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무인에게 있어 제 목숨보다 소중한 것이 ‘무공’이다.
그 무공에 근간이 되는 것이 바로 ‘단전’이고, 그 말인즉슨 단전을 잃었다는 것은 자신의 무공을 잃었다는 것과 같은 맥락의 이야기였다.
지금 이든의 상황이 그러했다.
그는 자신의 단전이 파괴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내내 입을 열지 않았다.
조금 전, 정신을 차렸을 때 이곳이 어딘지 묻던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말도, 표정도 일절 없이 그저 죽은 것처럼 누워 있던 이든을 향해 낯선 목소리가 한참 뒤에야 재차 들려왔다.
“뭐라도 잃어버린 겐가? 넋 나간 모양새가 아주 중한 것을 잃은 듯한데.”
“…….”
“진짜 중요한 건가 보네. 은인한테 대답도 없는 것을 보면.”
“…….”
“에혀! 앓느니 죽어야지. 앓느니 죽어. 내가 그쪽 살리겠다고 아주 개지랄을 떨었는데, 고맙다는 말 한마디는 고사하고 아주 그냥 말을 씹어 대는구먼. 어떻게 씹는 맛은 좀 있고?”
아무리 목숨을 구해 준 은인이라지만, 어쩜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마다 저토록 사람 배알을 뒤틀게 할 수가 있는 걸까.
사람 속을 콕콕 찌르며 조잘조잘 떠들어 대는 그의 말에 내내 묵묵부답이던 이든의 무거웠던 입이 비로소 열렸다.
“…그러지 마셨어야 했습니다.”
“응? 뭐라고?”
“…절 살리지 마셨어야 했단 말입니다.”
“…엥?”
“…쓸데없는 짓 하신 겁니다. 대체 저를 왜 살린 겁니까? 그냥 죽게 내버려 두셨어야지요.”
“…….”
“전 제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보잘것없는 한낮 껍데기만 남았다 그 말입니다!!!”
“…….”
“모든 것을 잃은 이딴 몸으로 생을 연장해 봤자. 남은 것은 그저 지옥 같은 나날일 뿐인 것을….”
“…….”
“은인께는 죄송한 얘기지만 지금이라도 절 죽여 주십시….”
“가관이군.”
“…….”
“듣자 듣자 하니 아주 가관이야. 기껏 살려 줬더니 뭐? 죽여 줘? 이게 말이야. 방구야?”
조금 전, 사람 속을 긁던 장난스러운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은인의 입에선 더없는 노기가 터져 나왔다.
입을 떼기 무섭게 울분을 터트리던 이든의 입이 그만 꾹 다물어졌다.
은인이 재차 말을 이었다.
“그리고 껍데기만 남은 건 또 어때서! 껍데기라도 남은 것이 어딘가. 세상엔 그 껍데기도 온전치 못해서 매일을 지옥같이 살고 있단 사람도 있다는 것을 모르나?”
“…….”
“망가진 몸이야 조금 더 정양하면 되고, 키도 훤칠하고, 얼굴도 잘생겼겠다. 눈이야 뭐…. 그건 원래부터 안 보이던 것 같으니 그냥 넘어가고. 무튼, 다시 시작할 기회를 얻은 것 아닌가.”
“…다시 시작이요?”
“그래. 다시 시작.”
“하. 하하하….”
듣던 이든의 입에서 바람 빠진 듯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
그리고 일순 뚝 멈춘 웃음.
이든이 재차 입을 뗐다.
“…전 뼛속까지 무인이었던 놈입니다. 오직 하나의 길만 보고 긴 세월을 살아온 제가 무(武)를 논하지 않으면 앞으로 무엇을 바라보고 이 남은 인생을 살아간단 말입니까.”
“…….”
맞는 말이었다.
그는 전생의 무진이었던 삶을 포함에 현재 이든의 삶에 이르까지 오로지 무(武) 하나만 보고 살아온 이였다.
그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이.
인생 자체가 온통 그것이었던 자에게 앞으로 이를 포기하고 살라면 어느 누가 현실을 쉬이 받아들이겠는가. 듣던 은인 역시 차마 말을 잇지 못하였다.
그렇게 한참이나 이어진 정적.
모든 것을 잃은 이의 얼굴로 뉘어 있던 이든이 불쑥 말을 꺼냈다.
“…그래도 죽어 가는 저를 살리려 애쓰신 건….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암, 애 많이 썼지.”
비록 단전까진 살리진 못하여 무공이 폐(廢)되긴 하였지만, 어찌 됐든 그 죽어 가던 이든을 이만큼 살린 것을 보면 대단한 실력이라 볼 수 있었다.
왜 아니겠는가.
이든은 다른 것도 아닌 한정적인 호연지기까지 죄다 끌어 써 생명까지 담보로 하여 싸웠다.
사실상 데스 스타와의 결전이 끝나면 죽었어야 하는 것이 정해진 수순이었다.
한데, 그런 이를 어떻게든 아득바득 살려 낸 것이니 불가능한 것을 해냈다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때 은인이 재차 입을 뗐다.
그의 목소리가 어째선지 잔뜩 심통이 나 보였다.
“근데 말이야.”
“……?”
“자네도 알지? 인사가 늦어도 너무 늦었다는 거. 아까는 뭐 왜 살렸냐 심통까지 부리고 말이야. 나 참.”
“…….”
“나 아까 진짜 상처받았다고.”
“…죄송하게 됐습니다.”
“훗.”
끝까지 늘어지며 생떼를 부리는 은인의 모습에, 이든이 결국 그에게 마지못해 사과했다.
듣던 은인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아이 뭐, 됐어! 내가 사과받자고 이런 얘기 한 건 아니고, 그냥 그렇다는 거지 뭐!”
“…죄송하다고요.”
모든 것을 잃고 생기라곤 없이 무표정을 일관하던 이든의 얼굴이 일순 와락 구겨졌다.
이를 본 은인이 배를 잡고 웃어 댔다.
“자네 놀리는 맛이 있는 친구구만! 낄낄!!!”
“…….”
“그래도 죽을상이던 아까 표정보단 지금 그 표정이 훨씬 보기 좋아.”
“…….”
“자, 의식도 차렸으니, 기운까지 차리려면 무엇보다 잘 먹는 게 가장 중요한 법이지. 내 자네가 먹을 음식을 내오도록 하지. 잠깐 여기서 기다리게.”
그렇게 은인이 어디론가 걸음을 옮기던 그때.
쿵. 쿵. 쿵.
그가 걷는 내내 무언가 바닥을 찧는 듯한 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
이든이 이를 의아하게 여겼으나, 의문은 그리 오래가지 못하였다. 남에게 신경 쓸 만큼 그 자신이 그리 여유로운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음식을 가져온 은인이 이든을 보더니 놀란 소릴 냈다.
“오호! 이제 혼자서 일어날 정도는 되나 보군?”
“예. 보다시피….”
말은 이리하지만, 사실 속으론 죽는소리가 절로 나오는 이든이었다.
전신이 심각한 타박상에 뼈마디는 부러졌는지 죄다 뒤틀려 있었고, 온몸엔 시퍼런 멍과 찰과상들로 그득했으니 그야말로 살아 있는 것이 용할 정도의 부상이었다.
그뿐이랴. 심지어 회복도 너무나 더뎠다.
단전이라도 멀쩡하여 내공 운용이 가능했더라면 회복이라도 빨랐을 것을. 이 만큼에 부상에 내공도 전무하니 대체 얼마나 정양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을 정도였다.
“입맛이랄 게 있을 리 없겠지만, 그래도 일단은 뭐든 먹어야 하지 않겠나.”
은인은 이든의 앉은 자리 앞에 탁자를 깔곤 음식을 놓아주었다.
식사라곤 별다른 것이 없었다.
고기 좀 몇 덩이 넣은 스튜가 전부였다.
이든이 손을 더듬고는 앞에 놓인 숟가락을 들었다. 그러곤 악을 쓰다시피 팔을 들어 음식을 입에다 쑤셔 넣었다.
움직일 때마다 온몸이 비명을 지르는 듯 통증으로 아려 왔다.
그렇게 몇 번 숟가락질하다가 도무지 안 되겠는지 결국엔 손을 놓았다. 이든이 입을 뗐다.
“잘 먹었습니다….”
“…많이 남기긴 했지만, 그래도 몸 상태를 봐선 꽤 잘 참았군. 고생했네. 앞으로 한동안 숟가락질조차도 고통스러울 거야. 하지만 참아 내야 하네.”
이든이 말없이 고갤 주억거리곤 기댈 곳을 찾아 손을 더듬었다.
그러자 손에 잡히는 벽.
그가 엉덩이를 질질 끌어 움직이곤 벽 가까이 가져가 등을 기대었다.
이든이 한숨을 푹 내쉬곤 입을 뗐다.
“이곳이 은인의 보금자리이시라고요.”
“그렇네. 여기가 내 집이지.”
“…눈이라도 보이면 좋겠는데, 어떤 곳인지 감이 잡히질 않는군요.”
듣던 은인이 씩 웃었다.
“그리 나쁘진 않은 곳이지. 아마…. 아슬란 제국의 황실보다 더 화려하고 살 만한 곳일걸?”
“…….”
이든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자가 의술은 상당할지언정, 언행이 괴팍한 것이 정상은 아닌 것 같다고.
그런데 그때.
그 은인 되는 자가 불쑥 말을 꺼냈다.
“뭐? 내가 미친놈 같다고?”
“…예?”
“방금 속으로 그리 생각했지 않은가. 의술은 뛰어날지언정 괴팍하고 또라이 같다고!!!”
“…….”
일순 이든이 넋을 놓았다.
입 밖으로 꺼내지도 않을 말을 은인 되는 자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맞췄기 때문이다.
그리곤 문득 떠오른 것이 있는지, 이든이 넌지시 물었다.
“…혹 엘프이십니까?”
오래전, 엘프족 숲을 찾았을 때, 그들의 왕 갤러하드가 그의 생각을 꿰뚫어 본 독심술이 떠올라 물은 것이다.
듣던 은인이 이든의 물음에 껄껄 웃었다.
“크하하하! 자네 정말 재밌는 말을 하는군. 나보고 엘프라고!? 크크큭!”
“…….”
이든의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이게 뭐 그리 웃긴 얘기라고….
저리 떠나가라 크게 웃는지 이해가 안 갔기 때문이다.
은인이 재차 입을 뗐다.
“하긴…. 엘프족 중엔 간혹 상대의 생각을 읽고 정신 전달이 가능한 이들이 있다는 얘길 들은 적이 있지. 아마 그들의 왕족이 그런 능력을 타고났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말이야. 아 참, 갤러하드 그 녀석이 아직 그쪽 숲 왕 맞지? 그놈이 실력은 좋은데, 허당 기가 있어서 말이야.”
‘응?’
듣던 이든이 고갤 갸웃거렸다.
그 녀석이라니?
그가 넌지시 물었다.
“…혹 갤러하드 님과 아는 사이이십니까?”
“아는 사이냐고? 알다마다.”
“…친구분이십니까?”
“친구?”
“…….”
“그놈이랑 나랑 친구?”
이든 딴엔 하는 얘기를 가만 들어 보니 둘 사이가 친한 것 같아 물은 것이었는데, 듣던 은인이 재차 배를 붙잡고는 박장대소하기 시작했다.
“으하하하! 아이고! 아이고오오! 배야. 내 살다 살다 이런 얘기도 다 듣는구먼. 역시 오래 살고 볼 일이라니까. 낄낄!”
“…….”
“친구? 친구는 얼어 죽을! 그 새끼 내 꼬봉이야.”
“…예?”
“못 들었어? 그놈 내 꼬봉이라고.”
“…꼬봉…이요?”
“그렇다니까! 그놈한테 검술 가르쳐주고 소드 마스터 만들어 준 게 나예요. 나!”
‘그건 보통 스승과 제자 관계라 하지 않나?’
근데 잠깐, 뭐라고?
‘갤러하드 님에게 검술을 가르쳤다고?’
이든이 무얼 들었나 싶은 얼굴로 재차 물었다.
“지금…. 무어라 하셨습니까. 갤러하드 님께 검술을 가르치신 적이 있으시다고요?”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묻는 이든의 모습에 은인이 쑥스러운 듯 머릴 긁적였다.
“에이 뭐, 별건 아니고. 아니 엘프면 응당 활만 잘 쏘면 그만인 것을 곧 죽어도 검 쓰는 법을 배우고 싶다잖아. 그래서 뭐, 가르쳤지. 근데 그놈이 원체 재능이 없어서 말이야… 거의 백 년을 가르쳤지 아마?”
“…백 년….”
백 년.
인간으로 치면 천수를 누리다 죽는 수명이었다.
그런데 이든의 앞에 은인은 갤러하드를 백 년간 가르쳤다 그리 말했다. 말인즉슨 앞의 이자 역시 인간이 아니란 뜻.
갤러하드를 꼬봉이라 불렀으니, 같은 엘프는 아닌 듯한데….
기인을 앞에 둔 이든의 얼굴이 조금 진중해졌다.
이든이 그간 은인에게 보여 준 적 없던 진중한 얼굴로 물었다.
“혹, 절 살려 주신 은인분의 존함을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내 이름? 보잘것없는 내 이름은 왜 궁금해하실까. 나중에 뭐 살려준 은혜라도 갚으려고?”
“…알려 주시기 곤란하신지요?”
“뭐, 그리 곤란한 건 아니고. 내 이름은 말이야….”
“…….”
“슈렌 레온하르트. 세간엔 난데없이 사라진 레온하르트 영지의 공작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
“……!”
믿기지 않는 얘기에 이든의 입이 쩍 벌어졌다.
하지만 놀라기엔 아직 일렀다.
은인, 슈렌 레온하르트가 재차 말을 이었다.
“사실 그건 유희차 인간으로 잠깐 싸돌았을 때 얘기고. 실제 내 정체는 말일세.”
이든이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드래곤이라네.”
“……!”
“데드 스타, 자네가 족쳤던 그 쌍년과 같은 종족이란 말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