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워낙 오래전 일이라 현재는 이 사실을 아는 이들이 드물지만, 드레이븐 가(家)는 일찍이 지금의 칼스테인 영지의 땅을 지배했던 전통 깊은 가문이었다.
아슬란 황제가 천하를 일통하여 그의 영토가 자연스레 제국에 수중에 떨어졌을 때도, 아슬란 황제는 오히려 드레이븐 가주를 포섭하여 작위를 내리고 그 자신의 아래 두었을 만큼 드레이븐 가문의 영향력은 실로 대단했다.
다만 당시 칠 인의 기사 중 한 명이었던 듀란드 공작이 칼스테인의 장인이 되면서 상황이 달라지게 되었지만 말이다.
사위를 승승장구시키려는 듀란드 공작의 입김은 오랜 세월 영토를 차지해 온 드레이븐 가주조차 버틸 수 없을 만큼 그 영향력이 실로 대단했고 결국, 이권 다툼에서 밀려난 드레이븐 가문은 칼스테인 가문에게 영주의 자리를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레이븐 가문의 숨은 저력은 칼스테인 역시 긴장을 놓을 수 없을 만큼 쉬이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 가문이 그 땅에 오랜 세월을 굳건히 자리해 온 굴지의 가문이었기 때문이다.
하여 드레이븐 가의 마지막 가주였던 드레이븐 드레이크는 희망을 놓지 않으며 다시 재기를 꿈꿨다.
그 자신의 아들이자 출중한 재능을 가졌던 첫째인 마르코와 둘째인 드라이를 통해서 말이다.
물론 ‘이든’이라는 복병을 만나고 나선 그 꿈이 산산이 부서졌지만….
그들 가문에게 있어 마지막 무도 대회였던 그해.
둘째인 드라이는 예선도 치러 보지 못하고, 이든이란 놈에게 당해 양팔이 불구가 되어 다시는 검을 잡을 수 없는 몸이 되었다.
첫째인 마르코 역시 무도 대회 본선에서 이든에게 동생의 복수는커녕 압도적인 실력 차로 망신을 당하며 가문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결국, 당시에 뒤에서 일을 꾸미는 데 일조하여 이든을 처리하려 했던 드레이븐 드레이크는 그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홧김에 이든에게 달려들다가 평생을 걸쳐 쌓아 온 힘 모두를 잃어 폐인이 되지 않았던가.
이후, 칼스테인은 현장에서 사건의 진상을 밝힘과 동시에 무도 대회의 권위를 떨어뜨린 드레이븐 가문의 작위를 박탈하고 그들을 먼 변방의 타지로 쫓아냈다.
그리고 이 일이 있은 지 얼마 후. 폐인이 된 드레이븐의 가주는 홧병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요절했다.
드레이븐 가문의 장남인 마르코는 멍하니 지켜볼 수밖에 없던 아버지의 죽음과 병신이 되어 사람 구실 못하는 동생을 보며 매일같이 복수의 칼을 갈았다.
살을 깎는 수련과 수없이 많은 실전을 거듭했고, 덕분에 그의 실력 역시 일취월장할 수 있었다.
그러던 중 느닷없이 전쟁이 일어났다.
제국 전역은 큰 혼란에 휩싸인 것이다.
마르코는 변방에 유배된 탓에 전쟁에 여파에 휘말리지 않았다.
운 좋게 살아남은 그는 제국의 힘이 약해진 틈을 타, 폐허가 된 땅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모았고, 막강한 병력을 거느린 도적 떼의 수장이 될 수 있었다.
다만 재기 아닌 재기를 성공한 그는 여전히 분을 삭이지 못하였다. 줄곧 벼르던 ‘이든’ 그놈에게 복수할 기회를 놓쳤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레온하르트 영지를 지키기 위해 혈혈단신으로 적들을 물리친 그의 위상은 제국 전역에 전설처럼 남았고, 마르코는 그토록 바라던 복수마저 못 하고, 영웅이 되어 사라진 이든의 그림자를 쫓아 이곳, 과거 레온하르트 영지였던 곳까지 오게 되었다.
그의 전설의 시작점이자 끝인 눈앞의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기 위해서 말이다.
“다 쓸어 버려라! 한 놈도 남기지 말고 모조리 죽여!!!”
천둥과도 같은 고함을 내지른 마르코가 곧장 방벽에 줄지어 선 마을의 병사들을 향해 말을 몰았다.
그의 검에 짙푸른 오러가 피어오르며 마을의 병사들을 도륙 내기 위해 쏘아지던 그때였다.
콰아아아아아앙!!!!
일순, 거대한 폭음이 울렸다.
방벽 넘어 달려들던 도적 떼 무리에게서 들려온 소리였다.
마르코가 놀라, 말을 멈춰 세우곤 곧장 소리가 난 곳을 향해 고갤 돌렸다.
도적 떼 무리가 있던 곳은 폭발의 여파로 어느새 뿌옇게 먼지가 자리한 상태였지만, 상황을 파악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후우우우웅.
차츰 먼지가 가라앉고 그 안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으으으….”
“아이고 나 죽네. 나 죽어….”
달려들던 도적 떼 전부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마르코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연신 그곳을 두리번거리던 그때. 그의 시선이 어느 한 곳에 고정되었다.
널브러진 도적 떼 무리 가운데에 멀쩡히 서 있는 한 사람이 보인 것이다.
마르코의 눈썹이 일순 꿈틀거렸다.
‘누구지…?’
멀리 있어 육안으로 확인하긴 힘들었지만, 큰 키에 다부진 몸이 가장 눈에 띄었다.
그리고 먼지가 완전히 걷혔을 땐 서 있던 인형의 얼굴이 비로소 온전히 시야에 잡혔다.
휘날리는 흑남색의 기다란 장발. 착 감긴 눈을 한 사내의 모습이 눈에 들어 왔었다.
왠지 모르게 더없이 익숙한, 누군가 떠오르는 얼굴이었다.
마르코가 저도 모르게 떠오르는 그 이름을 중얼거렸다.
‘이든…?’
일순 그의 눈에 핏발이 섰다.
마르코가 곧장 고삐를 당기곤 부지불식간 나타난 그 인형을 향해 몸을 날리며 고래고래 소릴 질렀다.
“죽여 주마!!! 이 개자식아아아아아!!!!!”
하지만 그의 외침은 그리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마르코의 시선이 고정됐던 인형의 신형이 눈 깜짝할 새 사라지더니, 별안간 무언가 쪼개지는 듯한 타격음이 울려 왔다.
빠아아아아아아악!!!
“꿱!!!!!!!!!”
그리고.
덩달아 들려온 외마디 비명.
‘꿱’ 소릴 내며 비명을 토해 냈던 마르코의 눈은 어느새 뒤로 회까닥 넘어가 있었다.
부르르르.
그의 전신이 인형의 발치에서 애처롭게 떨며 나뒹군 도적 떼와 같은 꼴을 하고 있었다.
그때.
툭툭.
인형이 자신의 발치 근처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진 마르코를 툭툭 건드려 댔다.
“이 새낀 왜 갑자기 튀어나와서 나한테 지랄이야?”
마르코를 몇 번 건드렸던 사내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방벽 너머 마을 사람들이 있던 곳으로 고갤 돌렸다.
그가 그쪽을 향해 소리쳤다.
“저기요! 말 좀 물읍시다. 여기가 옛날 레온하르트 영지였던 곳 맞소?”
“…….”
마을의 더없던 위기는 그렇게….
허무하리만치 금방 종식되었다.
방벽 너머 마을 사람들의 눈이 믿기지 못한 것을 본 것처럼 더없이 흔들려 댔다.
도적 떼의 수장은 어째선지 거대한 혹과 함께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고, 부지불식간 도적 떼 무리 사이에 나타난 청년의 손엔 그들 수장의 머릴 후려친 것으로 보이는 검이 검집째로 쥐어져 있었다.
도무지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이해를 하기 힘든 그때였다.
일시에 도적들을 때려잡은 그 청년이 자신들을 향해 고갤 돌리더니 별안간 이렇게 묻는 것이 아닌가?
“저기요! 말 좀 물읍시다. 여기가 옛날 레온하르트 영지였던 곳 맞소?”
“…….”
어째선지 지켜보던 이 많은 사람 중에 대답을 하는 이가 한 사람도 없다.
묻던 사내가 난감한 얼굴로 재차 입을 떼려던 그때였다.
“맞소! 여기가 레온하르트 영지였던 곳이오!”
난데없이 그 자신들 쪽에서 들려온 한 노인의 목소리.
마을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향했다.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그들의 촌장이었다.
촌장이 재차 말을 이었다.
“그보다 우릴 위기에서 구해 준 영웅이 누군지 알고 싶소! 그대는 대체 어디서 온 누구시오!!!”
듣던 마을 사람들이 고갤 끄덕였다.
그들 역시 저이가 누군지 궁금한 듯한 모양새다.
그들의 시선이 일제히 방벽 너머에서 묻던 청년에게로 쏘아졌다.
청년이 입을 열었다.
“나는 레온하르트 공작의 후계자 되는 사람이오. 이곳에 볼일이 있어 왔소!”
“……!!!”
들려온 말의 파장은 상당했다.
방벽 너머 마을 사람들 모두가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으니까.
마을의 촌장 스왈로 역시 같은 반응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레, 레온하르트 영주님의 후계자라고…?’
그의 눈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연신 흔들리며, 도적 떼 사이, 위풍당당이 서 있는 눈앞의 청년에게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
촌장과 장로들로 가득 들어찬 마을회관은 어째선지 더없이 조용했다.
암담한 현실이 코앞까지 들이닥쳐서 그렇냐고?
아니, 그런 것이 아니었다.
암담하기보단 더없는 희망에 가까웠지.
그런데 그게…. 너무 갑작스럽다고나 할까.
그도 그럴 것이 한 청년이 난데없이 나타나 자신이 레온하르트 영주의 후계자라 하니, 듣던 입장에선 이 상황을 선뜻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던 탓이다.
그렇게 한참 동안 이어진 정적 속, 내내 한 청년에게 시선을 떼지 못하던 촌장 스왈로가 먼저 말문을 열 작정인 듯 입을 떼더니 정중히 물었다.
“그러니까…. 레온하르트 공작님의 자제분 되시는지요?”
“그분께 레온하르트 성(姓)을 받긴 했지만, 피는 이어져 있지 않습니다. 자제라기보단 제자 쪽에 더없이 가깝겠군요.”
“…제자요?”
“예. 그분께 가르침을 받았으니 제자 비슷한 거긴 한데…. 역시 이 검만으로는 신원 확인이 어렵나 보군요.”
자신을 레온하르트 이든이라 소개한 청년이 회관 중앙 탁자에 놓인 보검을 가리키며 물었다.
촌장이 고갤 저었다.
레온하르트 영지민 중 가장 고령자인 그가 과거 레온하르트 공작이 쓰던 검을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게다가 보검의 검집 가장 하단엔 레온하르트의 가문을 상징하는 드래곤 머리 모양의 인장이 미스릴로 수 놓아져 있지 않은가.
단지 인장뿐이랴. 검 자체도 미스릴로 이루어져 있는지 그 무게가 깃털처럼 가벼웠다.
이것은 현존하는 어떤 대장장이도 따라서 만들어 내지 못하는 것이었다.
미스릴이라는 금속은 애초에 드워프들만이 다룰 줄 아는 것이었고, 드워프란 종족은 엘프족만큼이나 수가 드물고 세상에 나서기를 꺼리는 이들이었다.
어중이떠중이들한테는 결코 검을 만드는 종족이 아니니, 이 보검은 틀림없이 진품이란 것이다.
보검을 재차 찬찬히 살피던 촌장의 시선이 재차 눈앞의 청년, 레온하르트 이든을 향했다.
흑남색 머리카락의 착 감긴 눈이 마치 전해져 내려오는 심안의 무사 이든을 연상시키는 모습이었다.
‘설마…. 다른 사람이겠지. 그는 데스 스타로부터 우리를 지키기 위해 희생한 영웅이 아니던가.’
데스 스타가 이 땅에 현신했던 당시, 영지민들을 이끌고 대피시켰던 엘프의 왕 갤러하드는 필시 이렇게 말했다.
이든이란 사내가 스스로를 희생하여 데스 스타의 시선을 끌고 있으니 이 틈에 빨리 도망쳐야 한다고. 어서 영지에서 벗어나 그의 희생을 헛되게 해선 안 된다고 말이다.
그리고 갤러하드의 예측은 정확했다. 영지민들이 우왕좌왕 그를 따라나서기 무섭게 난데없는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고, 그 폭발에 레온하르트 성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니까.
모든 것이 폐허가 되어 버린 그 난리 속에서 그가 살아남았다는 것은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촌장이 고갤 휘휘 저었다.
‘역시…. 그럴 리가 없지.’
그가 재차 스스로 레온하르트의 후계자라 칭하는 청년에게 입을 떼려던 그때였다.
눈앞의 청년이 불쑥 말을 꺼내는 것이 아닌가.
“아무튼 이렇게 영지민분들만이라도 살아남을 수 있어 참으로 다행입니다. 죽다 살아난 보람이 있군요.”
“……?”
…네?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에 촌장 스왈로가 그게 무슨 말이냐 입을 떼려던 찰나, 청년이 재차 말을 이었다.
“아니, 근데 산적 떼가 인근에서 시도 때도 없이 약탈을 일삼는데도 엘프족에게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였단 말이 사실입니까? 갤러하드 그 양반 그렇게 안 봤는데, 이건 약속이 다른데?”
“저기….”
그때, 연신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던 청년의 말을 끊고 스왈로가 물었다.
“갤러하드 님과 약속이라니요? 아니, 그보다 갤러하드 님과는 어찌 아는 사이이십니까?”
“수년 전에 제가 엘프족과 레온하르트 영지가 동맹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중재해 드린 적이 있거든요. 갤러하드 님도 그때 만났었습니다.”
듣던 촌장의 눈이 일순 더없이 흔들렸다.
레온하르트 영지와 엘프족이 동맹을 맺은 사건, 그 중재의 중심에 있던 것이 바로 심안의 무사 이든 아니던가.
촌장이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저, 저기….”
“네?”
“제가 경황이 없어 여쭈질 못하였는데, 혹… 존함이 어찌 되시는지요?”
듣던 청년이 씩 미소 지으며 입을 뗐다.
“이든.”
“…….”
“이든이라고 합니다.”
“뭐, 뭐라고요!?!?”
촌장을 포함해 함께 둘러앉은 장로들이 유령이라도 본 것 같은 얼굴로 이든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죽었다 여긴 사람이 멀쩡히 살아돌아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