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스스스….
천지사방을 온통 까맣게 물들였던 검은 막이 서서히 걷혔다.
막이 사라지자 바닥을 구르던 인두 하나와 머리 없는 검은 갑옷을 입던 몸뚱이 한 구가 애처로이 스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 시신 앞에 검을 축 늘어뜨리며 서 있던 이.
이든이 쥐고 있던 흑색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철컥.
검을 넣기 무섭게 이든이 깊은숨을 들이 내쉬었다.
“후우….”
그의 온몸이 어느새 땀으로 축축이 젖어 있었다.
‘역시…. 이건 오래 유지할 것이 못 되는군.’
조금 전, 이든이 전개하여 데무한을 꼼짝 못 하게 억압했던 진법.
천마심혼곡진(天魔心魂梏鎭).
단지 진법을 전개하는 그 자체만으로 상당한 마기와 심력을 소모하여 사람을 기진맥진하게 만드는 이 비전기는 이전 생에서도 단 한 번밖에 쓴 적이 없었다.
그가 천무진이란 이름으로 신교의 정점으로 군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태상 장로였던 이가 가문을 일으키고자 반란을 일으킨 적이 있었다.
당시 세가 약했던 무진이 반란을 일으킨 태상 장로와 그의 가문을 제압하고자 썼던 것이 바로 이 비전기. ‘천마심혼곡진’이었다.
그때의 무진도 지금의 이든과 같았다.
아니, 그때는 진법 안에서 더 많은 적들을 제압하고 일일이 상대하느라 정말 죽다 살아났었다.
그때 이후로 이 비전기는 죽었다가 깨어나도 쓰지 않으리라 다짐했건만, 갈 길이 바쁘다 보니 저도 모르게 단숨에 제압할 방도를 떠올리다 보니 결국엔 이를 쓰고 만 것이다.
기의 소모가 상당했던 만큼 당장 운공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이롭건만, 레온하르트 영지가 처한 상황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시간이 그리 충분하지 않았다.
이든이 이를 악물곤 곧장 신법을 밟았다.
파아아아앗!!!
그의 몸이 재차 빛처럼 쏘아졌다.
***
레온하르트 영지의 수성 이틀째 되던 날.
상황은 제라드 기사단장의 예상보다 더없이 나쁘게 흘러갔다.
거센 반격에도 불구하고, 놈들은 두려움이란 일절 없는 기세로 달려들며 외성 벽까지 올라왔다.
그리고 그것이 놈들의 무서운 점 중 하나였다.
단순한 인해전술이라면 수성 하루 만에 성벽까지 올라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
들이닥쳐 오는 적병들의 눈엔 죽음을 앞둔 자가 보이는 일말의 공포조차 없었다.
마치 죽은 사람처럼 더없이 차가운 눈을 한 적의 병사들.
이유는 간단했다.
놈들 역시 ‘언데드’였기 때문이다.
저들은 이미 한번 죽음에서 되살아난 자들.
산 것이 아니기에 고통 따윈 몰랐고, 이미 죽은 자들이기에 공포 따윈 없는 것이 당연했다.
채챙! 챙!
“끄아아아악!”
급기야 사방에서 창칼이 맞부딪치는 굉음과 비명이 들려왔다.
물론 비명은 하나같이 레온하르트 영지의 병사들 것이었다.
발에 불이 나도록 뛰어다니며 적병을 베어 넘기던 제라드가 천둥과도 같은 고함을 내질러 댔다.
“막아라! 놈들이 이곳을 넘어가게 만들어선 안 된다!!!”
참으로 절체절명의 순간이란 말이 더없이 어울리는 상황이었다.
그 자신과 성의 몇 있지 않은 기사들이 죽기 살기로 싸우고 있었지만, 이대로라면 황실의 지원이 당도하기도 전에 성이 함락될 것임은 자명했다.
그때였다.
뿌우우우우우.
하늘도 무심하시지.
영지를 에워싼 적의 진영에서 재차 뿔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검을 휘두르던 제라드의 시선이 재빨리 성벽 너머 적진을 훑었다.
그의 눈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려 댔다.
“이런…!”
무엇을 보았길래 저럴까.
그의 시야가 찰나 훑던 곳.
적의 진영에 거대한 공성 전차가 뿔피리 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무지막지한 속도로 성문을 향해 내달려 왔기 때문이었다.
적병이 성벽을 넘으며 들이닥친 탓에 성문 인근에 있던 병사들까지 성벽 위로 모조리 올라와 적들과 맞서고 있던 상황이었다.
말인즉슨, 달려오는 저 공성 전차를 당장에 막아 낼 병력이 밑에 없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거칠게 달려오던 공성 전차는 어느새 성문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일촉즉발의 상황.
그리고 곧.
쿠오아아아아아앙!!!
거대한 굉음과 함께 성을 뒤흔들 만큼 엄청난 진동이 울렸다.
제라드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이, 이런…!”
비단 제라드뿐이랴.
고군분투하며 적들을 막던 병사와 기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시선이 성벽 밖.
단박에 성문을 부숴 버린 공성 전차를 향했다.
그리고.
쿠구구.
성문을 뚫었던 공성 전차가 뒤로 물러나 길을 트기 무섭게 포진해 있던 적병이 뚫린 성문을 향해 밀려들어 오기 시작했다.
“이런 젠장할…!!!!”
제라드의 입에서 거친 욕설이 튀어나왔다.
그럴 수밖에.
지금도 간당간당하게 버티고 있는 상황에 정문마저 뚫렸으니, 레온하르트 영지는 이제 끝난 것이나 다름없던 것이다.
위기 속에서도 사기 백배하며 맞서 싸우던 병사들과 기사들이 절망에 넋을 놓던 그때였다.
휘이이이이이이잉!!!
파아아아앙!!!!
마치 신이 노한 것처럼 하늘 위에서 공기를 찢는 듯한 굉음이 울려왔다.
굉음 들려온 곳에선 마치 별이 떨어지는 듯한 광경이 보였다.
레온하르트의 사람들도. 그리고 이곳을 노리며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던 벨라트릭스 왕국의 적병들도 일순 움직임을 멈추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쿠우우우우우….!!!
소리는 점차 가까워지며 요란스레 변하고, 먼발치에서 점점이 보이던 별 역시 그 크기를 부풀려 가며 점차 가까워졌다.
그리고 그것이 레온하르트 영지의 포진한 적들 위를 활공하던 그 순간.
휘이이이이이익.
일순 그것이 방향을 틀더니 적들의 진영 한가운데로 뚝 떨어지며 커다란 폭음을 만들어 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일순 울려온 진동은 마치 천지사방을 잡아 뒤흔드는 듯했고, 폭음과 함께 웅장하게 피어오른 먼지는 폭발을 연상시켰다.
스으….
까맣다시피 피어오른 먼지가 서서히 걷히고 점차 그 안의 참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푹 꺼져 있는 땅은 거미줄처럼 줄줄이 금이 가 있었다.
그리고 그 일대 주변으로 비명조차 없이 죽은, 사방에 널브러져 있는 적병들의 모습들….
그 한가운데.
한 인형이 무릎을 꿇은 채 서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스윽.
모든 이목이 오직 그를 향했다.
일어선 인형의 전신에선 난데없이 새까만 먹구름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를 본 제라드의 눈이 미친 듯이 흔들렸다.
그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저, 저자는… 분명 그때… 그…!!!”
아는 사람이었던 걸까.
갑작스런 천지개벽에 두려움과 의아함으로 가득했던 그의 눈동자에 찰나 희망의 빛이 들어차던 그 순간.
화아아아아아아악!!!!
새까만 먹구름이 느닷없이 거친 돌풍을 일으키며 사방에 퍼져 나갔다.
고고히 적들의 진영 한가운데 서 있던 이.
이든의 신형이 적 진영에 더욱 깊숙이 쏘아졌다.
번개와 같이 나아간 검은 잔상.
그리고.
쭉 늘어나다시피 한 먹구름 속에서 날카로운 칼바람이 일시에 전쟁터를 휩쓸었다.
심상치 않음을 느낀 걸까.
레온하르트 영지를 노리던 적병들이 일순 걸음을 돌렸다.
영지를 휩쓸던 어둠의 세력이 오직 단 한 사람, 이든을 향해 몰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휘익!!!!!!!!
콰아아아아아아아앙!!!!
이든의 흑색 검이 사방에 검은 마기를 흩뿌리며 사기가 느껴지는 곳을 향해 무자비하게 휘둘러 졌다.
힘을 아낄 생각 따윈 일절 보이지 않는 모습.
그리고 이를 증명하듯 그의 검엔 삼 장 이상 길이의 마기가 기다랗게 솟아오르며 오직 잔상만을 남긴 채 사방을 난도질하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긴커녕 칼이 휘둘러진 방향으로 무섭게 쌓여 가는 육편의 산들.
그래서일까.
이든이 지나갔던 자리는 마치 흔적과도 같이 남은 발자국처럼, 그에게 달려들던 적병들의 살점으로 중구난방 난잡하게 산을 이루며 쌓여갔다.
압도적인 무위로 도무지 전쟁이라 볼 수 없는 학살의 현장.
이만하면 적들의 기세도 한풀 꺾이는 것이 당연하건만, 어째선지 이든을 향해 몰려드는 놈들의 걸음은 더욱 거칠어지고 거침없어졌다.
그리고 그럴수록.
그의 단전에도 점차 무리가 오고 있었다.
주룩.
그때.
이든의 입가에 실 핏물이 비집고 나왔다.
내상이었다.
듀란드 영지에서 이곳까지 단 하루 만에 달려오고, 오는 길 도중엔 기다리던 적을 만나 합을 겨루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 운공 한번 없이 이곳에 도착하기 무섭게 전력의 힘으로 사방을 휩쓸며 일각도 되지 않아 적진 병력의 삼분지 일을 날려 버린 그였다.
내상이 생기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던 행보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멈출 수 없다.
여기서 멈추기엔 적의 수가 아직 너무 많이 남은 탓이다.
조급해진 탓일까.
이든의 움직임이 더욱 빨라지고, 삼 장 가까이 높이 솟아오르던 검은색의 오러가 더욱 그 크기를 부풀렸다.
이든이 몸을 한 바퀴 크게 돌려 검은 바람을 일으키곤 몰려들던 적들을 밀어내더니 사방팔방에 거대한 검기를 쏘아 댔다.
휘익! 휙! 휘익! 휙!!!
찰나의 쏟아진 열두 개의 검기가 용의 머리 형태로 변했다.
십이마룡마참격.
크오오오오오오오!!!
쏘아진 열두 개의 검은 용들이 포효하며 개미 떼처럼 몰려든 적들을 향해 비집듯이 뚫고 들어갔다.
그리고 용의 울음소리가 절정을 향하던 그 순간.
곧이어 폭음과 함께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하늘과 땅이 뒤집혔다고 해도 믿을 방대한 힘이 불러온 여파는 대단했다.
푸아아아아!!!
마치 태풍이 일 듯 일순 엄청난 폭풍이 폭발이 일어난 반경을 휩쓸었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바람이 서서히 잦아들고, 폭발이 일으킨 먼지가 걷히자 드러난 것은 황량한 대지 위에 홀로 서 있는 이든의 모습이었다.
그의 주위로 개미 떼처럼 모였던 적병들이 십이마룡마참격이란 단 일수에 먼지로 화해 버린 것이다.
다시 적병들의 수가 남은 것의 삼분지 이가 날아갔다.
이제는 정말이지 눈에 띄게 줄어든 적진의 병력들.
그 광경을 보고도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는지 이든의 일격 범위 밖에 있던 적병들이 재차 달려들려던 그 순간이었다.
-남은 병력은 즉시 레온하르트 영지로 가도록.
웬 나긋한 목소리가 귓가 가까이 불시에 울렸다.
무리한 탓에 조금 창백해진 안색을 하고 있던 이든의 눈썹이 일순 꿈틀거렸다.
‘사자후?’
아니었다.
사자후라고 치기엔 고함이라 볼 수 없었다.
이는 흡사 절대 고수의 중후한 내공에서 나오는 읊조림과도 같았다.
마치 전음을 연상시키던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온 직후.
적병들은 홀린 것처럼 레온하르트를 영지를 향해 재차 달려들었다.
이든 역시 그들의 움직임을 막기 위해 당장에 달려가야 할 상황이건만, 그는 쉽사리 걸음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새 그의 곁에 네 명의 인형들이 사방을 점하며 포위하듯 서 있었기 때문이다.
기감으로 주변의 기척을 훑던 이든의 입술이 뒤틀리듯 삐죽 솟았다.
“이제야 나서는군. 네놈들이 이것들의 적장들이렷다?”
그의 물음에 포위한 이 중 하나가 로브를 젖히며 얼굴을 드러냈다.
기다란 흑색의 장발.
창백하다 싶을 정도로 하얀 피부.
그리고.
여기에 있는 모두와 달리 홀로 붉은 안광을 터트리는 한 사내.
벨라트릭스 왕국의 국왕.
밸스커드가 얼굴을 드러내었다.
그가 웃으며 입을 뗐다.
“당신이 이곳에 있는 것을 보니 데무한이 당했나 보군요. 오랜만입니다. 이든 길드장. 아니, 이제 이든 남작이라 불러드려야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