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0화. (140/250)

140화.

옆에서 가만히 듣던 케인이 불쑥 말을 꺼냈다.

“레, 레온하르트 영지라니. 이거 정말 큰일이군….”

그의 말에 이든이 케인의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갤 들렸다.

“큰일이라니요?”

“레온하르트 영지의 유니콘 지부 말일세. 그들은 수도로 오지 못하였네….”

“뭐라고요?”

이든은 조금 전 그곳으로 적의 본대가 들이닥쳤다는 말보다 더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오지 못하였다니요. 어째서 말입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오지 못하였다가 아니라. 오지 않았다는 말이 맞겠군. 레온하르트 지부장이 수도로 피신하라는 게럴드 길드장님의 말에 이리 답신을 보냈다는군. 자신들은 레온하르트 성에 남아 이들과 함께 싸울 테니. 수도의 평화를 지켜 달라고 말이야….”

“그런 바보 같은 짓을…!”

이든이 바득 이를 악물었다.

길드장의 명까지 묵살하면서 그곳에 남은 레온하르트 지부의 길드원들이 바보 같으면서도 한편으론 이해도 됐기 때문이다.

그때, 내내 옆에서 듣던 황궁의 정예 기사 중 한 명이 다가와 물었다.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지금 당장 쉬지 않고 달려간다 해도 족히 3일 이상은 걸리는 멀리 떨어진 곳입니다. 더군다나….”

기사의 시선이 황폐해져 있는 듀란드 영지의 내부를 훑었다.

이든이 알맞게 도우러 와 줬다곤 하나, 이곳 역시 피해는 막심했다.

이곳이 안정에 접어들기 전까진 쉬이 떠날 수도 없었다.

놈들이 재차 공격을 감행할지도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상황 속에서 이든이 어렵던 결정을 내렸다.

“기사 여러분들과 유니콘 길드원들은 우선 이곳에 남아 주십시오. 그리고 당장 황궁에 지원을 요청해 이곳이 안정되는 대로 추가 병력을 이끌고 레온하르트 영지로 와 주십시오.”

“남작님께선 어쩌실 생각입니까?”

기사의 물음에 이든이 곧바로 입을 뗐다.

“일단 저만이라도 레온하르트 영지로 달려가겠습니다.”

기사가 퍽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혼자서 말입니까?”

“이미 한번 가 봤던 길입니다. 저 혼자 간다면 하루도 안 되어 도착할 수 있습니다.”

“네? 하루 만에요?”

이곳에서 레온하르트 영지까지는 밤낮을 잊고 꼬박 3일을 달려야 도착할 거리였다.

그의 상식으론 쉽게 이해가 가질 않을 말이었다.

하나, 이든을 대신해 케인이 입을 뗐다.

“가능할 겁니다. 일전에도 칼스테인 영지에서도 수도까지 하루 만에 주파했던 그입니다.”

“허어….”

듣던 기사가 헛바람을 삼켰다.

이곳에서 레온하르트까지만큼의 거리는 아니지만 칼스테인 영지에서 수도까지도 만만치 않은 거리였다.

그런데 그런 거리를 하루 만에 돌파했다니. 아무리 소드 마스터라는 경지가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존재라지만,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하지 않은가?

그가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케인의 말에 이어 이든이 고갤 끄덕이곤 재차 입을 열었다.

“어찌 됐든 지금으로선 이것이 최선인 듯합니다. 저와 함께 오신 모두 무리하지 말고, 반드시 황궁의 지원군이 오면 그때 다 같이 출발하셔야 합니다. 괜한 희생이 생기지 않으려면 말입니다.”

“알겠네.”

곧장 대답하는 케인과 달리 기사들은 여전히 넋이 나간 얼굴을 하다가 힘겹게 입을 뗐다.

“그,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동료들의 대답을 모두 듣고 곧장 길을 떠나려는 찰나, 내내 옆에서 듣던 듀크가 불쑥 말을 꺼냈다.

“미안하오. 이곳을 지키기 위해 애써 줬는데, 아무런 대접도 없이 그냥 보내게 생겼군요.”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이든.”

그때, 루디도 끼어들어 말을 꺼냈다.

“혼자 보내 미안하다. 무사해야 한다…!”

“내가 죽기라도 할까 봐?”

이든의 말을 듣던 루디가 눈살을 찌푸렸다.

“꼭 말은….”

“걱정 마라 멀쩡히 살아 있을 테니. 루디, 너야말로 몸조심해라. 아직 너의 꿈, 못다 이뤘잖아. 안 그래?”

“당연하지…!”

이든이 재차 걸음을 떼려던 그때였다.

내내 눈치만 보던 로즈가 황급히 다가와 이든의 손에 뭔가를 쥐여 줬다.

“이든, 이거…!”

“이게 뭡니까?”

“내 단검 중 하나야. 내가 가장 아끼는…. 줄곧 나에게 행운을 가져다준 애검이야. 비록 함께 가진 못하지만,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 큰 힘이 되어 줄까 싶어서. 그러니까… 반드시 무사해야 해. 알았지? 우리 역시 지원이 오는 대로 늦지 않게 갈 테니까.”

로즈의 애검을 받아 든 이든이 웃으며 그것을 품에 넣었다.

“고맙습니다. 로즈 씨. 그럼, 진짜 가 보겠습니다. 다들 건투를 빕니다.”

“몸조심해!!!”

“곧장 따라가서 마무리해 줄 테니까 대충 정리 좀 해 놓으라고. 응!?”

“아무렴요.”

마지막까지 농담을 날려 대는 톰슨의 말을 듣던 이든이 씩 웃어 보이곤 곧장 신법을 밟았다.

그의 신형이 어느새 저만치 멀어져 점점이 사라져 가고 있었다.

***

모든 영지를 통틀어 레온하르트 영지는 적들이 움직이던 조짐이 가장 적은 곳이었다.

게다가 레온하르트 영지의 험준한 지역 특성상 평시에도 몬스터들의 기습이 잦았던 탓에 늘 한결같이 수성 준비가 철저했던 것도 단단히 한몫했다.

레온하르트 영지의 총지휘관 제라드 기사 단장 역시 전쟁 발발 후 며칠이 지났건만, 수성에 별다른 어려움을 느끼지 못하고 묵묵히 버텨 왔었다.

하나.

그들 앞으로 거대한 어둠이 하룻밤 새 당도하였다.

레온하르트 영지의 북문 쪽.

“어, 어떻게….”

성벽 넘어 포진한 적들을 바라보는 제라드의 눈이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렸다.

“어떻게 저리 많은 적들이 하룻밤 새 나타났단 말인가. 필시 아무런 조짐조차 보이질 않았거늘…!!!”

사실이었다.

제라드의 시야가 담고 있던 포진한 적의 군대는 어림잡아 보아도 1만이 훌쩍 넘어 보였다.

저만한 군대라면 필시 움직이는 조짐이 진작에 보였어야 옳다.

한데, 수성 내내 그런 조짐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지 않았던가.

정말 말 그대로 적의 군사들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부지불식간에 나타나 지금처럼 에워싼 형국이 발생한 것이다.

포진한 적들을 바라보던 제라드가 옆에 있던 전령에게 말을 건넸다.

“급보는 잘 보냈는가?”

전령이 곧장 읍했다.

“네, 가장 빠른 전서구로 보냈습니다. 필시 진즉 영지 전역에 도착하였을 겁니다.”

“지원이 오는 데까지 최소 얼마나 걸릴 것이라 예상하는가?”

“오로지 기병만으로 아무리 빨라도 3일 이상입니다.”

“…3일이라. 그것도 너무 길군.”

“하지만 이 역시 곧바로 지원을 보내 준다는 가정하의 얘깁니다. 실제론 더 오래 걸릴 수도 있습니다….”

“흠….”

제라드의 눈에 보다 더 깊은 수심이 들어찼다.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해도 황실에서 곧바로 지원이 올지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전쟁이 발발하기 이전, 몬스터의 국경 침범이 잦았던 당시에도 황실에 제대로 된 지원을 받지 못하였던 경험 때문이다.

다행히 어찌 일이 잘 풀려, 국경 넘어 숲에 엘프족과 협업을 맺고 위기를 이겨 냈다지만…. 국가 간 전시 상황까지 엘프들이 나서서 도와줄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았다.

즉슨 어떻게 해서든 언제 올지 모르는 황실의 지원을 기다리며 악착같이 버텨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버틸 수 있을 때야 얘기지만….

포진한 적들을 보자니, 3일 버티기조차 버거워 보였기 때문이다.

한참 간 침음성을 흘리던 제라드가 재차 입을 뗐다.

“식량과 군수물자는?”

“충분합니다.”

“주 병력과 예비 징집 병력은?”

“모두 항시 대기 중입니다.”

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이 당도하기도 이전, 그들은 항시 만반의 준비를 해 온 상태였다.

문제는 저들을 상대로 죽기 살기로 싸워 버텨 내야 한다는 것.

“일단 버티는 데까진 최대한 버텨….”

부우우우우우우우.

그때, 성벽 넘어 벨라트릭스 왕국의 깃이 펄럭이던 적의 진영에서 뿔피리 소리가 가득 울렸다.

그리고.

그것을 기점으로 놈들의 진영이 서서히 앞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제라드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놈들의 본대가 수도가 아닌 이곳을 노린다는 것은 필시 노리는 무언가가 따로 있다는 뜻이다.

그것이 무언지는 알 수 없지만,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곳 레온하르트 영지를 사수해야 함은 변함없었다.

제라드 기사 단장이 모든 병사들이 다 들리도록 기함을 토했다.

“전부! 전투 준비!!!!!!!”

***

콰직. 콰르르르르릉!!!!!

이든의 신형이 목적지를 향해 빛처럼 나아갔다.

레온하르트 영지.

한번 가 봤던 곳은 그 나름대로 표식을 해 놔 망설임 없이 갈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도무지 눈으로 좇는 것이 불가능하다 싶을 속도로 나아가는 그가 지나간 자리엔 신법에 여파로 움푹 팬 땅과 부서져 널브러진 나무들만이 발자국처럼 남아 있었다.

콰과과가가가가강!!!!

하지만 진짜 놀라운 것은 신법의 여파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 엄청난 속도를 끊이지 않고 유지하며 단 한시도 쉬지 않고 나아간다는 것이다.

도중에 운기 한번 할 법했지만, 그는 이를 악무는 한이 있더라도 가로막는 모든 것을 돌파하며 멈추지 않고 달려 나갔다.

그렇게 거진 꼬박 하루를 달려 나가고 레온하르트 영지 도착을 앞두던 그때.

거침없이 내달리던 그의 움직임이 별안간 덜컥 멈추었다.

이든의 얼굴이 일순 차갑게 굳었다.

그의 입에서 마치 맹수가 으르렁거리듯 살기 돋친 음성이 뱉어 나왔다

“뭐야, 너.”

이든의 날카로운 음성이 향한 곳.

그곳엔 웬 인형이 그가 나아가던 길 한복판을 막아서고 있었다.

눈과 코, 입술만 내놓은 거음 투구를 눌러쓰고 전신에 검은 갑옷을 둘러 입은 그 인형이 입을 뗐다.

“네놈이 이든인가?”

“그런데?”

그때였다. 듣던 막아선 사내가 등에 가로질러 멘 대검을 빼내어 각각 양손에 쥐었다.

웬만한 장정이라도 두 손으로 겨우 하나 쥐어 들 만한 것을 양손에 각각 쥐었으니 그의 힘이 어찌나 대단한지 알 수 있었다.

사내가 입을 뗐다.

“내 이름은 데무한. 벨라트릭스 왕국 소속 사대 무장 중 하나다. 위대한 분의 명을 받들어 이곳에서 네놈을 기다렸다.”

“이곳에서. 나를?”

“그렇다.”

“감동이군. 어찌 알았는지 모르지만, 내내 이곳에서 기다리다니. 하지만 어쩌지. 내가 남자를 좋아하는 취향은 아니어서 말이야.”

“…….”

“특히나 네놈같이 시체의 썩은 내가 풀풀 나는 놈들은 더더욱 말이야.”

듣던 데무한이 어깰 으쓱였다.

“아쉽군. 난 제법 네놈이 마음에 드는데 말이야. 듣기론 아슬란 제국의 넘버원 소드인 칼스테인보다 강하다 들었다.”

“그래? 그리 알아주니 영광이군.”

“그리고 직접 보니 그 말이 맞는 듯 보이군. 정말 대단해 보이지 않는 눈으로 제국 최강이라. ‘그분’의 명을 떠나서라도 네놈과 꼭 붙어 보고 싶었다.”

“아… 그러니까. 네놈의 말인즉슨 너를 쓰러뜨리기 전까진 이곳을 지나갈 수 없다. 뭐, 그런 거냐?”

그때.

데무한의 투구 속 눈에서 푸른 안광이 토해져 나왔다.

언데드들이 보였던 안광보다 더욱 짙은 살기가 가득 들어찬 안광이었다.

“잘 알아듣는군.”

그리고.

스릉.

그를 마주한 이든 역시 허리춤에 있던 흑색 검을 빼내어 들기 시작한다.

이든이 입을 뗐다.

“근데 말이야 이거 곤란해서 어쩌지? 내가 지금 매우 바빠서 말이야. 이곳에서 네놈과 한가로이 투닥거릴 시간이 없거든.”

“날 쓰러뜨리고 가면 된다.”

이든의 굳게 다문 입술이 일순 삐죽 솟아 올라갔다.

“그래? 그럼 질질 끌 것 없이 단숨에 죽여 주지. 시체 놈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