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3화. (173/250)

173화.

갤러하드의 마음을 움직인 이든의 한마디로 이후의 대화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본디 높은 자리에 있는 걸물일수록 별것 아닌 사소한 것에 마음이 움직인다더니.

갤러하드가 딱 그런 유였던 것.

엘프의 왕이 ‘친구’라는 그 한마디에 이러한 결단을 내려줄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렇게 레온하르트 영지에 다시 활기를 불어넣기 위한 계획이 전부 짜이고 게럴드가 마저 말을 이었다.

“…어차피 인근의 산적들도 전부 소탕되었겠다. 오가는 길에 위험요소도 한껏 준 셈이니. 홍보만 제대로 한다면 상단과 부호들이 대단한 관심을 가질 것은 분명합니다. 일단 저는 수도로 돌아가는 대로 대대적인 홍보부터 해서 상인들에게 일차적으로 공급하는 것까지 계획해 놓도록 하겠습니다.”

이든이 더없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갤 끄덕였다.

엘프의 눈물이란 원석도 수월하게 수급할 수 있겠다.

유니콘 길드의 지부도 이곳에 다시 신설되겠다.

남은 홍보만 유니콘에서 제대로 해 준다면 떠나간 상인들을 다시 불러 모으는 것쯤은 시간문제였다.

그렇게 모든 대화가 끝나는 싶던 그때, 갤러하드가 문득 말을 꺼냈다.

“한데, 제일 중요한 장인은 어떻게 구할 생각인가?”

게럴드와 이든이 의아한 표정을 했다.

“장인이라뇨?”

아무것도 모른다는 그들의 표정을 보던 갤러하드의 얼굴이 일순 새하얗게 질렸다.

“설마…. 아무도 모르고 있던 건가?”

“…무엇이 말입니까?”

어째 슬금슬금 불안해지는 이든과 게럴드였다.

갤러하드가 재차 말을 이었다.

“자네들 얘기를 총합하자면 부호들과 귀족들을 대상으로 사업을 진행할 것이다. 그 말 아닌가?”

“그렇죠?”

“근데 이 엘프의 눈물이라는 원석이 가공 방법이 독특해서 말이야. 이것을 귀금속으로 세공해서 판매하려면 그만한 기술자가 있어야 하는데….”

비로소 게럴드가 알아들었다는 듯 웃으며 입을 뗐다.

“아 그 기술자 말씀이시군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아주 잘 아는 기술자가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 맡긴다면 문제없이 가능….”

그때, 갤러하드가 일순 고갤 저었다.

“그건 안 되오.”

“…예? 안 된다니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엘프의 눈물 원석의 강도는 ‘미스릴’과 동급이오.”

듣던 게럴드의 얼굴이 까맣게 죽었다.

그가 제대로 들은 것이 맞냐는 듯 곧장 되물었다.

“미스릴…? 지, 지금 미스릴 강도라 하셨습니까?”

“그게 그렇게 심각한 일입니까?”

게럴드와 달리 이든이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로 물었다.

게럴드가 넋 나간 듯한 얼굴로 답했다.

“심각한 일이냐고? 당연히 심각하지. 자칫 지금껏 짜 놓은 계획이 물거품이 될 수도 있는 거니까…!”

“물거품이라뇨? 그냥 장인만 구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이번 물음에 답한 것은 갤러하드였다.

“그게…. 생각보다 쉽지가 않네.”

“……?”

“왜냐하면, 미스릴 강도의 보석을 세공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드워프들만이 가능하거든.”

“드워프? 그럼 드워프 장인만 찾으면 되는 일이겠군요.”

“…그 드워프란 종족이 지금은 어디 사는지를 모르니까 하는 말이지….”

“…어디 사는지 모른다니요? 땅속에 숨어 사는 것도 아닐 텐데. 모른다는 게 말이 돼요?”

갤러하드가 고갤 주억거렸다.

“맞네.”

“네?”

“땅속에 산다고. 걔들 지금….”

“…….”

…아 진짜 땅속에 사는 거였어?

갤러하드와 게럴드의 심각한 표정과 달리, 내내 무미건조한 얼굴로 듣던 이든의 볼이 난데없이 푸들푸들 떨렸다.

그가 지붕이 떠나가라 버럭 소릴 질렀다.

“아오!!! 어째 잘 해결되는가 싶더라니!!!”

결국, 마을의 운명을 결정지을 걸물들의 회담은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흐지부지 끝나 버리고 말았다.

회관에서 대화를 나누던 사내들이 기운 빠진 걸음을 옮기던 그때, 게럴드가 넌지시 물었다.

“이제 어쩌면 좋겠습니까? 엘프의 눈물은 무리 없이 수급할 수 있게 됐다지만, 드워프 장인을 찾아내지 못하면 결국, 말짱 꽝 아닙니까. 모양 빠지게 원석 그대로 팔 수도 없고요.”

갤러하드가 고갤 저었다.

“요즘은 아마 원석만을 사려 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오. 원석이 있어 봤자 세공을 못 할 터인데. 어느 멍청한 상인이 이를 큰돈 주며 구매하겠소.”

“하아….”

“드워프들이 세상과 단절하기를 선언하고 숨어든 이상, 그들을 찾기란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보다 어려울 것이오. 엘프의 눈물 건은 보류하고, 내 다른 내어 줄 만한 것이 있는지 한번 고민을….”

그때였다.

게럴드와 갤러하드의 대화에 이든이 불쑥 끼어들었다.

“일단 예정대로 진행하시죠.”

“뭐어!?”

“자네 방금 내가 한 얘기는 못들은 겐가. 그 드워프 찾기가 보통 일이 아니라니까.”

이든의 말을 듣던 게럴드와 갤러하드의 반응이 동시에 터져 나온 그 순간, 이든이 재차 입을 뗐다.

“그들이 있는 곳을 알고 있을 만한 사람을 압니다. 그에게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그게 정말인가?”

“예, 그러니 우선 저만 믿고 다들 예정대로 진행해 주십시오.”

“…….”

엘프로서 오랜 세월을 살아온 갤러하드, 그 자신 역시 드워프의 서식지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것을, 누구에게 물어 무슨 수로 알아내겠다는 것인지 의아했으나, 필시 이든이 저리 말하는 것을 보면 그만큼 믿을 만한 구석이 있으리라. 생각한 그였다.

갤러하드와 게럴드의 눈이 일순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둘이 이내 큰 결심이라도 한 듯 고갤 끄덕였다.

가장 먼저 입을 뗀 것은 게럴드였다.

“그럼 그리 알고, 곧바로 수도로 돌아가 예정대로 일을 진행토록 하겠습니다. 모쪼록 갤러하드 님께서도 수급에 차질 없도록 잘 부탁드립니다.”

“이를 말이요. 아무 걱정 마시오.”

갤러하드에게서 확답을 받은 게럴드가 이든에게 시선을 옮겼다.

“오래간만에 만나 회포라도 풀어야 하는데 말이야. 일이 이렇게 돼서 그러진 못하겠군.”

이든이 웃었다.

“사업을 성공적으로 마치면 그때 하기로 하지요.”

“좋지. 다음번에 올 땐 꼭 그러도록 하세.”

마주 보며 웃던 게럴드가 일순 ‘아차’ 하더니 물었다.

“아, 근데 말이야. 함께 온 자네 부모님은 어찌할 생각인가? 역시 이곳에서 자네가 모실 생각이겠지?”

“그럴 생각입니다.”

“잘 생각했네. 안전하기야 수도가 더 괜찮기야 하겠지만, 자네도 있겠다. 그분들이 자네 찾겠다고 여간 고생을 하신 게 아니지 않나. 그간 부모님 마음 고생시킨 만큼, 이번 기회에 제대로 효도하게.”

“예, 그래야지요. 아 근데 말이에요.”

“응?”

“발리스타와 릴리도 이곳에 같이 왔죠?”

“그치? 근데 그 친구들은 왜?”

“걔들 좀 빌리겠습니다.”

“…응?”

유니콘 길드가 서둘러 재촉하는 게럴드 길드장을 따라 다시 수도로 걸음을 옮겼다.

간만에 만난 이든과 제대로 회포도 풀지 못했다는 생각에 아쉬움 가득한 얼굴로 떠나는 이들.

후에 다시 보기를 기약하며 떠나는 그들을 배웅한 이든이 갤러하드를 향해 입을 뗐다.

“갤러하드 님께서도 슬슬 가셔야죠?”

“어, 어어…. 그렇지. 가야지. 가긴 해야 하는데….”

“…왜 그러십니까?”

“아, 아니. 그냥 가기 전에 이곳에 주둔 중인 우리 병사들에게 격려 좀 할까 해서…? 다들 원체 고생 중이지 않나. 하하…하….”

그때였다.

이든이 일전 청년들과 드잡이를 했던 엘프족 여인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이든이 곧장 물었다.

“혹시, 따님께서 여기 계십니까?”

“엇!? 자, 자네가 그걸 어찌 알고?”

화들짝 놀라는 갤러하드의 반응에 이든이 일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역시, 어디서 만나 뵌 것 같은 익숙한 느낌이라. 내내 의아했었는데, 예상이 맞았군요.”

“아, 아니. 난 안 된다고 했는데 그 아이가 굳이 따라나서겠다고 해서…. 어떻게 잠깐 좀 보면 안 될까…?”

“설마 제가 안 된다고야 하겠습니까. 마음대로 하십시오.”

“하, 하하…. 고맙네.”

“단.”

“…응?”

“실비아 공주님께서 계신다 해서 훈련의 강도가 약해진다거나 그러진 않을 겁니다. 저 아시죠?”

“무, 물론 알다마다. 하하…!”

일순 그 자신의 딸을 과연 이곳에 보낸 게 맞는 일인지 걱정이 밀려오는 갤러하드였다.

***

이든이 그의 가족들과 밤새도록 회포를 풀었던 그다음 날.

이곳에 남게 된 발리스타와 릴리가 이른 아침부터 연무장으로 나왔다.

마침 먼저 나와 있었던 이든이 그들을 반겼다.

“생각보다 일찍들 일어났군.”

그의 말을 듣던 발리스타와 릴리가 죽을상을 했다.

그럴 수밖에.

간만에 아들을 보게 됐다고, 들떠 있던 브라운이 한껏 취해 발리스타와 릴리에게 연이어 술을 건네는 탓에 밤을 새우다시피 한 그들이었다.

다행히 메리가 브라운의 등짝을 치며 말려서 다행이지.

자칫 했으면 동이 틀 때까지 술을 들이켤 뻔한 그들이었다.

발리스타가 퀭한 눈으로 물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 묻는다는 것을 내 깜빡했소. 이든 형이 길드장님께 우리 둘 좀 빌려 달라 했다며, 대체 무슨 일이오?”

“무관학교 교관들을 빌려 달란 게 무슨 의미겠냐. 너희 둘. 쟤들 좀 가르쳐야겠다.”

발리스타와 릴리의 시선이 자연히 이든이 가리킨 곳을 향했다.

그곳엔 연무장으로 보이는 공터에 수백을 아우르는 마을의 청년들과 엘프족이라는 괴이한 조합이 줄지어 서 있었다.

발리스타가 넋 나간 표정으로 물었다.

“…저 사람들을 다… 가르치라고?”

“그래. 그간 무관학교에서 애들을 가르친 경험이 있으니, 달리 어려울 것은 없을 테고. 그치?”

“가르친다면야 가르칠 수 있긴 한데….”

“뭐야. 그 자신 없어 하는 말투는.”

“아, 아니…. 저, 저렇게 많은 사람들을 꼴랑 우리 둘이서…!? 게다가 지금껏 무관학교에서 가르쳤던 수련생들은 죄다 애들이었고. 저 사람들은 우리랑 나이 차이도 별로 안 나 보이는데!?”

“더 좋은 거 아냐?”

“…응?”

발리스타와 릴리가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로 이든을 바라봤다.

“나도 너희랑 나이 차이 별로 안 나잖아. 그렇지?”

“…그, 그래서?”

“근데도 난 너희를 쥐 잡듯이 가르쳤고. 그치?”

발리스타가 과거를 회상했다.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당시 이든의 무식하던 수련 방식을.

“그간 나를 가르치면서 쌓인 것도 많을 거고.”

“이를 말이요. 아주 이든 형만 아니었으면 내 그냥 콱…!”

찰나 굳어진 듯한 이든의 표정에 발리스타가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그, 그래서 계속 말해 보시오.”

미심쩍은 얼굴을 하던 이든이 재차 말을 이었다.

“…아무튼, 어라? 근데 마침 그간 쌓인 화를 풀 대상들이 저래 많이 있네?”

“…….”

“신나겠지? 그치?”

이보오. 이든 형, 그게 말이 왜 그렇게 되는 거요…?

발리스타와 릴리가 차마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모르고 입만 쩍 벌린 채 재차 가리킨 수련생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상황을 모르는 엘프족과 청년들이 똘망똘망한 눈으로 발리스타와 릴리를 뚫어지라 바라보고 있었다.

이든이 웃으며 마저 말을 이었다.

“뭐 해? 어서 일하러 가야지?”

“…….”

네, 합니다. 할게요…!

참 신기하기도 하지.

웃는 낯으로 부탁하는데, 이리 강압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못하겠다고 하면 어떤 잔소리가 튀어나올지 몰랐다.

발리스타와 릴리가 마지못해 수련생들을 향해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발리스타와 릴리의 주도 아래 시작된 수련은 이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욱 확실히 진행되어 갔다.

막상 지도하기 전엔 몰랐는데, 수련을 시작하다 보니, 이든의 말대로 그간 자신들이 고생했던 것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수련의 강도가 높아진 것이다.

결국, 그날 마을의 연무장엔 어느 때보다 강한 곡소리가 울렸다나 뭐라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