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침대에 누워 한참을 뒤척거리던 이든은, 이내 잠이 오질 않는지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바깥바람이라도 쐬면 복잡한 머릿속이 조금이나마 나아질까 싶어서였다.
하나, 새벽 공기를 맞던 이든의 얼굴은 여전히 침중하기 그지없었다.
‘그 아이가 제라드 기사단장님의 아들이었다니….’
제라드 기사 단장에게 혈육이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던 그에게 있어 제이콥의 등장은 커다란 충격이었다.
그리고 그 충격은 이내 책임감으로 다가왔다.
‘만약 내가 좀 더 강했더라면…. 제라드 기사 단장님이 그토록 허무하게 가진 않았겠지. 그리고 제이콥 역시 지금처럼 혼자가 되진 않았을 것이다….’
이든은 그 자신의 탓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때, 당시 제라드 기사단장은 그가 어떻게 손을 쓸 새도 없이 데스 스타에게 순식간에 당해버렸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계속 마음에 걸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혼자가 된 제이콥은 열세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그의 아버지 그랬던 것처럼 이 마을을 지켜야 한다는 일종의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 마치 나처럼.’
꾸욱.
일순, 이든의 손이 꽉 쥐어졌다.
그 역시 사명감을 안고 살아가는 이로써 그것이 얼마나 힘든 고행의 길인지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사명감을 안고 살고 있음에도 스스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재를 살아가는 제이콥의 심정이 어떨지 공감마저 되었다.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일까….’
손이 새하얘지도록 주먹을 쥔 이든의 얼굴은 마치 무언가를 결심한 듯한 표정이었다.
‘…아직 어리긴 하지만, 이 험난한 세상에서 스스로 지킬 힘 정도 가르치는 것이야 나쁘지 않겠지.’
오래전 세상을 방황하던 릴리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세상에 불공평함에 한탄하며 강해지길 간절히 바랬던 발리스타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는 또다시.
또 한 명의 제자를 두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결심을 한 이후에도 그는 한참이나 넋을 놓았다.
새벽공기가 제법 쌀쌀한 것이 이제 완연히 가을에 접어든 계절을 느끼면서 말이다.
***
새벽 공기가 다 가시지 않은 이른 아침부터 촌장 스왈로가 어디론가 급히 걸음을 옮겼다.
무슨 일이길래 그럴까.
그의 걸음이 평소보다 가볍고 경쾌해 보였다.
그리곤 어느 한 집 앞에 멈추어 서곤 당최 뭐가 그리 급한지 곧장 문을 두드렸다.
똑똑.
잠시 뒤. 한 앳된 아이가 문을 열곤 얼굴만 빼꼼히 내밀었다.
조금 전 문 두드리는 소리에 이제 막 일어난 것인지 아직 눈곱이 가득 낀 얼굴로 아이가 눈을 비비며 입을 뗐다.
“…음? 촌장님?”
모습을 드러낸 아이는 다름 아닌 제이콥.
지난 전쟁 때, 제라드가 사망한 이후.
제이콥은 줄곧 이 작은 집에서 이웃들의 도움을 받으며 홀로 지내고 있었다.
그런 제이콥을 보던 스왈로가 씩 웃어 보였다.
“제이콥, 잘됐구나!”
“…응? 뭐가요?”
난데없이 문을 두드리고 부르더니만, 갑자기 잘됐다니?
제이콥이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을 하자 스왈로가 재차 말을 이었다.
“영주님께서 너를 보자고 하시는구나.”
영주란 말에 제이콥이 화들짝 놀란 표정을 했다.
“영주님께서 저를요?”
“그래.”
“영주님께서 저를 왜요…?”
제이콥이 재차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영주가 자신을 찾을 이유가 마땅히 없던 것이다.
하지만 스왈로는 대답 대신 제이콥을 재촉할 뿐이었다.
“가면서 설명해 주마. 어서 채비하거라.”
“아… 네!”
결국, 제대로 된 대답을 듣지 못한 제이콥은 아무것도 모른 채 스왈로를 따라 나섰다.
그리고 영주를 만나러 가기 위해 스왈로와 함께 걷던 중 믿지 못할 얘기를 듣게 된다.
“그, 그게…. 정말이에요?”
“그래. 내 그래서 너를 이른 아침부터 이리 부른 것이 아니더냐.”
“…….”
스왈로를 바라보던 제이콥의 눈이 정면을 향하며 일순 넋을 놓았다.
제이콥이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제, 제가 영주님의 제자가 된다니…. 너무 신기해요….”
그런 제이콥의 모습에 스왈로의 얼굴에도 저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녀석, 그리도 좋을까.’
제이콥은 제 아비인 제라드 기사 단장을 똑 닮은 아이였다.
바른 심성에, 의젓함까지.
저 나이 때에 아이들에게서는 쉬이 볼 수 없는 어른스러운 아이였다.
물론 한편으로는 제이콥이 너무 이른 나이에 어른이 되어 버린 것 같아서 씁쓸한 마음이 들기도 했었다.
하나, 지금은 배시시 웃으며 저 나이 때 아이들이 보이는 천진난만함을 보여 주고 있지 않은가.
새삼 처음 보는 제이콥의 그런 모습에 스왈로 역시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때였다.
발맞춰 걷던 제이콥이 스왈로의 손을 잡곤 끌어당기다시피 해 걸음을 재촉했다.
“촌장님, 어서 가요. 빨리요!”
“허허…. 원 녀석, 알겠다. 가자 가!”
그렇게 흡사 손자와 할아비를 연상시키는 두 사람의 걸음이 영주가 기다리는 곳으로 재촉하듯 조금 더 빨라졌다.
***
“어, 여긴…?”
촌장이 제이콥을 데려온 곳은 제이콥이 어제 왔던 곳이었다.
제이콥의 시선이 저 먼발치에 가부좌를 틀고 있는 이든을 넘어 바닥에 길게 새겨진 검흔을 향했다.
‘여긴 분명 어제 영주님께서 수련하시던 곳인데…?’
제이콥이 넋이라도 놓은 듯 가만히 서 있자 스왈로가 제이콥 등을 살짝 두들기며 웃어 보였다.
“자, 스승님 되실 분이 기다리시지 않니. 어서 가야지?”
“아, 아아… 예!”
제이콥이 퍼뜩 정신을 차리곤 후다닥 이든의 곁으로 달려갔다.
제이콥의 걸음 소리를 듣던 이든이 웃으며 고갤 돌렸다.
“제이콥, 왔느냐?”
이든의 물음에 제이콥이 어느새 바짝 군기가 든 채 외쳤다.
“예!!!”
‘훗….’
일순 이든이 피식 웃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했다.
달리 설명해 주지 않았는데도 벌써부터 저리 자세가 된 것을 보면 확실히 기사단장의 핏줄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이든이 가부좌를 풀고는 제이콥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러곤 곧장 물었다.
“내가 어찌하여 너를 불렀는지는 알고 있느냐?”
“예…! 영주님께서 저의 스승님이 되어 주신다고 들었습니다…!”
이든이 고갤 끄덕였다.
“맞다. 난 오늘부로 너를 내 제자로 둘 생각이다.”
“저, 정말…. 제가 영주님의 제자가 되는 건가요?”
“그래.”
그리도 기쁠까.
앞으로 스승이 될 이든에게서 재차 확실한 얘길 듣는 순간, 제이콥의 얼굴이 더없이 밝아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마주 미소 짓던 이든의 얼굴이 진중한 듯 굳어지자 제이콥의 표정도 덩달아 어색하게 굳었다.
이든이 표정만큼이나 엄한 음성으로 입을 뗐다.
“지금 당장은 제자가 된다는 사실에 기쁘겠지만, 무도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그리 쉬이 볼 것이 아니다. 굉장히 힘들고, 항상 인내의 연속인 셈이지. 그런 고된 길을 평생을 걸어야 한다. 그리고 나 역시 어중간하게 너를 가르칠 생각이 없고, 난 한다면 확실히 한다.”
“…….”
제이콥이 자신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각오했던 것이지만, 막상 직접 듣게 되니 긴장이 몰려온 탓이었다.
이든이 재차 말을 이었다.
“다시 물으마. 너는 나의 제자가 되어 이 고된 길을 걸어갈 각오가 되어있느냐?”
하나.
긴장한 기색과 달리 제이콥은 망설이는 기색 없이 곧장 답했다.
“충분히 각오한 일입니다…!”
제이콥은 이미 진즉에 알고 있었다.
기사로서의 길이, 고행의 연속인 무도의 길이 얼마나 고달픈 삶인지를 이미 그의 아버지였던 기사단장 제라드를 통해 충분히 봐오지 않았던가.
물론, 이 길을 걷는 모든 이가 고달픈 삶을 살아가는 것만은 아니다.
누군가는 돈을 좇으며 이 길을 걷고.
누군가는 그저 검을 쓴다는 멋에 취해서 이 길을 걷고.
또 다른 누군가는 할 줄 아는 것이, 그저 몸 쓰는 것밖에 없어서 마지못해 이 길을 걷는다.
이처럼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다양한 이유로 각자의 이 길을 걷고 있다.
하나.
이 많고 많은 사람 중에 걷고 있는 지금의 ‘무도’란 길에 끝을 보고자 하는 이들은 얼마나 될까.
아마 손에 꼽을 것이다.
무도의 끝을 추구한다는 건 단지 각오만 가지고 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배경이 따라 줘야 하고, 선천적으로 타고난 천재성이 따라 줘야 한다.
만약 이 두 가지 중 하나라도 해당 사항이 없다면…?
그땐, 두 가지 중 하나라도 가진 놈들보다 죽어라 하고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하루도 빠짐없이, 하루도 쉼 없이 뼈와 살을 깎는다는 각오로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오직 사명감을 가진 이들만이 묵묵히 걸을 수 있는 고행의 길이었다.
그렇기에 온갖 불합리한 영지의 상황에서도 제라드는 그 길을 걸을 수 있던 것이다.
그리고 제이콥은 고행의 길을 아무런 불평불만 없이 걸어갔던 아버지를 곁에서 지켜봐 왔다.
아버지가 이를 악물며 어떻게 영지를 지켜 왔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데스 스타의 손에 유명을 달리하여 뼛조각 한 줌 찾지 못해 비석만이 외로이 세워진 아버지의 무덤을 바라본 순간.
제이콥은 결심했다.
아버지가 걸었던 길을 자신 역시 가겠노라고.
그리고 살아남은 영지민들을 제 손으로 지키겠노라고.
하지만, 제이콥이 다짐한 그 길은 혼자 걷기엔 너무도 어려운 길이었다.
걸음마를 처음 뗀 아기도 제 어미의 도움을 받아 자리에 딛고 일어선다.
그 후로 넘어지길 수차례 반복하며 비로소 걸음을 떼는 것일진대, 이 고행의 길을 누구의 도움도 없이, 어떤 이정표도 없이 무작정 걷는다는 것은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을 헤매는 것과 다를 것 없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제이콥은 너무도 절망스러웠다.
예고 없이 떠난 아버지를 대신하여 그를 이끌어 줄 사람 하나 없음에….
그리고 절망적인 그 상황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사실에….
그러던 중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처럼 한 사람이 나타났다.
데스 스타로부터 영지민들을 지켜 냈다는 심안의 무사 이든이 말이다.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마을의 청년들을 한데 모아 가르치기 시작했다.
제이콥 역시 거기에 끼고 싶었으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그럼에도 제이콥은 포기하지 않았다.
마을의 형들이 받는 훈련을 몰래 지켜보며 그 역시 홀로 따라 하길 반복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제이콥은 만족하지 못했다.
지금이야 기초훈련이니 어떻게든 보고 따라 할 수 있다지만, 본 훈련에 들어가면 보고 따라 하는 것만으론 무리가 따를 것이 분명했다.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제이콥이 이든의 제자가 되길 결심한 것이.
그리고 그 꿈에만 바라던 순간이 현실이 되었다.
비록 더없는 고행의 길이 될지언정 묵묵히 걷다 보면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 역시 필시 마을을 지킬 수 있는 한 사람이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으면서 말이다.
제이콥의 대답을 듣던 이든이 만족스러운지 씩 웃어 보였다.
“제이콥, 너는 이제 내 세 번째 제자다.”
듣던 제이콥이 이든을 향해 일순 한쪽 무릎을 굽혀 보였다.
“제이콥이 스승님을 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