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유니콘의 게럴드 길드장이 일순 서류를 보다 말고는 책상에 철퍼덕 엎드렸다.
그가 이러는 것이 오늘로만 해도 벌써 몇 번째인지.
옆 책상에서 함께 서류를 뒤적거리던 카르엘이 그런 게럴드의 모습을 보더니만 걱정스러운 투로 물었다.
“길드장님…?”
“…걱정하지 말게. 쓰러진 것 아니니.”
“그게 아니라. 계속 마저 일하셔야죠.”
그녀의 말을 듣던 게럴드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날 걱정하는 게 아니었나?”
“길드장님도 길드장님이지만, 일단 길드의 앞날이 더 우선 아닐까요?”
“끄응….”
게럴드가 핀잔을 듣더니만, ‘끙’ 소릴 내며 고개를 들었다.
어쩜 길드장이란 사람을 이리도 독하게 굴려 댈 수가 있는지, 칼스테인 지부의 이리아도 만만치 않았지만, 이곳 본부의 카르엘 비서장은 더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까라면 까야지.
더군다나 틀린 구석이 없는 말 아닌가. 그녀의 말대로 지금 유니콘 길드는 더없는 난관에 봉착해 있으니까.
게럴드의 시선이 다시 산처럼 쌓인 서류 중 하나로 향했다.
서류에 적힌 활자를 면밀히 검토하던 그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어째 이 많고 많은 서류 중에 괜찮은 것이 이리도 없는지….”
벌써 이 많은 서류 중 반이 넘는 것을 살펴보았지만, 그의 맘에 쏙드는 사업 계획을 찾지 못한 그였다.
과거 레스타드가 길드장이었던 시절에 서류부터 해서, 사무관들을 달달 볶아 쥐어 짜낸 계획들이 서류화되어 쌓여 있었지만, 지금의 난관을 해결하기엔 부족한 계획들이 다반사였다.
필시 이 많은 서류 전부를 뒤진다 한들 그럴듯한 계획이 있을 리 만무하지만, 그럼에도 지푸라기라도 붙잡는단 심정으로 살피고 또 살피는 그였다.
그렇게 다시금 그의 사무실에 정적이 찾아오고, 이따금 한숨 소리만 연달아 들려오던 그때였다.
똑똑.
난데없이 들려온 길드장실의 문 두드리는 소리에 내내 서류를 향하던 게럴드의 시선이 자연히 그곳으로 향했다.
“들어오게.”
그의 말이 들려오기 무섭게 길드장실의 문이 열리고 사무관 한 명이 들어왔다.
들어온 사무관이 평소와 달리 야단법석을 떨며 입을 열었다.
“길드장님, 길드장님…!”
“…응?”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
전쟁이 끝나고, 제국이 더없이 침울한 시기를 맞이한 근래.
길드장인 그를 찾아오는 손님의 발길이 끊긴 지 언제였는지 모른다.
난데없이 찾아온 손님이란 말에 게럴드의 안색이 환해지며 곧장 입을 열었다.
“어서 들라 하시게.”
“예…!”
듣던 사무관이 손님을 데려오기 위해 급히 나가고, 게럴드는 구색이라도 갖추잔 식으로 서둘러 차를 준비했다.
그리고 잠시 뒤, 사무관의 안내를 받고 한 사람이 길드장실 안으로 들어섰다.
“아이고, 어서 오세…. 요?”
게럴드가 웃으며 찾아온 손님을 맞기 위해 영업용 미소를 짓던 그때였다.
그의 눈이 일순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게럴드 길드장님, 그간 무탈히 잘 계셨습니까?”
“자, 자네는…!”
게럴드의 시선이 향한 곳.
거기엔 과거 유니콘의 레온하르트 지부장이었던 크리스가 밝게 웃으며 서 있었다.
쪼르르.
막 데운 차가 찻잔에 따라졌다.
크리스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를 받아 들곤, 주위를 둘러보다 입을 뗐다.
“여전히 바빠 보이시군요.”
듣던 게럴드가 피식 웃었다.
“겉보기에 바쁘기만 하지, 돈 될만한 짓을 하고 있던 건 아니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한번 봐도…?”
“어려워 말고 얼마든지. 자네가 어디 보통 손님인가.”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크리스가 의아한 얼굴을 하고는 바닥에 굴러다니는 서류 뭉치 중 하나를 집어 들어 보았다.
서류를 훑던 그가 이내 고갤 주억거렸다.
“아…. 신사업 구상 중이셨군요.”
“그런 셈이지. 한데 이 많고 많은 서류 중에 쓸 만한 내용이 하나 없네.”
“길드의 사정이 그렇게나 안 좋습니까?”
“하아….”
게럴드가 일순 한숨을 푹 쉬었다.
퀭해 보이는 눈에 어느새 수심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말도 말게나. 어려워도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야. 옛날에 유통 쪽을 주름잡던 길드의 위상은 어디로 갔는지 배송 쪽도 마찬가지지만, 호송을 전담하던 용병들은 하나같이들 거리에 나앉고 있는 판국일세. 그나마 과거에 이든이 길드장이었던 시절에 세운 무관학교 덕에 남은 길드원들 월급은 꼬박꼬박 나와서 문제없이 주는 셈이지. 아는지 모르겠지만, 일거리가 없는 호송에 비해서 무관학교는 어느 때보다 성황이라서 말이야.”
“아…. 무관학교가 그리도 성황입니까?”
“이를 말인가. 제국이 전쟁 이후부터 턱없이 부족한 전력을 채우기 위해 무도 대회도 거치지 않고, 출신에 상관없이 능력만 충분하다면 아카데미에 영입하고 난리일세. 그 때문에 하나같이들 출세하겠다고 이곳을 거쳐 아카데미에 들어가겠다고 무관학교의 문을 두드리고 있는 실정이고.”
“그런 일이 있었군요.”
“하지만 아무리 무관학교가 성황이라 한들. 유니콘의 본질은 유통업이었지. 상거래가 거의 죽다시피 한 요즘. 호송일도 귀신같이 끊겨서 사정이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네.”
“이런….”
듣던 크리스도 덩달아 표정이 심각해졌다.
어느 정도 길드의 형편이 어려울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이리도 사정이 안 좋을 줄은 몰랐던 탓이다.
그때, 힐끗 크리스의 표정을 살피던 게럴드가 일순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아, 이거 미안하구만, 오래간만에 찾아온 친구에게 내 앓는 소리만 해 대고 말이야. 그래…. 크리스 자넨 그간 어찌 지냈나?”
게럴드의 물음에 크리스가 어색하게 웃었다.
“저야 뭐…. 그냥 그랬죠.”
게럴드가 크리스의 반응을 보고는 더없이 침중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하구만…. 내 자네들의 사정을 빤히 알면서도 신경 쓰지 못한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네. 사실 어느 곳보다 어려웠던 곳이 그곳 아니던가…. 부디 이 못난 길드장을 용서해 주게.”
자신을 향해 고갤 푹 숙이며 미안함을 건네는 게럴드의 모습에 크리스가 황급히 그를 일으키곤 손사래를 쳤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길드장님께서 저희를 얼마나 신경 써 주셨습니까. 이렇게 사정이 어려운데도 줄곧 저희에게 본부로 오라 제안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다만…. 저희가 고향에 남겠다고 한사코 고집을 부려서 문제였지요.”
이는 사실이었다.
게럴드 길드장은 전쟁 이후. 내내 크리스 지부장과 그곳에 길드원들에게 마음이 쓰였던 탓에, 이들에게 수도 본부로 올 생각이 없느냐는 서신을 시시때때로 보내왔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크리스와 길드원들은 그곳에 남은 영지민을 버려두고 갈 순 없다며 늘 거절했었고….
그런 크리스의 말을 듣던 게럴드가 씁쓸하게 웃었다.
“이해를 구하려는 것은 아니었네만, 그래도…. 그리 말해 주니 고맙네.”
“별말씀을요. 전 정말 사실만 말씀드린 겁니다.”
“훗. 어련할까.”
서로의 근황에 대해 대화를 나누다 보니 모락모락 김이 나던 차도 어느새 식어 있었다.
약간은 미지근해진 차를 서로 한 모금씩 들이켜던 중 게럴드가 재차 입을 뗐다.
“근데 이 먼 곳까지는 웬일인가? 내가 오라고 할 때는 그렇게 안 오더니만, 혹 수도에서 일하게 될 마음이 생긴 건가…!?”
“하하하…. 아니요. 그것 때문에 온 건 아닙니다. 그보다 이것을.”
크리스가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게럴드 앞에 놓았다.
게럴드가 그것을 보더니 의아한 얼굴을 했다.
“이건…. 서신 아닌가?”
“예. 혹, 길드장님께서도 이든 님이 생존해 계신다는 소식을 들으셨습니까?”
“듣다마다. 무관학교의 발리스타 교관에게 얼마 전에 전해 들었지. 내 그것을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일순 말을 꺼내던 게럴드가 내심 섭섭하단 투로 말을 이었다.
“그 사람 참 너무하지. 아니 그렇게 한동안 연락도 없이 어딜 있던 건지. 무사했다면서 어떻게 이곳에 코빼기도 안 비칠 수가 있는지 말이야. 저기 앉아 있는 카르엘도 듣고는 아주 눈물을 펑펑 쏟더라니깐.”
“제, 제가 언제요!!!”
카르엘의 얼굴이 붉게 물들고는 꽥 소릴 질렀다.
마주한 크리스가 그들을 번갈아 보며 웃어 보였다.
내내 길드의 불투명한 미래를 걱정하다가 저리 온화한 표정을 짓는 게럴드 길드장도 그렇고, 서류 검토에 여념이 없던 카르엘조차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을 보면 이든이란 사람이 이들에게 얼마나 중요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크리스가 건넨 서신을 가리키며 입을 뗐다.
“그렇지 않아도 그 서신은 이든 영주님께서 보내신 겁니다.”
“…네?
“이든이 보낸 서신? …잠깐, 뭐?”
게럴드와 카르엘의 반응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게럴드가 자신이 무얼 들은 것이냐는 얼굴로 재차 물었다.
“자네 방금 뭐라 그랬나? 이든…. 영주?”
이미 이들의 반응이 어떨지는 충분히 예상했었다. 크리스가 고갤 주억거리며 답했다.
“네, 저 역시 아직 얼떨떨합니다. 얼마 전, 이든님께서 저희 마을에 난데없이 나타나시더니 자신이 레온하르트 공작의 후계자가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들리는 말로는 지난 2년간 레온하르트 공작님을 만나 가르침을 받고 정식 후계자가 되셨다는데, 자세한 것은 촌장님과 장로님들만이 아시지 저도 잘 모릅니다.”
듣던 게럴드가 넋이라도 나간 듯한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레, 레온하르트 공작이 살아 있었다는 것도 놀랍지만, 이든이 그분의 후계자가 되었다니…. 정말 난데없이 이 무슨….”
“아무튼, 이든 영주님께서 이것을 길드장님께 꼭 좀 전해 달라 부탁하셨습니다. 아무래도 상당히 중요한 내용인 듯합니다.”
게럴드가 듣기 무섭게 곧바로 앞에 있던 서신을 뜯어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카르엘 역시 서류에는 안중에도 없는 듯 게럴드 길드장 옆에 착 달라붙어 따라 읽고 있었다.
서신을 읽던 둘의 얼굴이 의아한 얼굴을 하다 이내 헛웃기 시작했다.
“허, 허허…. 이 친구 이거 복귀하기 무섭게 아주 어처구니없는 짓을 저지르려 하는군.”
서신을 내용을 알 리가 없던 크리가 궁금한 듯 물었다.
“…왜들 그러십니까? 서신에 대체 무어라 적혀 있길래….”
“여기서 이럴 게 아니지. 잠깐만 기다리게.”
“네?”
그때였다. 게럴드가 대뜸 외투를 주섬주섬 챙겨 입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 카르엘도 함께 말이다.
게럴드가 그런 그녀에게 물었다.
“잉? 자네도 가려고?”
“그럼요. 가야죠! 무사했으면서 그동안 한번 연락도 없던 사람이잖아요. 괘씸해서 한마디 하러라도 가야겠어요!”
“…그럼 여긴?”
“대충 알아서 잘 굴러가겠죠. 뭐.”
‘어… 그, 그런가…?’
길드장도 그리고 비서장까지 자릴 비운 적이 없다 보니 정말 이래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어쩌겠는가.
카르엘이 저리 눈에 불을 켜는데.
자넨 여기에 남아 있게. 라고 한마디 하는 순간, 길드장이고 뭐고 한 대 날아올 기세였다.
둘을 번갈아 바라보던 크리스가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로 물었다.
“다, 다들 이렇게 갑자기 어딜 가시려고…?”
“어디긴. 당연히 자네 마을이지. 자네도 서둘러 함께 돌아갈 채비 하게.”
“벌써요? 아니, 그보다 길드장님도 거기에 가신다고요?”
그때였다. 게럴드가 일순 크리스를 향해 씩 웃어 보였다.
“축하하네. 크리스. 아니, 크리스 지부장. 자네도 앞으로 상당히 바빠지게 생겼어.”
“…네?”
이게 대체 어찌 돌아가는 상황인지….
크리스가 여전히 넋이 나간 듯한 기색을 지우지 못하던 그때였다.
“아!!!”
게럴드가 일순 탄성을 터트렸다.
“카르엘!”
부르는 소리에 서둘러 준비하던 카르엘이 일순 게럴드를 향해 고갤 돌렸다.
“예?”
“준비 끝나는 대로 본부 숙소 쪽으로 가 주겠나?”
“거긴 왜… 아!”
그러자 덩달아 카르엘도 탄성을 터트리는 것이 아닌가.
카르엘이 곧장 고갤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곧장 모셔 오겠습니다.”
“응. 그리고 현재 본부에서 대기 중인 칼스테인 영지 호송 인원도 함께 준비시키도록. 모시는 분이 중요한 만큼 호송에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하지 않겠나?”
“알겠습니다!”
***
똑똑.
“응?”
한창 수련에 열중이던 갤러하드가 그의 수련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별안간 휘두르던 검을 멈추고는 입을 뗐다.
“들어오게.”
갤러하드 입이 떨어지기 무섭게 한 엘프 병사가 들어와 시립하고는 그에게 무언가를 건넸다.
갤러하드가 쥐던 검을 놓고는 그것을 받아들었다.
“이게 뭔가?”
“레온하르트 영주가 보낸 서신이라 합니다.”
“이든이? 알겠네. 나가 보게.”
“예.”
그리곤 다시 시립한 채 그대로 사라지는 엘프 병사.
갤러하드가 곧장 서신을 입으로 거칠게 뜯어 젖히고는 안의 내용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이게 뭐야…?”
서신을 읽던 갤러하드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대체 무엇이 적혀 있길래. 저리도 인상을 구기고 있는 걸까.
갤러하드의 시선이 향한 곳.
서신의 내용은 별것 없었다.
짧은 몇 마디 글귀가 삐뚤삐뚤한 글씨로 적혀 있었다.
- 도움!
엘프 숲 자원 필요.
당신의 친구 이든이.
“발로 썼나? 무슨 서신이 이따위야…?”
애가 썼다고 해도 믿을 엄청난 악필과 두서없는 내용.
엘프 왕인 그가 어처구니없을 만도 했다.
근데 이게 사실은….
제 이름만 겨우 쓸 줄 알던 이든 본인이 한창 직접 글 쓰는 연습 중이라나 뭐라나….
아무튼, 그런 사연이 있었다고 한다.
받는 사람 입장에선 퍽 당혹스러울 만하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