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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화. (145/250)

145화.

“이젠 정말 끝난 거겠지.”

잇단 전투로 이미 지저분해질 대로 더러워진 무복.

밸스커드의 살점이 사방에 뒹굴던 그 바닥에 이든은 별 상관없다는 듯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그가 한숨을 길게 푹 내쉬었다.

“하아….”

이든의 기감이 재차 레온하르트 성 쪽으로 향했다.

저쪽도 저쪽 나름대로 일을 마무리 지은 모양인지.

먼발치에서 들리던 창칼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적병들의 사기 역시 조금도 남지 않았다.

“힘들었다.”

힘들단 말이 입 밖으로 절로 나오던 그때.

피식.

이든이 난데없이 웃으며 입꼬릴 말아 올렸다.

힘들다니….

그 자신이 이런 말을 꺼내 본 것도 참으로 오래간만이었다.

언제였을까.

그것은 단지 전생에 그치지 않고 좀 더 까마득하게 거슬러 올라간다.

‘맹주와의 결전 때였지.’

무림의 제패를 꿈꾸며 숱한 싸움의 끝에 비로소 마주했던 이.

맹주이자 검신으로 불렸던 ‘남궁천.’

모든 경험을 통틀어 가장 강했던 상대였고, 적아를 떠나 그 자신조차 인정한 고수 중의 고수였다.

물론 그때 비하면 지금 힘든 것은 힘든 축에 끼지도 않겠지만, 그때만 못한다고 지금 고생한 것이 안 힘든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때.

“우아아아아아아아!!!”

함성이 들려왔다.

하늘조차 들썩일 거대한 함성.

그건 적들을 소탕해 낸 레온하르트 전사들의 함성이었다.

기쁨과 울분이 한데 뒤섞인 커다란 함성.

희생자들 역시 눈에 띌 정도로 많았지만, 슬픔은 뒤로 미뤄도 될 만큼 그들이 이룬 업적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당장에 무너졌어도 이상할 것이 없던 악조건 속에서 버텨 내 기적을 이뤄 냈으니 속 안에 들끓는 저 기쁨을 어찌 토해 내지 않을 수 있을까.

물론 이 모든 것이 이든 그 자신이 개입된 이후로 생긴 반전이었으나, 그 홀로 세운 업적이라곤 절대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영지를 지키기 위해 목숨 바쳐 싸워 간 병사들의 희생 역시 그토록 고귀한 것이었고, 큰 희생이 따를 것을 알고도 나서 준 엘프족 전사들의 희생 역시나 그 못지않게 값진 것이었으니까.

그렇게 함성이 끊이질 않으며 한참 이어질 무렵.

두두두두두.

멀찍이 떨어져 숨을 돌리던 이든의 곁으로 누군가 말을 타고 달려오고 있었다.

이든의 고개가 자연스레 기척이 들려온 곳으로 향했다.

그러곤 누군지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먼저 말을 꺼냈다.

“모두 고생 많으셨습니다. 갤러하드 님, 그리고 제라드 단장님도요.”

안장 뒤에 타 있던 제라드가 곧장 말에서 내리며 이든의 두 손을 꽉 맞잡았다.

“이든 남작.”

제라드가 더없이 깊게 고갤 숙였다.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남작 덕분에 우리 레온하르트 영지가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이든이 웃으며 고갤 저었다.

“그것이 어찌 저만의 공이겠습니다. 저는 단지 돌을 던진 것일 뿐. 물살을 일으킨 것은 레온하르트의 영지민과 엘프족 전사분들입니다. 저야말로 지금의 시련을 이겨 내 준 영지민들과 큰 결단을 내려 준 엘프족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이든의 얘길 듣던 갤러하드와 제라드가 마주 보며 웃었다.

일전 근처 숲에서 흑마법 발현 흔적이 발견되면서 엘프족 숲과 영지가 긴밀한 관계를 맺어 왔었지만, 이렇게 두 수장이 얼굴을 맞댄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그럼에도 마주 본 얼굴엔 더없이 환한 미소가 지어졌다.

잠깐이었지만, 서로 의지하고 등을 맞댄 채 함께 피 흘려 싸웠으니 자연스레 동료애가 생긴 것이다.

그때, 느껴지는 훈훈한 분위기에 마주 웃던 이든이 제라드에게 말을 건넸다.

“특히나 제라드 단장님께선 한 단계 더 높은 곳을 바라보셨군요. 축하드립니다.”

갤러하드도 그에게 찬사를 보냈다.

“축하드립니다. 제라드 단장님.”

제라드가 화답하듯 입을 뗐다.

“이제 퇴역해야 할 늦은 나이에 이만한 경지라니. 아직도 얼떨떨합니다.”

듣던 이든이 웃었다.

“검을 잡고 사는 이들에게 나이가 무슨 상관입니까. 참으로 잘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더 무슨 말이 필요할까.

그 한마디만으로도 벅차오르는 감정을 표현하기엔 충분했다.

그때, 제라드가 고갤 돌려 영지 쪽을 바라보았다.

적들의 침공으로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진 성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나저나 피해가 막심합니다. 재건하는 데 상당한 오랜 시간이 걸릴 듯합니다.”

제라드의 고심이 묻어나오는 말에 갤러하드가 손을 저었다.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

“우린 엘프들은 친구를 결코 배신하는 법이 없소. 한번 돕기로 한 이상. 병력을 최대한 동원하여 레온하르트 성의 재건까지 물심양면 돕겠소.”

수심 가득하던 제라드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 자신이 그만한 경지에 올랐다는 것보다 더욱 기뻐하는 표정이었다. 제라드가 깊숙이 고갤 숙였다.

“영지민들을 대표하여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훗. 겨우 이 정도로 무얼 그리 격식을 차리시오. 고개 드십시오.”

참으로 마음이 절로 훈훈해지는 광경이 아닐 수가 없다.

전쟁이라는 것이 그렇다.

큰 피해를 가져오지만, 이겨내는 순간. 더 큰 성장을 가져오는 법이다.

비록 많은 희생이 따랐으나, 이 일로 저들은 더욱 돈독해지고, 더욱 강해질 것이다.

당장 운공에 들어가려 했으나, 상황이 이러니 그 역시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이든이 일어서 수습에 한 손 거들려 하던 그때.

우우우우우.

난데없이 어둠이 몰려왔다.

아직 해가 저물려면 시간이 한참 남았건만, 정말 삽시간이란 말로도 부족할 만큼 하늘이 까맣게 물든 것이다.

마주 웃던 갤러하드와 제라드의 얼굴이 일순 심각해졌다.

“…이, 이 어둠은 대체?”

비단 그들뿐인가.

이든의 얼굴 역시 어느새 차갑게 굳어 있었다.

‘또 뭐가 남은 건가?’

먹이라도 번진 듯 새까맣게 물든 하늘엔 그 흔한 별 한 점 없었다.

거기에서 느껴지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방대한 사기였다.

이든 역시 그것을 느낀 것이다.

그리고 마치 경고하듯 사방 천지에 돌풍이 몰아닥쳤다.

후우우우우우.

전쟁의 막을 알리는 훈풍이 아닌, 세상을 갈기갈기 찢어 버릴 듯한 섬뜩하고 소름 끼치는 바람이었다.

그리고 그 바람의 시작점이라 볼 수 있는 영토 한가운데에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디에서 와서 언제 나타난 것일까.

부지불식간 모습을 드러낸 인형의 인상착의는 착 달라붙는 드레스를 입은 채로 굴곡진 몸매를 여실히 드러낸 여인이었다.

눈처럼 새하얀 피부에 한기마저 느껴지는 얼음장 같은 푸른 눈동자에 표정이라곤 일절 없어 보이는 무미건조한 얼굴.

여기까진 별다른 것 없이 그저 매력적으로 보이는 여인이겠으나, 특이한 구석이 있다면 그녀의 한쪽 얼굴 면에 기다랗게 새겨진 상처였다.

상처의 흔적은 마치 검이 지나간 자리로 보였다.

말짱히 떠 있는 눈 반대편에 새겨진 그 상처는 그녀의 한쪽 눈을 실명케 한 듯 내내 감겨 있었다.

그녀의 하나 남은 푸른 눈동자가 영토 사방을 훑었다.

“전부 몰살당했군.”

갤러하드와 제라드의 얼굴이 일순 새하얗게 질렸다.

단지 한마디 했을 뿐이건만, 그녀의 음성에서 느껴지는 어마어마한 사기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영지 전반을 훑던 여인의 기다란 드레스가 땅을 쓸며 반대편으로 돌려졌다.

어느새 그녀의 시선은 세 사내를 향해 있었다.

갤러하드, 제라드를 차례대로 한번 쓱 훑던 여인의 눈이 이든에게 멈추었다.

그를 응시하는 여인의 눈빛엔 흥미로운 빛이 일고 있었다.

“너로군.”

여인이 재차 입을 뗐다.

“네가 이든, 맞지?”

“……?”

마치 그 자신을 알고 있다는 그녀의 말투에 이든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듣던 이든이 조용히 입을 뗐다.

“당신은 누구지?”

“…훗.”

일순 여인이 입꼬릴 살짝 말아 올리며 웃었다.

매혹적인 얼굴에 미소라.

묘한 분위기에 응당 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을 뒤흔들 만큼 매력적인 얼굴이건만, 섬뜩한 공포가 느껴지며 온몸을 옥죄는 듯한 이 기분은 무얼까.

미소 짓던 여인이 입을 뗐다.

“역시 듣던 대로 건방지네.”

그때, 여인의 한쪽 눈에서 푸른 안광이 명멸을 반복했다.

그녀의 한 손이 위에서 아래로 저었다.

쿠우웅.

일순 보이지 않는 엄청난 힘이 갤러하드와 제라드. 그리고 이든을 짓눌렀다.

버티려 애썼지만, 소용없는 듯.

그들의 한쪽 무릎이 절로 굽혀지며 땅에 닿았다.

여인이 입을 뗐다.

“질문은 오직 나만 한다. 너는 대답만 하도록.”

바득.

이든이 이를 악물었다.

어떻게 해서든 일어날 작정인 듯 그가 땅을 짚으며 일어나던 그때.

“저세상으로 보내 주마!!!”

그나마 셋 중 가장 기력이 많이 남아 있던 갤러하드가 몸을 일으키기 무섭게 곧장 검을 뽑아 들며 여인을 향해 몸을 날렸다.

휘이익!

갤러하드의 검에서 피어오른 짙푸른 오러 블레이드가 휘둘러지던 그때.

“너에겐 관심 없다.”

휙.

여인의 남은 반대편 손이 그를 향해 휘저어졌다.

후우우우우우우욱!!!

일순 여인의 손을 뻗었던 방향으로 검은 돌풍이 몰아치며 달려들던 갤러하드를 날려 버렸다.

그의 몸이 무언가 거대한 힘에 부딪힌 듯 먼 곳까지 날아가 처박혔다.

갤러하드, 그 역시 엘프족의 수장이기 이전, 한때 검수로서 이름 날리던 소드 마스터 중 한 명이었다.

그런 그가 단지 손짓 한번에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쓰러진 것이다.

날아간 갤러하드에겐 아무런 관심조차 없다는 듯. 여인은 그쪽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오직 이든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든을 바라보던 여인이 턱을 매만졌다.

“참으로 신기하구나. 이 세상에 존재하여 발아래 둔 생명체는 무엇이든 훤히 꿰뚫어 볼 수 있거늘…. 너에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구나.”

이든을 향한 여인의 푸른 눈동자가 더욱 밝은 빛을 띠며 명멸했다.

“네놈, 정체가 무어냐. 아무래도… 이 세상 이가 아닌 것 같은데?”

듣던 이든의 얼굴이 찰나 굳었다.

일으키려 안간힘을 쓰던 그의 몸 역시 빳빳하게 굳었다.

“뭐…?”

이든의 입이 쩍 벌어졌다.

‘저, 저자가…. 어찌 나에 대해서 알고 있단 말인가…?’

그 자신에 대해 누구도 모르던 것을 앞에 의문의 여인이 낱낱이 꿰뚫어 본 것에 이든은 놀란 기색을 숨기지 못하였다.

그때, 입만 쩍 벌린 채 아무 대답 않던 이든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여인의 눈동자에 더욱더 흥미로운 빛이 뜨였다.

이든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걸까. 그녀가 입을 뗐다.

“다행히 생각은 읽어지는군. 그리고 예상대로 이 세상 것이 아니군…. 그러니 이 나조차도 들여다보지 못한 거겠지. 누구지? 너를 이곳으로 보낸 이는?”

순간, 여인의 몸에서 말로 표현 못 할 엄청난 사기가 줄기줄기 뿜어져 나왔다.

그 죽음의 기운은 오직 이든 한 사람만을 향해 손을 뻗어 오고 있었다.

스으으.

흡사 마기를 보는 듯 검은 그림자가 이든의 몸을 옥죄려던 그때.

검을 역수로 쥐어 가까스로 몸을 일으킨 제라드가 여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당장…! 이곳에서 꺼지거라!!!!”

휘몰아치는 돌풍을 뚫고 죽어라 달려든 제라드의 오러 블레이드가 여인을 향해 휘둘러지려던 그 순간.

여인의 검지가 쫙 펴지며 제라드의 심장을 노렸다.

여인이 가소롭다는 듯 입을 뗐다.

“꺼져?”

일순 여인 손가락에서 검은 섬광이 번쩍였다.

그리고.

그것이 끝이었다.

여인의 손가락에서 뻗어 나간 검은 섬광은 어느새 제라드의 심장을 뚫고 지나갔다.

기적처럼 소드 마스터란 경지에 오르던 제라드의 생은 그토록 허무하게 마감하고 말았다.

기감에서 제라드의 기척이 환상처럼 사라지자 이든이 고함을 질렀다.

“제라드 단장님!!!”

흡사 천둥이 터져 나온 듯한 외침.

하나, 이미 의식이 꺼져 버린 제라드에게 그의 외침은 차마 닿질 못하였다.

이든이 이를 악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얼굴이 그 어느 때보다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흉신악살을 절로 떠올리게 만들었다.

“이 개 같은 년, 죽여 버리겠어!!!”

목에 핏대가 터질 듯 바짝 섰다. 기함을 토해 내듯 소릴 질러 대던 그의 전신에 천마의 마기가 토해져 나오며 여인에게서 뻗어 나오는 그림자를 뿌리치듯, 첨예하게 대립했다.

그 순간.

파앗!!!

이든의 몸이 그녀를 향해 쏘아졌다.

쏘아진 그의 신형이 쥔 흑색 검에선 어느 때보다 섬뜩한 마기가 줄기줄기 피어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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