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다음 날.
“…어때요?”
허허, 어떻냐고…?
“…….”
해맑게 묻는 제이콥의 모습에 이든은 할 말을 잃었다.
‘정말 천마심공의 구결을 하루 만에 전부 외워 버릴 줄이야….’
물론 하루 만에 수천 자의 구결을 몽땅 외운다는 것이 전혀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이는 이든, 그 역시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물론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지금’의 이든이 가능한 것이지만 말이다.
무림에 몸을 담고 무도의 길을 걸으며 일정 경지 이상에 오른 고수들은 기억력이 보통 사람들과는 궤를 달리한다.
막혔던 혈맥이 뚫리고 전신에 피가 고루 퍼지며 머리 회전력이 상승하는 데서 오는 결과였다.
더군다나 입신의 경지에 오른 이든의 경우엔 하루 수천 자 정도 외우는 것쯤이야 손바닥 뒤집기만큼 쉬운 것이었다.
수천 자가 뭔가?
수만 자도 잠깐 훑으면 당장에 외워지는 것을.
하지만.
그가 제이콥 나이 때도 지금만큼 머리가 비상했냐고 묻는다면 결코 아니었다.
심지어 일정 경지 이상에 올랐던 소교주였던 시절에도 사사한 천마심공을 이해하고 외우는 데 수일이 걸렸을 만큼 고생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했다.
그런데….
무공의 문외한이라 할 수 있는 아이가 단지 타고난 영특함만으로 천마심공의 심오함을 이해하고 외우는 데 하루가 채 걸리지도 않았다.
그뿐이랴.
외우는 와중에 자연히 단전에 자리한 마기(魔氣)까지 이든의 도움이 없이도 타고난 오성으로 스스로 느끼고 있었다.
이는 단지 천재성과 재능만으로 봤을 때, 제이콥이 전생의 이든을 훌쩍 넘어서고 있다는 얘기였다.
그래서일까.
하나를 알려 주면 열을 넘어, 백 또는 천까지 이해하고.
뛰어난 오성으로 가르치는 족족 찰떡같이 따라 하다 보니, 지금 이든은 제이콥을 통해 정말로 모든 것을 잊고 스승된 이로서 가르치는 즐거움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있었다.
그때였다.
연신 거듭되는 감탄에 이든이 말을 잇지 못하자, 제이콥이 그의 스승을 넌지시 불렀다.
“스승님?”
“으, 응?”
“무슨 생각을 그리 오래 하세요?”
“아…. 별것 아니다. 참으로 잘했다.”
아암, 잘했지.
보통 잘한 게 아니라, 너무너무 잘했지.
물론 이든은 혹여 이 생각이 제이콥에게 독이 될까.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그가 재차 말을 이었다.
“네가 생각보다 훈련을 잘 따라와 주는 덕에 훈련을 진행 절차가 상당히 단축되었다. 바로 다음 훈련으로 넘어가자꾸나.”
“아…. 가, 감사합니다.”
아니.
‘오히려 내가 감사해야지.’
실제로 이든은 제이콥에게 남다른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하늘이 내린 천재를 가르친다는 재미가 어떤 것인지 알게 해 주었으니까 말이다.
덕분에 이든은 유니콘 길드가 오기 전까지, 제이콥에게 전수해 줘야 할 것은 전부 그의 머릿속에 때려 박을 작정이었다.
제이콥의 재능이 봉 잡았다는 말이 절로 나올 만큼 봉황의 수준이라 결론 내린 그였지만,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 가늠해 보기 위해서였다.
‘유니콘 길드가 이곳에 도착하기까지 앞으로 5일 정도…. 그 사이에 어디까지 깨우칠 수 있는지 시험해 봐야겠다.’
이든은 곧바로 제이콥에게 롱소드 모양의 목검을 건넸다.
제이콥이 그것을 받더니 놀라 물었다.
“오늘 바로 검술 훈련에 들어가는 건가요?”
“그래.”
사제의 연을 맺고 수련을 시작한 지 이제 겨우 하루 지났건만, 곧바로 검술 훈련에 들어간 것이다.
과정을 넘어가는 속도가 참으로 대단하다는 말로밖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다.
물론 첫 제자였던 릴리 역시 하루에 걸쳐 각 훈련을 진행하긴 했지만, 당시엔 이전 훈련을 완전히 숙지한 이후에 넘어갔다기보단 사정상 시간에 쫓기다시피 가르친 경향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 때문에 호송에서 돌아온 날이면 릴리가 그간 해 온 수련이 제대로 되었는지 함께 확인하기에 바빴건만.
제이콥은 달랐다.
하루 만에 그 ‘천마심공’을 완전히 깨우쳤으니, 곧바로 검술 훈련으로 넘어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목검을 건넸던 이든이 가부좌를 풀고는 자리에서 일어나자 제이콥 역시 그를 따라 벌떡 일어섰다.
이든이 제이콥을 멀찍이 뒤로 물렸다.
“지금부터 시범 보일 검술은 제이콥, 네가 알고 있던 검술 훈련과는 방식이 다를 것이다.”
“방식이 다르다고요?”
“그래.”
이곳에 검술은 하나의 형태부터 배운다.
찌르기, 베기 등등 각기 상황에 쓰이는 보편적인 형태가 있는 반면에, 기사들 같은 경우엔 전승되는 가문이나 스승에 따라 그 형태와 자세를 달리하며, 비기라 할 수 있는 독특한 형태에 일격필살을 배운다.
말인즉슨, 각각의 형태들을 완벽히 숙지 후. 그것을 상황에 따라 초식처럼 쓰는 것이 이곳에 보통 수련법이라면, 중원의 검술은 그 순서가 반대다.
우선 전체적인 초식을 익히고, 흐름을 깨우친 뒤에 어느 부분이 부족하다 싶으면 그것을 집중적으로 파고드는 역순이다.
그 때문에 실전에서 당장에 쓰긴 어려운 것이 중원의 검술이지만, 이것이 몸에 완벽히 익으면 각 상황에 맞게 초식 중 일부를 적재적소에 자신이 골라 쓸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해서 중원의 검술은 그 난해함 탓에 익히는 데 시간이 제법 걸리는 편인지라, 상반신에 해당하는 검술과 하반신에 해당하는 보법을 따로 가르친 후, 각각의 것들이 어느 정도 숙지가 되었다는 판단하에 전체적인 초식을 재차 익히는 편이다.
릴리도 그랬고, 발리스타 역시 그런 식으로 가르쳤었다.
하나, 지금 이든이 제이콥을 가르치는 방식은 그보다 더 고차원적인 것이다.
바로 검술과 보법을 동시에 가르치는 것.
필시 제이콥의 재능을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능히 가능한 수련법이라 판단한 것이다.
“지금부터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잘 보거라. 내가 어찌 움직이는지 말이다.”
“네…!”
제이콥이 반짝 긴장한 채로 이든을 뚫어지라 바라보았다.
제이콥의 시선이 이든을 향해 한시도 떼어지지 않던 그 사이.
저벅.
이든이 발이 한 발짝 내디뎌졌다. 그리고 그것을 신호로 그의 신형이 느릿한 듯 점차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마기를 운용하지 않은 순수한 초식이었기에 눈으로 그 움직임을 좇는 것이 불가능하지만은 않았다.
다만, 춤을 추듯 고고한 동작으로 보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 동작을 따라 복잡한 선을 그리는 목검까지.
이것만 보면 마치 한편의 검무를 연상시켰지만, 목검 안에 담긴 것은 필시 상대의 숨통을 노리는 ‘살초’였다.
휘이이이익!
요란한 듯 움직이며 보법을 밟는 발부터.
보법이 나아가는 방향을 따라 휘둘러지는 검까지.
검을 휘두르는 이든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담겠다는 작정으로 제이콥의 눈이 어지러이 흔들렸다.
휙휙.
검을 휘두르는 이든도 그렇지만.
그를 바라보는 제이콥 역시 어쩐지 무아지경에 빠진 것 같아 보이는 것은 왜일까.
그리고 초식에 끝자락에서 이든의 움직임 멈춘 그 순간.
부산스럽게 흔들리던 제이콥의 눈동자도 덩달아 멈추었다.
제이콥이 일순 마른침을 삼켰다.
‘끄, 끝난 건가….’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초식을 마치고 먼발치까지 떨어져 있던 이든이 곧장 입을 뗐다.
“이것이 바로 초식이다.”
“초식….”
“그래, 내가 지나온 길바닥을 환인해 보겠느냐?”
제이콥의 시선이 곧장 이든이 지나온 길바닥을 향했다.
그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이, 이건….”
“이 발자국이 바로 보법이지. 검을 정확히 따라 휘두르는 것에 그쳐선 안 된다. 동시에 바닥에 나 있는 발자국을 따라 정확히 움직여야만 비로소 제대로 된 위력이 나오는 법이지.”
“그렇구나….”
제이콥이 넋을 놓으며 이든이 남긴 발자국들을 남김 없이 눈에 담고 있을 무렵.
이든의 말이 재차 들려왔다.
“따라 해 볼 수 있겠느냐?”
사실 초식이란 것은 웬만큼 무학에 통달한 자가 아니고선 한 번 봤다 하여 곧장 따라 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이든이 따라 할 수 있겠냐고 물은 이유는 제이콥의 재능이 어디까지인지 정확히 가늠해 보기 위해서였다.
대답은 금세 돌아왔다.
제이콥의 말을 듣던 이든의 얼굴이 넋 나간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제자에게서 믿기지 않을 얘기가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듣던 이든이 놀라 재차 물었다.
“…정말 할 수 있다고?”
재차 묻는 이든의 목소리에 제이콥이 일순 멈칫하더니 조심히 말을 꺼냈다.
“정확하진 않지만, 어느 정도 엇비슷하게 가능할 거 같아요.”
“하, 한번 해 보겠느냐?”
“예!”
씩씩하게 대답한 제이콥이 곧바로 이든이 했던 동작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이든으로선 이를 직접 확인할 겨를이 없었지만 확인할 수 있는 방도가 완전 없는 것은 아니었다.
제이콥이 움직임이 이든이 멈췄던 자리 근방에서 멈추자, 이든이 곧장 제이콥이 지나온 길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나온 바닥을 반절쯤 더듬었을 때, 이든이 숙였던 허리를 폈다.
그의 얼굴엔 놀라움을 넘어 당혹스런 기색이 역력했다.
‘…일치한다.’
무엇이 일치한다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이든이 바닥에 남겼던 발자국의 방향을 말하는 것이었다.
엇비슷한 수준이 아닌.
그의 것과 정확히 일치하는 모양이었다.
“허, 허허….”
이든의 입에서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혹시나 하였는데 찰떡같이 따라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 자신조차 일정 수준 이상이었던 소교주 시절에도 이렇게까지 따라 하진 못했다.
그런데….
그간 무(武)와는 인연이라곤 없던 아이가 한번 본 것만으로 그대로 따라하는 것에 성공한 것이다.
물론 그의 발자국이 옆에 그대로 나 있긴 했지만, 이것은 보고 따라 한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었다.
헛웃음이 절로 나오는 것이 너무도 자연스러운 상황이었다.
그런 이든의 모습에 제이콥이 안절부절못한 얼굴로 물었다.
“저, 저기… 제가 잘못한 건가요?”
이든이 고갤 저었다.
“아니, 기가 막히도록 잘했다.”
“정말요?”
“그래.”
정말 기가 막혔지….
입신에 경지에 이르면서 생사현관과 전신세맥까지 전신에 뚫리지 않은 기맥과 혈맥이 없건만, 이 기막힌 기분은 대체 무어란 말인가.
이든 그 자신조차 천재라 불렸던 이건만, 제이콥의 비하면 새 발의 피요, 호랑이 앞에 생쥐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이든은 제이콥이란 괴물 같은 제자를 경험하며 한 가지를 느꼈다.
제이콥처럼 불가해한 진짜배기 천재들이 결국엔 등선에 길에 오르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고 말이다.
이든이 그답지 않게 한참을 넋 놓아 사념에 빠져 있을 무렵.
제이콥이 이든의 옷을 살짝 잡아당기며 그를 불렀다.
“스승님.”
“…….”
“스승님…!”
“…으, 응?”
“수련… 계속해야 하지 않아요?”
“아, 아아… 해야지. 당연히 해야지.”
문득 궁금해졌다.
이 아이는 대체 어디까지 강해질지 말이다.
그 이후로도 이든은 제이콥의 한계를 두지 않고, 상식을 벗어나는 훈련을 이어 나갔다.
“조금 전 초식과 어제 외웠던 구결을 동시에 해 보겠느냐?”
“도, 동시에요?”
“어렵겠느냐?”
이든의 물음에 제이콥이 고갤 저었다.
“하, 한번 해 보겠습니다!”
“…….”
제이콥이 단지 보법만 정확히 따라 한 것이 아니라 검까지 정확히 휘둘렀다는 것을 알기 위해선 이만한 방법이 또 없었다.
구결을 외우는 과정에 이동하는 마기의 흐름으로 제이콥이 따라 한 검 초식이 어떤지 정확한 판단이 가능했기 떄문이다.
“후우….”
한번 심호흡을 한 제이콥의 신형이 일순 빠르게 움직였다.
마기의 양이 얼마 되지 않았기에 느껴지는 반응은 미비했지만, 이든에게 그것은 한 점 문제 되지 않았다.
제이콥이 보이는 마계수라지옥검 초식에 마기의 흐름을 살피던 이든의 얼굴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한 차례 더 넋이 나갔다.
마기 흐름이 그 자신의 것과 정확히 일치했기 때문이다.
‘와…. 저거 사람 맞어?’
무인에게 있어 이는 극찬이나 다름 없다.
그리고 이든은 아마 몰랐을 것이다.
평소 사람들이 자신을 보는 생각이 조금 전 그의 생각과 같다는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