해서지 저들에겐 해당 사항이 없어 보였다.
병사와 기사들이 담고 있는 적들의 모습들이 필시 인간의 것과 거리가 한참 멀어 보였으니 말이다.
형태는 사람의 몰골을 하고 있을지언정 하나같이 살아 있단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화살에 온몸이 꿰뚫리고 창과 칼에 팔다리마저 잃었음에도 저들은 마치 뭐에 홀린 것처럼 끊임없이 성벽을 타고 올라와 넘기를 시도하며 사람을 지치게 했다.
산 사람이라면 애초에 보일 수가 없는 모습이었다.
그런 짓을 몇 날 며칠을 해 댔으니 제아무리 적들의 공성이 어설프다 한들, 수성하는 쪽 역시 힘에 부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일까. 며칠을 연달아 잠 한숨 제대로 자지 못하며 수성해 온 병사들이 하나둘씩 쓰러져 나가자 올라오는 그것들을 향해 검을 휘두르던 기사단장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외쳤다.
“다들 정신 차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곳을 반드시 사수해야만 한단 말이다!!!!”
사실이었다.
외벽이 뚫리는 순간, 피해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것이 분명했다.
외벽 다음으로 이어진 곳이 다름 아닌 민가였기 때문이다.
병사들이라고 이를 모를까.
하지만 머리론 아무리 이해하고 있어도 긴 시간 동안 이어진 고된 전투 탓에 몸이 제멋대로인 것처럼 따라 주지 않는 게 문제였다.
지금 이 순간에도 병사들이 제풀에 지쳐 픽픽 쓰러져 나가던 그때였다.
흡사 지옥과 다름없는 모습에 대지와 달리, 청명했던 하늘이 일순 붉게 물들며 열기가 들끓기 시작했다.
쿠우우우우우우웅.
하늘에서조차 지옥이 펼쳐진 것 같은 광경에 의문이 들 때쯤.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포기하지 마라!!!!!!!”
흡사 천둥과도 같이 고막을 찌릿하게 울려 대며 정신을 바짝 들게 만드는 목소리였다,
병사들이 화들짝 놀라며 휘둥그레진 눈으로 연신 사방을 훑다가 하나같이 한곳에 시선이 멈추었다.
모든 이목이 일제히 향한 곳.
거기엔 하늘을 들끓는 불바다로 만든 장본인으로 보이는 이가 화염이 치솟는 한 손을 하늘 쪽으로 쭉 뻗은 채 크게 휘젓고 있었다.
하늘을 붉게 물들인 이.
그 초로인이 재차 크게 외쳤다.
“곧 황실의 지원이 올 것이다. 그때까지 절대 포기하지 말거라!”
성벽 끄트머리에서 아슬아슬하게 선 채 손을 휘젓던 초로인이 일순 하늘을 향해 뻗었던 손을 성벽 아래 지상 쪽으로 내리쳤다.
그 순간.
하늘을 붉게 물들었던 화염이 몰려드는 적병들을 향해 단번에 쏟아졌다.
8서클 대 마법 헬파이어가 지상에 작렬하는 순간이었다.
쿠오오오오오오오오오…!!!!
마치 거대한 채찍처럼 기다란 불기둥이 적들을 휘감으며 일시에 태워버리는 모습은 지옥에 떨어진 죄인들에게 형벌을 내리는 흉신악살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지만, 정작 병사들에겐 암담한 상황에 한 줄기 빛을 내려 준 구원자요. 영웅일 뿐이었다.
지켜보던 병사 중 하나가 다 들리도록 크게 소리쳤다.
“듀, 듀크 경이다. 대마법사 듀크 경께서 다시 움직이셨다…!!!!”
“오, 오오오…!!!”
그리고 그 외침에 하나둘 픽픽 쓰러져 나가던 병사들의 눈에 생기가 비치며 축 처졌던 그들의 창칼에 다시금 바짝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자신의 활약 덕에 다시 올라가는 사기에 씁쓸하게 미소 짓던 대마법사 듀크가 일순 붉은 핏물을 토해 냈다.
“쿨럭…!”
그 모습에 곁에서 그를 보조하던 루디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입을 뗐다.
“듀, 듀크 경, 괜찮으십….”
하나, 루디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듀크가 그의 입을 막았다.
“조용.”
“……!”
자신이 무리하여 피를 토한 것을 알면 어렵게 오른 사기가 다시 꺼질 수 있으니 말조심하라.
듀크의 속뜻은 그것이었다.
이를 영특한 루디가 알아차리지 못할 리 없었다.
그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젠장…! 이런 때 듀크 님께 아무런 힘도 되어 드리지 못하다니…!’
루디의 시선이 재차 지상 쪽을 향했다.
그리고 그곳엔 여전히 무리하며 온 힘을 쏟아 내는 듀크의 화염이 작렬 중이었다.
‘나는 언제쯤에야 저만한 힘을 쏟아 낼 수 있을까…! 아니, 애초에 저만한 경지에 오르는 것이 가능하기나 할까?’
루디 역시 마법사 아카데미 수석으로 그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왔지만, 정작 세상 밖을 마주하니 자신이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가진 알량한 마법 몇 줌 가지곤 세상을 구하지 못하는 법이구나……!’
현실을 마주한 순간, 깨달은 것이다. 세상을 구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강한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단지 알량한 어중간한 힘이 아닌눈 앞에 대마법사 듀크처럼 세상천지를 뒤흔들 수 있을 어마어마한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이다.
그때, 대지를 휩쓸던 듀크의 화염이 일순 움직임을 멈추었다.
쿠우우우우웅!!!!!!!!!!!
어디선가 땅을 뒤집어엎는 듯한 굉음이 들려오는 것이다.
그의 시선이 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하자, 옆에 루디 역시 그를 따라 고갤 돌렸다.
쿠우우우우웅!!!!!!!!
그리고 그 굉음은 재차 상기시키듯 한 번도 아닌 연달아 몇 번씩이나 들려왔다.
듀크를 비롯한 사람들의 시선이 향한 굉음의 근원지.
거기엔 굳게 닫혀 있던 영지의 외성 문이 어떤 충격을 받고 연달아 들썩이고 있었다.
“이, 이 무슨…!”
듀크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무엇을 봤길래 저만한 자가 저토록 놀라 하는 것일까.
이는 비단 그뿐만이 아닌 다른 이들 역시 마찬가지인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외성 문의 바깥쪽.
어디서 불쑥 나타난 것인지, 일전엔 보이지 않았던 거대한 괴수급 몬스터들이 육중한 몸을 들이박으며 성문을 부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던 것이다.
괴수급 몬스터는 그 크기가 2장이 훌쩍 넘고 체중 역시 크기만큼이나 상상을 초월했다.
필시 저대로 둔다면 성문은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그 모습에 당황한 나머지 일순 멈칫했던 듀크가 천둥과도 같은 고함을 내지르며 재차 성문 쪽을 향해 손을 움직였다.
“이 미개한 몬스터 놈들! 감히 이곳이 어딘 줄 알고 오느냐!!!”
듀크가 휘두르던 화염이 성문을 향해 돌진하던 몬스터들을 향해 벼락같이 떨어졌다.
동시에 성문 인근에 거대한 폭음이 땅을 때리듯 울려댔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대마법사가 내지른 마법의 위력은 실로 대단했다.
괴수급이라 불리며 흉명 자자한 트롤과 오우거조차 작렬한 화염에 버티질 못하고 새까맣게 타 버렸으니까.
하나.
그 강력했던 마법이 문제였던 걸까.
돌격해 오던 괴수급 몬스터들을 처리하는 데 급급했던 나머지 폭발에 여파가 성문에까지 미쳐 버린 것이다.
듀크의 안색이 대번에 파랗게 질렸다.
‘이런…!’
눈에 띄게 허물어진 성문.
그리고.
적병들은 이를 놓치지 않았다.
놈들의 새파란 안광이 일순 성문 쪽으로 향하더니 일제히 그곳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듀크가 재차 소리 지르며 화염을 토해 내던 손을 휘두르려던 그 순간.
“모, 모두!!!! 성문. 성문을 사수…! 쿨럭!!!!!”
듀크가 재차 피를 토했다.
놀란 루디가 황급히 달려와 쓰러질 뻔한 그의 몸을 붙잡았다.
“듀, 듀크 경!!! 더는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듀크, 그라고 자신의 상태를 모를까. 누구보다 그 본인의 상태를 잘 알고 있었다.
하나, 정작 본인이 아니면 저 많은 적들을 어찌할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다.
자신을 따라나섰던 황궁의 마법사들 역시 전부 한계까지 마나를 쥐어짠 탓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
그나마 아직 쥐어짤 마나라도 남은 자신이라도 뭔가를 해야 이 위기를 막아 낼 수 있건만, 노쇠한 몸이 이를 버티질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요동치던 그의 눈이 몰려드는 적들로 무너져 가는 성문을 향했다.
죽기 살기로 성문을 막던 병사가 급히 몸을 피하곤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소리쳤다.
“서, 성문이… 성문이 무너진다!!!!”
쿠우우우우웅!!!!
급기야 무너진 성문.
그리고 그곳을 통해 언데드 적병들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듀크가 아직 남은 핏기를 토해 내며 성벽 밑의 병사들을 향해 황급히 소릴 질렀다.
“막아라! 어서 막아!!! 놈들이 절대 민가로 들어가게 만들어선 안 된다!!!!”
그가 무리하여 피를 토하면서까지 저토록 소리치는 이유.
이유는 간단했다.
바로 ‘감염’ 때문이었다.
듀크가 알던 지식이 맞다면 적병은 필시 언데드 중에서 좀비화된 몬스터였다.
좀비란 그 자체만으론 언데드 중에서 가장 낮은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지만, 저들의 가장 무서운 점은 희생자로 하여금 그들의 언데드화를 전염시킨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듀란드 영지는 수도 다음가는 최대 규모의 영지였다.
언데드가 민가에까지 몰려가 전염을 가속하고 영지 전체가 감염되는 순간, 피해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것이고 급기야 수도에까지 큰 위협이 될 것이 분명했다.
듀크가 재차 손에서 거대한 화염을 토해 냈다.
어떻게든 마지막 한계까지 짜내어 성문 쪽으로 몰려드는 언데드를 막아내기 위함이었다.
옆에서 그를 보조하던 루디가 황급히 외쳤다.
“듀, 듀크 경…! 이제 더는 안됩니다. 이 이상 마나를 소진하시면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단 말입니다…!”
“그럼, 이대로 영지가 초토화되어가는 광경을 그저 지켜만 보란 말이더냐…!!!”
듀크가 옆에서 말리던 루디를 뿌리치며 재차 화염을 쏘아 내려던 그때였다.
성벽 위에서 적병이 몰려오는 광경을 넋 놓고 지켜보던 병사가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손가락으로 그곳을 가리켰다.
“저, 저기!!! 저기!!! 누, 누군가 오고 있습니다…!!!”
“뭐…!?”
듀크의 시선이 병사의 손가락을 따라 움직였다.
몰려오는 적병의 끄트머리.
그곳에서 조금 떨어진 먼발치에서 확실히 누군가 말을 달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듀크의 눈이 가느스름해지며 집중을 하던 그 순간.
그의 시야에 달려오는 말에 걸린 깃이 보였다.
바로.
아슬란 제국의 깃이었다.
확인하기 무섭게 듀크의 눈이 부릅떠지고는 재차 쩌렁쩌렁 울리도록 외쳤다.
“온다!!!! 황실의 지원이 오고 있다. 다들 기를 쓰고 막아 내야 한다!!!!”
재차 울린 듀크의 함성에 희망이 보인 것일까.
주춤 물러나며 무뎌지던 병사들과 기사들의 창과 칼이 재차 예리해지며 힘이 들어가던 그때였다.
후웅.
일순 밝았던 사방이 깜깜해지는가 싶더니 어둠이 찾아왔다.
병사들을 독려하며 사기백배 시켜주던 듀크가 놀란 눈으로 어둠의 근원지를 찾아 재차 고갤 돌렸다.
대마법사 듀크의 시선이 닿은 곳.
그곳에 말을 타고 달려오는 황실의 지원병 가장 선두에서 성안으로 몰려드는 언데드들을 향해 검은 기운을 흩뿌리는 사내의 모습이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