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결국, 그날 총회는 취소되었다.
좌호법 이명학의 판단하에 교주가 정상적으로 총회에 참가할 수 없다 여긴 것이다.
물론 그 판단은 너무도 정확했다.
“…….”
일어난 뒤로 여전히 침소에서 벗어나질 못하던 이든. 아니, 무진은 내내 넋을 놓고 있었다.
자신이 왜 이곳에서 정신을 차렸는지 여전히 이해를 못 하는 얼굴로 말이다.
무진이 가만히 허공을 응시했다.
‘돌아왔다.’
멍한 얼굴과 달리 그의 눈은 빠릿빠릿하게 주변을 훑고 있었다.
보면 볼수록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이곳은 그의 침소. 역대 교주들이 써 온 당대 그만의 장소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무진이 침대 한 부 짝에 놓았던 동경을 들고는 재차 들여다보았다.
역시나 익숙한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과거 그의 얼굴이 말이다.
‘정말 돌아온 건가…?’
하지만 돌아왔다고 하기엔 무언가 이상했다.
동경의 비춘 것은 필시 그 자신 얼굴이긴 했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젊은 시절 무진의 얼굴이었다.
전생의 신교로 돌아온 것으로 모자라, 시간까지 역행하여 돌아온 것.
현실이라 보기엔 기이했고, 꿈이라 보기엔 너무도 생생한 지금의 현실.
터덜터덜.
무진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한 얼굴로 침소 밖으로 나갔다.
과거에 수도 없이 걸었던 그 길을 되짚으며 한참을 걷다 보니 정원이 나왔고, 정원을 지나다 보니 익숙한 곳이 눈에 들어왔다.
신교 중앙의 연무장이었다.
연무장엔 동이 트기 무섭게 마인들이 수련에 열중 중이었다.
일 권, 일 권 내지르며 기합을 터트리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비로소 자신이 고향에 돌아왔음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왜 이곳에 돌아왔는지, 어째서 시간을 거슬러 왔는지 여전히 파악하지 못한 것은 매한가지였지만 말이다.
얼마나 지났을까.
넋 놓고 연무장을 바라보던 무진은 일순 걸음을 옮겨 정원을 향했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서였다.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내가 이든의 꿈을 꾼 것인가. 생각할수록 참으로 기이하지 않은가….’
도무지 정리되지 않는 생각들을 헤집으며 휘적휘적 정처 없이 걷다 보니 중앙의 연못을 지났고, 넓디넓은 정원 한가운데에 정자까지 와 있었다.
그때, 넋 놓고 걷던 무진의 걸음이 난데없이 멈췄다.
누군가 흥얼거리는 노랫소리가 들린 탓이다.
무진이 고갤 갸웃거렸다.
‘…누구지?’
주변에 신경을 쓸 틈이라곤 전혀 없던 와중에 들려온 목소리는 참으로 곱고 아름다운 음색이라 해도 과찬이 아니었다.
그 노랫소리에 홀리기라도 한 걸까.
무진은 저도 모르게 기척을 죽이곤 흥얼거리는 음성이 들려오는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음성의 주인은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정원 인근 꽃이 만발해 있는 화단에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누가 다가온 것도 모른 채 연신 노랠 흥얼거리는 여인을 본 무진의 걸음이 일순 멈추었다.
그의 얼굴이 빳빳하게 굳었다.
‘저 여인은….’
찰나 숨겼던 기척이 노출된 탓일까.
여인이 노랠 부르던 것을 멈추곤 화들짝 놀라며 무진이 있던 곳을 향해 홱 고갤 돌렸다.
“누구…! 어?”
날이 선 눈빛을 하던 여인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그녀가 무진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듯 입을 뗐다.
“교주님?”
여인과 눈이 마주친 무진 역시 넋 나간 얼굴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설화…?”
무진의 시선이 향한 곳.
거기엔 너무도 익숙한 한 여인이 서 있었다.
아니, 단지 익숙할 뿐이랴.
죽는 그 순간까지 그녀의 얼굴을 잊어 본 적이 없었다.
사랑하는 사이였냐고?
‘그럴 리가….’
전생의 그는 가정은 있었을지언정 사랑하는 사람은 없었다.
당연했다.
평생을 사랑으로 누군가를 만나 가정을 꾸려 본 적이 없었으니까.
과거 그는 신교 내 정치적인 목적으로 그의 입지를 좀 더 견고하게 하도록, 장로 중에 가장 입김이 강했던 칠 가문의 여식과 혼례를 올렸던 적이 있었다.
무진의 입장에선 장로 중 하나를 앞에 뒀으니 그의 입지가 견고해져 좋았고, 장로의 가문으로선 교주를 등에 업어 기세가 강해졌으니 좋았으니, 일거양득이 아닐 수 없던 상황이었다.
물론 그 과정에 희생된 설화의 입장에선 난생처음 본 남자와 일평생을 보내게 생겼으니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설화, 그녀를 더욱이 불행하게 한 것은 혼례, 그 이후였다.
빼어난 미모에 숱한 남정네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던 꽃다운 나이의 그녀가 난데없이 하룻밤 새 아녀자가 되었으니, 그것만으로도 속이 문드러질 지경이건만, 혼례를 치른 뒤로 무진은 단 한 번도 설화, 그녀에게 정을 준 적이 없었다.
당시 무진에게 있어서 그녀는 정치적인 수단이요. 그의 자식을 낳아 줄 수많은 여자 중에 하나에 불과하였다.
그런 그의 행동은 훗날 업보가 되어 돌아왔다.
아녀자가 된 뒤로 사랑이라는 것을 받지 못하고 살아왔으니, 설화의 성격은 점점 삐뚤어졌고, 그 화를 아랫것들에게 풀어 댔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보며 무진은 설화란 여자에게 더욱더 질려 버렸고.
훗날 무진이 죽을 때가 가까워져 와 뒤를 되짚어 보니 그녀가 먼저 떠올랐다.
자신과 혼례를 이룬 뒤로 사랑 없이, 평생을 외로이 보내온 그녀.
그녀 배로 낳은 자식 역시 빼앗기다시피 하며 다른 이에게 맡겨지고, 그렇게 죽는 그 순간까지 홀로 외로이 눈을 감았던 그녀.
설화의 인생이 그러했다.
그리고 무진은 죽는 날이 와서야 그녀에게 벌였던 자신의 잘못을 두고두고 후회하였다.
그런데….
그토록 미안해했고, 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그녀가 그의 눈앞에 떡 나타났으니.
무진의 넋이 나가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런 그의 뚫어지라 바라보는 시선 때문일까.
마주했던 설화가 의아한 얼굴을 하다 이내 평소대로 얼굴을 차갑게 굳혔다.
“여긴 어쩐 일이시죠?”
“……?”
“수련밖에 모르고 사시는 분이 이 시간에 정원엔 다 오시고 말이죠.”
“아….”
당시에 무진은 정말이지 눈 뜬 아침부터 잠들기까지 무(武)밖에 모르던 수련 광이었다. 그랬던 그였으니, 가뜩이나 정도 없던 설화를 더 찾아갈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녀의 성정이 삐뚤어진 것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무진이 멋쩍은 얼굴 볼을 긁적였다.
하나, 어쩌겠는가.
모든 것이 자신의 업보인 것을.
무진이 괜한 헛기침을 하고는 모르쇠 하며 그녀 곁으로 한 발짝 다가갔다.
“크, 크흠.”
그가 화단을 바라보며 입을 뗐다.
“그…. 꽃이 참 예쁘지 않소?”
화제를 돌리고자 꺼낸 얘기였지만, 사실 정말 예뻐서 한 말이기도 했다.
이든의 몸으로 살면서 거진 이십 년간 맹인으로 살아왔으니 멀쩡할 땐 몰랐던 것들이 너무도 아름다워 보였다.
뭐, 정작 듣던 설화의 입장에선 이 양반이 갑자기 왜 이러나 싶겠지만.
그녀가 대답도 않고 고갤 홱 돌렸다.
설화의 손이 재차 바쁘게 움직이며 화단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답이라도 해 주면 좋으련만, 말을 건넨 교주를 대놓고 무시라….
감히 교내에서 해서는 안 될 짓을 설화는 내키지 않고 해 대고 있었다.
뭐, 과거의 무진이었다면 이곳에 올 일도 없었겠지만, 그런 설화의 행동에 별달리 신경도 쓰지 않고 무시했을 것이다.
당연하지….
애초에 정이란 것을 일절 주지도 않았는데, 평소에 본다면 얼마나 본다고 그녀를 책잡겠는가….
하지만 지금의 무진은 과거 그때의 무진이 아니었다.
그가 미안한 얼굴로 멀뚱히 서서 안절부절못하는 모습 때문일까.
“앗!”
모른 척했지만, 내내 신경이 쓰던 설화가 일순 신음을 냈다.
화단을 정리하던 그녀의 손가락에서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이를 본 무진이 놀라더니 황급히 그녀 곁으로 다가왔다.
“어, 괘, 괜찮아요?”
“……?”
일순 평소 이든의 말투가 나와 버린 무진.
설화가 순간 의아한 표정을 했지만, 이도 잠시 그녀의 시선이 옷을 찢어 피가 나는 자신의 손가락을 감싼 무진에게 떼어지질 못하였다.
“아휴. 화단 정리하면서 딴생각이라도 한 거예요? 심하게 베었네….”
“…대체.”
“……?”
“대체 제게 왜 그러세요?”
“…네?”
“겨우 마음 잡았는데, 왜 다시 절 힘들게 하시나요?”
“…….”
설화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잔소릴 늘어놓던 무진의 입이 꾹 다물어졌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설화의 울음이 생각보다 금방 그쳤다는 것이다.
무진과 설화는 화단 근처에 있던 정자에 걸터앉아 있었다.
“…….”
힐끔.
무진이 곁눈질로 설화를 바라보았다.
‘예쁘긴 진짜 예뻤네.’
당시에는 몰랐는데, 지금에 와 돌이켜 보니 그녀는 정말 예뻤다.
제 아비를 꼭 닮아 눈매가 날카롭긴 했지만, 그래도 묘한 매력이 있던 여자였다.
‘이런 여자에게 정도 안 주었단 말이지…. 에라이 등신아….’
무진이 속으로 과거의 자신에게 욕을 한 사발 할 때쯤.
설화는 옆에서 내내 고갤 푹 숙이고 있었다.
조금 전, 그의 앞에서 눈물을 쏟던 자신이 부끄러워서였다.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만 들리던 한참의 정적 속.
무진이 불쑥 말을 건넸다.
“원망스럽죠?”
“……?”
“이해합니다. 여인들의 마음이 다들 그러하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 오순도순 사는 것. 근데 난데없이 저 같은 사람을 만나서 하룻밤 새 아녀자가 되어 버린 것도 모자라. 바깥양반이란 놈은 얼굴 한번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많이… 외로웠을 겁니다….”
무진의 물음에 그녀의 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단지 또 다른 물음만 들려올 뿐이었다.
“교주님 맞으…세요?”
“…….”
설화의 반응이 저런 것도 사실 이해는 되긴 했다.
그녀만큼이나 평소 냉담하기 짝이 없던 사람이 갑자기 딴사람이 되어 저런 식으로 말을 건네니.
이 상황이 당최 무언지 이해가 되지 않으리라.
무진이 낮게 웃다가 입을 뗐다.
“맞긴 맞는데. 그게 좀…. 복잡합니다.”
“……?”
암, 복잡하지.
그간 자신이 겪었던 일을 설명하려면 날을 꼬박 새워도 부족할 만큼 복잡했다.
물론 믿을지 말지는 오로지 듣는 사람 몫이었지만, 그리고 당연히도 듣던 설화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까부터 무슨 얘길 하시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더 할 말 없으시다면 이만 가 보겠습니다.”
한기 서린 음성을 내뱉던 설화가 정원을 벗어나기 위해 걸음을 옮길 때쯤.
무진이 그녀의 가녀린 팔목을 냉큼 붙잡았다.
잡힌 설화가 날카로운 눈빛을 하며 고갤 홱 돌리던 그 순간.
그녀의 눈에 서렸던 한기가 서서히 사라져 갔다.
지금, 그녀의 시야에 담긴 무진의 모습.
늘 먼발치에서만 봐 오던 위엄 넘치고, 냉정해 보이던 교주의 모습이 아니라. 한없이 따스하지만, 어쩐지 슬퍼 보이는 눈빛을 한 사내가 눈앞에 있었다.
설화가 차마 무진의 손을 뿌리치지 못할 때쯤.
그가 죄스러운 얼굴로 재차 입을 뗐다.
“미안해요. 정말…. 너무 미안했습니다….”
“…교, 교주님?”
그때, 무진이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두텁지만 따스한 온기가 느껴지는 무진의 손이 그녀의 손등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
무진의 영문 모를 행동에 설화는 퍽 당황한 듯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무진의 손을 뿌리치지 못하고 있었다.
당장 뿌리치기엔 그에게 느껴지는 온기가 너무도 따스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