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터덜터덜….
들려온 발소리엔 힘이라곤 일절 느껴지지 않았다.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일순 시선을 돌렸던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부릅 뜨였다.
메리가 손으로 입을 틀어막듯이 가리며 중얼거렸다.
“저, 저 여자들은….”
발소리가 들려온 곳의 근원지.
거기엔 나신의 여인들이 바르르 떨며 두려운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어느 안채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곳은 다름은 도적들의 두목인 베이글의 안채였던 곳.
브라운이 급히 시선을 돌리곤 메리를 향해 입을 뗐다.
“여, 여보….”
“…….”
놀란 메리가 딱히 대답을 한 것은 아니지만, 고개만 주억거리던 그때.
함께 바라보던 릴리가 대신 입을 떼 그녀들에게 물었다.
“설마…. 잡혀 온 여자들인가요?”
정황상 그리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릴리의 물음에 답하듯 나신의 여인들 무리 중의 한 명이 어렵게 입을 뗐다.
“도, 도와주세요…. 저희 좀 구해 주세요….”
흐느끼는 목소리부터 연신 바르르 떨어 대는 몸까지 그녀들의 상태가 썩 좋지 않다는 건 대번에 알 수 있었다.
발리스타가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릴리와 메리, 그리고 브라운을 번갈아 가며 바라봤다.
그가 답을 구하듯 물었다.
“어, 어쩌죠…?”
“…….”
“…….”
모두 쉽사리 답을 내지 못하던 그 순간. 메리는 결심이 선 듯 눈을 빛냈다.
“데리고 갑시다.”
“예?”
발리스타가 놀라 되물었다.
옆에서 브라운을 부축하던 릴리 역시 상당히 놀란 얼굴이었다.
발리스타가 망설이듯 입을 뗐다.
“하, 하지만…. 괜찮을까요? 이곳에서 수도까지는 거리가 상당한데, 게다가 마차에 저들 모두를 태우고 갈 수도 없고….”
그의 걱정은 당연한 것이었다.
제아무리 사두마차 내부가 널찍하다 한들 수용할 수 있는 인원엔 제한이 있었다.
그 자신과 릴리는 말을 몰며 밖에 마부석 쪽에 있어도 된다지만, 저기 있는 여자들 여섯과 메리와 브라운 전부를 수용하게 되면 내부가 상당히 비좁아질 것이 분명했다.
발리스타가 재차 입을 뗐다.
“게다가…. 지금 브라운 아저씨는 몸이 많이 상한 상태이시라…. 그리된다면 자리가 많이 불편할 텐데….”
그때, 발리스타의 걱정을 한 번에 날려 버리려는 듯 브라운이 발리스타의 등을 몇 번 토닥였다.
“난 괜찮다.”
“…아저씨!”
“저 여인들 역시 우리와 같은 처지였던 사람들이야. 아니, 우리보다 먼저 붙잡혀 와 긴 시간을 고통받으며 지내온 사람들이야. 빤히 알면서도 저들의 어려움을 외면해 버린다면 우리가 저 도적들과 다를 게 무어겠느냐? 게다가 여기서 수도와의 거리는 너무도 멀단다. 저이들만으로 이곳을 벗어난다는 것은 자살행위와 다를 바 없어. 이대로 둔다면 필시 다른 도적들에게 붙잡혀 같은 곤욕을 치르게 될 거야. 안 그렇소? 여보.”
메리가 고갤 끄덕였다.
그녀 역시 브라운과 생각이 같은 듯 보였다.
“당신 말이 맞아요. 저들을 이대로 두고 갈 순 없어요….”
브라운과 메리가 저렇게 말하는데 발리스타도 더는 만류할 수 없었다. 게다가 둘의 말대로 이대로 둔다면 여인들은 또 다른 위험에 빠질 것이 분명했다.
발리스타가 고갤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발리스타가 릴리를 대신해 브라운을 부축했다.
메리가 릴리를 바라보며 불렀다.
“릴리.”
“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무얼 해야 할지 알고 있었다.
릴리가 서둘러 집 안 구석구석을 뒤지며 여인들이 입을 만한 옷들을 찾아 입혔다.
다행히 그녀들이 입을 만한 옷들은 충분히 있었다.
그사이, 브라운을 사두마차에 안전히 태운 발리스타가 여자들을 바라보며 입을 뗐다.
“이쪽은 다 준비됐습니다!”
릴리 역시 바로 답했다.
“여기도!”
메리와 릴리가 여전히 잔뜩 겁먹은 채 안절부절못해하는 여인들을 이끌고 사두마차에 태웠다.
그 자신들과 여인들이 전부 타자 마차 내부가 꽉 들어차 비좁아졌지만, 오히려 브라운과 메리의 표정은 한결 편안해 보였다.
도리어 이 불쌍한 여인들을 이곳에 버려두고 갔다면 내내 마음 한쪽이 걸렸을 것이다.
마지막까지 마차 내부를 확인한 릴리가 고갤 끄덕이곤 곧바로 발리스타가 앉은 마부석 옆자리에 앉았다.
발리스타가 곧바로 말고삐를 당겼다.
“이럇!”
고삐를 당기기 무섭게 사두마차가 빠른 속도로 수도 쪽을 향해 달려 나갔다.
사두마차가 떠난 자리, 과거 캐슬롯 영지의 땅이었던 이곳엔 한 차례 태풍이 휩쓴 듯, 죽은 자들과 함께 오직 고요함만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하나, 이 고요함도 잠시뿐일 것이다.
전쟁이 불러온 참사는 컸고, 다시 이 자리를 차지할 난민들과 도적 떼들 역시 숱하게 불어난 것이 현 제국의 상황이었으니까….
하지만 절망 속에도 한 줄기 희망은 피어나는 법이다.
메리와 브라운은 수도로 돌아가는 중간에 발리스타로부터 믿을 수 없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토록 찾아 헤매던 이든의 생존 소식을 말이다.
***
“…해서 여기까지가 지금의 현 아슬란 제국의 상황이라고나 할까.”
전쟁 후, 아슬란 제국의 상황을 듣던 내내 이든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가 더듬거리듯 재차 물었다.
“아, 아니…. 제국의 상황이 그리도 심각하단 말입니까…?”
“뭐, 심각해질 수밖에 없던 상황 아니었는가. 듀란드, 그놈이 황위를 차지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키면서 그 자신을 포함하여 동조했던 영주들의 주 병력을 모조리 이끌고 수도로 진격했던 그들일세. 내 알기론 자네와 칼스테인이 그 많던 반란군을 저지했다 들었네. 당시 반란에 손을 거들던 병력이 거진 제국 전력에 반절 가까이 되는 병력이었는데, 하룻밤 새 증발한 꼴이 된 것이니. 사실상 칼스테인 영지와 자네가 중간에 합류했던 전 듀란드 영지 쪽을 제외하곤 결국엔 모조리 함락당해 폐허가 되었지. 해서 아슬란 제국의 영토는 수도를 포함해 그 세 곳이 전부야. 제국이란 말이 무색하게도 말이야.”
“…적의 본대가 레온하르트 영지에서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고 다른 곳은 살필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렇겠지.”
“…….”
“그들에게 너무 마음 쓰지 말게. 어쩔 수 없던 상황 아니던가?”
“예….”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해서 후회해 봤자 소용없어. 중요한 것은 앞으로의 일이지.”
“맞습니다.”
고갤 주억거리는 이든을 향해 레온하르트가 씩 웃었다.
“하여 이제 준비는 마쳤고?”
“예. 대부분의 점검은 마친 상태입니다. 아직 흡수해야 할 드래곤 하트의 기운이 상당량 남은 상태이긴 하지만, 이것은 차차 해결해야 할 문제이고요.”
“그렇지. 욕심이 과하면 그릇에 물도 넘쳐나는 법. 반쪽짜리라도 그 양이 상당할 테니 조급해하지 말고 시간을 들여서 천천히 자네의 것으로 만들어 봐.”
“명심하겠습니다.”
활짝 웃던 레온하르트의 얼굴에 일순 씁쓸한 빛이 감돌았다.
그가 나직이 입을 떼었다.
“참 정들었는데 말이야.”
“저도요.”
무미건조한 이든의 말투에 레온하르트가 얼굴을 구겼다.
“자네 방금 그 말과 표정. 상당히 안 어울렸던 것 알고 있나? 아쉬워하는 얼굴이 아닌데?”
“에이, 설마요. 기분 탓이겠죠.”
“끄응. 내가 이놈이 뭐가 이쁘다고 2년 동안 그렇게 아득바득 보살펴 댔는지.”
듣던 이든이 씩 웃었다.
그 역시 왜 아쉽지 않겠는가.
이곳에서 정신을 차린 뒤로 지난 몇 달간을 함께 지내 온 그들이었다.
둘 성격이 하나같이 한 고집들 하는 성격들이라 중간에 티격태격하던 것도 없지 않아 있었으나, 그래도 정이 안 들래야 안 들 수가 없던 기간이었다.
그때, 살짝 미소 짓던 레온하르트의 얼굴이 재차 딱딱하게 굳었다.
그가 더없이 진중한 음성으로 말을 꺼냈다.
“언제가 됐든 데스 스타는 꼭 다시 돌아올걸세. 그때는 자네도 전보다 훨씬 강해져 있겠지. 그때가 오면…. 이 제국을 아니, 이 나라의 사람들을 꼭 좀 다시 좀 부탁하네.”
이든이 힘 있게 고갤 끄덕였다.
“당연하죠. 그때가 오면 반드시 선두에 서서 놈을 막아 보이겠습니다.”
“…본래는 내가 해야 할 일인데, 고맙네.”
“뭘요. 그리고 레온하르트 님 부탁이 아니더라도 그럴 생각이었고요.”
“응?”
“전 빚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거든요. 절 그 꼴로 만들었던 놈을 쓰러뜨리고 사지육신을 잘근잘근 밟아 줘야 이 분이 풀릴 것 같거든요.”
“그, 그런가? 하, 하하…하….”
듣던 레온하르트가 어색하게 웃었다.
한참을 어색하게 웃던 그가 재차 말을 이었다.
“아, 그리고 당부의 말이 있네.”
“말씀하십시오.”
“일전에 내가 자네에게 가르쳐 주었던 용언(龍言) 말일세. 자네도 느껴서 알다시피 용언의 기술들은 하나같이 그 위력이 만만치 않아. 편하다고 남발하지 말고, 꼭 필요할 때만 쓰도록 하게. 내 말 무슨 뜻인 줄 알지?”
“그럼요. 제가 바보도 아니고, 그 무식한 기술들을 설마 남발하겠습니까?”
“…무식한 놈은 아닌 것 같은데, 무식한 짓을 하도 많이 해 대니까 노파심에 하는 소리지.”
“뭐요?”
레온하르트가 괜한 헛기침을 해 댔다. 하나, 이든의 표정은 딱히 기분이 나빠 보이거나 그러진 않았다. 그저 아쉬움이 한가득한 얼굴로 미소 지을 뿐이었다.
“그간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
그때였다.
이든이 별안간 앞에 있던 레온하르트를 향해 큰절을 올렸다.
레온하르트가 일순 당황한 얼굴을 했으나, 이내 더없이 푸근한 미소를 짓는다.
“거, 사람 참. 뭘 이런 것을 다….”
“절 살려 주신 은혜, 그리고 다시 재기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은혜. 꼭 갚겠습니다.”
“말만이라도 고맙네.”
인사는 끝났다.
이제는 이곳을 떠나 걸음을 옮겨야 할 때였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
“잠깐.”
“……?”
“어디로 갈 생각인가?”
“어디긴요. 당연히 부모님이 계신 수도로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레온하르트가 고갤 휘휘 저었다.
“수도는 말고, 다른 곳으로 가게.”
“…수도 말고요? 왜요?”
“훗. 그전에 자네에게 줄 선물이 하나 더 있네.”
그때였다.
레온하르트가 씩 웃으며 이든에게 뭔가를 건넸다.
“받게.”
“…이건?”
“내가 레온하르트 공작으로 유희 삼아 인간 세상에서 지내던 시절에 쓰던 보검이지.”
“…이것을 왜 제게….”
이든이 건네받은 보검을 쓸어 만져 보았다.
곳곳에 울퉁불퉁한 문양과 보석들이 만져지는 것이 필시 화려하게 장식된 검이었다.
하지만 이든이 놀란 것은 단지 그 화려함 때문만이 아니었다.
받아 든 검의 무게.
필시 대충 만져만 보아도 제법 길이가 긴 장검이건만, 무게는 깃털만큼이나 가볍게 느껴지는 것이 아닌가.
“미스릴이군요.”
“맞아. 이 보금자리를 만든 드워프 장인이 일생에 거쳐서 만들어 낸 제일의 보검이지.”
듣던 이든이 곧바로 검집에서 검을 빼내 들었다.
스르릉.
깔끔한 발도에서 모습을 드러낸 보검의 검신은 마치 새하얀 눈을 연상시키듯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이든이 검의 날을 손가락으로 튕겨 보았다.
티잉.
부딪친 검신에서 검명(劍鳴)이 울리며 맑게 울어 댔다.
이든이 씩 미소 지었다.
그렇지 않아도 검이 필요했던 참인데, 이런 귀한 것을 받게 될 줄은 예상치 못하던 것이었다.
“감사합니다. 요긴하게 쓰겠습니다.”
“아, 참고로 그거 공짜로 주는 거 아니야?”
“…선물 아니었어요?”
“선물이긴 한데, 자네가 개인적으로 해결해 줬으면 하는 것이 있어서.”
“뭡니까. 그게.”
“자네에게 나의 이름. 레온하르트 성(姓)을 주겠네.”
“…예?”
뭉뚱그린 말에 이든이 고갤 갸웃거렸다. 레온하르트가 재차 말을 이었다.
“레온하르트의 성(姓)을 가지고, 레온하르트의 영지로 곧장 가 주게.”
“…무슨 말입니까. 그게…. 레온하르트의 성을 가지고, 레온하르트의 영지로 가 달라니요.”
듣던 레온하르트가 답답하다는 투로 가슴을 쳐 댔다.
“아니, 이 사람아. 레온하르트 성을 가지고 레온하르트 영지로 가 달라는 게 무슨 뜻이겠어? 가서 영지 재건 좀 도와 달라 그거지.”
도리어 듣던 이든이 얼굴을 구겼다.
“아니이! 그러니까 그게 뭔 소리냐고요. 레온하르트 영지도 이미 폭삭 망했다면서요.”
“망했지.”
“근데?”
“영지민들은 말짱히 살아 있어.”
일순 이든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뭐라고요? 영지민들은 살아 있다고요?”
“응.”
“아, 아니… 어떻게요? 그때 다 죽었던 것 아니었어요?”
“갤러하드가 피신시켜서 구했는데?”
“…….”
“…….”
한참 동안 이어진 침묵.
별안간 이든이 고래고래 소릴 질렀다.
“아니, 이 양반아!!! 그걸 왜 인제 말해!!!!”
“안 물어봤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