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모든 이들의 하루가 진즉에 끝난 늦은 밤.
"응?"
집으로 향하던 스왈로의 발길이 덜컥 멈추었다.
그의 시선이 마을 회관 쪽을 향했다.
‘불이 켜져 있잖아?’
대부분 마을 사람들이 이미 진즉에 잠자리에 들었건만, 마을 회관 안은 누가 있기라도 한 것인지,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누가 들어왔다가 불을 끄는 것을 깜빡한 건가 싶어 스왈로가 회관으로 걸음을 돌렸다.
끼익.
문을 열고 들어선 스왈로의 주름진 눈가가 펴지며 동그랗게 뜨였다.
안에 사람이 있던 것이다.
"영주님?"
회관 안에 있던 사람은 다름 아닌 이든이었다.
한데, 왜일까.
불렀음에도 이든은 달리 대답이 없었다.
스왈로가 재차 그를 불렀다.
"저, 영주님…!"
"……."
여전히 묵묵부답.
평소 눈을 감고 있으니, 혹 저대로 잠이라도 든 건가 싶어 다시 불러본다.
"영주님."
"……."
"영주님, 혹 주무십니까…?"
"예…?"
수차례 부르고 나서야 이든이 화들짝 놀라며 반응했다.
"촌장님?"
"음?"
평소답지 않은 영주의 모습에 스왈로가 고갤 갸웃했다.
그러곤 이든이 앉은 자리 옆에 앉고는 물었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십니까? 한참을 불렀는데 전혀 듣지도 못하시고…."
이든이 멋쩍은 듯 볼을 긁적였다.
"아 그러셨습니까? 죄송합니다. 전혀 듣질 못했습니다."
"예…?"
듣던 스왈로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평소였으면 문을 열기가 무섭게 누가 왔는지 귀신같이 알아맞히며 인사부터 건네던 사람이 다가오는 소리부터 해서 부르는 소리까지 전혀 듣지 못했다는 것에 퍽 놀란 것이다.
‘진짜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 건가?’
확실히 지금 이든의 모습은 평소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약간 얼빠진 모습 같다고 해야 하나.
이든이 영주로 부임한 이후, 줄곧 옆에서 그를 보좌해 왔지만, 지금과 같은 모습을 보여 준 적은 결단코 없었다.
이든을 연신 의아하게 바라보던 스왈로가 넌지시 물었다.
"혹…. 제이콥이 말을 잘 안 들어서 그러십니까?"
듣던 이든이 피식 웃으며 고갤 저었다.
"아뇨. 말을 안 듣기는커녕 너무 잘 듣습니다."
"그럼…. 제이콥의 재능이 영 마음에 안 차셔서 그러십니까?"
"……."
듣던 이든이 일순 입을 꾹 다물며 얼굴을 구겼다.
그의 표정이 마치 ‘그게 뭔 개풀 뜯어 먹는 소리냐?’라고 묻는 것 같았다.
영문을 모르는 스왈로로선 이든이 속 시원히 대답해 주지 않으니, 영주가 대체 왜 저러는지 알 수 없어 그는 그 나름대로 답답한 노릇이었고.
이든이 고갤 휘휘 젓고는 입을 뗐다.
"제이콥에 관해선 너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걔 완전 미쳤어요."
"…예?"
미쳤다는 말에 스왈로가 놀라 되묻자 이든이 곧바로 그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정정했다.
"물건이라고요."
"아…. 그렇습니까? 허허, 그거 다행이군요."
듣던 스왈로마저 제이콥의 칭잔에 제 자식마냥 기분이 좋은지 허허실실 웃던 그때, 이든이 물었다.
"근데, 갑자기 여기까진 어쩐 일이십니까?"
스왈로의 얼굴이 재차 굳었다.
아무래도 이 영주 되는 양반이 시간 개념마저 까먹은 것인가 걱정이 밀려와서였다.
스왈호가 조심히 말을 꺼냈다.
"저 영주님…. 지금 시간이 많이 늦었는데요?"
"그래요? 해 봤자 다들 저녁 식사 시간 아닙니까?"
"…저녁은 옛날 고릿적에 먹고 다들 곯아떨어진 시간입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습니까?"
이든이 멋쩍은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왈로도 그를 따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이럴 게 아니라. 촌장님께서도 어서 들어가시죠. 오늘 하루도 고생하셨을텐데요."
"제가 달리 고생할 것이 뭐 있겠습니까? 고생은 마을의 청년들과 손님들께서 하고 계시지요."
듣던 이든이 웃으며 손을 휘저었다.
그 순간.
‘훅’ 하고 회관 안을 환하게 비추던 초들이 한순간에 꺼지며 어둠이 찾아왔다.
그 광경에 따라 나오던 스왈로는 ‘방금 내가 뭘 본거지?’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마법…. 인가요?"
스왈로의 물음에 이든이 고갤 저었다.
"검술입니다."
"…네? 조금 전 그게 말입니까?"
스왈로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을 했다.
뭐, 다른 이도 아닌 저 영주가 하는 말이니. 괜한 소리는 아닐 것이라 여긴 그이지만, 그게 어째서 검술의 영역인지는 무공의 문외한이 그로선 여전히 알 수 없는 노릇이었지만 말이다.
저벅저벅.
스왈로의 집과 이든이 머무는 곳은 방향이 같았다.
때문에 이렇게 함께 돌아가는 일이 간혹 가다 있긴 했다.
걷던 중 이든이 스왈로에게 넌지시 물었다.
"마을 중앙의 공사 현장은 얼마나 진행됐습니까?"
"아, 그렇지 않아도 그것에 관해 말씀드리려던 참이었는데, 이참에 말씀드리는 게 좋겠군요. 마을 중앙에 건물이 내일쯤이면 완공이 될 것 같다고 현장에 투입된 드워프 장인들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일이요?"
이든이 놀란 듯 곧바로 되묻자, 스왈로가 이해한다는 듯 웃었다.
"저도 처음 들었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최소 한 달은 걸리겠거니 싶었는데, 일주일도 안 돼서 뚝딱 만든 것 아닙니까?"
이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속도였다. 스왈로가 재차 말을 이었다.
"확실히 드워프 장인들이 투입되고 나서 건축 속도가 정말 말도 안 되게 빨라진 것 같습니다."
확실히 그리 볼 수밖에 없었다.
엘프의 눈물 원석 세공 작업에 포함되지 않은 드워프들이 공사현장에 투입된 이후로 작업 속도가 몰라보게 빨라졌다는 소릴 종종 들었으니까.
다만, 이렇게까지 빠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달까.
이든이 화제를 돌렸다.
마을 중앙에 건축도 건축이지만, 사실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중요한 것은 영지의 외성 벽 공사였기 때문이다.
"외벽 공사 현장은 어떻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일꾼들 역시 사고 치는 횟수가 눈에 띄게 줄었고요."
"기대도 안 했는데, 그것참 다행이군요."
"그곳 역시 드워프 장인들이 투입되고 나서 속도가 몰라보게 빨라졌습니다만, 그보다는 다른 이유인 것 같습니다."
"다른 이유요?"
"예, 드레이븐 마르코라고 했던가요? 그 도적들의 수장 말입니다. 그자가 공사 현장에 투입된 이후로 뭐랄까…. 의기투합하는 분위기가 형성됐다고나 할까요?"
이든이 제법 놀란 표정을 했다.
드레이븐 마르코가 정신 차렸단 얘길 듣긴 했지만, 제 동료들까지 챙겨가면서 일을 시킬 줄은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마르코가 바닥까지 추락해버린 가문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 절실하단 뜻으로 봐도 될 것 같았다.
안쓰러웠던 걸까. 이든의 얼굴에 찰나 씁쓸한 기색이 비친 듯했으나, 이내 고갤 저었다.
‘자업자득이야.’
드레이븐 가문을 풍비박산 낸 것은 이든의 본인의 손으로 벌인 것이지만, 어찌 됐든 그 사달이 나기까지 그들 스스로 무덤을 판 것은 부장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신경이 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이든이 침중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던 사이, 어느덧 갈라져야 할 시간이 왔다.
스왈로가 고갤 숙였다.
"그럼,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영주님께서도 어서 들어가 쉬십시오."
"예, 촌장님도 오늘 하루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든이 마주 인사하며 걸음을 떼려던 찰나, 스왈로의 음성이 그의 발을 붙잡았다.
"저기, 영주님."
"……?"
이든이 고갤 돌리는 사이, 스왈로가 말을 이었다.
"근래 들어 가장 바쁜 나날을 보내고 계시지요?"
"……."
"고민 역시 많이 되실 것으로 압니다. 무엇보다 저희를 이끄는 입장이시니까요."
이든이 아무런 말도 못 하는 사이, 스왈로가 씩 웃어 보였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영주님의 걱정과 달리 이젠 영지민들 스스로가 너무도 잘 해내 주고 있으니까요. 조금은…. 영주님께서 짊어지고 계시는 짐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 줘도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훗.’ 이든이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내 표정이 그리도 심각해 보였나.’
하지만 왠지 모르게 스왈로의 말을 듣고 있자니, 마음이 한결 가벼운 느낌이 들었다.
이든이 고갤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촌장님 말씀 새겨듣도록 하겠습니다."
"이 노인네는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이제 밤바람이 꽤 차네요."
"그러게요."
"그럼, 들어가 쉬십시오. 영주님."
조금은 밝아진 듯한 이든의 모습에 스왈로가 안심하며 다시 걸음을 돌리던 그때.
"촌장님."
이번엔 이든이 그의 걸음을 붙잡았다.
"항상 큰 힘이 되고 있습니다. 늘 고맙습니다."
"뭘요."
스왈로가 이든을 마주 보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가을에 접어든 계절.
차가운 밤공기에 몸이 절로 움추러 들었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 한쪽은 더 없이 따뜻해져 오는 밤이었다.
***
다음 날.
이든은 제이콥을 훈련시키기 이전, 드워프들과 엘프들이 묵게 될 숙소부터 확인차 들렀다.
이든을 확인한 드워프 장인 중 하나가 그에게 후다닥 달려왔다.
"영주님, 오셨습니까?"
"예, 촌장님으로부터 숙소가 오늘이면 완공될 것 같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예정대로 오늘이면 완성이 될 것 같습니까?"
"이제 마감 작업만 남은 터라 오늘 저녁이면 엘프분들을 포함하여 저희 모두 각 숙소에서 묵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잘됐군요."
생각해 보니, 숙소의 완공이 빨라진 이유가 그들이 편히 쉬기 위해서 이토록 빨랐었을 수도 있겠단 생각 문득 들었다.
뭐, 이유가 어찌 됐든 간에 완공이 예정보다 빨라졌다는 것은 긍정적인 일임은 분명했다.
‘이곳에 일이 끝나는 대로 남은 드워프들은 외벽 공사 현장에 곧장 투입 시키면 되겠군.’
이든이 이곳 현장에 일이 끝나는대로 남은 드워프들을 어찌 돌려야 하나 고민하던 그때, 보고하던 드워프가 불쑥 말을 꺼냈다.
"숙소가 완공되는 대로 저희는 외벽공사 현장에 바로 투입하면 되겠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는데, 드워프가 먼저 말을 꺼내 준 것이다.
이든이 고갤 끄덕였다.
"예, 우선은 그렇게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이든은 마을 중앙과 외벽공사 현장을 모두 다녀오고 나서야 제이콥의 훈련을 시작할 수 있었다.
제이콥의 훈련 역시 별다를 것은 없었다. 괴물 같은 재능으로 이든이 무공을 알려 주는 족족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있었다.
그사이, 숙소는 예정대로 무사히 완공되었다.
드워프들과 엘프들은 불편하던 임시 거처에서 비로소 제대로 두 발 뻗고 쉴 수 있는 공간을 갖게 된 셈이었다. 그렇게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시간들이 흐르고.
마을에 손님들이 찾아왔다.
유니콘 길드와 소식을 듣고 함께 걸음 해 준 상인들이었다.
***
"허…."
마을에 들어선 상인들은 연신 감탄을 금치 못했다.
"여기가 정말…. 그 레온하르트 마을이라고?"
한 상인이 중얼거리는 소리에 뒤따라오던 다른 상인이 바로 맞받아쳤다.
"세상일이라는 게 어떻게 될지 모른다더니. 딱 이걸 두고 하는 소리 아닌가. 그 별것 없던 마을이 이렇게 활기가 넘치는 마을이 될 줄이야."
상인들은 발품을 파는 존재들이다.
그런 이들이 전쟁 이후 레온하르트 마을의 상황을 확인조차 안 했을까.
전쟁 이후 제국의 대부분 영지가 폐허가 됐다지만, 말로만 듣는 것과 두 눈으로 확인하는 것은 명백한 차이가 있었다.
아마 누구보다 빠르게 레온하르트 마을 역시 어떤 상황인지 확인했을 것이고, 이곳엔 얻을 것이 없다 여기며 빠르게 손을 털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때 알던 마을과 지금 보이는 마을에 모습이 너무도 다르니 놀랄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때였다.
마을을 구석구석 둘러보던 상인들이 무언가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저, 저기 봐. 저기!"
"응?"
한 상인이 가리킨 곳으로 남은 상인들의 시선이 덩달아 옮겨졌다.
무언가를 바라보던 상인들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저, 저들이 설마 엘프들인가…?"
"그, 그런가 봐…."
그들의 시선이 훈련을 받는 엘프들에게서 떨어지질 못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한참 엘프들을 구경하던 중 한 상인이 고갤 갸웃거리며 물었다.
"근데…. 엘프들이 원래 저리 생겼었나…?"
이야기 속에서 전해 내려오는 엘프의 모습은 뾰족이 솟은 귀가 있으며, 흰 피부에 늘씬하게 뻗은 팔다리. 그리고 무엇보다 아름다운 외모가 인상적이라 했다.
그런데….
지금 상인들이 바라보는 엘프들의 모습은 뭐랄까.
우락부락…. 하달까?
피부도 탄 듯 조금 거칠고….
물론 귀와 아름다운 얼굴을 보면 저들이 엘프라는 것을 알 수 있긴 했지만, 그래도 뭔가 알던 것과 묘하게 다른 느낌을 받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 그래도… 설마 했지만, 진짜 엘프들이 있을 줄이야…."
엘프들을 바라보는 상인들의 입이 다물어지질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