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2화. (182/250)

182화.

‘…지금쯤이면 서신을 받고, 채비하고 있겠군.’

얼마 전, 이든은 크리스 지부장을 통해 유니콘의 게럴드 길드장 앞으로 서신을 보냈었다.

모든 준비가 끝났으니, 계획대로 진행하자는 내용의 서신이었다.

유니콘 길드가 마을까지 오는 데는 아직 시간이 상당히 남아 있었고, 훈련병들의 훈련 역시 발리스타와 릴리 교관 밑에서 문제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 말인즉슨. 유니콘 길드가 마을에 도착할 때까진 이든, 개인의 시간이 상당히 남았단 뜻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든이 주어진 자유 시간 동안 놀고먹고 할 위인은 아니었다.

그는 오래간만에 주어진 이 여유마저 헛되이 쓸 생각이 결코 없었다.

그는 끼니를 간단히 해결하고는 아침 일찍부터 가까운 공터로 나갔다.

공사현장에서는 조금 떨어진 곳.

인적마저 드문 이 공터에 이든은 철퍼덕 앉고는 곧바로 가부좌를 틀었다.

그리곤 자신의 내부의 자리한 드래곤 하트를 관조했다.

그렇게 한참 동안 드래곤 하트를 살피던 이든의 얼굴엔 퍽 만족스런 표정이 자리했다.

‘…이제 삼분지 일 정도 남은 건가.’

흡성대법을 접목한 심법을 통해 드래곤 하트의 기운을 마기로 조금씩 바꿔 나간 지 어느덧 꽤 시간이 흘렀다.

드래곤 하트 내에 존재하는 마나의 양이 원체 상상을 초월한 나머지 그 많은 시간을 투자했음에도 아직 마기로 바꿔야 할 양이 상당 부분 남았으나, 흡성대법 역시 극성에 가까워지며 그 속도가 날이 갈수록 빨라지고 있기에 이른 시일 내에 드래곤 하트의 모든 기운을 그의 것으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때가 된다면 필시 과거와 달리 데스 스타와 동수를 이뤄 볼 만할 것이다.

하지만.

‘겨우 그 정도에 만족해선 안 돼.’

이든이 목표로 둔 곳은 하늘이었다.

물론 과거 입신에 경지에 두었던 그조차 어찌하지 못했던 데스 스타였으나, 데스 스타 놈의 경지가 줄곧 목표로 두었던 하늘의 경지라 보기엔 어려움이 있었다.

어찌 됐든 간에 당시에 원정지기까지 전부 꺼내어 놈과의 승부에서 치명상을 입히지 않았던가.

만약 데스 스타가 그 자신이 목표로 두었던 경지의 고수였다면, 그가 원정지기를 전부 꺼냈다 한들 일수(一手)에 운명을 달리했을 것이다.

그만큼 그가 목표로 둔 그 경지는 더 까마득하고 지고하단 의미였다.

‘데스 스타와 동수를 이루는 것에 만족해선 안 된다. 압도적으로 이겨야 해. 그래야만 동료들의 희생을 최소화할 수 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 반드시 넘어야 할 언덕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깨달음’이었다.

입신의 경지는 전생의 그 역시 밟았던 단계였고, 한번 걸었던 길이기에 이곳에 이르러선 엘프족의 세계수 열매를 통해 손쉽게 달성할 수 있었지만, 입신을 넘어 등선을 통해 무신(武神)으로서 자리하기 위해선 깨달음이 필수적으로 요구되었다.

하지만 그전에 한 가지 걸리는 것이 있었다.

바로 자신 안에 있는 드래곤 하트가 망가진 단전을 대신해서 깨달음에 발판이 될 수 있느냐는 것이 그 문제였다.

물론 이든, 역시 그 부분에 대해선 당장 확실한 판단을 내리기 어려웠다.

드래곤 하트가 깨달음의 발판이 될 수 있느냐, 없느냐.

그것은 하트 내의 기운이 온전히 그의 것이 되었을 때나 고민해 볼 만한 것이다.

지금의 그로서는 백날 붙잡고 고민해 봐야 답도 안 나오는 것이었다.

이든이 고갤 휘휘 저었다.

‘서두르지 말자. 차근차근 쌓고, 움직이자. 차근히….’

물론 데스 스타와의 결전이 떠오를 때면 조급해지는 것이야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서둘러선 안 됐다.

“후우….”

마음을 다잡고 흡성대법으로 재차 드래곤 하트의 마나를 마기로 변환시키던 이든이 일순 숨을 푹 내쉬었다.

더는 흡성대법을 유지하기에 몸에 부담이 올 것 같아서였다.

보통 심법이라 하면 기운을 채워 주는 용도인 것이 일반적이지만, 드래곤 하트 특성상 그 무한한 기운 탓에 기운을 따로 채울 필요는 없었다.

게다가 지금의 천마심공은 흡성대법의 구결을 접목한 변칙적인 심법이었다.

아니, 이젠 용도로만 보자면 심법이라 보기에도 모호했다.

그래서일까.

마나를 마기를 바꾸는 과정이 상당한 심력과 체력을 소모하다 보니, 오랜 시간 유지하는 데는 어려움이 따랐다.

그렇게 흡기를 마친 이든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일순 허리춤에 차고 있던 레온하르트의 보검을 꺼내 들었다.

스릉.

검집에서 보검의 새하얀 검신이 빛을 발하며 모습을 드러냈다.

언제 들어도 검을 쥐었다는 감각조차 잊을 만큼 가벼운 검이었다.

이만큼 가볍고, 단단하고, 예리한 보검이라면 필시 일전에 쓰던 흑색 검보다 그의 절기를 사용했을 때 한층 더 강한 위력이 나올 것은 분명했다.

다만 이든은 거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데스 스타와의 결전에서 그 자신이 사용하던 절기에 부족한 부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지금 그가 사용하는 천마의 절기보다 강한 무언가가 있어야만 했다.

“새로운 초식이 필요하다. 보다 더 강하고, 보다 더 간결하며, 보다 더 한 사람에게 타격을 집중할 수 있는 초식이.”

본래 그의 사용하던 천마의 신공이 결코 수준 낮은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전생에서 그가 사용하던 초식들은 하나같이 고금제일을 다투던 것이었다.

다만, 데스 스타와의 결전을 통해서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다면 그와 비슷하거나 혹은 그보다 강한 상대를 만났을 경우, 그 한 사람에게 타점을 집중할 절기는 사실상 없다는 것이었다.

그의 초식 대부분은 따지고 보면 오히려 대규모 난투용에 더 가까웠다.

물론 과거엔 이를 염두에 두지 않고 일대일의 전투에서도 잘만 사용했지만, 일전 대결을 통해 여실히 깨달았다.

오직 한 명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절기가 더없이 필요하다는 것을.

스윽.

이든의 검을 쥔 손이 전방으로 세워졌다.

그리고.

휘익. 휙. 휘이익.

그가 쥔 보검의 칼끝이 잔상을 남기며 사방에 어지러이 흩어졌다.

머릿속에 존재하는 무림의 모든 초식들을 하나씩 그려 보는 것이다.

그리고 휘두르는 각기에 초식 중에 지금 그에게 가장 필요로 하는 것만 추려 내어 다시 흔들고, 또 흔들기를 반복한다.

다른 불필요한 번뇌는 모두 잊고, 수많은 초식을 그려내며 추려 내고 조합하며 다시 휘두르길 반복하는 그의 모습은 필시 무아지경에 든 검수의 모습이었다.

반복과 반복의 연속.

수많은 잔상만을 어지러히 남기며 흔들리던 그의 검이 차츰 시간이 지날수록 단순화되기 시작한다.

무아지경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중천에 걸렸던 해가 노을빛만을 남길 무렵.

치이이이이이잉.

그의 검이 검명을 울리며 이내 하나의 선을 그려냈다.

어지럽고, 중구난방이던 조금 전 검의 움직임과는 확연히 다른, 단출하며 단순한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왜일까.

단순해 보이는 그 움직임에서 태산과 같은 범접 불가한 힘이 느껴지는 이유는….

그때였다. 그 단순한 선을 그리던 그의 보검이 일순 전방에 인적 없는 곳을 향해 휘둘러졌다.

휙.

절대 요란하지 않은, 단순한 휘두름에 불과했지만, 검이 휘둘러진 방향으로 바닥에 한 줄기 깊은 검흔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그 검흔을 따라 먼발치에 있던 큰 산이 일순 반으로 갈라졌다.

검술이 극치에 다르면 단 한번의 칼질만으로도 산을 가를 수 있다더니. 이든이 그것을 해낸 것이다.

그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지어졌다.

‘나쁘지 않아.’

무수히 많은 시행 끝에 만들어진 검의 극치는 그토록 대단했고, 무(武)에 관해선 깐깐한 그마저도 만족할 만한 성과였다.

그리고 그는 이 검술에 이름을 지었다.

‘극마신검(極魔神劍)’.

모든 검의 끝이자.

모든 마(魔)가 지향해야 할 초절정의 검술로서 한점 부족함 없다는 뜻에 이름이었다.

지금에 이르러 산을 갈랐으니, 훗날 그가 목표로 두었던 경지에 도달한다면 그땐, 산을 넘어 하늘마저 가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때가 언제가 될지는 아직 모르는 얘기였지만 말이다.

철컥.

극마신검을 발출해 냈던 검이 다시 검집 안으로 착검되고, 이든이 훈련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걸음을 떼려던 무렵이었다.

“응?”

이든의 고개가 어느 한 곳으로 돌아갔다.

그가 훈련하던 공터에 조금 떨어진 곳에서 왠 기척이 느껴져서였다.

이든이 그 기척을 향해 내공을 실어 목소리를 날렸다.

“누구?”

이든의 음성이 쏘아진 곳에 한 인형이 화들짝 놀란 듯싶더니 몸을 숨기던 나무 뒤에서 슬금슬금 걸어나왔다.

“저, 저기…. 몰래 훔쳐보려던 건 아닌데 그게….”

수련을 훔쳐보는 것이 무림의 오랜 불문율이라지만, 이곳에서까지 그것을 지키고 싶지도 않을뿐더러.

조금 전 고안해낸 초식 같은 경우엔 몰래 지켜본다 해서 따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인형에게 들려온 음성은 필시 아이의 목소리였지 않은가.

이든이 아이의 기척이 있는 곳 가까이 다가가 물었다.

“꼬마 친구 같은데, 인적 드문 여기까진 무슨 일이지?”

묻는 이든의 음성은 생각보다 자상했다.

크게 혼날 줄 알았다가 그의 표정과 목소리에 느껴지는 온화함에 아이가 우물쭈물하다가 어렵게 입을 뗐다.

“…구, 궁금해서 따라와 봤어요….”

“궁금해서?”

“…네.”

“무엇이?”

“영주님께선…. 어떤 식으로 평소 훈련을 하시는지….”

듣던 이든이 피식 웃었다.

앳된 목소리만 해도 아직 한참 어린 것 같건만, 자신이 어떤 식으로 수련을 하는지 궁금했다는 말이 당돌하면서도 기특했기 때문이다.

이든이 재차 아이에게 물었다.

“이름이 무어냐?”

“제, 제이콥이요!”

“그래, 제이콥. 너도 무술을 익히고 싶은 게냐?”

“…네!”

“흠. 하지만 목소리만 들어선 아직 마을 청년들과 훈련을 받을 만한 나이는 아닌 것 같은데?”

“맞아요. 나이가 너무 어리다고 훈련에서 제외됐어요.”

“역시 그랬구나. 제이콥은 나이가 몇 살이지?”

“열세 살이요…!”

“열세 살. 확실히 많이 어리구나.”

현재 발리스타와 릴리 밑에서 교육을 받는 훈련생들의 경우엔 대부분 나이가 약관에 가까운 청년들이었다.

이제 막 성장해 가는 어린아이들 같은 경우엔 혹여 다칠 수도 있었기에 일정 나이가 되기 전까진 훈련 자체에서 애초에 제외하자고 이든이 따로 말해 두었기 때문이다.

이든이 씩 웃으며 제이콥의 머릴 헝클어 놓다시피 쓰다듬었다.

“아쉽겠지만, 조금 더 클 때까지 참거라. 아직 성장기인 나이에 고된 훈련을 소화하기엔 이른 감이 없지 않아 있구나.”

“…….”

제이콥의 얼굴이 금세 시무룩해졌다.

이든이 한 번 더 아이의 머릴 쓰다듬고는 재차 집으로 걸음을 떼려던 그때, 대뜸 제이콥이 물었다.

“…그때가 되면 너무 늦어요.”

“응?”

이든의 걸음이 덜컥 멈추었다.

그가 고갤 돌려 물었다.

“너무 늦다니. 무슨 말이지?”

“…데스 스타, 아직 안 죽었잖아요. 언젠가 다시 돌아오잖아요. 그렇죠?”

“…….”

데스 스타가 언젠가 돌아올 것이란 사실을 아이조차 알고 있다는 것이 내심 씁쓸했지만, 사실은 사실이었다.

이런 얘긴 숨긴다고 될 것이 아니었다. 이든이 솔직히 대답했다.

“맞아. 놈은 아직 죽지 않았어. 그리고…. 언젠가 다시 돌아오겠지.”

“…왠지 그럴 것 같았어요. 마을 형들과 엘프족 형, 누나들이 저렇게 기를 쓰고 훈련하는 이유가 그것 말곤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초조했던 게냐? 넌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맞아요. 불안해요…. 전 그 한 번의 전쟁으로 하나뿐인 가족을 잃었으니까요. 그러니까…. 더는 소중한 사람들을 잃고 싶지 않아요. 저 역시 제게 더없이 소중한 이 마을 사람들을 지키고 싶단 말이에요…!”

데스 스타가 강림했던 그날.

영지가 폐허가 되기 직전, 영지민들은 대피하여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지만, 병사들은 아니었다.

이든이 씁쓸한 얼굴로 물었다.

“혹 가족이 당시에 참전했던 것이냐?”

제이콥이 고갤 주억거렸다.

“네, 저희 아버지께선 당시 선두에서 병사들을 이끌고 계셨거든요.”

“…뭐?”

듣던 이든의 얼굴이 찰나 굳었다.

조금 전 아이의 말을 듣고 떠오르는 얼굴이 있어서였다.

이든이 곧장 물었다.

“혹… 너의 아버지 존함이 어찌 되시느냐?”

“…제라드요. 저희 아버진 이곳의 기사단장이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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