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레온하르트 마을은 이른 새벽부터 상당히 분주해 보였다.
본래 일정대로 산도적이었던 노예들의 외벽 공사가 한창인 곳과 더불어 마을 중앙에선 마을 사람들 몇몇과 함께 차출된 노예들이 중앙에 건물이라도 지으려는 듯 움직임이 분주해 보였다.
그 소란스러움에 덩달아 잠자던 마을 사람들까지 이른 시간에 일어나 이게 무슨 일인지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로 구경하기에 바빴다.
“아니, 이게 대체 다 무슨 일이래? 마을 한가운데에 이건 또 뭐고?”
연신 넋 놓고 구경하기에 바쁘던 한 사내가 아무나 답해 주길 바라는 듯 다짜고짜 물었다.
그러자 그와 멀지 않은 곳에 있던 또 다른 사내가 곧장 답했다.
“소식 못 들었어? 영주님께서 마을 중앙에다가 번듯한 건물 몇 개 좀 짓자고 하신 거.”
“번듯한 건물? 그건 갑자기 왜? 우리 마을에 번듯한 건물이 뭐가 필요하다고?”
“영주님의 뜻을 내가 어찌 알어. 여련히 계획이 있으시니까. 이러시는 거겠지.”
“흠.”
듣던 사내가 ‘그런가?’ 하는 얼굴로 고갤 끄덕이곤 마을 중앙을 훑었다.
소박한 마을이었지만, 그래도 다들 나름 마을에 애정이 있던 탓에 항상 잘 정돈되어 있던 거리였는데, 건물을 짓기 위한 기초 공사 중인 듯 파 놓은 땅이며 여기저기 쌓여 있는 깎아 놓은 돌과 반듯하게 베여 쌓인 나무들까지. 하룻밤 새에 마을 중앙이 온통 공사현장을 방불케 하며 난잡해졌다.
그뿐이랴. 방벽 근처엔 지금도 외벽을 쌓는 공사가 한창이지 않은가. 마을의 바깥부터 해서 중앙까지 온통 공사인 것이다.
마을 전체를 훑던 사내가 일순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그러고 보면 영주님 오시고 나서 마을이 참 많이도 바뀌었어. 그렇지?”
“이를 말인가. 지난 2년간은 하루하루가 항상 똑같았었는데 말이야. 도적들이 쳐들어올 때 빼곤, 정말 조용한 마을 아니었던가. 근데 영주님이 오시고 나서부터는 뭔가 활기가 생긴 것 같다고 해야 할까. 좋은 건지 나쁜 것인지.”
“당연히 좋은 것 아니겠나.”
“응?”
번잡해진 마을을 훑으며 대화를 나누는 그들 사이로 한 노인이 휘적휘적 걸어왔다.
사내들이 그를 보고는 황급히 고갤 숙였다.
“게르만 장로님 나오셨습니까?”
“음. 소란에 잠이 오질 않아서 말이야.”
마을의 사람이 보고는 일제히 인사를 건네는 이.
마을의 가장 연장자이자, 큰 어른이었던 게르만 장로였다.
본래 나이가 들면 잠이 없어진다더니만, 그런 그조차 잠을 잘 수가 없었단 것을 보면 보통 시끄러운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소란에 평소보다 일찍 기침한 게르만의 얼굴엔 이 난잡한 거리를 보고도 미소가 환하게 피어 있었다.
그가 사방을 훑고는 고갤 주억거리며 천천히 입을 뗐다.
“이제야 사람 사는 동네 같은 느낌이구만.”
“사람 사는 동네요?”
듣던 사내들이 게르만이 혼자 중얼거리는 소릴 듣고는 궁금한 듯 물었다.
게르만이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품으며 고갤 주억거렸다.
“다들 그새 까맣게 잊기라도 한겐가? 전쟁이 일어나기 이전, 영지의 모습을 말이야.”
“아….”
비로소 이해한 사람들이 작은 탄성을 터트렸다.
게르만이 착 가라앉은 눈으로 말을 이었다.
“물론 이전에 레온하르트 영지 역시 더없이 어려운 상황이었지. 아니, 그때는 오히려 더하지 않았나. 시도 때도 없이 영지를 노리며 오는 몬스터들로 모두가 밤잠을 이루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유니콘 길드가 다녀간 이후로 살 만하지 않았던가. 유니콘의 지부가 세워지고, 엘프족과 동맹을 맺게 되면서 말이야. 그때 이후였지. 레온하르트 영지가 사람 사는 곳처럼 느껴진 것이. 그래, 마치…. 과거 레온하르트 공작님이 영지를 다스렸던 때만큼 말이야.”
“…….”
사람들의 입이 꾹 다물어졌다.
어찌 잊겠는가.
이제는 먼 과거가 되어 버린 그 시절의 레온하르트 영지를.
전쟁이 발발하기 이전.
제국이 강성했고, 레온하르트 공작이 영지를 다스렸던 그 시절.
이곳은 변방에 멀리 떨어진 작은 영지였지만, 당시에 레온하르트 영지는 수도 부럽지 않은 호황을 누리지 않았던가.
“유니콘 길드가 다녀가고 나서 그때의 기분을 간만에 느낄 수 있었지, 물론 그 평화가 오래가진 않았지만…. 얼마 안 있다가 전쟁이 일어나고, 영지는 폐허가 되고. 다시는 이런 활기를 느끼지 못할 줄 알았는데.”
게르만의 시선이 재차 마을 훑었다. 얘기하는 지금도 분주히 움직이며 공사 작업에 한창인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마을의 사람들부터 해서, 인부들에 게다가 엘프들까지. 이 많은 사람이 마을에 한데 모여 이른 새벽부터 이리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 여전히 난 믿기지 않네.”
말을 잇는 게르만의 눈동자가 어느새 촉촉이 젖어 있었다.
밀려오는 감동이 노인의 가슴에 저도 모르게 북받쳐 올라오는 것이다.
게르만 장로를 바라보는 마을 사람들까지 덩달아 숙연해지는 기분이었다.
게르만이 마저 입을 뗐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참으로 대단한 분 아닌가. 영주님 말이야.”
맞는 말이었다.
이 모든 것이 이든이 오고 나서 생긴 변화들이었다.
참으로 대단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레온하르트의 후계자가 난데없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가 다시 그때의 시절을 재현하고 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어르신 말씀이 맞습니다.”
“어르신의 말을 듣고 보니, 정말 마을이 활기를 찾은 것 같아 너무 기쁩니다…!”
마을 사람들이 저마다 대꾸하며 손뼉을 쳤다.
환한 미소로 그들을 바라보던 게르만이 짐짓 생각하듯 턱을 매만졌다.
“매일매일을 마을을 위해 달리듯 바쁘게 살아가시는 분일세. 안 보이는 곳에서 지금은 또 마을을 위해 어떤 일을 하고 있을지 보지 않아도 훤하구먼. 껄껄!”
게르만이 일순 호탕하게 웃었다.
이든이 마을을 위해 뭔가를 준비하며 열심히 달리고 있으리라 생각하는 그였다.
그래서 이든은 지금 뭐 하고 있냐고?
그게 그러니까….
***
“낄낄낄!”
어디선가 배꼽 잡고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낄낄낄낄!!!”
그 멈추지 않는 웃음소리에 마르코가 버럭 소릴 질렀다.
“닥쳐라! 이노옴!!!”
잔뜩 성이 나다 못해 노기 띤 목소리엔 살기까지 뒤섞여 있었지만, 들려오는 답은 어째 그의 신경을 더욱 박박 긁어대고 있었다.
“닥쳐라~~~ 이노오옴~~~~ 낄낄!”
비꼬듯 따라 말하는 것을 듣던 마르코의 눈은 핏발이 잔뜩 서다 못해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어쩜 사람을 약 올려도 저리 열이 받게 약 올릴 수가 있는지, 철들지 못한 동네 아이들마저 한 수 접고 들어갈 말본새였다.
“이, 이놈을…!!!”
급기야 열이 받을 대로 받은 마르코가 달려들 기세로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였다.
철컹.
기둥에 고정된 쇠사슬이 그의 팔다리에 단단히 채워져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들며 그의 움직임을 막아섰다.
달려들 재간이 없던 마르코가 연신 끓어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며 입술을 짓씹듯 자신의 앞에서 모욕을 주는 이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이든…!!!”
마르코에게 이름을 불린 이, 이든이 씩 웃으며 입을 뗐다.
“간만이구나. 마르코, 일전에는 네놈이 누군지 기억이 안 났는데 말이지.”
입을 뗀 이든이 발작하듯 자신에게 기를 쓰고 달려들려는 마르코를 향해 한 발짝 내디뎠다.
그가 재차 말을 이었다.
“그래. 어디서 뭐 하고 사나 했더니만, 산도적 수장 노릇을 하고 있었다고? 너에게 제법 어울리는 일이구나.”
“크읏…! 무도 대회 때 내게 망신을 준 것도 모자라 가문을 풍비박산 내더니 그것으로 부족했던 것이냐….! 어찌 이리 끝까지 내게 모욕을 줄 수 있단 말이더냐. 이럴 거면 차라리 여기서 날 죽여라…!!!”
붙잡힌 줄곧, 나눠 준 배식도 마다하고 쫄쫄 굶은 채로 이곳에 감금되어 있던 그였다.
처음 이곳 마을에 공격을 강행하려 모습을 드러낸 당시, 도적들을 호령하던 수장다운 위풍당당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는 수척한 모습.
하지만 지금 이든을 향한 마르코의 눈빛에선 어느 때보다 살벌한 기광이 넘쳐 흐르고 있었다.
오랜 시간 동안 오직 ‘이든’ 한 사람만을 목표로 두고 갈아 온 살기가 줄줄이 새어 나오면서 말이다.
그런 그의 살기를 오롯이 받던 이든이 일순 혀를 찼다.
“쯧.”
조금 전, 내내 마르코의 신경을 긁어 대던 장난기 가득한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이든의 얼굴이 어느새 전에 없던 위엄을 뿜으며 차디차게 굳었다.
“그간 나를 목표를 두고 힘을 길러 온 것은 가상하다만, 기껏 선택한 방식이 이런 거라니. 네놈 그릇이 겨우 이 정도더냐? 아니면 드레이븐 가문의 저력이라는 것이 고작 이 정도뿐인가?”
“……!”
마르코의 눈이 찰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무도 대회 그날 이후.
오랜 시간 동안 애써 지워 오던 가문의 옛 영광이 풍경처럼 그의 머릿속에 그려졌다.
차마 무어라 말을 못 하는 마르코를 대신해 이든이 재차 말을 이었다.
“네놈과 너의 가족들이 변방으로 쫓겨나던 당시 나는 분명 네게 이렇게 말했지. 네놈을 기다리겠노라고. 그리고 힘을 길러 다시 도전해 오라고 말이야. 한데 힘을 기르고 나서 선택한 것이 고작 도적질이라니. 어떻게든 가문의 위상을 되살리겠다는 계획은 애초에 안중에도 없던 것이냐?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
치부를 들추고, 정곡을 후벼 파 대는 이든의 말은 그야말로 촌철살인이 따로 없었다.
어찌 아니겠는가.
한때나마 한 영지를 지배했던 유서 깊은 가문의 장남이 도적들의 수령이 되었다는 것은 결코 자랑이 될 수 없는 것이었다.
아무리 힘을 기르기 위한 선택이었다지만, 이는 변명에 지나지 않았다.
특히나 요즘같이 혼란에 빠진 제국의 상황이라면 힘을 기르면서 동시에 가문의 영광까지 되찾을 공을 세울 기회라면 얼마든지 많았다.
다만 마르코의 선택은 그러지 못했던 것이고.
그는 제국의 힘이 약해진 틈을 타 세상 모든 것에 복수하겠답시고 날뛰지 않았던가.
내내 변명 한마디 없던 마르코가 입술을 짓씹으며 말했다.
“…그래서 그릇된 선택을 한 나에게 모욕을 주기 위해 여기까지 행차했느냐?”
“뭐, 그런 것도 있고.”
“…크읏!”
허를 찌르며 다시 신경을 긁는 이든의 말에 마르코가 재차 이를 악물던 그때였다.
“네놈에게 기회를 줄까 한다.”
이든의 말을 듣던 마르코의 눈썹이 일순 꿈틀거렸다.
“…기회?”
“그래. 땅으로 처박힌 네놈 가문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는 더없는 기회 말이다.”
그때, 마르코의 눈에서 불신의 기색이 역력히 피어올랐다.
“갑자기 그게 무슨 개소리냐! 가문의 영광을 되찾을 기회라니.”
“말 그대로야. 너도 귀가 있다면 익히 들어서 알고 있겠지. 전쟁이 일어난 배경에 관해서. 그리고 레온하르트 영지가 왜 흔적도 없이 폐허가 됐는지도.”
어찌 모르겠는가.
달리는 말보다 빠른 것이 소문이고, 그 소문은 남은 제국의 영토에 널리 퍼져 있었다.
그 역시 그걸 알고 있기에 죽은 줄로만 알았던 이든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서 이곳에 왔던 것 아닌가.
“그래서 그것이 뭐 어쨌다는 것이냐.”
마르코의 물음에 이든의 표정이 더없이 굳어졌다.
그가 살아 돌아온 이후. 오직 갤러하드에게만 알렸던 사실을 마르코에게도 내뱉었다.
“이곳을 폐허로 만든 죽음의 드래곤 데스 스타. 그놈이 아직 살아 있다.”
“……!”
마르코의 눈이 일순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뭐, 뭐라고…? 데스 스타가 살아 있다고…?”
“그리고 놈은 필시 이곳에 다시 돌아올 터.”
그때였다.
“드레이븐 마르코.”
“……!?”
이든이 난데없이 마르코가 그간 줄곧 버려두었던, 가문의 성(姓)을 포함한 그의 온전한 이름을 불렀다.
듣던 마르코가 여전히 놀란 기색이 가시지 않은 눈으로 이든을 바라보던 그사이, 이든이 데스 스타에 관한 얘기만큼이나 믿기지 않는 제안을 건넸다.
“훗날 되돌아올 데스 스타에게 대항하여 싸울 생각 없나? 네놈 가문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