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4화. (174/250)

174화.

“하늘은 청명하고, 날은 더없이 선선하고 좋구나.”

레온하르트는 간만에 정취를 느꼈다.

“역시 이런 날에는 차 한잔의 여유만 한 것이 없지.”

레온하르트가 막 데운 차를 고고히 찻잔에 따랐다.

쪼르르.

역시 남아도는 것이 시간과 돈이라는 드래곤답달까.

얼마나 귀한 찻잎을 쓴 것인지. 차를 따르기 무섭게 방 안 가득 향이 퍼졌다.

그가 차를 따르고 자리하여 향을 음미하던 그때였다.

‘이든은 잘 지내고 있으려나.’

함께 지내는 동안 하루가 멀다 하고 티격태격했던 둘이었으나, 막상 그가 떠나고 나니, 너무도 조용했다.

물론 그가 떠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땐 말 더럽게 듣지 않던 짐 덩어리가 나간 것에 속이 이루 말할 수 없이 후련했건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떠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았건만, 그새 정이라도 들었던 건지….’

영원에 가까운 무수히 오랜 세월을 살아오며 ‘정’이라는 감정엔 이미 무뎌질 대로 무뎌진 줄로만 알았건만, 자신이 변한 것인지. 그게 아니면 그만큼 이든이란 존재가 그에게 특별했던 건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지금쯤이라면 레온하르트 영지의 재건을 위해서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겠군. 훗….’

이든의 행보를 상상하며 레온하르트가 저도 모르게 미소 짓던 그때였다.

콰아아아아앙!!!

그의 레어에 난데없는 폭음이 울려 왔다.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마냥 흔들려 대는 레어에 레온하르트의 눈도 덩달아 당혹스러워하며 흔들렸다.

“이, 이게 갑자기 무슨…!”

일순 레온하르트의 안색이 대번에 창백해졌다.

‘서, 설마…. 데스 스타가 벌써 돌아온 건가…!?’

흡사 자연재해를 연상시키는 이 흔들림과 이 폭음으로 봤을 때 그리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데스 스타가 정양을 완전히 끝났다고 보기엔 조금 이른 침입이었지만, 그렇지 않고서야 이 레어까지 올 누군가도 없을뿐더러. 이만한 충격을 줄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레온하르트가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자신의 반쪽짜리 드래곤 하트에 신경을 집중하던 그때였다.

쾅!

그가 있던 방의 문이 걷어차이다시피 거칠게 열리더니, 더없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레온하르트 님!!!”

“…이든?”

레온하르트의 얼굴에 드리웠던 긴장한 기색이 삽시간에 사라졌다.

하나, 곧바로 그가 인상을 구기며 육두문자를 내뱉었다.

“야이, 미친놈아! 오려면 조용히 올 것이지 왜 이리 요란 법석이야!!!”

평소의 이든이었다면 육두문자엔 응당 육두문자로 대답했을 것이다.

하나, 웬일인지.

오늘만큼은 그러지 않았다.

이든이 곧장 본론을 꺼냈다.

“됐고! 저랑 당장 어디 좀 갑시다!”

“무, 뭐…? 갑자기 어디를?”

“이 레어, 드워프가 설계했다면서요. 그 종족들 지금 어딨는지 알고 계시죠!?”

듣던 레온하르트가 고갤 갸웃했다.

“드워프 종족? 뭐, 알고 있긴 하다만 걔들은 갑자기 왜 찾는데?”

“가면서 설명해 드릴게요. 빨리 좀 서둘러 갑시다. 빨리…! 마법 뒀다 뭐 해요. 이럴 때 쓰는 거지!!!”

차 한잔의 여유를 즐기던 레온하르트는 결국 이든에게 끌려가다시피 그 자릴 떠날 수밖에 없었다.

***

어두침침하고 퀴퀴해 보이는 땅굴 속.

그곳의 한쪽 공간이 일순 일그러지는가 싶더니 꽃이 개화하듯 벌어진다.

벌어진 곳에 보이던 것은 이곳과 전혀 별개의 또 다른 공간.

그곳에 두 인형이 걸어 나왔다.

먼저 목발을 짚고 걸어온 이.

레온하르트가 한 발짝 앞으로 내딛고는 땅굴 안을 가리키며 입을 뗐다.

“이곳일세.”

“……?”

레온하르트를 따라 별개의 공간에서 이곳으로 나온 이든이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을 했다.

“…뭐가 이곳이란 거에요?”

“도착했다고. 드워프 사는 곳.”

“…예? 지금 이곳이 드워프 사는 곳이라고요?”

“그래.”

이든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기감으로 사방을 살피듯 두리번거렸다.

“…뭔가 다른 곳에 온 것 같긴 한데, 이게 어찌 된 겁니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저는 레어에 있었고, 그냥 한 발짝 걸었을 뿐인데요?”

레온하르트가 피식 웃었다.

“불가능한 것을 능히 가능하게 바꾸는 것. 그것이 드래곤의 능력이지.”

신기해하는 이든의 눈치에 레온하르트의 어깨가 한층 올라간 그때, 이든이 뚱한 표정을 했다.

“…이것도 용언으로 쓸 수 있는 것 중 하나입니까?”

“그런 셈이지?”

“근데 저한텐 이거 왜 안 알려 줬어요?”

…어?

안 알려 줬었나?

레온하르트가 볼을 긁적였다.

“…깜빡했나 본데?”

“와! 어처구니가 없네. 이렇게 좋은 걸 두고 자기만 알고 있었다고? 누군 좋아서 뛰댕기는 줄 아나!?”

“…알려 주면 되잖아.”

“이런 좋은 것 있으면 그때, 그때좀 알려 줍시다. 좀! 꼭 싫은 소리를 하게 만들어요. 어휴!”

“…….”

잔소릴 듣던 레온하르트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그의 표정이 ‘내가 왜 이놈한테 이런 잔소리까지 들어야 해…!?’라고 짜증을 팍팍 내고 있었다.

그렇게 다 큰 두 사내의 시답지 않은 말이 오가는 사이, 어느새 그들은 드워프가 사는 밀집 지역으로 보이는 곳 입구에 다다를 수 있었다.

레온하르트가 걸음을 멈추자, 이든 역시 따라 멈추곤 입을 열었다.

“도착한 겁니까?”

“그래, 이곳이 입구지.”

“따로 문지기 같은 이는 없는 것 같은데요.”

“그야 당연하지. 땅속 깊은 곳에다가 주거를 이룬 채 살아가니, 딱히 방문자랄 것도 없지. 그러니 무슨 문지기가 필요하겠나?”

“그럼, 어떻게 들어갑니까? 입구는 막혀 있을 테고, 문지기는 없고. 무작정 들어가서도 안 되는 것 아닙니까?”

“기다려 봐. 여기 어딘가에 그들을 부를 단추 같은 것이 있거든.”

흡사 거대한 외성의 성문을 연상시키는 커다란 문을 구석구석 살피던 레온하르트가 벽면 한쪽에 볼록 튀어나온 무언가를 꾸욱 눌렀다.

그 순간.

대애애애애앵. 대애애애애앵.

난데없이 굳게 닫힌 성문 안쪽에서 커다란 종소리가 울려오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잠시 뒤.

천장에 설치된 나팔 모양 관에서 웬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 누구시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그 목소리에 레온하르트가 온화하게 웃으며 입을 뗐다.

“그대들의 친구 레온하르트가 왔네. 문 좀 열어 줄 수 있겠나?”

-레온하르트 님?

“그래.”

-자,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나팔 속에서 더는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자 내내 잠자코 듣던 이든이 입을 뗐다.

“문지기는 없지만, 방범은 상당히 철저하군요.”

“그런 셈이지. 드워프란 친구들이 원체 겁이 많아서 말이야.”

그때였다.

덜컥.

성문의 가장 낮은 곳에 난 작은 구멍이 덜컥 소리와 함께 열리며, 웬 불신 어린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드러낸 눈동자는 이든을 한 차례 훑다가 레온하르트를 보더니 이내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덜컥.

그리고 눈이 보이던 작은 구멍이 재차 닫히고 잠시 뒤.

쿠궁. 쿠구구궁. 쿠궁.

성문을 굳게 잠그던 기관진식 형태의 자물쇠가 기이한 소리를 내며 하나씩 잠금을 풀더니, 이내 모두 풀리기 무섭게 성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열린 성문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머리에 뿔이 달린 짜리몽땅한 노인의 형상을 한 드워프였다.

그 드워프가 후다닥 튀어나오며 레온하르트를 향해 깊게 읍하곤 입을 뗐다.

“레온하르트 님, 여기까진 어인 일이십니까…!”

근래 들어 이든같이 몰상식한 놈만 보다가 드워프의 공손한 모습에 한껏 기분이 좋아진 것인지. 레온하르트가 껄껄 웃으며 답했다.

“하하, 우리가 뭐 무슨 볼일이 있어야만 보던 그런 사이던가.”

레온하르트의 말에 드워프가 재차 고갤 푹 숙였다.

“아, 아니요!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다른 이도 아니고 무려 레온하르트 님이신데요…!”

“이리 반겨 주니. 내 아주 뿌듯하군. 그래…. 멀린은 잘 지내고 있는가?”

레온하르트가 누군가의 안부를 묻자 드워프가 곧장 입을 뗐다.

“멀린 장인께선 무탈히 잘 계십니다. 저, 저기… 여기서 계속 이럴 것이 아니라 안으로 드시지요.”

드워프가 안절부절한 모습으로 손짓과 발짓까지 해대 가며 성문 안을 가르치자, 레온하르트가 만족스럽단 얼굴로 고갤 주억거렸다.

“으음. 그럴까. 자, 이든 자네도 어서 따라오게.”

들려온 레온하르트의 목소리에 이든이 고갤 끄덕이며, 곧장 그를 따라 발을 뗐다.

뒤따라 걷던 이든이 넌지시 물었다.

“멀린은 누구입니까?”

“내 레어를 제작해 준 장인의 아들이지. 아마 지금쯤이면 이곳의 우두머리가 되었을 것 같아 그의 안부를 물었던 것이고. 내가 일전 자네에게 줬던 레온하르트를 상징하는 보검 역시 멀린의 아비 되는 자가 만들어 낸 작품 중 하나지.”

“음.”

대화를 주고받는 둘의 모습에 드워프가 힐끗 그들을 바라봤다.

레온하르트야 평소 알고 있던 귀한 손님이니 들이는 것이야 당연하지만, 난생처음 보는 이든의 모습에 앞장서 걷던 드워프가 연신 신경 쓰이는 듯 훔쳐보다가 이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저, 저기…. 레온하르트 님.”

“응?”

“저기 뒤에 계신 같이 오신 분은 누구신지 여쭤도 될까요?”

역시 모든 종족을 통틀어 가장 겁이 많고, 가장 조심성 많은 드워프답달까.

레온하르트와 함께 온 것을 보면 그 못지 않은 귀한 손님으로 보이지만, 그래도 누군지는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겠다는 드워프의 물음에 레온하르트가 웃으며 답했다.

“내 귀한 친구일세. 음… 그 외엔 딱히 이 친구를 설명한 방법이 없는데, 어찌 안 되겠나?”

“…….”

드워프가 이든을 뚫어지라 쳐다보다가 천천히 고갤 끄덕였다.

“레온하르트 님의 친구이시면 저희에게도 귀한 손님이시지요. 실례했습니다.”

드워프의 말에 이든이 고갤 저었다.

“아닙니다. 미리 양해를 구하지 못해 죄송할 따름입니다.”

이든이 예의를 가득 담아 말하자, 앞장서던 드워프가 비로소 안심한 얼굴을 하며 재차 그들을 안내했다.

“아닙니다. 자자, 어서 이쪽으로.”

드워프를 따라 긴 터널을 지난 지 한참 뒤. 터널 끝에 도달하자 가히 땅속이라곤 믿기지 않는 드넓은 도시가 모습을 드러냈다.

일순 느껴지는 수많은 기척에 이든이 놀란 얼굴을 했다.

레온하르트가 그런 이든의 반응을 보며 아쉽다는 얼굴을 했다.

“크…. 자네가 이 광경을 두 눈으로 직접 담아야 했는데.”

“그리 대단합니까?”

“대단하냐고? 당연하지! 드워프 종족의 도시는 엘프족 숲과 비견될 만큼 이 드넓은 대륙에 얼마 되지 않는 장관 중 하나를 보여 주고 있지. 숲과 조화를 이루며 문명을 이룬 엘프족 숲과는 달리 단지 땅굴 속에 이만한 광경을 담았다는 것은, 그만큼 드워프들의 기술력이 대단하다는 방증이기도 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이 도시의 규모야. 마치 아슬란 제국의 수도를 방불케 한달까.”

“음….”

듣던 이든이 고갤 끄덕였다.

확실히 이곳에 들어선 순간부터 흡사 아스란 제국의 수도에 처음 발을 내디뎠을 때와 비슷한 기분을 느꼈으니까.

안내하는 드워프를 따라 길을 계속 걷다 보니 어느새 드워프 왕국의 도시 한복판까지 다다랐다.

등장한 레온하르트와 이든의 모습에 떠들던 드워프들이 입을 틀어막고는 잔뜩 경계한 채로 그들을 바라봤다.

그 사이를 누비며 일행들을 따라걷던 이든이 입을 열었다.

“저희가 지나가는 자리마다 고요하기 짝이 없는 것이, 다들 겁을 잔뜩 먹은 모양인데요?”

“그럴 수밖에 엘프족과 마찬가지로 거진 수백 년을 숨어 지내온 그들이야. 간만에 만난 다른 종족일테니 경계를 하는 것이야 당연하지.”

“음.”

하지만 그런 고요 속에서도 끊임없이 들려오는 한 가지 소리는 있었다.

땅! 따아앙! 땅!!!

들어선 도시 곳곳에서 쇠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야말로 장인들의 도시다운 소리였다.

듣던 이든이 재차 입을 뗐다.

“그나저나 정말 대단하군요.”

“뭐가 말인가?”

“곳곳에서 쇠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림에도 불구하고 땅속 안이 찌는 듯하게 느껴지거나 그러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쾌적하게까지 느껴지는데요.”

레온하르트가 웃으며 그의 말을 맞받아쳤다.

“그게 이곳의 명물 중 또 하나지. 드워프들이 마나를 다룰 때는 오직 불을 피울 때만이야. 그 외엔 모든 것을 자기네들의 기술로 대체하고 있는 상태고. 대체 환기 시설을 어떤 형태로 설계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이들의 머리가 아주 비상하다는 거지. 내 감히 예상해 보건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엔 비상한 머릴 지닌 이들이 이 세상을 이끌어 갈 재목이 될 거야. 내 장담하지.”

“확실히 그럴 수도 있겠군요.”

이든과 레온하르트가 나누는 대화를 듣던 앞서가던 드워프가 표현은 안 해도 내심 뿌듯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던 그때, 그 드워프가 일순 멈추어 섰다.

그가 한 건물을 가리키며 입을 뗐다.

“이곳이 바로 멀린 대장 장인께서 계신 곳입니다.”

드워프가 가리킨 건물을 바라보던 레온하르트의 입이 쩍 벌어졌다.

어느 곳보다 높디높고, 웅장해 보이는 건물이 도시 한가운데에 위풍당당이 우뚝 솟아 있었다.

이를 바라본 레온하르트가 감탄을 금치 못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와…. 어째 내 레어보다 더 좋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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