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청명했다.
이런 날에는 그저 아무 생각 없이 푸르디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기기에 더없이 좋은 날이었다.
물론 지금의 마을 같은 상황에서야 그런 여유 같은 것이 있을 리 없겠지만, 그래도…. 하늘 한번 바라볼 여유라고 없었을까.
옛날이었다면 한숨 돌리며 그런 사치 아닌 사치를 부렸을 것이다.
…말 그대로 옛날이었다면 말이지.
“끄, 끄으으….”
사방에서 죽어 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늘은 청명하고, 마을은 오래간만에 더없이 평화롭건만.
이 앓는 소리는 대체 무어란 말인가.
“나, 나 죽네….”
그때였다.
앓는 소리를 해 대던 청년 중 하나가 다리를 부르르 떨다 위태하게 휘청거리던 그때였다.
“어? 어어어!?!?!?”
난데없이 들려온 소리에 주저앉으려던 청년이 잽싸게 기마 자세로 원상 복구했다.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죽어 가던 얼굴을 하던 그의 눈에 급기야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무언가가 주르르 흘렀다.
‘크흡!’
절로 서러움이 북받쳐 올라왔지만, 우는 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자, 진짜 조금밖에 안 남았다. 조금만 버티면 돼. 이 악물고 마지막까지 버텨 보란 말이야! 쓰러지면 그땐 그냥 다 같이 사달 한번 내보는 거야. 엉!?”
악을 써 대는 저 마귀 같은 양반을 앞에 두고 어찌 우는소릴 해 댈 수 있겠느냔 말이다.
마을 청년들이 연신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그 마귀의 정체.
누구겠는가. 당연히 이든이었다.
“악으로 버티란 말이야. 엉!? 악으로 깡으로 그냥.”
그때였다.
“저, 저… 영주님.”
“……?”
오늘 있을 첫 훈련이 걱정됐던 모양인지 날이 밝기 무섭게 이든의 옆에 서서 참관을 하던 스왈로가 넌지시 물었다.
“그…. 이제 슬슬 그만하는 것이 어떨지…?”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훈련을 앞두고 담담한 듯 의지마저 엿보이던 엘프들을 보고, 청년들의 의지가 그의 생각보다 약하다고 생각했던 그였다.
해서 이 훈련을 계시로 해이해진 청년들의 기강이 바로 서길 바랬는데….
이든을 향하던 스왈로의 시선이 재차 연무장에 있는 청년들을 향했다.
‘와…. 저건 좀 심한데…?’
필시 본래 그들이 하던 훈련도 황실의 병사들 못지않다고 그리 여겼건만, 교관을 자처한 이든의 훈련방식을 두 눈으로 보고 있자니.
이전의 훈련은 훈련 축에도 끼지 못하는, 설렁설렁했던 것에 불과했다.
영주가 일전에 그것을 두고 왜 체조라 했는지 이해가 절로 되는 그였다.
스왈로의 말을 듣던 이든이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을 했다.
“벌써요?”
저, 저기 영주님? 벌써라뇨?
스왈로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영주님의 깊은 생각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 그래도 훈련인데…. 저렇게까지는 좀….”
걱정이 한가득한 스왈로의 말을 듣던 이든이 심드렁한 얼굴로 입을 뗐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 생각이 있어서 이러는 겁니다. 제가 설마 저들을 죽이기야 하겠습니까?”
‘죽을 것 같으니까 이러지. 이 양반아…!’
라고 목놓아 소리치고 싶었지만, 차마 목구멍 밖으로 뱉진 못한다.
그래도 어떻게든 이 미친 영주를 말리겠다고 스왈로마저 덩달아 우는소릴 하며 그를 말리려는 찰나였다.
“그, 그래도 영주님 첫날이니까. 조금만 살살하는….”
“어? 어어어어! 누가 쓰러지래. 어? 원상 복귀 안 해!?!?”
와 저걸 또 언제 그걸 보셨… 아니 아셨대?
스왈로가 재차 넋 나간 얼굴을 했다.
보면 볼수록 느끼는 거지만.
정말이지. 저 영주 되는 사람은 두 눈 똑바로 뜨고 다니는 웬만한 사람보다 귀신같은 사람이었다.
이젠 스왈로마저도 영주를 말리는 것을 포기하고, 그저 저들이 어떻게든 잘 버티기만을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시 시간은 흘러.
“…으, 으으!”
“이, 이제 진짜…. 진짜 더는…!”
이를 악물고 버티던 청년들의 의식이 새하얘질 때쯤.
“됐어. 그만! 휴식!”
가뭄에 단비처럼. 그리고 어둠 속에 한 줄기 빛처럼 휴식을 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든의 입에서 휴식 소리가 떨어지기 무섭게 여기저기서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고야…. 나 죽네. 나 죽어…!”
“넌 그냥 죽을 것 같지? 난 진짜 요단강 건너고 왔어.”
청명한 하늘이 노랗게도 보일 수 있구나. 하는 것을 느끼는 그들이었다.
“와…. 어떻게 훈련이 이럴 수가 있지?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하잖아!”
하지만 진짜 너무한 것은 더 있었다.
아침 훈련은 이제 막 시작이란 것이고, 아침 훈련이 끝나고 점심 식사 후엔 낮 훈련이 더 남았다는 것을…. 이 짓이 끝나려면 아직 한참이나 남았다는 것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청년들의 입에서도 욕지거리가 절로 나왔다.
“씨, 씨발…. 이러다 진짜 뒤지는 거 아냐?”
“…서, 설마 남은 훈련도 이렇게 시키겠어? 안 그러겠지. 생각이 온전히 박힌 사람이라면 상식적으로 그렇게는 안 하지.”
“그, 그렇겠지?”
“그럼!”
아쉽게도 이든은 상식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이를 알 리가 없는 청년들이 이제야 좀 살 것 같은지 한숨을 돌리다 말고 주변을 흘겨봤다.
그들의 시야에 엘프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저것들은 힘들지도 않나?’
제아무리 저들이 전문적으로 훈련을 받아 온 엘프라고 한들 그들 역시 살아 있는 생명체인 이상 조금 전 훈련이 벅차지 않았을 리가 없다.
한데 내내 앓는 소리를 해 댔던 그 자신들과 달리 묵묵히 숨을 고르는 모습이 자기들과는 다르자 절로 감탄이 나오는 그들이었다.
그때, 엘프와는 사뭇 다른 모습으로 연무장에서 휴식을 취하던 청년 중 하나 별안간 얼토당토않은 말을 꺼냈다.
“…야, 우리 쨀래?”
듣던 옆에 있던 청년이 화들짝 놀라며 입을 뗐다.
“미쳤어? 그러다 들키면 어쩌려고. 너 요 며칠 동안 영주님을 보고도 그 말이 나오냐?”
“이러다 진짜 죽을 것 같은 걸 어쩌라고. 그리고 걸리면 집안일이 있어 어쩔 수 없이 빠졌다 하면 그만 아냐? 훈련 좀 쨌다고 영주님이 신경을 쓰시기야 하겠냐?”
“…그, 그런가?”
옆에서 듣건 말건 한심한 소리를 잘도 해대던 그때였다.
“한심하긴.”
대화를 나누던 청년들의 정곡을 찔러 오는 한 여인의 목소리.
청년들의 고개가 자연히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돌려졌다.
“뭐야?”
청년들의 시선이 향한 곳.
거기엔 한 엘프족 여인이 연신 흐르는 땀을 훔치며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녀를 보던 청년들이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그도 그럴 것이….
고된 훈련으로 머리는 엉망이고, 흙투성이라곤 하나, 여신이 세상에 강림했다고 믿을 만큼 너무도 아름다운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하나, 넋을 놓게 만드는 아름다운 외모와 달리 나오는 말은 가시가 돋친 듯 곱지만은 못했다.
그 엘프족 여인이 재차 입을 뗐다.
“훈련을 버티지 못하겠으면 핑계 대지 말고 그냥 솔직히 못 하겠다고 말하지 그래? 괜히 분위기 흐려서 멀쩡히 훈련받고 있는 사람들한테까지 피해 주지 말고.”
얼굴을 붉히던 청년들이 자존심을 박박 긁어 대는 그녀의 말을 듣고는 이내 인상을 썼다.
“뭐라고!?”
“당신들보다 어린 애들도 이를 악물며 버티고 있어. 창피한 줄 알면 입 다물고 조용히 훈련받지?”
“이게 예쁘다고 가만히 있었더니만…!”
급기야 입 다물란 말까지 나오자 투덜대던 청년이 덤벼들 기세로 벌떡 일어나던 그때.
엘프족 여인의 눈에서 한기 서린 빛이 피워졌다.
“왜 덤비려고? 그딴 정신 상태로 날 이길 수 있겠어?”
일어섰던 청년이 흠칫 놀라다가 이대로 물러서기엔 자존심이 상하는지 애써 더 강하게 나왔다.
“오, 오냐…! 덤비려 그런다! 어디 그 잘난 엘프분들께서 얼마나 대단하신지. 견식 좀 해 보자…!”
청년의 발악 아닌 발악에 엘프족 여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청년 못지않은 훤칠한 키가 돋보이는 엘프족 여인.
이윽고 한기를 피우던 그 여인의 눈동자에서 그보다 더한 것이 줄이줄이 새어 나왔다.
살갗이 꽁꽁 얼어붙다 못해 까질 것 같은 살벌한 한기였다.
“헙…!”
당장에 달려들 것 같던 청년이 저도 모르게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곧이어 여인의 입에서 그 못지않은 차디찬 음성이 내뱉어졌다.
“얼마든지 덤벼도 좋은데, 덤비려거든 각오 단단히 하는 게 좋을 거야. 내가 보기보다 손이 매서워서 힘 조절을 잘 못 하거든.”
제아무리 마을의 청년들이 지난 2년간 빈둥댄 것이 아니라 한들, 갤러하드 밑에서 정예병 수준의 훈련을 줄곧 받아 온 엘프족을 감당한다는 것이 가당키나 할까.
결코, 당해 낼 재간이 없다.
그래도 이 청년이 제 주제는 아는지, 그 엘프족 여인을 상대로 도무지 이길 겨를이 안 보이는 듯하자, 들릴 듯 말 듯 쫑알대듯이 욕지거리를 하고는 철퍼덕 자리에 앉았다.
그 모습에 엘프족 여인 역시 시답지 않다는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그사이, 이 모든 상황을 안절부절못한 채 바라보던 스왈로가 옆에서 목을 축이던 이든에게 넌지시 물었다.
“저, 저기요. 영주님, 이대로 둬도 괜찮을까요?”
듣던 이든이 질린다는 듯 툴툴거렸다.
“훈련받는다고 안 죽는다니까요.”
“아, 아니 그게 아니라요…. 저렇게 서로 분위기가 살벌한데, 저리 붙어 있어도 될까요?”
“그게 뭐 어때서요?”
“혹여 저러다가 싸움이라도 나면 어떡합니까…?”
듣던 이든이 어깰 으쓱였다.
“그럼 싸워야죠. 뭐.”
“…예!? 싸우게 내버려 두신다고요?”
“네.”
“아, 아니…. 그래도 되는 겁니까? 다른 분들도 아니고 마을을 지켜 주겠다고 주둔해 주는 엘프분들이랑 자칫 싸움이라도 났다가, 저들하고 사이라도 틀어지면 어쩌시려고요!”
야단을 떠는 스왈로의 말을 듣던 이든이 급기야 피식 웃었다.
이를 본 스왈로는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이었다.
“영주님…?”
“그런 것에 관해선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설마하니 저들이 왕의 명령까지 어겨 가면서 사이가 심하게 틀어질 짓까지 하겠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그리고 저나 갤러하드 님 역시 이런 상황을 이미 진즉에 예상하였습니다.”
“예상하고 계셨다고요?”
“당연하죠. 종족부터 틀리고 살아온 방식 자체가 서로 다른 이들이 모인 곳에, 싸움이 안 나고 배기겠습니까?”
“한데 어째서 그냥 두시는 겁니까?”
이든의 표정이 심드렁하던 조금 전과 달리 사뭇 진지해졌다.
“이젠 좋든 싫든 간에 서로 지겹도록 봐야 할 얼굴들입니다.”
“…네?”
“저리 싸우다 보면 어느 순간 정도 들 겁니다. 그때가 되면 서로의 등을 맡길 수 있는 더없이 든든한 동료가 되겠죠.”
“…….”
이든의 얘기는 스왈로의 입장에서 선문답 같은 알아듣기 힘든 것이었다.
스왈로가 여전히 이해하기 어렵단 얼굴을 하던 그때, 이든이 재차 말을 이었다.
“우선 그냥 이대로 두시죠. 마찰이야 피할 수 없겠지만, 틀림없이 서로에게 좋은 자극이 되어 줄 겁니다.”
영주인 이든의 뜻을 완벽히 이해한 것은 아니었지만, 나름 깊은 뜻이 있어 보이니 스왈로가 저도 모르게 고갤 주억거렸다.
‘참 신기하단 말이지. 생각 없이 일하시는 것 같아도, 다 나름의 뜻이 있는 걸 보면 말이야.’
스왈로 그에게 있어 영주는 여전히 종잡기 힘든 사람이었다.
그사이, 이든의 기감이 조금 전 소란의 중심이었던 엘프족 여인에게로 향했다.
그녀를 살피던 이든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이상하네. 많이 듣던 목소리였는데 말이지….’
하지만 정작 기억은 떠오르지 않는지 연신 고개만 갸웃거리던 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