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응?”
걷던 무진의 발걸음이 불현듯 멈추었다.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였다.
그의 고개가 조금 전 나왔던 설화의 처소로 돌려졌다.
‘…기분 탓인가.’
그녀의 처소를 그렇게 한참이나 바라보던 무진은 이내 어깰 으쓱였다. 그가 재차 자신의 처소로 걸음을 옮겼다.
걷는 내내 그의 발걸음이 너무도 가벼워 보였다.
***
무진이 앉은 자리 앞에 놓인 탁자엔 상다리가 휘어질 만큼 온갖 산해진미의 음식들이 가득 놓여 있었다.
조금은 과하다 싶은 상차림.
오래간만에 맛보는 중원의 음식이다 보니, 그간 먹지 못하던 원을 풀기 위해 작정이라도 한 듯 보였다. 물론 그 자리엔 술도 빠지진 않았다.
와구와구! 꼴꼴꼴꼴.
게걸스럽게 온갖 산해진미들을 한 점씩 뜯고는 술을 들이켜는 무진의 모습은 그야말로 걸신이 따로 없었다.
“…….”
“…….”
그리고 그의 앞.
좌호법 이명학과 우호법 장룡이 그런 무진을 넋 나간 얼굴로 바라보았다.
꼴꼴꼴꼴!
술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소리가 재차 시원하게 들려오고, 병나발을 불며 마시던 무진의 눈이 문득 그 둘을 향했다.
그가 입에 물던 술병을 떼곤 물었다.
“뭘 그리들 쳐다봐? 다들 먹지들 않고.”
“하하하… 하….”
“지, 지금 먹으려던 참이었습니다. 아, 아주 맛나 보이네요…!”
이명학이 어색하게 웃고, 음식과 술이라면 사정을 못 쓰던 장룡도 이제야 젓가락을 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입으로 쉬이 가지 않는 젓가락. 장룡이 멈칫하곤 무릅쓰고 무진에게 물었다.
“저… 교주님.”
“……?”
무진이 여전히 입으로 음식을 구겨 넣다시피 한 채 눈으로 ‘왜 불러?’라고 물었다.
장룡이 재차 말을 꺼냈다.
“며칠 굶으셨습니까? 어째 평소답지 않으신데요.”
“…? 영소에 어에은데?”
“네?”
“영소에 어엥야오!”
장룡이 알아듣질 못하자, 이명학이 장룡의 귓가에 대고 귀띔했다.
“평소엔 어땠는지 물으시는 것 같네.”
“…아!”
그제야 알아듣던 장룡이 곧바로 대답했다.
“그야, 평소엔 세상 느긋하게 점잖게 드시지 않으셨습니까? 지금 교주님의 모습은 마치…. 저 같은데요?”
“…….”
그, 그랬나아…?
듣던 무진이 한 손에 쥐던 오리 다리를 놓았다.
그리곤 내내 그의 앞에 놓인 채 한 번도 쓰인 적 없던 젓가락이 비로소 쓰임새대로 쥐어졌다.
그가 괜한 헛기침을 해 대었다.
“크, 크흠. 내가 그대들에게 점잖지 못한 모습을 보였구려.”
“…….”
명학과 장룡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제 와 그러시기엔 많이 늦은 듯합니다. 교주님’이라는 말을 목구멍 밖으로 뱉으려다 삼키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때, 내내 어색한 웃음을 감추지 못하던 이명학이 비로소 말문을 열었다.
“그런데 교주님.”
“……?”
“혹 이리 부르신 이유가, 따로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지요?”
명학의 말에 장룡 역시 그답지 않게 찔끔찔끔 음식을 주워 먹다가 무진에게 시선을 돌리곤 젓가락을 놓았다.
듣던 무진이 입을 뗐다.
“내가 뭐 따로 할 말이 있어야 자네들을 부르던 사이였던가?”
하긴….
그건 또 아니긴 했지.
무진의 말대로 이명학과 장룡. 그리고 무진 자신은 주종관계 이전에 더 없는 동료이자, 친구였다.
하지만 뭐랄까.
지금 명학이 보는 무진의 모습은 평소의 무진과 사뭇 달라 보였다.
마치 사람이 하룻밤 새 달라진 것 같다고나 할까.
평소 이명학이란 사람 자체가 보통 사람보다 훨씬 영민하다 보니, 무진의 변화를 눈치챈 것이다.
무진 역시 명학이 어떤 뜻에서 그런 말을 했는지 잘 알고 있었고.
무진이 웃으며 옆에 놓여 있던 새 술병을 들었다. 그리곤 공손히 받아든 이명학과 장룡의 빈 잔에 각각 따랐다.
쪼르르르.
술병의 굴곡진 모양을 따라 맑은 술이 떨어지며 고고히 채워지고, 마지막으로 무진이 자신 앞에 놓인 빈 잔에 자작했다.
그사이, 명학과 장룡의 시선은 무진에게서 떼어질 줄을 몰랐다.
그런 그들의 모습에 무진이 웃었다.
“거 사람들, 별로 잘생기지도 않은 얼굴 뚫어지겠구먼. 내 그냥 자네들 얼굴이 보고 싶어 이리 부른 것일세.”
“…….”
그때였다.
눈치 없기론 일등공신인 장룡이 넌지시 물었다.
“그…. 교주님.”
“……?”
“뭐, 죽을병이라도 걸리신 건 아니시죠?”
듣던 무진이 얼굴을 와락 구겼다.
“거, 술맛 떨어지게.”
옆에서 이명학이 거들었다.
“자네, 그게 무슨 말인가? 할 말이 있고 안 할 말이 있지. 크흠!”
장룡이 볼을 긁적였다.
“아니, 그냥…. 그렇지 않은가! 교주님께서 평소답지 않게….”
“…….”
“…너무 온화하신데?”
…뭐?
무진의 눈이 동그랗게 뜨이고, 장룡이 그답게 눈치라곤 없이 주절주절 떠들어 댔다.
“지금도 그렇단 말이지. 원래 같았으면 그런 거 묻자마자 바로 주먹이 날아와야 했거든? 근데 그냥 웃고 넘기셨단 말이지.”
이명학이 힐끔 무진의 눈치를 봤다.
혹여 교주가 열이 받아 평소와 같이 주먹부터 날아갈까 싶어 곧바로 자릴 피할 준비를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괜한 걱정이었다.
정작 당사자인 무진은 쓴웃음을 지으며 과거 자신의 행실에 깊은 반성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과거의 내가 참…. 괴팍하긴 괴팍했나 보구만. 어째 반응들이 하나같이들 똑같어?’
어쩌면 꿈인지 생시였는지 모를 이든으로서의 삶이 그를 조금은 온화하게 만든 건가 싶기도 했다.
찰나 그때의 삶을 떠올렸던 탓일까.
문득 이든의 가족들과 친구들이 떠올랐다.
‘다들 좋은 사람들이었지.’
그것이 꿈이었던 뭐였던 간에 가장 아쉬운 것은 단 한 번도 그들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무진의 가슴 한쪽에 쓸쓸함이 들어찼지만, 이제는 무진, 그 자신의 삶에 집중해야 할 때였다.
그가 채웠던 술잔을 높이 들었다.
“자자, 어서들 한 잔씩들 걸치자고. 내 경황이 없어 불러 놓고 내 배만 채우고 있었구만.”
무진이 잔을 내밀자. 명학과 장룡도 잔을 들었다.
쨍.
잔끼리 부딪치는 청아한 소리가 들려오고, 곧바로 술을 들이켜는 세 사람.
독한 화주가 목을 타고 넘어갔지만, 어쩐지 오늘따라 유독 이 술이 달게만 느껴졌다.
무진이 웃으며 재차 빈 잔에 술을 채웠다.
그리곤 가득 채워진 잔을 들곤 달이 비추는 열린 큰 창을 향해 사뿐히 걸어갔다.
명학과 장룡은 그런 무진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였다.
창밖 넘어 신교의 풍경을 그렇게 한참을 바라보던 무진이 천천히 입을 뗐다.
“가까이 있을 때는 몰랐는데, 이리 보니 이젠 알겠어. 참으로…. 내가 이곳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말이야.”
“…….”
“…….”
평소 그답지 않은 참으로 묘한 얘기였다.
하지만 명학과 장룡은 굳이 그에 말에 어떠한 토도 달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무진의 얘길 들었다.
그가 재차 말을 이었다.
“…장룡, 명학.”
“예.”
“예.”
“보고 싶었네. 친구들이여.”
다 큰 사내들끼리 하기엔 낯간지러울 수 있는 말이건만, 두 사내는 무진의 얘기를 그저 묵묵히 들으며 미소 지을 뿐이었다.
그렇게 가만히 무진의 등 뒤를 바라보던 명학이 입을 뗐다.
“…다만 더욱 그리운 것이 있으시지요?”
“응?”
무진이 놀라며 고갤 돌렸다.
정곡을 찔린 느낌이었다.
한데, 그것을 저이가 어찌 알았단 말인가.
그사이, 이번엔 장룡이 명학에 이어 입을 뗐다.
“저희 역시 간만에 교주님을 뵐 수 있어 참으로 즐거웠습니다.”
“둘 다 무슨 말인가. 조금 전 말은 또 뭐고, 즐거웠다니?”
무진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했지만, 그를 바라보는 명학과 장룡은 여전히 푸근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가셔야 하니까요.”
“아직 끝내지 못한 일이 있지 않으셨습니까?”
무진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그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자, 자네들…. 무얼 알고 하는 소린가?”
“…….”
“…….”
대답은 없었다.
다만 저들의 얘기로 인해 확실하게 알게 된 것은 이곳이 그가 알던 세계가 아니란 것이다.
좌호법 이명학과 우호법 장룡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선 둘이 고갤 푹 숙이고는 무진을 향해 포권지례를 올렸다.
두 사내가 우렁우렁한 음성을 뱉으며 입을 뗐다.
“교주님의 그 꿈! 그곳에서 반드시 이루소서!”
그때였다. 무진에게 포권을 올리던 이명학과 장룡의 신형이 차츰 신기루처럼 사라져 갔다.
차츰 흩어지는 그들의 모습에 무진이 당장에 달려가 손을 뻗었지만, 이상하게도 그들과 무진의 거리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무진이 그들의 이름을 더없이 크게 외쳤다.
“명학! 장룡!!!”
대답은 없었다. 다만 두 사내는 모습이 사라져 가던 그 순간까지도 미소를 잃지 않으며 무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진이 재차 둘의 이름을 외쳤다.
“명학! 장룡…!!!!”
하나, 여전히 들려오지 않는 대답.
그저 무진의 외침만이 메아리처럼 되돌아올 뿐이었다.
명학과 장룡 두 사내가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을 땐, 그들이 있던 침소마저 서서히 사라져 가고 있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사라졌을 땐, 사방은 그저 깜깜한 어둠뿐이었다.
***
“어? 일어났네?”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찌, 정신이 좀 드나?”
문득 들려온 그 소리에 무진이 급히 정신을 차리려 눈을 떴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세상은 온통 어둠뿐이었다.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몸을 일으키던 그때.
그의 몸 역시 말을 듣지 않았다.
온몸이 쇠사슬로 둘둘 묶어 놓은 것처럼 무거웠다.
무진이 입을 뗐다.
“여긴…. 어디요?”
무진이 물었다.
그것은 중원의 말투였다.
“…뭔 말이야? 그건. 알아듣게 좀 말해 봐.”
“…….”
무진의 표정이 굳어졌다.
들려온 대답이 중원의 언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낯선 언어는 더더욱 아니었고, 그건 다름 아닌 아슬란 제국의 언어 아니던가.
무진. 아니, 이든이 길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꿈이었나.’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상황이었다.
조금 전 거기선 이쪽 일이 마냥 긴 꿈처럼 느껴지더니만….
천근만근 무거운 몸과 여기저기 쑤셔오는 뼈마디를 느끼고 나서야 다크 스타와의 일전이 떠올랐다.
확실히 이곳이 진짜 현실이라는 것을 여실히 느끼게 해 주는 순간이었다. 이든이 중원의 언어가 아닌, 아슬란 제국의 언어로 재차 물었다.
“후우…. 여긴 대체 여긴 어딥니까?”
“여기? 어디긴 내 보금자리지.”
그러니까.
그 보금자리가 어디냐고.
라고 따져 묻고 싶었지만, 아무리 봐도 저 괴팍한 인간이 자신을 구해 준 은인인 것 같아서 차마 그 쓴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진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이든이 기감을 끌어올려 주변을 살피려는 순간이었다.
“…응?”
이든이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을 했다.
‘뭐지…?’
기감이 올려지지 않았다.
몸이 의지대로 말을 듣지 않는 것 같아 재차 시도해 봤지만, 역시나 마찬가지인 상황.
그가 여전히 모르겠단 표정을 하며 단전을 훑던 그때.
이든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 이게….”
“……?”
“이게… 대체 무슨…!”
흡사 정신이 나간 듯한 모습이었다.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허둥대던 그의 얼굴이 점차 흙빛으로 물들더니 이내 넋을 놓아 버렸다.
그가 이토록 충격을 받은 이유.
그것은 마땅히 있어야 할 그의 단전이 느껴지지 않아서였다.
단전이 느껴지지 않으니, 당연히 마기 역시 한 줌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든이 여전히 넋이 나간 듯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다, 단전이… 파괴됐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