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9화. (179/250)

179화.

전설의 장인 몰린이 자진해서 나서겠다고 하는 순간, 멀린의 걱정과 달리 몰린을 따라나서겠다고 스스로 지원하는 드워프들이 상당했다.

누굴 보내야 할지 걱정을 던 셈이긴 하지만, 이제는 연로한 그의 아버지가 나서게 되자 아들 된 도리로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버지,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바깥세상은 이곳과 달리 지내기 힘드실지도 모릅니다….”

현 대장 장인이 아닌 자식으로서 건네는 멀린의 걱정에 몰린이 희미하게 웃었다.

“이곳과 바깥이 다를 게 무어겠습니까. 어차피 모두가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인 것을…. 대장 장인께선 이 노인네를 너무 걱정하지 마시구려.”

“아버지….”

이제는 완연한 백색인 머리카락과 수염. 그리고 얼굴에 가득한 주름은 그간 몰린이 얼마나 긴 세월을 살아왔는지를 어림짐작하게 해 주었다.

장인의 길은 고됨의 연속이었다. 해서 드워프들은 고령이 되면 자연히 일선에서 물러나는 것이 수순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몰린은 멀린에게 있어서…. 아니, 이 도시에 치열하게 쇠를 두드리는 드워프에게 있어서 항상 어엿한 장인이고 싶었다.

그렇기에 노쇠한 몸을 이끌고 바깥세상으로 나가겠다고 한사코 고집을 부린 것이다.

멀린이 이를 모를 리가 없다. 자신의 아비 되는 이가 평소 어떤 신념으로 살아왔고, 어떤 생각으로 먼저 바깥으로 나서겠다고 말을 꺼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떠나는 아비를 바라보는 멀린의 가슴은 그렇게 절절할 수가 없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듯한 멀린을 바라보던 몰린이 아들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쓸어내렸다.

“대장 장인께선 오래전 이미 그 자리에 오르셨지요. 그리고 내내 이 부족한 노인네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질 못하였습니다. 내가 바깥세상에 나가는 것은 순수한 호기심 때문이지만, 대장 장인께서 이제 나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진정한 장인이 되길 바라는 뜻 역시 없지 않아 있답니다. 그러니….”

몰린이 말끝을 흐리자, 멀린의 시선 역시 자연히 아비에게 고정되었다.

몰린이 천천히 고심하고 고심 끝에 무겁던 입을 뗐다.

“…부디 지금 가는 그 길을 계속 걸어감으로써 나를 뛰어넘어 주시오.”

아비로서 자식에게 남기는 마지막 인사라기보단, 선배 대장 장인으로서 후배에게 남기는 인사에 더욱 가까웠다.

남들이 이를 봤을 땐 어떨지 몰라도.

그것이 멀린의 마음을 두드리며 더욱 구슬프게 다가왔다.

아비의 깊은 속뜻을 이해한 멀린이 눈물을 쏟으며 고갤 주억거렸다.

“명심. 또 명심하여 지금 가는 길에 한 점 부끄럼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멀린 역시 아들로서가 아닌 후배 대장 장인으로서 대답한다.

그런 멀린의 모습을 바라보며 몰린이 희미하게 웃어 보이고는 자신의 뒤에 늘어선 드워프들을 향해 고갤 돌렸다.

“총 오십이라.”

몰린이 자신을 따라나서게 된 드워프들을 뿌듯한 얼굴로 훑었다.

지원한 이백여 명의 드워프 중 솜씨 좋은 이들로 고르고 골라 구성된 정예 장인들이었다.

그리곤 곧장 이든을 향해 입을 뗐다.

“영주님, 저희는 모든 준비를 끝마쳤습니다.”

이든이 고갤 끄덕였다.

그리고 멀린이 있던 곳을 향해 고갤 숙였다.

“무리한 부탁이었을 텐데,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멀린이 고갤 저었다.

“영주님께서 저희를 위기에서 구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저희는 응당 그에 따른 보답을 한 것이고요.”

“그래도 큰 결단을 내려 준 것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이로써 저희 마을도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은혜,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은혜는요. 앞으로 영주님의 마을과 저희는 동맹을 맺게 될 터인데 그저 저희의 작은 성의라 생각해 주십시오.”

“동맹이라….”

낮게 중얼거리던 이든이 일순 고갤 저었다.

“동맹 말고, 친구는 어떻습니까?”

멀린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그의 시선이 이든이 내민 손을 향했다.

“친구…. 말입니까?”

이든이 고갤 끄덕였다.

“단순한 동맹 관계 같은 것은 원하지 않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위해 무언가를 바라지 않고 아낌없이 도와줄 수 있는…. 그런 친구 같은 관계가 되었으면 합니다.”

“동맹이 아닌 친구….”

듣던 멀린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지금껏 타 종족들에게 숱한 침략만 받아 왔고, 과거 동맹을 청했던 몇몇 이들 역시 그 자신들에게 무언가를 바랐던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렇기에 바깥세상과 완전히 등지겠단 각오로 이 깊은 땅속으로 숨어들었건만….

그런데 수백 년 만에 찾아온 인간 되는 이는 목숨을 걸고 자신들 도시의 위기를 구해 준 것으로도 모자라, 동맹이 아닌 친구가 되자 먼저 제안한 것이다.

찰나 깊어지는 생각과 함께 넋을 놓던 멀린의 얼굴에 차츰 미소가 가득 채워지는 것은 왜일까.

그가 고갤 끄덕이곤 이든이 내밀었던 손을 마주 꽉 잡았다.

“좋습니다. 친구…!”

멀린이 마주 내밀어 준 손을 맞잡고 흔들던 이든의 얼굴에도 이내 환한 미소가 지어졌다.

단순한 동맹 관계가 아닌 친구가 된 두 사람.

그리고 이는 레온하르트 마을과 드워프 도시 역시 서로 친구가 됐다는 것을 의미했다.

줄곧 세상과 등지고 살던 드워프들의 닫혔던 마음을 열게 된 계기가 된 것이니, 오늘을 기점으로 훗날 인간과 드워프가 화합을 이루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서로 꽉 마주 잡던 두 친구의 손이 떼어지고, 이든이 먼저 입을 열었다.

“드워프 도시에 또다시 어려운 일이 발생하거든, 어려워하지 말고 언제든 제게 말해 주십시오. 바로 달려오겠습니다.”

“이든 영주님께서도 저희의 도움이 필요하시거든 언제든 말씀해 주십시오. 저희 드워프들이 기꺼히 달려갈 것입니다.”

멀린의 화답을 듣던 이든이 마주 웃으며 고갤 주억거리곤 옆에 있던 레온하르트를 불렀다.

“레온하르트 님, 이제 슬슬 출발하시죠.”

“음.”

인간을 향한 드워프의 뿌리 깊었던 증오는 이 자리에서만큼은 더는 보이지 않았다.

생각지도 못한 두 종족의 화합.

이든과 멀린을 번갈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감추지 못하던 레온하르트가 부르는 소리에 고갤 끄덕이곤 곧장 용언을 외웠다.

그 순간.

우우우웅.

그들이 선 한 곳의 공간이 일그러지더니, 이내 레온하르트 마을과 연결된 커다란 차원 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깥세상으로 떠나는 친구들에게 인사를 건네는 드워프들의 눈가엔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다들 거기서도 잘 지내야 해!!!”

“연락 자주 해 달라고!!!”

이들의 열렬한 작별 인사에 큰 결심과 함께 비장한 눈빛으로 바깥세상으로 떠나는 드워프의 눈가도 어느새 촉촉이 젖어 있었다.

이든과 레온하르트가 가볍게 손을 흔들곤, 이들을 뒤로한 채 먼저 차원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드워프들 역시 하나둘씩 둘을 따라 차원 문 안쪽으로 들어서기 시작한다.

마지막 남은 드워프가 차원 문 안쪽으로 걸음을 떼기 직전, 도시에 남은 드워프들을 향해 소리치며 손을 흔들었다.

“다들 건강히 지내시오!!!”

그 마지막 일별과 함께.

차원 문 역시 차츰 닫히더니 이내 완전히 자취를 감추듯 사라졌다.

동료들이 떠나고, 언제 떠들썩했냐는 듯 일순 찾아온 정적.

차원 문이 사라진 빈자릴 바라보던 멀린의 얼굴에 일순 착잡함이 묻어 나오는 듯했으나, 이내 고갤 휘휘 젓고는 밝게 미소 지어 보였다.

이별은 또 다른 만남의 시작이라 하지 않던가.

비록 저들은 친구와 가족들을 두고 떠나지만, 앞으로 마주하게 될 새로운 세상에서 그들은 새로운 만남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멀린 역시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마지막엔 웃으며 마음을 정리했으리라.

***

차는 이미 진즉에 식었건만, 어째선지 스왈로는 따라 놓은 차를 쉬이 입에 가져다 대지 못했다.

이른 아침에 마을을 떠났던 이든이 밤늦도록 돌아오지 않자 문득 걱정이 밀려온 탓이었다.

스왈로가 일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휴…. 영주님께선 대체 무엇을 하시길래 이리 늦으신단 말인가….”

이든이 하루가 멀다 하고 마을을 쑤시고 다닐 때는 제발 단 하루만이라도 조용히 지냈으면 좋겠다 목 놓아 기도했던 것이 엊그제 같건만.

정작 이든이 밖을 나돌아다니며 돌아오지 않으니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닐까 걱정부터 앞서는 것을 보면, 이젠 이든이란 존재가 그에게 있어 알게 모르게 얼마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지 내심 깨닫게 된 스왈로였다.

비단 그에게만 있어 중요할까.

이제 이 마을은 이든이 없으면 살아갈 수가 없게 되었다.

이든이 온 뒤로, 도적들의 숱한 침략이 사라졌고, 이든이 온 뒤로 엘프족과 재차 동맹을 맺게 됐으며, 이든이 온 뒤로 유니콘 길드가 들어서게 됐고, 이든이 온 뒤로 외벽 공사가 진행되며 꿈에서만 그리던 영지의 재건이 시작되었다.

이 모든 것이 ‘이든’이란 한 사람으로 비롯하여 시작된 변화였다.

처음 이 변화의 움직임을 목도했을 땐 자신을 포함한 마을 사람들 모두가 적응을 못 하고 얼떨떨해하기 일쑤였지만, 이젠 변화가 없는 마을의 모습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지금 레온하르트 마을은 평화와 변화가 공존하는 시기다.

그리고 이대로라면 필시 이른 시일 내에 과거 영광스럽던 영지의 모습을 되찾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깜깜무소식인 이든 때문에 스왈로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 것이 당연하였다.

그렇게 다시 시간이 흐르고, 스왈로가 대뜸 자리에서 일어나고는 밖으로 나섰다.

밤이 이미 진즉에 깊어져 그 시끌벅적하던 마을 역시 쥐 죽은 듯이 조용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스왈로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아, 아무래도 무슨 일이 생긴 것이 분명해. 그러지 않고서야 이리 돌아오지 않는단….’

그때.

뿌우우우우.

보초를 서던 엘프가 뿔피리를 불었다.

잠을 청하려던 마을 청년들과 엘프들이 그 소릴 듣곤 후다닥 뛰쳐나왔다.

스왈로 역시 긴장이 역력한 얼굴로 뛰어가 방벽 위의 엘프에게 물었다.

“무, 무슨 일이오!”

스왈로의 물음에 뿔피리를 불었던 엘프가 먼발치를 가리키며 입을 뗐다.

“웬 무리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무리!?”

이런 늦은 시각에 마을로 다가오는 무리라면 필시 도적일 터.

하지만 하필이면 이든이 없을 때 도적이 올 것이 뭐람.

“엘프족과 청년들은 즉시 전투태세….”

현재 자리에 없는 이든을 대신해 스왈로가 명을 내리기 위해 막 입을 떼려던 그때였다.

“나다!!!”

방벽 너머 다가오는 무리로부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스왈로가 화들짝 놀란 얼굴로 다가오는 무리를 향해 재차 고갤 홱 돌렸다.

“나 영주다!!! 도적 아니야. 화살 쏜 놈은 아주 그냥 그날로 제삿날일 줄 알어!!!”

괴팍함과 심통이 잔뜩 묻어 나오는 저 목소리에 말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틀림없이 그들의 영주인 이든이었다.

방벽 너머 다가오는 무리를 바라보던 스왈로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왠지 영주의 목소리만 들어도 반가워진 탓이었다.

마을 안에 들어선 이든 일행을 바라보던 스왈로는 쩍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가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그러니까…. 여기 이분들이 드워프 분들이시라고요…?”

“네. 어렵게 모셔 온 분들입니다. 이분들이 지내시기에 불편함이 없도록 쉴 공간을 내어 주십시오.”

“아, 아아… 예.”

생각할수록 어처구니가 없다.

아침에 이든이 대뜸 드워프를 찾아오겠다며 나섰을 때는, 저 양반이 이젠 하다 하다 있지도 않은 드워프까지 찾아온다 난리구나…. 라며 혀를 차 댔었다.

그때는 그게 당연한 반응이었다.

드워프란 것이 역사책에서나 볼 수 있는 멸종한 종족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진짜 그 드워프를 데려올 줄이야.

대체 영주의 한계는 어디까지인지 내심 시험해 보고 싶은 스왈로였다.

그렇게 드워프들을 신기한 듯 바라보던 스왈로가 힐끗 이든을 바라봤다.

스왈로가 조심히 물었다.

“저 영주님….”

“네?”

“…지금 꼴이 말이 아니신데…. 괜찮으신 거지요?”

스왈로가 바라본 이든의 꼴은 그야말로 흙투성이에 상거지 꼴이 따로 없었다.

이든이 한숨을 푹 쉬곤 입을 뗐다.

“제가 이분들 모셔 오겠다고 아주 개고생을 했거든요.”

“네, 확실히 그러신 것 같습니다….”

저 영주가 개고생이라 말했을 정도면 대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이고 온 것인지 짐작조차 할 수가 없다.

그때였다. 이든이 자신의 뒤에 시립 해 있던 몰린을 향해 고갤 돌렸다.

“몰린 어르신.”

“예.”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엘프의 눈물이 도착할 겁니다. 그전에 마을에 그럴듯한 대장간을 만들었으면 합니다. 가능하겠습니까?”

몰린이 웃어 보이며 고갤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그런 일은 서두를수록 좋지요. 내일 날이 밝는 대로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비로소 레온하르트 마을이 영지로 도약할 발판이 마련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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