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2화. (162/250)

162화.

이든의 관한 소식은 장로들과 촌장이 마을 회관에서 나오기 무섭게 퍼졌다.

난데없이 나타나 자신을 레온하르트의 후계자라 소개한 청년이 사실은 2년 전, 그들을 구했던 심안의 무사 이든이라는 것과 그가 레온하르트 영주님의 유지를 받들어 그 자신들을 이끌게 되었다는 소식 전부 다 말이다.

물론 ‘비석’에 관한 그의 반응 역시 함께 말이다.

이든, 그가 이곳 촌락의 영주(?)가 된 이후로 가장 먼저 한 일은 비석을 치워 달라였다.

촌장은 서둘러 이든의 비석을 치우라 명했고, 마을의 사내들은 황급히 움직이며 비석을 눈 깜짝할 새 치워 버렸다.

그리고 그다음에 그가 한 일은 이곳을 노린 도적 떼에 관한 처분이었다.

“저들은 어찌하실 생각인지요?”

스왈로가 말하는 저들이란 오늘 이곳 마을을 노렸던 도적 떼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듣던 이든이 고민하듯 연신 턱을 매만졌다.

“흐음…. 글쎄요.”

마을의 가장 넓은 곳이라 할 수 있는 커다란 우물이 있는 광장 한가운데, 촌장과 장로들을 포함한 마을 사람들이 둘러 모인 곳엔 도적 떼 수백이 팔과 다리가 단단히 묶인 채 무릎을 꿇고 있었다.

도적 떼를 바라보는 마을 사람들의 눈엔 저들을 당장에 요절 내 버리지 않고 뭐 하냐는 뜻이 내비칠 만큼 그 기세가 제법 살벌했다.

다들 그간 도적 떼에게 숱하게 당해 온 것이 많다 보니, 단지 수탈을 일삼는 도적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속 안에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는 비단 촌장이었던 스왈로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촌장 일을 해 오며 이곳을 숱하게 노려 온 도적 떼로 얼마나 골치를 썩이고 마음고생을 했는지 모른다.

그 역시 단지 저 사특한 것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당장에 달려 나가 놈들의 모가지를 따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더는 그에겐 이러한 결정권이 없었다.

이제 이 마을에서 일어나는 중차대한 사안의 모든 결정권은 그의 옆에 자리한 이든, 그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째선지 스왈로의 시선이 향한 이든의 모습은 고민이 역력한 표정이었다.

스왈로가 궁금한 것을 참지 못하고 이든에게 물었다.

“영주님,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습니다. 어서 결단을….”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저들 죽여 본보기를 보이고 이들의 한을 풀어 달라.’ 스왈로가 말한 속뜻은 그것이었다.

이든이라고 이를 못 알아들었을까. 하지만 어째선지 이든의 반응은 영 시큰둥하기만 했다.

“흠…. 잠시만 생각 좀 하….”

그때, 이든이 입을 떼던 찰나였다.

도적 떼의 수장 마르코가 다른 이들과 달리 겁먹기는커녕 여전히 흉흉하게 눈을 빛내며 이든을 노려보고는 핏대가 설 만큼 소릴 질러 댔다.

“이든, 이번에도 나에게 모욕을 줄 셈이냐. 어서 날 죽여라!!!”

도적 떼를 살벌한 기세로 바라보던 마을 사람들마저 마른침을 삼킬 만한 죽음을 앞둔 인질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살기등등한 모습이었다.

“여기서 날 죽이지 않는다면 내 다시 한번 더 재기하여 네놈을 후회하게 만들 것이다…. 사람이란 사람은 모조리 죽일 것이고, 이곳을 불태워 쑥대밭으로 만들…!!!!”

빠아아아아아아악!

“꿱!!!!”

마르코가 재차 으르렁거리듯, 입술을 짓씹으며 말을 잇던 그때, 이든의 검집이 마르코의 머릴 후려갈겼다.

마르코가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혀를 삐죽 내밀곤 눈을 회까닥 뒤집은 채 바닥을 굴렀다.

그의 머리에 이미 한차례 뽈록 튀어나와 있던 혹 위에 재차 큰 혹이 금세 자라났다.

깃털만큼이나 가벼운 검으로 어찌 저리 둔탁하면서도 찰진 소릴 낼 수 있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때, 이든이 발치에 쓰러져 있던 마르코를 냅다 걷어찼다.

뻐엉.

마르코의 몸이 부웅 날아가 도적 떼 무리 중앙에 떨어졌다.

게거품을 문 채로 애처로이 떨고 있는 제 두목의 모습을 바라보며 도적들은 그야말로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이든은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는지 씩씩대며 입을 뗐다.

“아니, 근데 저 새끼는 아까부터 왜 자꾸 나한테 지랄이야. 너 나 알어!?”

이든을 철천지원수로 생각하는 마르코와 달리, 정작 그는 마르코를 어디서 봤는지 전혀 기억을 못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하나, 이든의 물음에도 마르코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지만, 맞고 기절한 자도 말이 없긴 마찬가지임을 여실히 보여 준 그였다.

“그나저나 이것들을 어찌 처리한다. 이대로 죽이기엔 아까운데 어떻게 써먹을 방법이….”

화를 삭이며, 도적 떼를 어찌 처리할지 고민하던 이든이 일순 손뼉을 쳤다.

“아!”

“왜, 왜 그러십니까? 영주님…?”

마르코의 꼴을 보며 마찬가지로 머리 쪽에 알 수 없는 섬뜩함을 느끼던 스왈로가 이든이 내지른 탄성을 듣고 깜짝 놀라더니 되물었다.

“이렇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무, 무엇이 말입니까?”

“지금, 재건 중인 이곳 마을의 규모가 과거 레온하르트 성에 비하면 어느 정도 수준입니까?”

난데없는 질문에 스왈로가 짐짓 고민했다.

“그, 글쎄요…. 아마 십분지 일도 훨씬 못 미칠 겁니다. 아무래도 살아남은 영지민들만으론 재건하는 데 한참 걸릴 테니까요.”

“십분지 일에도 훨씬 못 미친다라…. 과거의 영지 때 모습과 비슷하게 재건하려면 아직 일이 한참 남은 상황이군요.”

“그렇지요. 아마 한두 해 가지고는 그때의 모습으로 재건하긴 어려울 겁니다. 한데…. 갑자기 그건 왜 물으시는지?”

“제 생각에 그 한두 해 안에 재건이 가능할 것도 같은데요?”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스왈로의 물음에 이든이 턱짓으로 도적들을 가리켰다.

“영지민들만으로 오래 걸린다고 하셨지요. 마침 일꾼들이 저리 많이 생겼으니 참으로 잘되지 않았습니까?”

“…예?”

스왈로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이든과 도적들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그가 더듬거리다시피 하며 재차 물었다.

“저, 저기 영주님, 제가 부족하여 영주님의 의중을 헤아리기가 힘든데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말 그대로입니다. 저놈들 강제 노역시키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네에에에에에?????”

이든의 말이 불러온 파장은 그야말로 대단했다.

스왈로를 포함한 듣던 모두가 입만 쩍 벌린 채 대경실색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저, 저들을 재건 현장에 강제 노역을 시키자고요…!?”

“네, 노략질을 해 오던 것들이니 힘도 제법 쓰겠다. 어차피 밥 세 끼만 대충 던져 주면 그만이니 그야말로 무임금 노동 착취로 부릴 수 있는 일꾼이 절로 굴러 들어온 것 아닙니까? 크흐흐….”

“…….”

마을 사람들이 재차 넋이 나간 얼굴을 했다.

비단 그들뿐일까.

내내 바르르 떨며 자신들의 처분을 기다리던 산적들 역시 난데없는 이든의 말에 경악한 얼굴을 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든이 도적들이 있던 곳으로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자연스레 도적들의 이목이 그를 향했다.

“축하한다. 너희들 방금 취직됐어.”

“……?”

“무임금 노동자로 말이지. 아, 걱정하지는 마. 밥 세 끼는 내 꼬박꼬박 챙겨 줄 테니. 흐흐흐….”

듣던 도적들의 얼굴이 점차 새하얗게 질려 간다.

그리고 위로 삐죽 솟아올라 더없이 환하게 웃어젖히는 이든의 모습에 그들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 자신들이 벗어날 수 없는 수렁에 영원히 갇히게 되었음을 말이다….

***

밤은 이미 진즉에 깊은 시각.

회관 가장 가까운 곳에 임시로 마련된 이든의 거처엔 아직 초가 환하게 안을 밝히고 있었다.

물론 보일 리 없는 이든에게 있어 초를 키든 말든 상관없는 것이지만, 이는 비단 이든 그를 위해서 초를 켜 놓은 것만은 아니었다.

이든이 앉아 있는 탁자 앞, 스왈로가 종이에 연신 무언가를 받아 적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탁.

펜이 놓아지고, 묵묵히 한참 동안 무언가를 적던 스왈로가 비로소 입을 뗐다.

“일단 말씀하신 대로 서신을 적어 뒀습니다.”

이든이 고갤 주억거렸다.

“고생하셨습니다.”

“그냥 불러 주신 대로만 적었을 뿐인데, 고생은요….”

그때, 말하던 스왈로가 난감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을 하며 재차 확인하듯 물었다.

“그, 근데…. 정말 이대로 보내실 건가요?”

“네.”

단호하기 짝이 없는 이든의 말투에 스왈로는 연신 진땀을 뺄 수밖에 없었다.

“…일단 알겠습니다. 한데, 이렇게 보낸다고 저들이 답신을 해 줄까요? 그들은 근 2년간 한 번도 저희에게 답신을 보낸 적이 없는데요….”

“그건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한 치의 틀림도 없이 불러 드린 그대로 적으셨다면, 서신을 받기 무섭게 저들이 뛰쳐나오다시피 찾아올 겁니다.”

“예…. 이걸 본다면 확실히 그럴 것 같군요….”

문제는….

눈에 불을 켠 채로 싸우자고 찾아올 것 같다고나 할까.

그도 그럴 것이 서신의 내용이 참…. 도발적이지 않은가.

스왈로의 시선이 재차 종이 안에 적힌 내용을 훑었다.

- 갤러하드 아저씨 보쇼!

아니, 이거 약속이 다른 거 아닙니까?

사내가 말이야. 한번 약속을 했으면 끝까지 지켜야지.

내가 예전에 거기 돕느라 개고생했던 건 그새 잊으셨소?

아무리 내가 죽었다고 생각이 들겠거니, 그래도 레온하르트 영지 도와주기로 일전에 약속했던 것이 있으면 하늘이 무너지는 한이 있더라도 도와주어야 하는 거 아뇨?

이야! 어떻게 죽다 살아 돌아왔는데, 레온하르트 영지가 이 모양 이 꼴이 되도록 그냥 지켜만 볼 수가 있지?

내 듣자 하니 그간 2년 동안 꼬박꼬박 도와 달란 서신을 보냈더구만.

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엘프의 왕이란 사람이 그리 쪼잔하게 그러는 것 아니오!

불만 있으면 직접 찾아와서 변명이라도 해 보시든가.

-당신의 친구 ‘이든’ 올림.

그다지 길지 않은 내용의 서신이었지만, 시작부터 끝까지 이것을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신경을 박박 긁어 대는 말투로 쓰여 있는 것이, 당장에 이를 읽는 갤러하드가 찾아와 그의 앞에 이든의 멱살을 잡아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내용이었다.

정말 이대로 보내도 될지 여전히 의구심이 들기야 했지만, 어쩌겠는가?

이대로 보내라는데….

스왈로가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한 얼굴로 입을 뗐다.

“…그럼 그리 알고 곧바로 전서구를 날려 보내겠습니다.”

“예. 부탁드립니다.”

스왈로가 서신을 주섬주섬 챙기며 일어나려던 그때, 이든의 입이 재차 열렸다.

“아. 그나저나 잡아 두었던 도적놈들은 어찌하셨습니까?”

“우선 단단히 결박하여 놓았습니다. 마을의 청년들이 번을 서 가며 감시할 예정이고요.”

“그렇군요. 잘하셨습니다.”

“한데 말입니다….”

“……?”

“놈들을 영지를 재건하는 데 쓰자는 영주님의 뜻은 알겠지만, 저들이 과연 순순히 말을 듣겠습니까? 다른 놈들도 아니고, 수탈을 일삼으며 선량한 이들을 괴롭혀 온 놈들입니다. 차라리 죽이라고 악이나 쓰지 않을지…. 혹은 작심하여 마을 안에서 소동이라도 일으킨다면 그것이야말로 큰일 아닙니까?”

듣던 이든이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 고갤 끄덕였다.

그의 말대로 따르자면 산적들을 생포한 채 마을 안에 계속 붙잡아두어야 한다는 뜻이니, 마을 사람된 입장에서 불안한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내 이든의 입가에 지어지는 알 수 없는 미소.

보던 스왈로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그건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또 그런 것들 다루는 데 한가락 하는 전문가이거든요. 여러 번 효과를 입증한 방법으로 착실히 교육시켜 놓겠습니다.”

미, 믿어도 되는 걸까.

어쩐지.

앞으로 이든과 함께할 시간이 순탄치만은 않을 것 같다고 절로 생각이 드는 스왈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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