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수하의 보고를 받던 베이글이 밖에서 들려온 소리에 얼굴을 와락 구겼다.
“어떤 정신 나간 새끼가 감히…!!!”
얼굴을 악귀와 같이 일그러뜨린 그의 모습에 주변에 여인들도 그의 안채에 있던 수하들마저 몸을 바르르 떨던 그때.
침대에 누워 있던 베이글이 완전히 몸을 일으키곤 한쪽 옆에 두었던 대검을 쥐어 들었다.
쾅!
그가 문을 걷어차다시피 하며 곧장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망언의 근원지를 찾아 두리번거리던 베이글의 시야에 한 거구의 청년이 들어왔다.
그와 눈이 마주친 거구의 청년이 일순 비릿하게 웃었다.
위풍당당한 풍채만큼이나 더없이 자신만만한 모습.
“이…!”
이를 본 베이글이 이를 악물었다.
그의 악명은 이 주변에서 꽤나 유명한 편이었다.
그의 악명을 들어 본 사람이라면 다짜고짜 이 땅에서 쳐들어와 저런 망발을 할 수도 없을뿐더러, 그 자신을 앞에 두고 저리 건방진 모습을 보여서도 안 되는 것이었다.
그때.
두다다다다!
조금 전 소란이 들려오기 무섭게 사방에 대기하던 그의 수하들이 달려와 소란을 피우던 청년을 에워쌌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베이글이 여전히 노기가 가시지 않은 얼굴로 말문을 열었다.
“네놈이냐?”
“……?”
“겁도 없이 나의 영지에서 소란을 피운 녀석이.”
“풉!”
일순, 베이글의 수하들에게 둘러싸인 채 마주 서던 청년이 웃음을 터트렸다.
“영지는 개뿔. 다 죽어 가는 마을 주제에.”
그 모습에 듣던 베이글의 눈에 핏발이 섰다.
“이놈이…!”
그때, 그 청년이 재차 입을 뗐다.
“됐고. 다 듣고 왔어. 며칠 전에 이곳에 왔던 노부부 어디다 숨겼어?”
“노부부?”
듣던 베이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며칠 전 이곳에 찾아온 노부부라면 재산을 뜯어내기 위해 그가 시켜 수감시켜 놓은 부잣집 노부부밖에 없었다.
비로소 전말을 파악한 그가 비릿하게 웃었다.
“호오. 어느 놈이 이리 겁대가리 없이 구나 했더니만, 그 노인네들을 찾으러 온 손님이었군…. 그래서 돈은 가져왔나?”
“돈? 무슨 돈?”
“그 노부부를 찾으러 온 것 아닌가? 보아하니 그 노인네들의 호위 기사쯤 되는 것 같은데.”
“아 그래서 얌전히 데려가고 싶다면 돈을 내라?”
베이글이 웃으며 손뼉을 쳤다.
“그렇지! 생각보다 말은 잘 통하는 놈이로군. 그들을 데려가고 싶다면 돈을 가져와. 물론 한두 푼 정도론 어림없고, 그들이 가진 재산이라 할 만한 것들은 모두 가져오도록. 그럼 내 그 노인네들을 얌전히 넘겨주지.”
듣던 청년이 볼을 긁적였다.
“미안한데, 난 너희들하고 거래를 하러 온 게 아닌데?”
“뭣이?”
“그리고 딱히 그분들에겐 재산이라 할 만한 것도 없고.”
“없다고?”
“그들이 뭐라고 그런 재산이 있겠어?”
“웃기는 소리. 재산이 없단 놈들이 사두마차를 끌고 다녀?”
“아니 진짜라니까?”
“닥쳐라!”
베이글이 이빨이 남아나지 않을 기세로 이를 갈 듯 입을 뗐다.
“다시 한번 말하지. 그 노인네들 되찾고 싶으면 그들의 있는 재산이라곤 전부 털어와서 이리로 가져와. 최대한 빨리 가져오는 것이 좋을 거야. 그렇지 않으면 고문의 강도가 점차 강해질 테니.”
“지금, 뭐라고 했어?”
“…응?”
그때였다. 내내 장난스럽게 대꾸하던 청년의 전신에서 살기가 줄기줄기 새어 나오고 있었다.
마주 선 베이글이 저도 모르고 움츠러들 만큼 살벌한 살기였다.
“그 사람들…. 고문했어?”
하나, 움찔한 것도 잠시. 베이글이 비릿하게 웃었다.
“했다면?”
“…….”
“그러니 서두르는 게 좋을 거야. 그들의 나이를 생각하면, 오래 버티진 못할 것 아닌가? 우리의 고문은 생각보다 고된 편이거든. 크흐흐….”
베이글이 섬뜩한 웃음소리를 내며 이죽대던 그때였다.
파앗!!!!
베이글의 수하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청년의 신형이 일순 쭈욱 늘어나더니 난데없이 베이글의 코앞까지 나타난 것이 아닌가.
베이글의 눈이 부릅 뜨였다.
“이, 이런!!!”
그가 황급히 쥐고 있던 대검을 들어 앞을 가로막았다.
카아앙!!!
쇠끼리 맞부딪친 소음에 두리번거리며 청년의 자취를 쫓던 수하들이 소리가 들린 곳으로 황급히 고갤 돌렸다.
“두, 두목!!!”
수하들의 시선이 향한 곳.
거기엔 베이글이 청년의 검을 가까스로 막은 채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부르르….
가까스로 위기를 넘긴 베이글이었지만, 그의 앞에 난데없이 나타나 검을 휘두른 청년의 힘은 그의 상식을 훨씬 벗어나 있었다.
그의 팔다리가 부르르 떨리며 애처롭게 버티던 그때, 베이글이 멀뚱히 보고만 있는 수하들을 향해 버럭 소릴 질렀다.
“다들 뭣들 하고 있는 거야! 이 새끼 죽이지 않고!!!”
비로소 퍼뜩 정신을 차린 그의 수하들이 꼬나쥔 무기를 들고 제 두목을 제압한 청년을 향해 달려들려던 그때였다.
“어딜!”
난데없이 그들의 머리 위로 낮선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달려들려던 수하들이 저도 모르게 고갤 들어 자신들의 머리 위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수하들의 시선이 향한 곳.
거기엔 앳돼 보이는 한 여인이 그들을 향해 검을 겨누고 있었다.
사내들을 겨누던 여인의 검에서 일순 검은 오러가 뭉글뭉글 피어올랐다.
화아아아아아.
검신에 피어오른 그녀의 검은 오러는 미세하게 흔들리는 검을 따라 사방천지에 검은 꽃을 만개하듯 피워냈다.
그리고.
얼굴을 드러낸 활짝 핀 검은 꽃의 꽃잎들이 일순 사내들을 향해 비처럼 떨어져 내렸다.
꽃을 피워낸 풍경은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으나, 그 꽃잎이 떨어진 직후에 보이는 풍경은 흡사 지옥도를 연상시켰다.
“끄아아아아아악!!!!”
사방에서 비명이 쏟아져 나왔다.
떨어진 꽃잎에 사내들의 전신이 갈가리 찢기듯 베이며 사방팔방에 피를 뿜어 대고 있었다.
참상을 바라보던 베이글의 눈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믿기지가 않았다.
그 많던 수하들이 난데없이 나타난 여인의 검에 속절없이 당하고 있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하나, 이대로 보고만 있을 순 없는 노릇.
베이글이 노성을 터트렸다.
“이놈들!!!!!!!!”
천둥 같은 고함을 질러 대던 그의 몸이 청년의 대검을 밀어내며 서서히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청년의 대검을 막아 낸 베이글의 대검에서도 푸른 오러가 피어오르던 그 순간.
청년의 손등에 핏줄이 그득하게 섰다.
“어딜!”
점차 펴지던 베이글의 무릎이 재차 굽혀졌다.
그의 전신이 짓눌러지듯 점차 땅으로 박히기 시작했다.
가까스로 버티던 베이글의 안색이 점차 새하얗게 질려 가던 그 순간이었다.
쿠오오오오오.
청년의 검에서 흡사 먹구름을 연상시키는 검은 오러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것은 이내 하나의 형태로 자리 잡아갔다.
흡사 검 위에 검을 덧씌운 듯한 뚜렷한 형태의 오러.
이를 본 베이글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오, 오러…. 블레이드….”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이 장 가까이 청년의 대검에서 치솟아 올랐던 오러 블레이드가 이를 막아선 대검째로 베이글을 일도양단시켜 버린 것.
그의 몸이 정수리부터 사타구니까지 일자로 그어지며 양옆으로 갈라졌다.
그리고 터져 나온 피가 바닥을 그득하게 적셨다.
청년이 얼굴에까지 튄 피를 거칠게 닦으며 눈을 빛내곤 사방을 훑었다.
그사이, 베이글의 수하를 모두 끔살시킨 여인이 청년의 곁으로 다가왔다.
“느껴져?”
“…어디 계신지 알 것 같아. 따라와!”
참상의 현장에 말짱히 오롯이 선 두 사람.
파아아아아아앗!
발리스타와 릴리의 신형이 어느 한 곳으로 벼락같이 쏘아졌다.
***
“…여보, 괜찮아요?”
메리의 눈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엔 브라운이 성치 못한 몸으로 한구석에 쪼그려 앉아 몸을 떨고 있었다.
“괜찮소…. 겨우 이 정도로 가지고. 너무 걱정 마요.”
“흑….”
메리가 연신 흐르는 눈물을 훔쳤다.
온몸이 피멍으로 그득한 브라운의 몰골을 보고 있자니 쏟아져 나오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던 탓이다.
브라운이 씁쓸하게 웃으며 바로 옆까지 다가와 눈물을 훔치던 메리의 손을 꼭 붙잡았다.
“울지 말아요. 이 정도 상처쯤이야 곧 나을 테니….”
“미안해요…. 괜히 내가 고집부려 이런 곳에 와서 당신만 고생을 시키고….”
“그게 어디 당신 고집이요. 결국엔 나도 가자고 한 것을….”
메리는 자신의 손을 꼭 붙잡은 브라운의 손을 놓지 못하였다.
지금 당장에야 브라운이 어떻게든 버티곤 있다지만, 자신들을 이리 만든 극악무도한 것들이 혹여 고문의 강도라도 높였다간, 제아무리 브라운이라도 버틸 재간이 없던 탓이다.
곧 팔순을 바라보는 그들에겐 지금의 고문도 버겁긴 마찬가지였으니까.
브라운과 메리가 서로 손을 맞잡으며 이 암담한 현실에 절망하던 그때였다.
끼익.
그들이 갇혀 있던 마굿간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브라운을 살피던 메리의 안색이 대번에 새하얗게 질렸다.
내내 자신들을 방치하다시피 한 저 마굿간의 문이 열렸다는 것.
다름 아닌 내내 그들을 괴롭힌 고문이 재차 시작된다는 말과 다를 바가 없었다.
메리의 시선이 흡사 지옥문이 열린 듯한 모양새로 바르르 떨며 바라보던 그때였다.
“엄마, 아빠…?”
메리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그녀가 저도 모르게 들려온 목소리에 이름을 중얼거렸다.
“…릴리?”
옆에 있던 브라운이 놀란 얼굴을 했다.
“뭐? 릴리라고…?”
메리와 브라운의 시선이 들어선 릴리에게 고정됐다.
릴리가 일순 눈물을 터트리며 메리와 브라운을 향해 달려갔다.
“엄마, 아빠!!!”
어느새 달려온 릴리가 메리의 품에 와락 안겼다.
“리, 릴리… 네가 여긴 어떻게….”
“엄마, 아빠. 괜찮아요? 어디 다친 곳은 없고…? 아빠… 많이 다쳤어요!?”
메리를 살피던 릴리가 브라운의 안색을 보고는 놀라 물었다.
릴리를 안고 있는 메리도 그렇고, 브라운도 돌아가는 지금의 상황을 이해 못 하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해 보이던 그때였다.
메리가 일순 품에 안겨 있던 릴리를 밀어냈다.
“어서 도망쳐! 릴리야!!! 이곳에 있으면 안 돼!”
“엄마…?”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왔어! 여기가 얼마나 위험한 곳인 줄 알아!!! 어, 어여…! 어여 도망가 어서…!!!”
그때, 릴리가 재차 메리의 품에 안기며 입을 뗐다.
“엄마, 아빠. 너무 걱정 마세요. 그 나쁜 사람들 우리가 전부 혼내 줬으니까…!”
“뭐?”
듣던 메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재차 물었다.
“우리…?”
“아줌마, 아저씨!”
그때, 열려 있던 마굿간 문으로 익숙한 얼굴에 커다란 덩치의 청년이 들어왔다.
아는 얼굴이었던 걸까.
브라운이 그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발리스타 총각…?”
발리스타가 씩 웃으며 고갤 끄덕였다.
“어머님, 아버님. 이젠 안심하셔도 됩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앞장선 발리스타를 따라 메리가 나왔고, 릴리가 다친 브라운을 부축하며 마굿간에서 걸어 나왔다.
따라 나온 메리와 브라운의 눈이 요동치듯 흔들렸다.
“헉…!”
“서, 설마… 저, 저들이…!”
브라운과 메리의 시선이 향한 곳.
거기엔 그간 그들을 괴롭힌 도적들의 시신이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발리스타가 황급히 앞을 가로막으며 브라운과 메리가 바라보던 것을 가렸다.
그가 진땀을 빼며 입을 뗐다.
“자자, 저런 거 보지 마시고요. 어서 오세요. 가지고 오셨던 사두마차도 미리 준비해 뒀습니다…!”
“으, 응. 그, 그러자꾸나….”
브라운도 전직 군인 출신이라 저들이 얼마나 극악무도하고 위험한줄 알고 있었다.
한데, 그 많던 도적들이 저리 초주검되어 있다니….
발리스타와 릴리만 보이는 것을 보면 다른 사람은 오지 않았다는 뜻인데, 이 둘이서 저런 참상을 만들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던 탓이다.
브라운과 메리가 안내하는 발리스타를 따라 미리 준비해 둔 사두마차로 걸음을 옮기던 그때였다.
터덜….
어디선가 들려오는 발소리.
발리스타와 릴리. 그리고 브라운과 메리의 시선이 자연스레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