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0화. (150/250)

150화.

잠시 후.

시비가 쪼르르 다가오더니 정자에 나란히 앉은 무진과 설화 앞에 다탁을 놓았다.

둘 사이에 흐르는 분위기 때문일까. 다탁을 가져왔던 시비가 눈치를 살피더니, 말없이 꾸벅 고갤 숙이곤 총총걸음으로 사라졌다.

내내 한마디 말없이 있던 설화가 찻주전자를 들어 올렸다.

역시나 명문의 여인다웠다.

그녀가 정갈한 몸가짐으로 무진 앞에 놓인 찻잔에 고고히 차를 따랐다.

쪼르르.

찻잔에 담긴 차에서 금세 향이 올라왔다.

우러나온 향을 보건대, 귀한 찻잎을 우린 것 같았다.

‘훗….’

따듯한 기운이 올라온 찻잔을 어루만지며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을 바라보던 무진의 입가에 작게 미소가 지어졌다.

‘살다 보니. 이런 일도 다 있네.’

과거엔 그녀와 이렇게 마주 앉아 차를 마셔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거늘.

참으로 별일이었지만, 나쁘진 않았다.

나쁘진 않긴 한데….

“…….”

‘어색하네.’

둘은 내내 대화 없이 찻잔에 입을 가져다 댔다.

설화 그녀야 난데없는 무진의 모습에 영문을 모르니 그렇다 쳐도….

무진은 평소 그토록 미안해하고, 보고 싶어 하던 여인을 앞에 두고도 쉬이 입을 떼지 못하였다.

그리고 어느새 차가 다 비워질 때쯤. 이대로 헤어지긴 아쉬웠는지 무진이 황급히 입을 뗐다.

“저기….”

“……?”

“같이 산책이라도 하겠소?”

“산책이요?”

차 마시는 내내 어색했던 분위기 탓에 자리가 불편해서 이 시간이 언제쯤 끝나나 했었는데, 갑자기 산책이라니….

설화가 쉬이 대답하지 않자, 무진이 재차 입을 뗐다.

“그 날씨도 선선하고 한데, 산책합시다. 우리.”

‘우리…?’

설화의 눈이 일순 동그랗게 뜨였다.

왜일까. 그녀가 저도 모르게 고갤 끄덕이고 말았다.

터벅터벅.

그렇게 무진과 설화는 나란히 걸었다.

정원을 거닐 때 역시 별다른 대화가 없던 것은 마찬가지지만, 가만히 앉아 차를 홀짝이던 것보단 덜 답답했는지 설화의 표정도 한결 나아 보였다.

그렇게 내내 그녀의 눈치를 살피던 무진이 불쑥 말을 꺼냈다.

“정원이 참 예쁘오. 신교에 이런 곳이 있는 줄 미처 모르고 살았군요. 그나저나 화단 꾸미는 취미가 있을 줄은 몰랐소. 어릴 적 취미요?”

“…….”

설화가 무진을 빤히 바라봤다.

무진이 의아한 얼굴을 하다가 물었다.

“내 얼굴에 뭐 묻었…소?”

“여기 화단.”

“……?”

“교주님이 선물해 주셨던 건데요.”

응…? 내가 그랬나?

무진이 어색하게 웃었다.

“아, 아아아…! 이제 기억 날 것 같기도 하고. 하하하!”

“…….”

“하하…하.”

무진이 이마를 짚었다.

‘등신아, 차라리 말이라도 말지.’

돌이켜보니, 자신은 정말이지.

무(武)에는 통달했을지언정.

여인에는 초짜였다는 것을 실감하는 그였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덧 뉘엿뉘엿 해가 저물고 있었다.

이번엔 설화가 불쑥 말을 건넸다.

“해가 지네요.”

“…그러게 말이오. 평소엔 몰랐는데, 해가 지는 모습이 이제 와 보니 참으로 운치 있고 좋군요.”

듣던 설화가 피식 웃었다.

무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곤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왜 웃으시오?”

“그냥 웃겨서요.”

“뭐가 말이오?”

“교주님에게도 이런 모습이 있었구나. 뭐 그런 거?”

듣던 무진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나이가 든 게지요.”

“…나이요?”

설화가 이해 못 하겠단 얼굴을 했다. 당연했다.

그녀가 아는 한 무진의 나이는 이제 겨우 이립이 채 안 되었으니까.

뭐, 반로환동이라도 했다면 지금과 같은 젊어 보이는 모습이 이해라도 되겠지만, 그럴 리는 없었다.

무진이 선대 교주에 이어 교주직에 오른 지 십 년도 채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을 시작으로 대화에 물꼬가 트였다.

내내 실없는 대화를 나누며 걷고 또 걷다 보니 어느덧 그녀의 침소에 다다랐다.

무진 옆에 있던 설화가 그에게 고갤 숙였다.

“오늘 나름 즐거웠습니다. 함께 시간 보내 주셔서 감읍할 따름입니다.”

“풉.”

난데없이 웃음을 터트리는 무진의 모습에 설화가 고갤 갸웃거렸다.

“…왜 웃으세요?”

“감읍은 무슨, 솔직히 말해 봐요. 궁금해서 내내 옆에 붙어 있던 것 아니에요? 이 양반이 오늘 뭘 잘못 먹었나 싶어서.”

설화의 얼굴이 굳었다.

정곡을 찔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내 그녀의 입가에도 미소가 지어진다.

그녀가 따라 웃었다.

“풉. 맞아요.”

그렇게 서로 한참을 웃다가 웃음 멎으니 재차 어색함이 밀려왔다.

설화가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더니 고갤 푹 숙였다.

평소 찬바람이 쌩쌩 불던 그런 모습이 아니었다.

참으로 그 나이에 어울리는 소녀 같은 모습이었다.

미소 짓던 무진의 시선이 그녀가 평소 묵던 건물의 외곽으로 옮겨졌다.

‘작구나….’

그녀가 묵던 건물의 외곽은 그 자신의 것과 비교해 참으로 작았다.

가만히 보던 무진이 입을 뗐다.

“안에 들어가 봐도 되겠소?”

“…네?”

설화가 넋 나간 얼굴로 되물었다.

“저, 저기 처소 안을요?”

“네.”

“왜, 왜요…?”

“왜긴. 그냥 궁금하니…까….”

일순 무진이 말끝을 흐렸다.

생각해 보니 참으로 낯부끄러운 말이었다.

시꺼먼 사내가 늦은 밤에 대뜸 다 큰 여인의 처소 안에 들어가 봐도 되겠냐니.

아무리 혼례를 올린 사이라지만, 그간 왕래라곤 전혀 없었으니 사실 혼례만 올렸다뿐이지 남남이나 다름없던 것을….

묘해진 분위기에 그가 얼굴을 붉히며 허둥지둥 입을 뗐다.

“아, 아아… 그, 그러니까 그게…. 펴, 평소 어찌 사나 궁금하기도 하고 뭐 불편한 것은 없으셨나… 뭐 아무튼 그런…. 잠깐.”

허둥대던 무진이 일순 말을 멈췄다. 그가 살짝 고갤 갸우뚱하더니 입을 뗐다.

무진이 괜히 큰소릴 냈다.

“아니, 생각해 보니까. 내가 처소 안 좀 살피겠다는 게 뭐 잘못인가?”

“누가 뭐래요? 괜히 큰소리는.”

“…큼! 아무튼, 보여 줄 거에요. 말 거에요?”

설화가 어깰 으쓱이곤 먼저 걸음을 옮겼다.

“따라오세요.”

결국, 무진 역시 설화를 따라 그녀의 처소 안으로 들어왔다.

“여기에요.”

설화가 비켜서며 뚱한 얼굴을 했다.

들어선 무진은 입을 다물지 못한 채 그녀의 처소를 훑었다.

“여기가 당신의 처소였군요.”

처소 내부는 밖에서 본 건물 외곽보다 더욱 작게 느껴졌다.

침실과 다탁이 있었고, 제법 잘 나가는 가문이니 방 안을 나름 화려하게 꾸미긴 했지만, 교주의 정실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그럼에도 너무도 작은 방 안이었다.

바라보던 무진의 눈엔 어느새 수심이 깊어 있었다.

“줄곧 이런 곳에 있으셨군요. 홀로….”

“네?”

중얼거리는 그의 말에 제대로 듣지 못한 설화가 되물었지만, 무진은 고갤 저었다.

“아니오….”

그리고 다시 방 안을 훑었다.

참으로 작은 세상이었다.

한창 사랑받던 나이에 시집온 그녀는 이 작은 세상에서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 줄곧 홀로 보내온 것이다.

무진의 얼굴에 착잡함이 묻어나왔다.

“당장….”

“……?”

“침소부터 옮겨야겠소.”

“왜요? 나름 괜찮은데, 아늑하고.”

“너무 좁소. 그리고…. 홀로 너무 동떨어져 있는 것 아니오?”

“…그런가?”

실제로 그녀의 침소는 신교 내 정원이 있는 외곽에 홀로 동떨어진 곳에 있었다.

신교에 모든 것은 교주의 소유.

정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보니 정작 정원은 있지만, 정원을 거니는 사람은 없었다.

사람 자체가 없는 인적이 드문 곳이란 뜻이다.

그리고 그런 적막함에서 오는 쓸쓸함을 달래기 위한 그녀의 유일한 낙은 이 아무도 찾지 않는 정원의 화단을 가꾸는 일이었을 것이다.

“내일 당장 사람을 시켜 짐을 옮기도록 하겠소.”

“하지만 전 여기가 좋은걸요? 화단도 있고….”

“정원도 같이 옮겨 주겠소.”

“…네?”

대뜸 침소를 옮기자더니 이젠 하다 하다 정원까지 옮겨 주겠단 그의 말에 설화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정원을 옮긴다고요? 그게 가능해요?”

“안 될 것 뭐 있소. 마음만 먹으면 산도 옮기는 것을.”

“…….”

요란을 떠는 무진의 모습을 말없이 보던 설화가 입을 뗐다.

“…다정하시네요.”

“……?”

“처음 알았어요. 교주님께서 이리도 다정하신 분이란 걸.”

설화의 눈이 자신의 처소를 훑었다.

“늘 생각했거든요. 앞으로 이런 좁디좁은 곳에 꼼짝없이 홀로 있어야 하나 하고….”

“…….”

“그래서 시집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매일 베개를 적시며 눈물을 흘렸었죠.”

듣던 무진의 마음이 한 차례 더 파장이 일 듯 아려 왔다.

하지만 이내 그녀의 얼굴에 지어지는 환한 미소.

그녀가 재차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제 알았어요, 교주님께서 내심 무엇보다 절 신경 써 주고 계시단걸….”

“설화….”

“하지만 정말 괜찮아요. 전 진심으로 이곳이 마음에 들어요. 마음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 말하니 어쩔 수 없군요. 알겠소. 하나, 이곳이 불편하거든 언제든 내게 말하시오. 내 바로 옮겨 드리리다.”

“예.”

대답하며 밝게 말하는 그녀의 미소를 보자니 과거의 죄책감을 조금 던 것 같지마는, 그럼에도….

여전히 마음이 무거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종종 들러야겠어….’

전생에 저지른 것이 있는데, 잘못을 뉘우치려면 그 정도 수고는 당연한 것이었다.

무진이 그렇게 마음을 다잡곤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날은 어느새 저물어 어둑해져 있었다.

설화 역시 그를 따라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오늘은 왠지 평소보다 시간이 빠르게 간 것 같아요.”

“그러게 말입니다… 내 너무 시간을 뺏은 것 같소. 내 이만 돌아가 볼 터이니, 편히 쉬시오.”

무진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마음으로 처소 밖으로 무거운 걸음을 옮기던 그때.

무진의 등에 대고 설화가 입을 뗐다.

“…교주님.”

“……?”

“오늘 즐거웠습니다….”

듣던 무진의 얼굴이 밝아졌다.

“나도 너무 즐거웠소. 내 종종 생각나는 대로 이곳을 찾아도 되겠소?”

설화가 웃으며 고갤 끄덕였다.

그렇게 그녀의 미소를 뒤로한 채 무진은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재차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 방 안엔 다시 평소와 같은 고요함이 밀려왔다.

무진이 나갔던 그곳을 한참이나 바라보며 시선을 떼지 못하던 설화의 몸이 일순 신기루처럼 사라져 갔다.

마치 이 모든 것이 꿈이었다는 것처럼 차츰 옅어지는 그녀의 모습….

작디작은 처소에 설화의 음성이 메아리처럼 울렸다.

‘소녀, 진심으로 교주님과의 시간이 즐거웠습니다….’

그렇게 완전히 사라져 가는 그 순간까지도 조금 전 설화의 얼굴에 피었던 환하디환한 미소는 여전하기만 했다.

점점이 사라진 메아리와 함께 끝내 아무것도 남지 않은 그녀의 처소에도 왠지 온기가 남아 있는 것 같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