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9화. (159/250)

159화.

황폐해진 대지. 그리고 그곳에 들어선 초라하기 짝이 없는 촌락.

한 노인의 시야에 담긴 과거 레온하르트 영지였던 곳의 현재 모습이 그러했다.

전쟁이 끝난 지 어언 2년.

한때 영광을 누리던 넓디넓은 영지들은 수도를 포함한 몇 개를 제외하곤 전부 폐허가 되어 사라졌다.

폐허가 된 땅에 자리를 잡은 각지에 대부분 촌락들은 말이 좋아 촌락이지 사실상 도적질을 일삼는 산채와 다를 것 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당연했다.

폐허가 되기 이전, 그 땅에 살았던 본래 영지민들은 대부분 도망쳐 떠나거나, 죽었으니까.

그래서일까. 현재 그런 땅을 차지한 촌락들은 전국을 망명하다 자리한 외지인들이 차지하고 있었는데, 체계란 것이 전무한 채로 무리를 이루다 보니 각지에서 지금과 불안한 치안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레온하르트 성이 자리했던 이곳에 자릴 잡은 촌락만큼은 그 모습이 사뭇 달랐다.

폐허가 된 다른 곳과는 달리, 이곳 레온하르트같은 경우엔 영지민 대다수가 미리 몸을 피신했던 탓에 대부분이 생존할 수 있었다.

체계가 무너지지 않고 금방 자릴 잡을 수 있었단 것이다.

물론 희생이 전혀 없던 것은 아니었다.

2년 전, 당시 목숨 바쳐 이곳을 지키려던 병사들은 난데없이 모습을 드러낸 죽음의 드래곤 데스 스타의 현신으로 모두 몰살당했으니까.

하나, 그들을 잃었다 하여 슬픔에만 잠길 순 없는 노릇.

살아남은 영지민들은 끓어오르는 슬픔을 삼키고 촌락을 이뤄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고 있었다.

그렇게 폐허가 되어 황량했던 대지에 부대끼듯 이룬 촌락을 훑던 노인의 시선이 어느 한 곳에 고정된다.

‘우리가 이렇게라도 살아남을 수 있던 것은 모두 당신들 덕분입니다.’

노인의 시선이 향한 곳.

거기엔 비석 세 개가 세워져 있었다.

하나는 병사들을 이끌고 선두에서 싸워준 제라드 기사 단장의 것이었고, 또 하나는 기사 단장을 따라 전선에서 싸워 준 병사들의 것.

그리고 남은 하나는….

‘심안의 무사 이든….’

레온하르트 영지의 사람은 아니었으나, 이곳에 혈혈단신으로 달려와 데스 스타를 물리쳐 준 용사.

사람들이 떠올리는 이든의 모습은 ‘용사’이자 ‘구원자’ 같은 것이었다.

물론 이 비석엔 그들의 시신이라곤 묻혀 있지 않았다.

영지를 휩쓴 거대한 폭발에 휘말려 전부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신이 없다 한들 그들의 넋을 기리지 않을 수는 없는 법.

레온하르트의 영지민들은 촌락 중앙에 그들의 비석을 세워 자신들을 위해 목숨 바쳐 싸워 준 이 영웅들을 한사코 잊지 않았다.

그렇게 세 개의 비석에 새겨진 이름들을 눈에 담으며 생각에 잠기던 노인의 시선이 옮겨진 것은 문득 옆에서 들려온 한 목소리 때문이다.

“촌장님!”

“응?”

마을의 한 소년이 비석을 바라보던 노인 곁에 가까이 다가와 입을 뗐다.

“촌장님, 이곳에 계셨어요?”

“그래, 제이콥. 무슨 일이지?”

촌장이라 불린 노인의 물음에 제이콥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 촌장님! 오늘 마을 회관에서 장로님들 간에 의하시기로 한 거 그새 잊으셨어요!?”

“회의?”

“아니. 이틀 전에 촌장님께서 잡으셨던 일정이요! 지금 장로님들이 눈에 불을 켜고 촌장님을 찾고 있다구요!”

듣던 촌장이 비로소 떠오른 듯 소리 나도록 손뼉을 쳤다.

“아이고! 내 정신 좀 보게. 나이가 들다 보니 며칠 전에 했던 약속도 까맣게 잊어버렸구나. 이럴 게 아니지. 자자, 어서 가자꾸나.”

촌장이 손짓하자 제이콥이 앞장섰다.

“제가 모실게요. 따라오세요!”

“허허…. 그래그래.”

촌장이 앞장선 제이콥을 바라보며 눈가에 자글자글 주름이 질 만큼 미소 지었다.

하나, 아이를 바라보던 그의 눈동자에 일순 연민이 들어찼다.

눈앞에 저 소년.

제이콥은 다름 아닌 비석에 새겨진 기사단장 제라드의 하나뿐인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아이의 어미는 제이콥이 태어나자마자 몸져누워 세상을 일찍 떠나고, 하나 남은 그의 아버지마저 돌연 사라진 레온하르트 공작을 대신해 이곳을 지키며 평생을 희생하다시피 살았다.

그렇게 살아온 제 아비 밑에서 제이콥은 응당 그 나이 때 누려야 할 것들을 어느 하나 누리지 못하였다. 가족의 관심과 사랑 역시도 그중 하나였을 것이다.

물론 수년 전에 엘프족과 동맹을 맺고, 유니콘 길드가 영지에 들어선 이후론 상황이 제법 나아지긴 했지만, 난데없이 찾아온 전쟁은 그간 평생을 이곳을 위해 헌신해 온 그의 아비 제라드마저 앗아가 버렸다.

소년을 바라보던 촌장이 씁쓸히 고갤 저었다.

‘운명 한번 참 기구하지….’

제 아비가 죽던 그 날.

제이콥은 울지 않았다.

그저 제 아비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 앞에 앉아 무언가를 다짐하는 모습만 보일 뿐이었다.

촌장의 눈에 제이콥은 아직은 보살핌이 필요한 어린아이이건만, 제이콥 스스로가 이미 어른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렇게 앞서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며 걸음을 옮기던 촌장은 어느새 회관 앞까지 도착해있었다,

***

“인근 도적들의 수탈이 끊이질 않고 있습니다.”

회의의 주제는 시작부터 무거웠다.

“더욱이 무서운 점은 그 도적들의 수가 줄기는커녕 계속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고요.”

“흠….”

다른 장로가 이어서 말했다.

듣던 촌장이 지끈거리는 골을 부여잡으며 침음성을 삼켰다.

촌장이 입을 뗐다.

“병사들은 어떻소?”

촌장의 물음에 병권을 담당하는 다른 장로가 입을 뗐다.

“사망자는 없지만, 부상자는 속출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아시다시피 다들…. 늙거나, 검 한번 잡아 본 적 없던 아이들이지 않습니까?”

“그렇지….”

지난 전쟁 때, 모든 병사들을 잃을 수밖에 없던 레온하르트 영지민들은 촌락을 이룸과 동시에 스스로를 지킬 힘을 기르기 위해 생존자들 중에 추려 내어 병력을 꾸렸다.

물론 평생 검이나 창 같은 무기라고 할 만한 것을 한 번도 잡아 본 적이 없던 이들이 부지기수였기에, 영지민들 중 과거에 군 생활 경험을 해 본 적이 있는 이들이 나서 교관을 자처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 이는 말 그대로 임시방편에 불과할 뿐이었다.

촌락 주변에 도적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는 요즘 같은 실정에 오합지졸이나 다름없는 지금의 병력으로 놈들의 수탈을 매번 막아 내기엔 그때마다 적지 않은 희생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둔다면 피해는 걷잡을 수 없게 불어날 것이 자명한 상황.

무언가 방법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촌장이 장로 중 한 명을 바라보며 물었다.

“엘프족 쪽에선 아직 답이 없습니까?”

눈이 마주친 장로가 고갤 저었다.

“…아직 이렇다 할 답이 전혀 없습니다. 그들로서도 당시에 피해가 막심했을 터이니, 부담스러운 것이겠지요.”

“하긴….”

사실 지난 2년간 그들은 줄곧 엘프족에게 하루도 빠짐없이 도움을 요청하는 서신을 보내왔었으나, 그들은 단 한 번도 답신을 보내 준 적이 없었다.

전쟁 당시 레온하르트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도움을 와 줬던 엘프족의 병력 역시 몰살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니, 그들 역시 뒷수습을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을 현 시점에 자신들의 요청을 받아 줄 리가 만무했다.

“저기….”

그때, 내내 잠자코 듣던 장로 중 하나가 불쑥 의견을 꺼냈다.

“…용병을 고용하는 건 어떨까요?”

“용병?”

“예. 이곳에 보호를 요청함과 동시에 병사들의 훈련을 부탁하면 어떨지….”

듣던 촌장이 고갤 저었다.

“나 역시 그것을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이 아니요. 다만 그리하면 용병 한두 명 가지고는 안 될뿐더러, 거기에 따른 비용 역시 마을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게 됩니다. 게다가….”

촌장이 말끝을 흐렸다.

장로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에게 고정되었다.

“만에 하나, 고용한 용병들이 다른 마음을 품고 이 마을을 장악하려 든다면 그땐 꼼짝없이 당할지도 모르는 일이오.”

일리가 있었다.

가뜩이나 아슬란 제국의 영토였던 땅들의 치안이 불안해지면서 호송건이 줄어들고, 그에 따라 용병들 역시 일자리가 상당 부분 줄어든 상태였다.

그럴듯한 이름 좀 날린 용병단이라면 몰라도, 어중이떠중이 같은 용병단이라면 이 그럴듯한 촌락을 차지하기 위해 난데없이 자신들 등 뒤에다 칼을 꽂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

듣던 장로들의 얼굴엔 처음 마주했을 때보다 깊은 수심이 들어차 있었다.

촌장 역시 답도 없는 이 상황에 연신 한숨을 푹푹 쉬어 대던 그때였다.

콰앙!

그들이 있던 회관의 문이 난데없이 거칠게 열리며 누군가 뛰어 들어왔다.

“촌장님!!!”

헐레벌떡 들어온 이는 마을을 지키는 병사 중 하나인 청년이었다.

그런데 어째선지 다급해 보이는 그의 모습에 심상치 않음을 느낀 촌장이 냉큼 물었다.

“무슨 일인가!?”

“도, 도적 떼가 출몰했습니다!”

“또 말인가!?”

오늘로만 벌써 두 번째 출몰이었다. 듣던 청년이 곧장 입을 뗐다.

“아침에 출몰했던 놈들과는 다른 소속으로 보였습니다.”

“다른 놈들!?”

“예, 근데…. 그 수가 헤아릴 수 힘들 정도로 많았습니다. 속히 가 보셔야겠습니다!”

자리한 병과 소속 장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그러곤 들어왔던 청년과 함께 급히 걸음을 옮기는 장로.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촌장의 얼굴엔 어느새 한가득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아무래도 이번 일은 여기서 이럴 것이 아닌 것 같소. 나 역시 가 봐야겠소.”

촌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자, 함께 자리했던 장로들 역시 불안하긴 마찬가지였던 듯 곧바로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었다.

“저희도 함께 가겠습니다.”

촌장이 고갤 끄덕였다.

“좋소. 어서 갑시다.”

먼저 일어선 촌장을 필두로 장로들이 따라 일제히 걸음을 옮겼다.

어쩐지 오늘은 평소와는 조금 다른 불안함이 엄습해 왔지만, 발길을 재촉하던 그들은 이를 애써 무시했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그들은 몰랐다.

왠지 모르게 자신들의 마음을 졸이게 만들던 것이 근거 없는 불안함이 아니었단 것을.

***

방벽 넘어 도적 떼를 바라보던 장로의 얼굴이 돌처럼 굳어 갔다.

차마 말을 잇지 못하던 그가 도적떼들을 가리키며 어렵게 입을 뗐다.

“저, 저들이 전부…. 도적 떼란 말인가…?”

맨 처음 그를 안내했던 청년 병사가 고갤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사실 확인을 하고 나니 더더욱 말이 나오지 않는다.

눈앞의 수백을 헤아리는 도적 떼를 바라보는 순간 전신에 두려움이 엄습하며 바르르 떨려 왔지만, 장로가 정신을 바짝 부여잡으려는 듯 입술을 힘껏 깨물었다.

‘여기서 나까지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일 순 없다. 어떻게든 병사들의 사기를 올려야 해…!’

줄지어 선 병사들 역시 장벽 넘어 도적 떼에 잔뜩 얼어붙은 모습들.

여기서 장로인 그 자신까지 겁먹은 모습을 보인다면 사기는 걷잡을 수 없이 떨어질 것이고, 그리하면 그간 노력으로 일구어 낸 이 마을은 결국, 놈들의 수중에 넘어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대로 넋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장로가 짓씹던 입술을 떼고 노회한 몸에서 나온 것이라 믿기지 않을 우렁우렁한 음성으로 외쳤다.

“모두!!”

들려온 외침에 병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장로를 향했다.

장로가 재차 말을 이었다.

“겁먹지 마라!!! 우리 역시 지난 2년간 놀고먹지만은 않았다!!! 그간에 쌓아 온 힘을 보여 줘라! 우리는 레온하르트의 자랑스러운 후손이며! 데스 스타를 몰아세운 영웅들의 남은 후예이다!!! 겨우 저런 도적 떼들에게 이 땅을 넘겨주지 마라!!!”

마을 사방팔방으로 뻗어가며 들려오는 장로의 외침은 두려움으로 요동치던 병사들의 심장까지 콱 들이박혔다.

잔뜩 겁먹어 흔들리던 병사들의 눈동자가 차츰 멈추며 안정이 찾아왔다.

엄습해 온 불안감이 사라지고, 그 안에 굳은 결의가 대신 자리한 것이다.

두려움이 결사의 각오로 바뀐 그 순간.

장로가 재차 외쳤다.

“사격 준비!!!”

방벽 위에 서 있던 병사들이 일제히 활 시위를 당겼다.

그리고.

“우아아아아아아아!!!”

도적 떼들이 방벽 코앞까지 다가온 그 순간.

“격발!!!”

장로 외침과 동시에 팽팽히 당겨졌던 화살이 도적들을 향해 쏘아졌다.

파바바바박!

비처럼 날아간 화살이 도적들을 향해 틀어박혔다.

놈들 중 가장 앞서 달려오던 것들이 이를 맞고 바닥을 굴렀지만, 그럼에도 도적 떼의 숫자는 여전히 바글바글거리다시피 많았다.

쏘아 낸 화살의 수가 달려오는 것들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탓이다.

살아남은 도적 떼가 방벽을 넘어 올라온던 그때였다.

병사들이 활에서 일제히 창으로 고쳐 쥐며 그들을 떨쳐내려던 그때였다.

푸르르륵!

언제 달려온 것인지 일순 검은 말 한 마리가 방벽을 성큼 넘어온 것이 아닌가.

돌발상황에 병사들이 일제히 얼어붙던 그때.

넘어온 이가 쩌렁쩌렁 외쳤다.

“나 마르코가 명하노니, 이 땅에 모든 것들을 죽이고 불태워라! 마치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흔적도 없이 말이다!!!”

도적 떼의 수장.

마을 안까지 단숨에 들어선 드레이븐 마르코가 흉흉한 살기를 내비치며 모두를 노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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