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3화. (143/250)

143화.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기억을 더듬던 이든이 떠오른 듯 입을 뗐다.

“밸스커드 국왕이군.”

듣던 밸스커드가 놀란 얼굴을 했다.

“호오. 목소리만 듣고도 내가 누군지 알아내다니 대단하군요.”

“바보냐?”

“……?”

“벨라트릭스 왕국이 쳐들어왔단 소릴 빤히 들었는데, 내가 거기서 아는 사람이 너 말고 또 누가 있다고. 국왕이 저리도 멍청해서야. 쯧!”

“…….”

혀를 차대는 이든의 소리에 밸스커드가 멋쩍은 얼굴을 했다.

그가 괜한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말을 꺼냈다.

“어찌 됐든 간에 이렇게 또다시 뵙게 되는군요. 그때, 사교회 이후로 당신을 못 볼 줄 알았는데….”

밸스커드의 홍안이 조금 전 이든의 일격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들을 훑었다.

“볼수록 대단하군요.”

붉게 타오르는 그의 눈빛에 순수한 감탄이 일었다.

밸스커드가 재차 입을 뗐다.

“…조금 전 당신을 보고서야 깨달았습니다. 확실히 이 정도 실력이라면 제아무리 불사의 스파토이라 한들 당신에겐 무리였겠지요.”

스파토이란 말에 이든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스파토이? 아… 그때. 야밤에 난데없이 내가 있던 객실에 쳐들어왔던 흉물들. 네놈이 보낸 것이었군.”

우두득.

이든이 곧장 몸을 풀었다.

빚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니, 알게 된 이상 당장에 달려들 기세였다.

그 모습에 밸스커드가 웃어 보였다.

“간만에 만났는데 그리 서두르실 이유가 있을….”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서 있던 이든의 신형이 삽시간에 사라지더니 밸스커드를 향해 벼락같이 쏘아졌다.

파아아아앗!

워낙에 빠른 탓에 눈으로 확인조차 불가해 보이던 그 찰나의 순간.

채애애애앵!!!!

쏘아진 신형과 함께 달려든 이든의 흑색 검이 금속음을 터트리며 무언가에 막혔다.

밸스커드의 코앞에서 멈추어진 검.

이든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응?”

밸스커드의 기척이 느껴지던 곳.

그 앞에 주변에 알짱거리던 다른 기척이 이든을 가로막고 있던 것이다.

“반응이 빠르군.”

막아선 이를 향해 이든이 재차 검을 휘두르려던 그때.

그의 곁으로 삽시간에 두 인형이 달려들었다.

이든이 급히 검을 회수하곤 놈들의 투로를 피해 멀찍이 떨어졌다.

잠시 뒤.

콰아아아앙!!!

조금 전 이든이 있던 그 빈자리에 거대한 검흔 두 개가 깊게 새겨졌다.

조금만 늦었어도 그의 몸이 날아온 검격을 따라 분해될 뻔한 아찔한 순간이었다.

터벅.

멀찍이 떨어진 이든의 기감이 밸스커드를 보호하듯 둘러싼 세 명을 향했다.

하나같이 만만치 않은 사기(死氣)를 풍기는 것이, 일전 그와 일전을 벌였던 데무한을 연상시켰다.

이든이 어깻죽지에 흑색 검의 검신을 걸치곤 감탄한 듯 입을 뗐다.

“무슨 배짱으로 내 앞에서 조잘조잘 떠들어 대나 했더니만, 제법 괜찮은 것들을 호위로 세워 두고 있었군.”

듣던 밸스커드가 웃으며 답했다.

“제가 워낙 조심성이 철두철미해서 말입니다. 조금 전 말도 없이 저를 베려고 했던 것을 보니 이전 일로 쌓인 화가 많으셨던 모양인데, 이거…. 제가 이든 남작을 실망시켜 드린 것은 아닌가 싶군요.”

“실망까지야. 뭐 당신 말대로 조금 열이 받긴 하는군.”

말은 이렇게 해도 사실 그는 조금 조급하던 터였다.

창백해진 그 자신의 안색만큼이나 심각해진 내상도 그렇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지금, 이 순간에도 뒤에서 레온하르트 영지를 노리며 달려드는 적병들의 소리에 한시라도 빨리 이곳의 일을 해결하고 저곳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물론 저들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으로 보아 여기에서 벗어나긴 쉽진 않을 듯싶었지만….

그리고 그의 생각을 훤히 꿰뚫듯 밸스커드가 비릿하게 웃었다.

“조급하시겠습니다.”

“…….”

“하지만 안타깝게도 저의 기사들은 당신을 보낼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어 보여서 말입니다. 아니 그런가? 자네들.”

밸스커드가 앞을 막아선 수하들을 향해 물었다.

그리고 마치 그의 말에 반응하듯 세 명의 인형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명만 떨어지면 당장에 눈앞의 이든을 향해 달려들 기세였다.

사기 충천하는 놈들의 사기를 마주한 이든이 어깨에 놓았던 검신을 축 늘어뜨렸다.

그극.

기다란 팔에 검신이 땅에 닿자 찰나 땅을 긁는 소음을 만들어 냈으나, 잠시 뒤.

땅에 닿았던 검신 끝에 바닥이 움푹 파이기 시작한다.

스스스.

땅을 뚫어 버린 그것은 다름 아닌 오러였다.

검신을 타고 진득하니 피어오르던 마기가 점차 그 크기를 부풀려 가며 검의 형태로 자리 잡아 갔다.

검강.

이곳. 세간엔 오러 블레이드라 불리는 그것.

이를 본 세 인형의 눈에 호승심이 비친다.

밸스커드가 수하들의 반응을 보더니만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재차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나의 기사들이 당신과 당장 붙어 보고 싶나 봅니다.”

밸스커드가 앞의 수하들을 불렀다.

“델론즈, 사인, 바쿠.”

“…명령을.”

“이든 남작에게 보여 보아라. 너희들의 실력을.”

파아아앗!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인형 셋이 이든을 향해 쏘아졌다.

그 순간.

달려드는 그들을 향해, 이든이 한걸음 내디뎠다.

저벅.

그의 손에 쥐어진 흑색 검에 피어오른 검은빛의 오러 블레이드가 그의 손을 따라 고고히 움직여졌다.

마치 검무를 연상시키는 그 움직임은 역대 천마들이 오랜 세월 동안 고안해 낸 최강의 검 초식이었다.

이든의 검이 더없이 우아하게 선을 그리며 휘둘러지고, 잔상을 남기며 더없이 빠르게 앞으로 전진한다.

마계수라지옥검이 세 인형들을 향해 펼쳐지는 순간이었다.

콰르르르릉!!!

***

“단장님!!! 놈들의 기세가 만만치 않습니다. 속히 대피를!”

“멍청한!!!”

한 기사의 외침에 제라드가 버럭 소릴 질렀다.

“저곳에 이든 남작이 적의 수장들과 혈투를 벌이고 있다. 그들이 빠진 오합지졸들을 상대로, 영지민들을 놔두고 어찌 몸을 사릴 수 있단 말이더냐!”

듣던 기사가 입을 꾹 다물었다.

제아무리 적병의 수가 눈에 띄게 줄었고, 오합지졸만 남았다 한들 죽음을 불사하는 놈들의 기세는 만만히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한편으론 제라드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레온하르트 공작께서 돌연 자취를 감춘 뒤로 이곳에 영주 노릇을 해오며 영지민들을 보살피던 그였다.

숱한 몬스터의 침략에도 항상 선두에서 병사들을 이끌고, 목숨 바쳐 가며 이곳을 지켜오던 그가 제 한 몸 사리겠다고, 성을 버리고 갈 리가 만무했다.

기사가 비장한 얼굴로 고갤 주억거렸다.

“죄송합니다.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기사가 빼 든 장검에는 어느새 짙푸른 오러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단장님과 함께 이곳에서 뼈를 묻겠습니다.”

그리곤 대답도 듣지 않고, 곧장 쏟아져 오는 적병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말을 건넸던 기사가 몸을 내던진 곳.

그곳을 바라보던 제라드의 눈이 찰나 침중히 가라앉았다.

그의 시야에 몇 남지 않은 기사와 병사들이 사력을 다해 적병들을 막는 모습이 보였다.

개중엔 예비병인 노인도 있었고, 성인도 되지 못한 아이도 있었다.

그 잠깐의 순간에 모두의 얼굴을 담는 듯했던 제라드의 눈에 일순 안광이 쏟아졌다.

‘내가 조금 더 강했더라면. 그랬다면 여기 있는 모두를 지켜 낼 수 있었을까.’

죽은 이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전쟁에 만약이란 말은 없다.

하지만.

자신의 부족함을 알기에 끝없는 아쉬움이 몰려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젊은 나이에 기사가 되어 레온하르트 영지를 지켜온 지 수십 년.

쉰을 바라보던 제라드의 검에 일순 뚜렷한 검의 형태에 오러가 피어났다.

오러 블레이드.

깨달음이 아닌, 간절함으로 일평생 그의 발전을 막던 그 커다랗던 벽이 무너져 내린 것이다.

제국의 또 한 명의 소드 마스터, 제라드의 신형이 적병들을 막던 병사들을 비집고 가장 선두로 향했다.

그리고 그의 검이 자비 없이 몰아쳐 오는 적병들을 향해 휘둘러졌다.

휘익! 콰과과과아아앙!

벽을 뛰어넘은 제라드의 기세는 실로 대단했다.

쉴 새 없이 몰아쳐 오던 적병들로 인해 점차 성안으로 밀리던 아군들이 선두에 선 제라드를 필두로 적병을 휩쓸 듯 학살해 나가기 시작하더니 안으로 밀리던 기세가 재차 밖으로 향했다.

그렇다고 안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럼에도 적병의 수는 아직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너무도 많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채를 발하는 제라드의 눈에 한점 두려움이라곤 없었다.

벽을 뛰어넘으며 바닥을 보였던 그의 기운 역시 재차 새것처럼 채워졌기 때문이다.

제라드가 적들을 향해 검을 휘두르는 내내 속으로 몇 번이나 되뇌었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막아 낼 수 있다. 지금의 힘이라면. 지금의 나라면 충분히 가능하다!’

한 발짝, 한 발짝.

강하게 내딛던 그의 걸음이 성문 앞에 멈추었다.

그가 뒤에 따라붙고 있는 병사들에게 다 들리도록 소리쳤다.

“우리는 결코 쓰러지지 않는다!”

그의 외침 때문일까.

병사들의 사기가 더더욱 올라갔다.

제라드가 재차 입을 뗐다.

“우린 레온하르트의 후예다!!!!”

그리고 그 외침에 답하듯.

“으아아아아아아!!!!”

병사들이 하늘이 떠나가라 소리치며 선두에 선 그의 양쪽에 버티어 섰다.

기세는 삽시간에 기적처럼 역전되었다.

그리고 기적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뿌우우우우우!!!!

불현듯 뿔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들려온 곳.

국경 너머 저 먼발치의 숲이 마치 살아 움직이듯 양옆으로 갈라졌다.

그리고 그곳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희망’이었다.

“저, 저들은…!”

제라드의 안색이 환해졌다.

비단 그뿐이랴.

양쪽에 도열한 병사와 기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일순 적병들이 움직임을 멈추며 그들의 시선이 향했던 곳으로 고갤 돌렸다.

레온하르트의 전사들이. 그리고 이곳을 침략하려던 적병들의 시선이 하나같이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이목이 향한 곳.

그곳엔 갤러하드를 필두로 한 엘프족 전사들이 찬란한 빛을 등지며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스릉.

그들 가운데 선두에 있던 엘프의 왕 갤러하드가 검을 하늘 높이 치켜세웠다.

그리고 그들이 바라보는 영토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소리쳤다.

“위대한 숲의 전사들이여!”

갤러하드의 목소리가 열변을 토하듯 사방팔방에 메아리쳤다.

“나를 따르라! 그리고 눈앞에 저 흉물스러운 것들을 이 땅에서 몰아내어라!!!”

그때, 외치던 갤러하드의 말이 쏜살같이 앞으로 뛰쳐나갔다.

그것은 일종의 신호탄처럼 뒤에 늘어서 있던 엘프족 기병들마저 갤러하드를 따라 일제히 튀어나오게 만들었다.

그 모습은 마치 엘프의 정예병들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것 같았다.

기적에 더해진 희망.

그 때문일까.

전세는 삽시간에 지키던 자들로 하여금 유리하게 변하였다.

***

나아가고 나아가던 이든의 걸음이 우뚝 멈추어졌다.

그가 지나간 자리엔 검은빛이 잔상처럼 희미하게 남아 있었고, 잔상 밑에는 흉흉했던 사기가 이미 진즉에 꺼져 버린 세 구의 시신들이 쓰러져 있었다.

밟던 마계수라지옥검 초식의 끝자락. 도달한 그곳엔 밸스커드가 바로 코앞에 서 있었다.

가뜩이나 창백했던 밸스커드의 안색이 더더욱 하얗게 질렸다.

그가 떠듬거리는 입술로 입을 뗐다.

“…어, 어떻게… 어떻게 이런 일이….”

밸스커드는 지금 무엇을 본 건가 싶었다.

자신의 명을 받잡고 이든에게 쏘아졌던 그의 수족들이 발악 한번 해 보지 못하고, 사방에 분해된 채 싸늘한 주검으로 바닥을 구르며 버려져 있었다.

싸움이라고 부르기에도 창피한.

허무하다, 라는 말로도 부족한 싱겁던 시간을 끝낸 이든이 턱짓으로 뒤를 가리켰다.

밸스커드의 눈이 자연스레 그가 가리킨 곳을 향했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엔 자신들의 병사들을 향해 달려가는 엘프족 전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진퇴양난이란 말이 더 없이 어울리는 말도 안 되는 반전이었다.

그때, 그의 앞에 묵묵히 서 있던 이든이 비로소 입을 뗐다.

“자, 이제 너와 내 차례다.”

스으으으….

초식을 펼친 뒤, 상당한 힘을 쏟아 낸 탓에 오러 블레이드는 이미 진즉에 사라져 있었다.

하지만.

남은 불씨가 재차 화를 일으키듯.

그의 새하얀 검신에서 마기가 조금씩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이든이 재차 말을 이었다.

그의 입술 한쪽이 비릿하게 말려 올라가 있었다.

“이 질긴 악연을 여기서 끊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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