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0화. (180/250)

180화.

동이 트기 무섭게 대장간을 짓는 드워프들의 작업이 시작됐다.

스왈로는 드워프들의 작업을 넋 놓고 바라보다가 일순 고갤 돌려 마을 전체를 훑었다.

한쪽에는 외벽을 짓는 작업이 한창이었고, 마을 중앙에는 건물들을 세우는 작업이 한창이었으니, 그야말로 마을 전체가 공사 현장을 방불케 했다.

“허 참….”

헛바람을 삼키던 스왈로는 내심 생각했다.

정말 이대로라면 영지를 복원하는 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 같다고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포로로 잡아 노예로 부리던 도적들도 이젠 저들이 알아서 아침 일찍 일어나 당연하다는 듯 척척 일을 찾아서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들의 수장 되는 자 역시 무슨 바람이 들어서인지 저들을 도와 도적들을 진두지휘하며 일을 시키고 있었다.

그뿐이랴.

이젠 장인 중에서 장인이라 할 수 있는 드워프들까지 합세한 셈이니. 과거 영지의 모습까지 복원하는 데 더욱 속도가 붙게 된 셈이었다.

“이 모든 게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사이 벌어진 일이란 말이지….”

현 영주 되는 이든은 알면 알수록 참으로 신기한 사람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바람처럼 나타났고, 그 이후로 아무런 조건도 없이 영지민들을 위해서 매일 한결같이 바쁘게 살아가는 그를 보고 있자면, 그 자신이 촌장이었던 시절엔 항상 걱정만 앞섰지 얼마나 게으르기 짝이 없었는지 내심 반성하곤 했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스왈로만이 느끼는 감정은 아니었다.

장로들도, 그리고 앞으로 마을을 이끌어나갈 청년들 역시 스스로 얼마나 노력이 부족했는지를 깨닫고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것을 영주님이 오시고 나서야 깨닫다니….’

너무 늦게 깨달은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미 지나가 버린 시간이 아닌, 살아가는 현재임은 틀림없다.

바쁘게 살아 숨쉬는 마을을 보며 저도 모르게 고해성사를 해 버린 스왈로가 고갤 휘휘 저었다.

“이제부터라도 변하면 되는 거야. 이제부터라도…!”

스스로 다짐하듯 낮게 읊조리던 스왈로가 일순 어딘가로 향해 곧장 걸음을 뗐다.

마을의 입구에 반가운 손님들이 찾아온 탓이었다.

***

“이것이…. 엘프의 눈물이군요.”

연신 감탄을 금치 못하는 스왈로의 눈이 한곳에서 떼어지질 못하였다.

다름 아닌 엘프들이 싣고 온 수레들에 가득 담긴 엘프의 눈물이라는 원석 때문이었다.

“어떻습니까?”

이든이 묻자, 함께 자리한 몰린이 원석들을 감정하며 고갤 끄덕였다.

“더 볼 필요도 없습니다. 최상 중에 극 최상품입니다.”

“다행이군요.”

이든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엘프의 눈물이라는 원석에 등급이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지만, 전설의 장인 몰린이 저리 말할 정도면 유니콘 길드와 함께 계획 중인 사업에 더없는 도움이 될 것은 자명했다.

이든이 이곳까지 수레를 끌고 오며 고생해 준 엘프들을 향해 입을 뗐다.

“모두 고생 많으셨습니다.”

“고생은요.”

“그냥 이대로 보내긴 섭섭한데, 들어가서 차라도 한잔하시겠습니까?”

이 일의 책임자로 보이는 엘프가 웃으며 고갤 저었다.

“제안은 감사드리지만, 마음만 받겠습니다.”

“그리 말씀하니 어쩔 수 없군요.”

그렇게 인사치레가 끝나려던 그때였다. 조금 전 엘프가 망설이다 입을 뗐다.

“…그보다 영주님.”

“예.”

“저기 그러니까… 따로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

할 말이라는 게 대체 무엇이길래 이토록 뜸을 들인단 말인가.

그 엘프가 주변의 눈치를 살피더니 이든에게 가까이 다가가 대뜸 귓속말로 이리 묻는 것이 아닌가?

‘저기, 실바아 공주님께선 잘 계시는 거죠?’

‘…나 참.’

듣던 이든이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야 말았다.

그가 주변에 누가 듣든 말든 상관없다는 듯 입을 뗐다.

“갤러하드 님이 여쭤봐 달래요? 자기 딸 잘 지내는지.”

“여, 영주님. 쉬! 쉬잇!!!”

엘프가 식겁한 표정을 하곤 황급히 조용히 해 달라 표현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엘프족 공주가 이곳 마을에 주둔하여 훈련을 받는 엘프 중 한 명이란 것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야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요란을 떠는 엘프의 행동에 이든이 심드렁한 얼굴로 입을 뗐다.

“아니, 갤러하드 님도 참. 그렇게 걱정이 되면 직접 보러 오시든가. 바로 옆 동네구만.”

“그, 그것이…. 왕께서 용무가 바쁘시다 하여….”

“바쁘긴 무슨. 맨날 먹고 놀기만 하는 양반이.”

“크, 크흠! 여, 영주님…!”

엘프가 곤란하다는 듯 입을 떼자 이든도 더는 장난하지 않고는 답했다.

“제가 요즘은 따로 병사들을 교육하지 않고 있어서 잘은 모릅니다만, 별다른 얘기가 들려오지 않는 것을 보면 공주님께서 잘 버티고 계시는 거겠지요. 너무 심려치 말아 달라 그리 전해 주십시오.”

“아, 아아… 예….”

듣던 엘프가 그것만으론 영 시원치 않다는 듯 대답하자, 눈치 빠른 이든이 곧바로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혹…. 공주님께서 힘드신데 따로 표현을 못 하시거나 그러는 것일 수도 있으니 꼭 개별 상담 좀 해 달라는 왕의 부탁이 있으셔서….”

이든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예!? 개별 상담이요?”

“…크, 크흠…!”

“허 참.”

말하는 엘프도 갤러하드의 유별남에 무안했던지 헛기침을 하며 얼굴을 붉혔다.

‘…개별 상담?’

이젠 하다 하다 자녀 개별 상담까지 하게 된 이든이었다.

***

공사 현장도 모든 움직임을 멈추고, 마을의 청년들과 엘프들 역시 고된 훈련을 마치고 꿀맛 같은 휴식을 취하는 저녁 시간.

스왈로의 보고를 듣던 이든이 고갤 끄덕였다.

“음. 모든 것이 예정대로군요.”

“예, 일꾼들이 빠릿빠릿한 것으로도 모자라 드워프 장인들이 합류한 뒤로 모든 현장에 속도가 제대로 붙었습니다. 이대로라면 이른 시일 내에 유니콘 지부의 건물도 완성될 것이고, 현재 임시 거처에 지내시는 드워프분들과 엘프분들이 지낼 숙소도 빠르게 완성될 것입니다.”

“고생하셨습니다.”

“뭘요.”

보고를 마친 스왈로가 뒤로 스윽 빠지고, 이번엔 총 교관 발리스타의 보고만이 남은 상황이었다.

이든이 먼저 발리스타에게 물었다.

“교육은 어때? 할 만해?”

발리스타가 고갤 끄덕였다.

“걱정했던 것과 달리 잘 따라 주어서 생각보다 할 만하오. 확실히 애들하곤 방식 자체가 다르더이다.”

“그렇겠지. 무관학교의 애들과 달리 이쪽은 언제 실전에 투입될지 모르는 예비 병사들이니까. 애들보다 간절하겠지.”

“확실히 그런 부분이 있는 것 같소.”

이든이 화제를 돌려 물었다.

“릴리도 별문제 없고?”

“릴리 역시 그럭저럭 잘 적응하고 있는 모양…. 잠깐, 릴리랑 어머니, 아버지랑 한집에서 같이 지내는 것 아니었소?”

“맞아.”

“그럼 이따 직접 물어보면 되잖소.”

“바빠서 물어볼 시간이 없다.”

“흠….”

하긴.

발리스타가 이곳 마을에 머문 지 며칠 되지 않았지만, 이든이 얼마나 바쁘게 지내는지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아마 이 모든 일정을 소화하고, 바로 집으로 들어가 쉬는 것이 아니라. 필시 개인 훈련 일정도 소화할 것임이 분명했다.

‘대체 저러면 잠은 언제 자는 거야?’

발리스타가 내심 감탄을 금치 못하던 그때, 이든이 넌지시 물었다.

“그…. 엘프족 훈련병들은 어떻게 훈련 잘 따라오는 것 같아?”

“이를 말이요. 아주 독기로 똘똘 뭉쳐 있는 것인지, 군말 없이 잘 따라오고 있소.”

“뭐, 어디 아프거나. 그런 애들은 없고?”

“…글쎄. 훈련할 때 외엔 따로 얘기 같은 것을 안 하니. 그건 잘 모르겠는데…. 그런데 그건 갑자기 왜 묻소?”

차마 엘프 공주 학부모 되는 양반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말을 꺼내지 못하는 이든이 말을 얼버무렸다.

“그런 게 있어. 네가 신경 쓸 것은 아니고.”

“흠?”

발리스타가 의아한 얼굴로 고갤 끄덕이던 그때, 이든이 스왈로에게 물었다.

“촌장님, 건설 중인 대장간 상황은 어떻습니까?”

“수십의 장인들이 붙어 만들고 있는 만큼 내일이면 완전히 끝낼 듯합니다.”

“흠. 그럼 원석 세공까진 아직 시간이 남은 셈이군요.”

“그렇지요?”

이든이 곧바로 발리스타를 향해 입을 뗐다.

“일단 알겠어. 너랑 릴리는 평소대로 훈련을 진행해 줘. 내일 아침 훈련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내 잠깐 들르도록 하지.”

“알겠소.”

보고를 모두 전달받고, 말을 꺼낸 이든의 표정은 어쩐지 상당히 난감해 보였다.

발리스타와 스왈로가 그의 평소답지 않은 모습을 놓쳤을 리가 없다.

둘이 서로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로 마주 보다 이내 어깰 으쓱였다.

그들이 알까.

학부모(?)의 요청으로 교육생을 면담하는 일이 처음인 이든의 심정이 지금 얼마나 난감했는지 말이다.

그리고.

다음 날 면담의 날이 밝았다.

***

“그만!”

발리스타의 외침에 훈련병들이 짊어지던 돌덩이를 바닥에 내팽개치듯 내려놓았다.

과거 자신이 했던 훈련을 그대로 따라 하는 이들을 보고 있자니, 발리스타가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는 마저 말을 이었다.

“자, 아침 훈련은 끝났다. 점심 식사 이후 각자들 오후 훈련 전까지 휴식들 하도록. 해산!”

“해산!!!”

훈련병의 우렁찬 대답이 들려오고, 각자 뿔뿔히 흩어지며 해산하던 그때, 발리스타가 이제 막 걸음을 떼려던 훈령병 하나를 붙잡았다.

“36번 훈련병!”

“…예!?”

번호가 불린 엘프 훈련병이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발리스타가 자신의 뒤편을 가리켰다.

“이든 교관님께서 부르신다.”

“…이든 교관님께서요?”

36번 훈련병의 눈이 발리스타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을 향했다.

확실히 그의 말대로 이든이 먼발치에서 훈련병을 기다리고 있었다.

저벅.

들려오는 발소리에 이든이 고갤 돌렸다.

그리고 곧이어 이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에 이든이 난감한 표정을 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건만, 벌써부터 저리 어려워하는 것을 보면 그간 훈련이 상당히 고되긴 했던 모양이다.

내심 그녀가 실비아 공주였단 것을 빤히 알면서도 너무 무관심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신분이 어떻든 간에 훈련에 차이를 두어서는 안 될 노릇이었다.

스스로 강해지길 간절히 원했기에 지원한 이들 아닌가. 그렇다면 이에 맞게 이든 역시 그의 신념대로 이들을 몰아붙이는 것이 맞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이렇게 계속 모른 척 지낼 수만도 없었다.

생각을 마친 이든이 곧바로 입을 떼 물었다.

“훈련은 할 만하십니까? 공주님.”

“예! 할 만합니… 예!?”

대답하던 36번 훈련병 실비아가 복명복창하다 말고, 휘둥그레진 눈으로 말끝을 흐렸다.

마치 들켜선 안 될 것 같은 비밀을 들킨 표정이었다.

실바아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어, 어떻게… 아니, 언제부터 아셨어요…?”

“훈련 첫날, 마을 청년들과 실랑이를 벌일 때부터?”

실비아의 얼굴이 빨개졌다.

당시 마을 청년들의 정신 상태가 너무 해이했던 나머지 옳은 소리 한마디 했던 것뿐인데, 이든이 그것을 기억하고 있단 소리에 왠지 모르게 부끄러움이 몰려온 것이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쓸데없이 간섭을….”

“아닙니다. 잘하셨습니다. 공주님이 아니었다면 제가 한소리 했을 테니까요.”

사실 실비아가 그들을 살린 셈이었지. 이든이 한마디 했다면 말로만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때, 여전히 당황한 기색을 지우지 못하는 실비아에게 이든이 물었다.

“훈련은 힘들지 않으십니까?”

“…예? 아, 아아… 예! 괜찮습니다…!”

“정말요?”

되묻는 이든의 소리에 실비아가 망설이다 솔직히 입을 뗐다.

“소, 솔직히…. 예상했던 훈련과는 많이 달라서 처음엔 당황했었는데, 그래도 지금은 나름 적응한 상태입니다…!”

“그래요? 다행이긴 한데…. 앞으론 나름의 적응 가지곤 안 될 겁니다.”

“…예?”

“지금까지 한 달간 진행해 온 훈련들은 기초 체력 단련에 불과합니다. 본 훈련에 들어가면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훈련들이 기다리고 있죠.”

“…….”

실비아는 할 말을 잃었다.

지금까지 훈련을 적응하는 데만 해도 상당 시간이 걸렸는데, ‘기초’라니.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이든이 말을 이었다.

“솔직히 걱정됩니다. 공주님께서 이를 버티실 수 있을지.”

“…….”

“그리고 저는 공주님의 사정까지 봐 드릴 수 없습니다. 훈련은 모두에게 공평해야 하는 거니까요.”

“…….”

“해서 확인차 여쭤보는 겁니다. 앞으로도 계속 지금의 훈련을 버티실 각오가 되어 있는지 말입니다. 왜냐하면, 이 시간부로 공주님 역시 스스로 공주란 생각을 버리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일전 엘프족 숲에서 봤던 이든의 모습과는 너무도 다른, 한때나마 그녀가 짝사랑해 온 사내의 모습이 아닌, 엄격한 교관의 모습이 거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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