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8화. (168/250)

168화.

“크리스…?”

들어온 크리스의 모습에 스왈로가 의외란 표정을 했다.

크리스는 스왈로 역시도 너무 잘 아는 사람이었다.

레온하르트 영지에 전쟁이 발발하고 폐허가 되기 이전, 당시 어려웠던 영지의 상황에 숨통을 트이기 만든 요인 중에 유니콘 길드의 지부가 상주하게 된 것이 그중 하나 아니던가.

그렇다 보니 레온하르트 영지민 중에 크리스 지부장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크리스가 멋쩍은 얼굴로 인사를 했다.

“촌장님도 계셨군요.”

“영주님께서 용건이 있으시다 해서…. 자네도?”

“네.”

크리스가 멀뚱히 서 있던 그때, 이든이 건너편을 향해 손짓했다.

“앉으시죠.”

“아, 예!”

영주라지만, 어째 군기가 바짝 든 모습이다. 스왈로가 의아한 얼굴로 크리스의 잔을 준비하곤 차를 따르는 사이, 이든이 입을 뗐다.

“오랜만입니다. 용케 그 난리에서 살아남았군요.”

“…아, 네. 운이 좋아 영지민들을 따라 피신할 수 있었습니다.”

아는 사이처럼 말하는 둘의 모습에 스왈로가 넌지시 물었다.

“두 분이 서로 아는 사이셨습니까?”

그의 물음에 답한 것은 크리스였다.

“영주님께서 유니콘 길드의 길드장이셨습니다.”

“여, 영주님이…? 유니콘의 길드장이셨다고요?”

이든이 고갤 끄덕였다.

“네, 아주 잠깐이지만, 길드장을 맡았던 적이 있습니다.”

“허….”

내심 이든의 화려한 이력에 스왈로가 저도 모르게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어쩌면 이든의 발 빠른 일 처리 능력이 그때의 경력으로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닌지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사이, 크리스의 앞에 차가 놓이고 이든이 재차 말을 이었다.

“요즘은 지내기 어떠십니까?”

“…그냥 뭐 그렇습니다. 전쟁으로 지부도 사라지고, 따로 할 일도 없다 보니 마을의 일손을 도울 때 외엔 거의 놀다시피 하고 있습니다.”

전쟁 이후, 영지와 함께 유니콘의 레온하르트 지부가 함께 사라지고, 영지민과 더불어 그 지부의 길드원들만이 간신히 살아남은 현재.

그들은 한순간에 직장을 잃어버리고 손가락만 빠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사실 이쯤 되는 피해 규모면 수도의 본부에서 진즉에 지원이 왔어야 마땅하건만, 제국의 영토였던 곳 대부분이 상황이 좋지 않다 보니, 그들이 지원을 올 만한 여력이 되지 못하던 것이다.

그리고 크리스는 언제가 될지 모르는 본부의 지원만 넋 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던 실정이었고.

듣던 이든이 착잡한 얼굴로 입을 뗐다.

“진즉에 불러서 인사라도 해야 했는데 바빠서 그럴 겨를이 못 됐습니다.”

“제가 어찌 그걸 모르겠습니까. 같은 영지민인데요. 너무 괘념치 마십시오. 한데…. 촌장님과 함께 자리한 것을 보면 단지 인사만 나누고자 저를 부르신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따로 용건이 있으신 거군요?”

확실히 들어선 그 잠깐 사이에 이든의 의중을 파악한 것을 보면 젊은 나이의 지부장이란 자릴 꿰찬 것이 꽁으로 얻은 것은 아닌 모양이다.

듣던 이든이 솔직하게 고갤 끄덕였다.

“맞습니다. 아무래도 크리스 지부장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아서 말이지요.”

‘크리스’라는 이름만이 아닌 간만에 ‘크리스 지부장’으로 불리는 소리에 그가 얼굴에 살짝 미소를 띠었다.

“어떤 도움이 필요하신지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할 수 있는 한에선 최선을 다해 영주님을 돕겠습니다.”

호기로운 크리스의 말에 이든이 고갤 주억거리며 곧장 본론을 꺼냈다.

“이곳에 유니콘 길드의 지부를 다시 세웠으면 합니다.”

“…예!?”

“…네? 유니콘 길드의 지부를 세우신다고요?”

듣던 크리스와 스왈로의 반응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그때, 곧바로 크리스가 의아하다는 투로 물었다.

“…어, 어떻게 말입니까? 지금 수도 본부는 이곳에 지원을 올 만한 여력이 안 되는데요…?”

이든이라고 이를 모르고 아무 생각 없이 얘길 꺼냈을까.

그가 입을 뗐다.

“여력이 안 되는 것도 있겠지만, 좀 더 냉정히 말하자면 이곳에 지부를 세울 이점이 없는 거겠죠.”

“이점…이요?”

“돈이 안 된다는 얘깁니다. 이딴 마을에 뭐가 있다고 유니콘 길드가 큰돈 들여가면서 지부를 세우겠습니까?”

…거, 영주님이라지만 말씀 너무하시네. 이딴 마을이라뇨.

스왈로가 난데없이 울상을 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든은 계속 말을 이었다.

“이 마을의 가장 큰 문제점이 뭔지 아십니까?”

“……?”

“아무것도 없단 겁니다. 까놓고 얘기해서 여기에 시장이 있기라도 합니까? 하다못해 상인들이 드나들기라도 합니까? 아무것도 없지 않습니까. 유니콘 길드 역시 마찬가집니다. 최근까진 무관학교로 사업을 넓혔다지만, 주 업무는 어쨌든 유통업. 호송과 배송으로 먹고 사는 길드가 사업성이 전무해진 곳에 지부를 세울 리가 없죠.”

“…….”

“본부에서도 이를 알고 오래전부터 크리스 지부장에게 수도로 오라는 서신을 보냈을 텐데요. 아닙니까?”

제아무리 유니콘 길드가 어지러운 제국의 상황에 정신이 없다지만, 낙오된 길드원을 내버려 둘 만큼 인정이 없는 곳이 아니었다.

이든 역시 이를 알기에 물었던 것이었고.

“…맞습니다.”

크리스가 솔직하게 고갤 끄덕였다.

그의 대답을 듣던 스왈로는 처음 듣는 얘긴 듯 상당히 놀란 얼굴이었다.

‘역시나…’란 표정으로 고갤 끄덕이던 이든이 재차 말을 이었다.

“영지가 무너진 거야. 다시 세우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떠나간 상인들은 붙잡지 못하는 법이죠. 그들은 오직 돈만 좇으며 움직이니까요.”

이든의 말은 현 마을이 가진 가장 큰 문제점을 정확히 짚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란 것은 단지 제시만으론 끝내서는 안 되는 법.

중요한 것은 그에 마땅한 해결책이었다.

“혹 길드장님께선 이 문제를 해결하실 만한 방도가 있으신지요…?”

이든이 대뜸 이 얘길 언급한 것이 어쩌면 해결책이 있기에 그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스왈로가 조심스레 물었다.

이든이 곧장 답했다.

“어떻게든 제국의 남은 상인들이 이곳에 오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이곳이 어느 영지보다 구매력이 높다는 것을 알려야 하고, 영지 간에 유통 과정이 편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를 가능케 하려면 절대적으로 유니콘 길드의 도움이 필요한 셈이고요.”

듣던 크리스가 난감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을 했다.

“영주님 말씀은 잘 알겠지만, 지금은 그게 어렵습니다. 구매력은 둘째 치더라도 유통 과정은 더없이 어려운 실정입니다. 아시다시피 지금 제국 영토였던 곳들이 폐허가 되어 곳곳에 산채가 들어서면서 산도적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는 실정입니다. 특히나 수도와 가장 멀리 떨어져 고립되어 있다시피 한 저희 마을은 더더욱 그렇고요.”

듣던 이든이 고갤 끄덕였다.

“해서 우선은 그것보다 시작할까 합니다.”

“…무엇을 말입니까?”

“이 일대 산적과 도적이란 것들은 전부 씨를 말려야겠습니다.”

“그,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의아한 얼굴로 되묻는 크리스와는 달리, 스왈로는 저 막가파 영주가 늘 호언장담하던 대로 진짜로 해낼 것만 같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생각이 맞기라도 한다는 듯, 이든이 자신만만한 얼굴로 씩 웃어 보였다.

“제가 언제 안 될 걸 된다고 얘기하는 거 봤습니까? 내일 아침 동이 트기도 전에 주변에 산적과 도적이란 것들은 전부 치워 버리겠습니다.”

“…….”

“…….”

스왈로의 얼굴이 어느 때보다 빠르게 굳었다.

‘어…. 아무리 영주님이라지만, 그건 안 될 거 같은데요?’

그때, 이든이 마저 말을 이었다.

“그리고 크리스 지부장은 길드원들을 대동해서 동이 트는 대로 수도로 가 주십시오.”

“수도로요?”

“네, 그리고 이것을 게럴드 길드장께 보여 주십시오.”

이든이 건넨 것은 한 통의 서신이었다. 크리스가 그것을 받아 들다가 여전히 믿지 못하겠단 얼굴로 입을 뗐다.

“이, 일단 영주님 말씀대로 따르겠습니다만…. 그게 정말 가능하긴 한 건가요? 그… 내일 동이 트기도 전에 산도적들의 씨를 말린다는 것이….”

“그건 아무 걱정하지 말고, 크리스 지부장께선 오늘 밤 푹 자 두십시오. 지부장께서 가시는 길. 제가 싹 청소해 놓을 테니 말이죠.”

“하, 하하….”

크리스가 어찌 반응해야 할지 모르고 어색하게 웃던 그때, 이든이 또 다른 서신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스왈로가 앉은 자리 앞에 스윽 내밀었다. 스왈로가 고갤 갸우뚱했다.

“이건…?”

“촌장님께선 사람을 시켜 이것을 엘프족 숲에 전해 주십시오.”

“에, 엘프족 숲에 말입니까?”

일전, 이든이 보낸 서신에 엘프의 왕 갤러하드가 다짜고짜 쳐들어왔던 것이 떠올라 불안해 되묻는 스왈로였다.

당시엔 그가 서신을 대신 써 주었기에 내용을 미리 알고 있었으니 어느 정도 각오를 해 둔 것이 있긴 했지만, 이번엔 누가 써 준 것인지는 몰라도 미리 서신을 준비해 놓은 탓에 내용을 모르는 스왈로 입장에선 더욱 불안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이었다.

스왈로의 물음에 이든이 웃으며 입을 뗐다.

“크리스 지부장께서 전하는 서신 만큼이나 더없이 중요한 겁니다. 그 서신이 앞으로 이 마을의 운명을 바꿔 줄 겁니다.”

“저희 마을의 운명을 바꿔 줄 거라고요?”

이든이 고갤 끄덕였다.

“네, 저만 믿고 일단 보내세요. 제가 곧 돈방석에 앉게 해 드릴 테니까요. 후후후….”

‘아… 불안하다. 불안해…!’

어쩐지 이든의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고 있자니 벌써부터 불안이 한가득 밀려오는 스왈로였다.

그리고 그의 예상은 어김없이 빗나가는 법이 없었다.

***

툭. 툭.

동이 트려면 아직 한참이나 남은 새벽.

이 시간까지 잠자리에 들지 못한 것인지 스왈로가 퀭한 눈으로 연신 무언가를 바라보았다.

그가 쩍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곤 이든과 엘프족 병사들이 짊어진 채 나르는 큼지막한 자루에서 연신 눈을 떼지 못하던 그때, 한참을 넋 놓고 바라보던 스왈로가 비로소 말을 꺼냈다.

“저, 저기 영주님…. 이 많은 자루들은 대체 뭡니까?”

투우우웅.

땅에 떨어지는 소리만 들어도 그 무게가 상당해 보이던 자루들을 한가득 짊어진 채 나르던 이든이 그것을 내팽개치듯 내려놓고는 어째 평소답지 않게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흐르는 땀을 훔치며 입을 뗐다.

“후우…. 재물들입니다.”

“…재물들이요?”

“궁금하면 직접 보시든지요.”

듣던 스왈로가 여전히 의아한 기색이 가시지 않은 채로 쌓인 자루중 하나를 열어 안을 들여다보더니만 그의 눈이 일순 화등잔만 하게 커지는 것이 아닌가.

그의 시선이 쌓인 자루 전체를 재차 훑더니 더듬거리며 물었다.

“서, 설마 이 자루들이 전부 다…?”

이든이 씩 웃었다.

“그럼요.”

자루 안에 한가득 담겨 있던 것은 다름 아닌 각종 귀금속과 금은보화였다.

그런데 그 자루가 하나도 아닌, 산처럼 쌓여 있었으니, 그가 놀라 자지러지는 것도 이상할 게 없었다.

“아, 아니…. 이게 다 어디서 난 겁니까?”

“이 새벽에 제가 어딜 다녀왔겠습니까?”

“그, 그야 어젯밤에 산도적들을 소탕하신다고 하셨으니…. 설마, 거기 있던 것들?”

“전쟁 이후, 알뜰살뜰히들 모아 뒀더군요. 이건 놈들이 가지고 있던 것 중 극히 일부입니다.”

스왈로가 기겁을 했다.

“이, 이게 극히 일부…! 이, 이래도 되는 겁니까? 혹 저들이 빼앗긴 재물들을 되찾겠답시고 이곳에….”

“이곳에?”

이든이 되묻자, 스왈로가 냉큼 입을 다물었다.

이곳에 산도적 놈들이 쳐들어오지 않겠느냐는 말을 하려다가 만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눈앞의 영주가 후환을 남겨 뒀을 것 같지는 않았다.

“아무튼, 이걸로 모든 준비는 끝난 셈이군요.”

“…모든 준비라니요?”

“돈도 있겠다. 예정대로라면 유니콘 본부에서 사람도 보내오겠다. 이제 슬슬 제대로 된 마을 구색 좀 갖춰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 마을 구색이요…?”

이놈의 영주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스왈로가 여전히 알아듣지 못하던 그때, 이든이 그를 불렀다.

“촌장님.”

“…네?”

“엘프 병사들에게 시켜 외벽 공사현장에 노예들 백 명만 추려 마을 중앙으로 보내 달라 하십시오.”

“그들은 왜…?”

“그럴듯한 건물 몇 개 좀 지어야겠습니다.”

“어, 얼마나 말씀이신지…?”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앞으로 손님맞이로 바빠질 예정일 테니까요.”

“…….”

정말이지.

이젠 마을이 다른 의미로 한 치 앞도 알 수 없게 될 것 같다고 생각하는 스왈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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