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꼴꼴꼴꼴.
목구멍을 타고 술 넘어가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려왔다.
촌장 스왈로를 포함한 장로들은 넋이라도 나간 듯한 표정으로 술을 병째로 들고 들이켜는 청년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탁!
다 비운 술병이 탁자에 호쾌하게 내려놓아지고.
내내 쉬지 않고 병나발을 불어 대던 이든이 더없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호탕한 음성을 내뱉었다.
“크!!! 이거지, 이거!!! 이 맛에 살아 돌아온다니까.”
“…….”
…죽을 고비에서 살아 돌아왔다는 게 이리 아무렇게나 내뱉을 정도로 쉬운 일이었던가?
듣던 촌장과 장로들이 아연실색한 얼굴로 이든을 바라보다 그의 주변에 널브러진 술병들을 바라보았다.
‘많이도 마셨네….’
거진 마을의 일주일 치 술을 앉은 자리에서 홀로 부어 댄 그였다.
전쟁 후, 제국의 영토 대부분이 폐허가 된 탓에 상행이랄 것이 없는 현재는 술을 직접 만들어 먹을 수밖에 없는 요즘이었다.
특히나 현재로선 자급자족이 비교적 쉬운 음식과 달리 술은 그 재료를 마련하기도 어렵고, 만드는 시간도 오래 걸리는 탓에 마을에서도 특별한 일이 아니고선 쉬이 풀지 않는 것인데….
하지만 어쩌겠는가.
눈앞의 저 청년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려 그 자신들을 구한 영웅 ‘이든’ 아니던가.
죽었다 생각한 영웅이 살아 돌아온 것이었으니, 마을의 행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 영웅 ‘이든’이 사라진 ‘레온하르트’ 공작의 후계자가 되어 나타났다.
마을의 더 없는 복이 찾아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촌장 스왈로가 헤벌쭉 웃으며 입을 뗐다.
“어떻게 음식은 입에 맞으십니까?”
이든이 막 잡아 와서 삶은 닭 다리를 뜯으며 고갤 끄덕였다.
“예. 아주 맛납니다. 근래에 영 음식 같지도 않은 음식만 먹다 보니 여기에 있는 것들이 더없는 산해진미로 느껴집니다.”
뭣이야…!?!?!?
라고 레온하르트의 성난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오는 것 같지만, 이든은 애써 그 환청을 무시했다.
“그, 그렇습니까? 하하….”
듣던 촌장 역시 난해한 얼굴로 웃으며 볼을 긁적이다 이든이 어느 정도 식사를 마친 것으로 보이자 바로 본론을 꺼냈다.
“그나저나 레온하르트 님께 성을 하사받았다 하셨는데, 대체 어찌 된 일인지 자세히 좀 말씀해 주십시오. 아니, 그보다 레온하르트 님께선 지금껏 어디 계셨던 거고요?”
산처럼 쌓인 묻고 싶던 것들이 줄줄이 새어 나왔다.
듣던 이든이 뜯던 닭 다리를 내려놓고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난감한 얼굴을 했다.
“흠…. 그러니까. 2년하고도 수개월 전이죠? 데스 스타를 비롯해 벨라트릭스 왕국이 아슬란 제국에 쳐들어왔을 때가?”
“그렇죠?”
“…마지막 결전 때, 치명상을 입은 데스 스타가 발악하다시피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고, 전 거기에 휩쓸려 의식을 잃었었습니다. 죽다 살아난 제가 의식을 차린 것은 전쟁 이후 이미 2년이 지난 시점이었죠.”
“…2, 2년간…. 줄곧 혼수상태였단 말씀입니까?”
“네.”
이든이 고갤 주억거리곤 재차 술을 한 모금 들이켰다.
화주나 다름없는 독한 술이 목을 타고 넘어왔지만, 이든의 표정엔 한 점 변함이 없었다.
그만큼 그가 겪어 온 그간의 일이 그가 목으로 넘긴 화주보다 독하고 힘들었단 것을 어림짐작하게 해 주었다.
이든이 재차 말을 이었다.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서 정신을 차린 제가 가장 처음 만난 사람이 바로 레온하르트 님이었죠. 그분께서 줄곧 2년간 혼수상태였던 저를 보살폈다. 그리 말씀해 주시더군요. 레온하르트 영지를 구해 준 보답이라면서요.”
“…여, 영주님께서.”
“그렇게 정신을 차린 뒤론 수 개월간 오직 몸을 정양하는 데만 집중해 왔습니다. 그 과정에 레온하르트 님께 가르침을 받았고요. 그리고 모든 정양이 끝나고 다시 세상 밖으로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에 레온하르트 님께서 제게 이 보검을 주시며 성을 하사하시고, 이곳에 영지민을 부탁하셨습니다. 부디 자신 대신 그곳을 잘 맡아 달라는 당부의 말씀을 하시면서요.”
그간 이든의 행적을 들으며 궁금했던 것이 해소되긴 했지만, 여전히 의아한 점 한 가지는 남아 있었다.
듣던 촌장이 곧바로 물었다.
“헌데 이든 님의 말씀대로라면 사라지셨던 레온하르트 님께서도 무사히 잘 계신단 얘긴데…. 왜 직접 오시지 않고, 이든 님께 그런 부탁을 드린 것입니까?”
혹여 듣는 그로 하여금 실례가 될까. 촌장의 물음은 어느 때보다 유독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이든이 별 거리낌 없다는 얼굴로 아는 모든 것을 설명했다.
“직접 오실 만한 상황이 아니셨습니다.”
“…직접 오실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고요?”
뭉뜬 그린 듯한 대답에 장로들과 촌장의 시선이 일제히 이든에게서 떼어지질 못하였다.
촌장이 대표하여 되묻고, 이든이 말을 이었다.
“십수 년 전, 레온하르트 님께서 난데없이 사라진 그 날. 다들 기억하십니까?”
어찌 그날을 잊겠는가?
레온하르트 공작이 아무 말도 없이 사리진 그날을 기점으로 레온하르트 영지의 기세가 기울기 시작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이곳에 있는 모두가 당시에 고된 세월을 직접 피부로 느꼈던 산증인들이었다.
그날의 일을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촌장과 장로들이 고갤 주억거렸다.
“기억하다마다요. 어찌 그날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세상엔 알려지지 않았지만, 레온하르트 님께선 사라진 그날, 데스 스타와 결전을 벌이고 계셨습니다.”
“…예?”
들려온 이든의 대답은 그들의 예상을 한참 벗어난 것이었다.
모두가 당혹을 금치 못한 얼굴을 하던 그때, 촌장 스왈로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레, 레온하르트 님께서 데스 스타와 결전을 벌이고 계셨다니요…? 아니, 그보다 이든 님의 말대로라면 데스 스타가 이 땅에 현신했던 것이 이번이 처음 있는 일이 아니란 뜻 아닙니까?”
“맞습니다. 데스 스타가 이 땅에 나타난 것은 처음 있던 일이 아니었습니다. 2년 전, 전쟁이 발발했던 때보다 훨씬 이전부터 데스 스타는 틈이 날 때마다 이곳에 나타나 세상을 위험에 빠뜨렸습니다. 물론 그때마다 누군가 나서 그를 막았겠지요. 레온하르트 님 역시 십수 년 전 사라진 이유가 그중 하나였고요.”
이든은 데스 스타가 그 자신을 제외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드래곤을 멸족시키는 것이 목표고, 레온하르트 역시 그 드래곤 중 하나였단 사실만 쏙 빼놓고 상황을 설명하느라 애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레온하르트가 사라진 이유에 대해서 듣던 촌장이 재차 물어왔다.
“허, 헌데…. 어쨌든 레온하르트 님께서 사라지고 나서 그간 십수 년간 아무 일도 없었단 것은 데스 스타를 막는 데 성공했단 뜻 아닙니까?”
“성공은 했지요. 다만….”
이든이 말끝을 흐렸다.
저들이 받을 충격을 생각하면 데스 스타를 막아 낸 레온하르트가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자세히 말해 줄 순 없던 탓이다.
자연히 그 자신에게 집중된 이목 속에서 이든이 재차 둘러대며 말을 이었다.
“레온하르트 님 역시 큰 부상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여, 영주님께서 많이 다치신 겁니까?”
“예, 아마도…. 보시다시피 저 역시 눈이 보이질 않으니, 어디를 얼마나 다치셨는지는 자세히 알지는 못합니다. 다만…. 지금껏 여러분께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은 필시 당시 입었던 부상이 심각하셔서 그런 것이라 짐작될 뿐입니다.”
“…….”
재차 찾아온 침묵.
자신들을 위해 한 몸 바쳐 희생한 레온하르트 영주의 소식을 듣고 나서 마을 회관의 분위기는 어느새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듣던 모두가 나서서 먼저 입을 떼지 못하던 정적 속.
촌장이 힘겹게 입을 뗐다.
“저는 그것도 모르고, 영주님께서 사라진 그 이후로 내내 그분을 원망하기만 바빴는데, 그런 일이 있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습니다….”
“이해합니다. 레온하르트 님 역시 여러분께 직접 모습을 보일 수 없는 상황을 더없이 안타까워하셨으니까요.”
“…….”
마지막 쐐기를 박은 이든의 한마디는 재차 회관에 더없이 무거운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침묵 속, 이든이 한참 뒤에 다시 말을 꺼냈다.
“제가 레온하르트 님의 후계자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건 오직 이 보검과 그분이 겪으신 그간의 일들을 여러분께 설명 드리는 것이 전부입니다. 전… 그분의 후계자로서 이곳을 책임지는 것에 한 점 욕심이 없습니다. 받아들일지 말지는 온전히 여러분들의 몫입니다.”
이는 사실이었다. 이든이 레온하르트로부터 성(姓)을 받았다곤 하나, 이들을 이끄는 것엔 결단코 욕심이 없었다.
그에게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앞으로 후에 재차 있을 데스 스타와의 결전을 대비하는 것.
그것이 전부였으니까.
회관 중앙 모두가 둘러앉은 탁자에 놓인 레온하르트의 보검에서 한참 동안 눈을 떼지 못하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서로 눈을 마주치며 고갤 끄덕였다.
이윽고 시선을 나누던 장로들의 이목이 일제히 촌장을 향했다.
한마음 한뜻인 그들의 의지에 촌장 스왈로 역시 마주 고갤 주억거리며 눈을 빛냈다.
촌장이 천천히 무겁던 입을 열었다.
“우선 영지민을 대표하여 2년 전, 적의 침략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신 이든 님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촌장을 따라 장로들이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이든 역시 살짝 고갤 끄덕이는 것으로 그들의 인사를 받았다.
촌장이 재차 말을 이었다.
“그리고 다시 영지민들을 대표하여 이든 님께 저희의 뜻을 전할까 합니다.”
“…….”
“십수 년 전 세상을 위기에서 구하신 레온하르트 공작님의 유지를 받들어 저희를 다시 이끌어 주십시오. 영주님…!”
그때였다.
촌장 스왈로를 필두로 장로 모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중앙에 앉은 이든을 향해 무릎을 꿇고, 고갤 숙였다.
주군을 향한 신하의 예를 표한 것.
비록 보이지 않더라도 그들이 자신에게 무얼 했는지는 이든 역시 쉬이 예상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영지라기엔 그래 봤자 마을 정도의 규모이고, 영주보단 촌장직이란 것이 더 어울리겠지만, 어찌 됐든 뜻하지 않게 이들을 이끌게 된 것이다.
‘또 누군가를 이끌게 될 줄이야….’
전생의 신교 때야 강자 존의 법칙을 따랐기에 교주가 될 이유가 있다지만, 그는 사실 감투 같은 것에 미련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것들을 귀찮아하는 것에 더 가까운 사람이었다.
하여 유니콘의 길드장으로 취임했을 당시에도 당장에 닥친 위기를 해결하고 곧바로 길드장의 자릴 위임하지 않았던가.
그런 그에게, 촌장과 장로들이 자신들을 이끌어 주길 간청한다.
예전 같았으면 한사코 거절했겠으나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레온하르트로부터 받은 갚아야 할 은혜가 산더미처럼 컸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스윽.
이든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을 마주 보며 섰다.
그러곤 자신을 향해 예를 표한 촌장과 장로들을 향해 포권을 올렸다.
“많이 부족합니다. 부디 여러분들의 지혜로 절 좀 많이 도와주십시오.”
희망의 불씨가 점차 사그라들던 이곳 촌락에, 그들을 이끌 새 희망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그때.
“아 맞다.”
이든이 불현듯 뭔가 떠오른 듯 다시 입을 뗐다.
고갤 숙이며 예를 표하던 장로들과 촌장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에게로 향했다.
“그 아까 소개해 주실 때, 마을 중앙에 세워져 있던 비석 말이에요. 제거 좀 치워 주시겠어요?”
아… 그거요?
촌장과 장로들의 얼굴이 일순 핼쑥해졌다.
“멀쩡히 이렇게 살아 돌아다니는 데 제 비석이 있다니까 영 찜찜해서요. 언제 말씀드려야 할까 내내 고민했었는데, 지금이 딱 적기인 듯싶어서요.”
“아….”
내내 속에 그것을 염두에 두었다는 그의 말에 장로들과 촌장의 머릿속에 불현듯 한 생각이 떠올랐다.
‘마음속에 담아 두는 편이시구나….’
어쩐지 이든, 그에게 밉보여선 안 되겠다고 절로 생각이 드는 그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