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1화. (181/250)

181화.

실비아가 스스로 분했던 나머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역시 난 아직 한참 멀었어.’

그간 뼈와 살을 깎는 훈련을 받아오며 스스로 공주가 아닌 전사라 여겼건만, 이든의 말을 듣던 순간, 저도 모르게 대답하는 데 망설임을 느낀 것이 부끄러웠던 탓이었다.

그리고 자신 안에 아직 나약한 모습이 남아 있음을 깨닫고 말았다.

실비아가 한참 동안 말이 없자 이든이 그녀를 불렀다.

“공주님?”

재차 자신을 부르는 이든의 목소리가 들려온 순간, 그녀 스스로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저도 모르게 대답이 나왔다.

어째선지 망설임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라진 망설임 대신 그녀 안에 할 수 있다는 확신이 가득 찼다. 대답했던 실비아가 말을 이었다.

“아니, 무슨 일이 있더라도 버틸 겁니다. 왜냐하면….”

실비아가 찰나 말끝을 흐리다가 단호히 입을 뗐다.

“저는 엘프족의 자랑스러운 전사가 되고 싶으니까요.”

“…….”

실비아의 대답을 듣던 이든의 얼굴이 넋이라도 나간 듯 입을 벌렸다.

이쯤 얘기했으면 스스로 포기할 거라고 예상했건만, 전혀 뜻밖의 대답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금 전 대답을 통해 느낄 수 있었다.

과거, 천방지축이던 철없던 공주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고.

그리고 걱정과는 달리 그녀에겐 오직 전사로서의 오기만이 남아 있다고.

훈련생의 이런 모습은 교관으로서 더없이 뿌듯해야 하지만, 왜인지 듣던 이든의 표정은 씁쓸하기만 했다.

그녀가 어째서 이러한 마음가짐을 갖게 되었는지, 그 역시 충분히 예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데스 스타와의 전쟁 이후겠지.’

그때 그날.

레온하르트의 병사들과 함께 엘프족의 정예병들 역시 데스 스타로 인해 허무하리만치 몰살당했다.

그뿐인가.

대륙의 소드 마스터 중 한 명이었던 그녀의 아버지 갤러하드는 당시 전투로 오른손을 잃고 새로운 왼손에 적응하느라 부단히 애쓰는 중이었다.

병사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아픔을 삼키면서….

그리고 그것을 옆에서 지켜만 봐야 했던 실비아의 심정은 오죽했을까.

아마 무너진 가슴에 찢어질 듯한 통증마저 느꼈을 것이다.

먼 훗날.

갤러하드가 일선에서 물러나게 되면 실비아가 그의 자리를 물려받게 된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당시와 같은 악재가 다시 오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그날 이후, 실비아는 결심했다.

강해지겠다고.

당신의 아버지처럼 이 숲을 수호하는 왕이 될 것이라고….

그날 이후, 그녀는 정예병 훈련에 자원하였고, 지금에까지 오게 된 것이다….

그녀가 어떤 마음으로 이곳에 왔는지 알게 된 이든의 얼굴이 찰나 굳었다.

지금부터는 그녀를 공주가 아닌 철저하게 훈련병으로 대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잘 알겠습니다. 공주님의 얘길 들어보니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던 모양이군요.”

“그, 그럼 이곳에서 계속 훈련을 받아도 되는 건가요?”

“물론입니다.”

이든의 대답을 듣던 실비아의 얼굴이 환해지려던 찰나.

이든이 재차 말을 이었다.

“앞으로 눈물 콧물 쏙 빠질 각오 하셔야 할 겁니다. 알겠습니까?”

뜻밖에 물음에 실비아가 얼타다가 어물쩍 대답했다.

“…아, 아아 예!”

이든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목소리 봐라. 36번 훈련병, 알겠습니까!”

그리고 자신을 36번 훈련병이라 호명하는 순간, 실비아 역시 화들짝 정신을 차린다.

실비아가 우렁찬 소리로 복명복창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럼, 식사 마치고 다음 훈련까지 대기하도록. 해산.”

“해산!!!”

쩌렁쩌렁 대답한 실비아가 동료들이 있던 곳으로 후다닥 달려가며 저만치 멀어지는 사이, 이든의 입가에 씩 미소가 지어졌다.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겠군. 마음가짐만큼은 이미 전사나 다름없으니까.’

물론 진정한 전사가 되려면 앞으로 있을 훈련을 소화해 내야 하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이든의 학부모 요청으로 인한 자녀 개별 상담은 성공적으로 마치게 되었다.

물론 이것이 갤러하드가 원했던 방향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다시 시간은 흐르고.

땅! 땅! 따앙!

지금껏 들려온 적 없던 새로운 소음이 마을 전체에 가득 울려 왔다.

지이이이이잉.

이게 무슨 소리냐고?

다름 아닌 엘프의 눈물 원석을 가공하는 대장간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엘프의 눈물은 미스릴과 비슷한 초강도를 지닌 결정체이다.

말인즉슨 엘프의 눈물 역시 미스릴처럼 오직 드워프의 기술만으로 세공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드워프가 세상에서 자취를 감춘 뒤로 더는 볼 수 없었던 엘프의 눈물.

하지만 지금 이곳 레온하르트 마을에 엘프의 눈물이 전설의 장인 몰린의 손을 통해서 수백 년 만에 그 자태를 드러내려 하고 있었다.

“…됐다.”

신중에 신중을 기하며 한참이나 원석을 두드리고 깎아 내던 몰린이 완성한 엘프의 눈물을 조심히 들어 올렸다.

커다란 돌덩이만 했던 원석이 불순물들을 깎고 또 깎아 내다 보니 순수한 결정은 손톱 크기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원석 때는 결코 볼 수 없었던 황홀한 아름다움이 저 작은 보석에 가득 담겨 보이는 것은 착각은 아닐 것이다.

몰린이 집어 든 엘프의 눈물을 바라보던 스왈로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이, 이럴 수가… 어쩜 이토록 아름다울 수가….”

넋 놓고 보석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스왈로를 향해 이든이 입을 뗐다.

“촌장님, 이거 꿀꺽하시려는 거 아니죠?”

이든의 물음에 스왈로가 화들짝 놀라며 정색했다.

“예에!?!?!? 무, 무슨 말씀이십니까. 꿀, 꿀꺽하다니요!”

“침 넘어가는 소리 다 들리던데.”

“저, 저를 뭘로 보시고! 저 그런 놈 아닙니다!”

“농입니다. 농. 왜이리 예민하실까. 낄낄!”

“끄응….”

이든의 짓궂은 장난에 스왈로가 끙 소릴 내며 침음성을 내던 그때, 이든이 몰린에게 물었다.

“장인께서 직접 보시기에 어떻습니까?”

재차 보석을 면밀히 살피던 몰린이 고갤 주억거렸다.

“손색이 없습니다. 이것이 대중들에게 공개되면 필시 이것을 사겠다고 부호들이 줄을 설 것이 분명합니다.”

전설의 장인이 하는 말이니 틀림없을 것이다.

이든이 만족스럽다는 듯 씩 웃었다.

“잘됐군요.”

웃던 이든이 곧장 스왈로를 향해 입을 뗐다.

“촌장님.”

“예, 영주님.”

“지금 즉시 유니콘의 크리스 지부장에게 전해 주십시오. 모든 준비가 끝났다고 말이죠.”

스왈로가 비장한 얼굴을 하며 고갤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곧장 전하겠습니다!”

그러곤 크리스 지부장이 있는 곳으로 서둘러 걸음을 옮기는 스왈로.

이든이 몰린에게 물었다.

“유니콘 길드가 상인들을 몰고 오는 데까지 일주일 정도 소요될 예정입니다. 같은 등급으로 몇 개나 더 가능할까요?”

듣던 몰린이 한참을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엘프의 눈물을 세공할 줄 아는 이는 저를 포함해 다섯이 전부입니다. 칠 일을 꼬박 새워 만든다 해도 일 인당 다섯 개가 전부입니다.”

“그럼 그동안 만들 수 있는 최대 개수는 스물다섯 개 정도란 얘기군요.”

“예, 아무리 빨라도 그렇습니다.”

스물다섯 개라면 수레에 가득 가져온 원석들과 비교해 턱없이 적은 양이지만, 상관없었다.

신사업의 첫걸음은 이것을 단순히 많이 판매하기보단, 엘프의 눈물이 다시 세상 밖에 나왔음을 시사하는 의미가 더 컸으니까.

생각을 마친 이든이 고갤 끄덕이곤 입을 뗐다.

“장인께서는 남은 장인들을 동원해 만들 수 있을 만큼만 만들어 주십시오. 서두를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처럼 최대한 정성을 다해 가치 있는 보석을 만드는 데 더욱 집중해 주십시오.”

몰린이 만족스러운 듯 고갤 끄덕였다.

“이를 말씀입니까. 잘 알겠습니다.”

이젠 모든 준비가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유니콘 길드가 상인들을 이끌고 이곳 마을에 오는 순간.

레온하르트 마을을 보는 세간의 시선은 달라질 것이다.

그리고.

그때가 오면 아슬란 제국 역시 이 마을에 다시 자연히 관심을 갖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부터가 레온하르트 마을이 영지로서 도약하는 첫 순간이 될 것이다.

***

레온하르트 마을이 그곳에 찾아올 손님들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무렵. 유니콘 길드 역시 그들 나름대로 분주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게럴드 앞에 시립한 카르엘이 서류를 훑으며 보고를 이어 나갔다.

“홍보를 개시한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관심을 갖기 시작한 부호들이 상당합니다. 상인들 역시 처음엔 믿지 않다가 부호들이 관심을 두기 시작하자 저희 쪽으로 연락을 취하기 시작했고요”

카르엘의 보고를 받던 게럴드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갤 끄덕였다.

“음. 그럴 만도 하지. 소수의 대부호만이 소장하던 엘프의 눈물이란 보석이 다시 세상에 나오는 순간이야. 사치를 즐기는 부호들의 눈이 돌아가는 거야 당연하고, 그들을 대상으로 상인들이야 시장 변화의 조짐을 마냥 무시할 수 없는 노릇이겠지. 수고했네.”

“별말씀을요. 한데….”

“응?”

일순 말끝을 흐리는 카르엘의 모습에 게럴드가 고갤 갸웃했다.

그녀가 쉽게 말을 잇지 못하자 게럴드가 먼저 나서서 물었다.

“왜 그런가? 뭐, 걱정이라도 있는겐가?”

게럴드의 물음에 카르엘이 망설이다가 어렵게 입을 뗐다.

“일단 어떻게든 원석 세공 방법을 찾겠다는 이든 씨 말만 듣고, 수도가 떠들썩하도록 홍보를 했는데, 만약 일이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면 그땐….”

뒤에 이어질 말을 차마 더는 입 밖으로 얘길 꺼내지 못하겠는지 카르엘이 재차 말끝을 흐렸다.

게럴드가 이를 보곤 피식 웃더니 대신 말을 꺼냈다.

“그렇게 된다면… 유니콘은 그날로 문을 닫아야 하는 거겠지.”

“…….”

길드에게 신뢰는 필수적인 것이다.

하물며 대형 길드인 유니콘은 오죽할까.

그들이 아무리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지금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지만, 신뢰를 잃은 길드는 모두에게 외면받고 도태되기 마련이다.

특히나 홍보 대상으로 했던 부호들과 상인들에게 외면받기 시작하면 유니콘 길드에게 남은 것은 오직 파국뿐이었다.

카르엘이 걱정하는 부분 역시 이것이었다. 게럴드가 그녀의 어두운 낯빛을 보고는 웃어 보였다.

“일단 우린 이든을 믿고 하던 일을 계속하자고. 그가 언제 장담한 것 중에 실패한 일이 있던가? 분명 방도가 있으니 일을 예정대로 진행해 달라 한 것이겠지. 안 그런가?”

“…네.”

카르엘이 고갤 끄덕였다.

그녀 역시 이든이 못 미더워서 이러는 게 아니었다.

다만 현재 유니콘의 사정상 어느 때보다 신사업의 성공이 간절했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똑똑.

일순 누군가 길드장실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게.”

게럴드가 입을 떼기 무섭게 한 사무관이 안으로 들어섰다.

들어온 그가 들고 있던 서신을 게럴드가 앉은 탁자 위에 놓았다.

“응? 이건 뭔가?”

게럴드가 의아한 듯 묻자 사무관이 곧장 긴장한 기색이 역력해 보이는 얼굴로 입을 뗐다.

“레온하르트의 크리스 지부장이 보낸 서신입니다.”

“뭐라고?”

듣던 게럴드가 황급히 서신을 뜯고는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얼마나 빠르게 읽어 내려가는지 그의 눈이 요란스럽게 움직여 댔다.

잠시 뒤. 서신을 향한 게럴드의 눈이 차츰 이채를 발하기 시작한다.

길드장의 안색을 살피던 카르엘이 궁금한 듯 어느새 그의 옆에 찰싹 붙어 함께 서신을 읽었다.

그리고 카르엘의 역시 게럴드와 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서신을 모두 읽은 듯 요란스럽던 눈동자가 일순 멈추고 어느새 환희에 찬 얼굴로 두 사람이 서로 마주보는 것이 아닌가.

카르엘이 먼저 입을 열었다.

“길드장님…!!!”

“그래!!!”

그때.

게럴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는 황급히 외투를 걸쳤다.

이쯤되면 사무관 역시 돌아가는 상황이 무언지 예상이 가는 바.

사무관의 낯빛도 함께 밝아지고, 게럴드의 명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

게럴드가 시립해 있던 사무관을 향해 말을 꺼냈다.

“지금 당장 소식을 돌렸던 부호들과 상인들에게 전하게. 엘프의 눈물 경매를 위해 유니콘 길드에서 곧 출발한다고 말일세.”

“예!!!”

도약을 준비하는 것은 레온하르트 마을만이 아니었다.

유니콘 역시 마찬가지. 그리고 이것은 유니콘의 제2의 전성기의 시작과도 같았다.

게럴드의 명을 받고 수도 각지에 이 소식을 알리기 위해 나서는 사무관의 걸음이 어느 때보다 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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