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상인들이 엘프들의 모습에 격하게 반응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이 이 먼 곳까지 수고를 무릅쓰며 온 이유와 어느 정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엘프의 눈물’ 때문이었다.
엘프의 눈물이란 원석은 어째선지 엘프들이 살아가는 터전에서만 나오는 자원이었다.
과거 인간과 엘프의 교류가 활발했을 때만 해도 비교적 쉽게 볼 수 있는 자원이었나, 엘프들이 인간들에게 등을 돌린 이후. 덩달아 사라져 버리며 희귀자원이 되어 버렸다.
그 때문에 엘프의 눈물로 만들어진 과거의 보석들은 그 가격이 천정부지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사실 상인들은 유니콘 길드를 따라나서면서도 내내 반신반의했다. 이제는 세상에 다시 나올 일이 없을 거라 여긴 엘프의 눈물을 이곳 레온하르트 마을에서 공개하겠다는 얘기가 너무 허황되게 들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홍보의 근원지가 다른 곳도 아닌 유니콘 길드라는 것이 마음에 걸렸고, 수도의 귀족들 역시 유니콘이 대대적으로 홍보한 탓에 엘프의 눈물에 남다른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유니콘 같은 대형 길드가 정신이 나가지 않고서야 귀족들의 관심까지 받아가며 사기를 칠 만큼 어리석진 않을 노릇.
게다가 수도에 돈 좀 있다 하는 상인들마저 눈치를 보더니만, 슬금슬금 따라나서려는 상황에 다른 상인들이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결국, 속는단 심정으로 유니콘 길드를 따라왔건만.
"진짜…. 엘프의 눈물을 구하긴 구했나 봐. 그러지 않고서야. 마을에 저토록 많은 엘프가 주둔하고 있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그, 그러게."
한두 명도 아닌, 거진 삼백의 달하는 엘프들이 늘어선 채 어떤 교관을 따라 훈련을 받는 모습은 정말 장관이란 말이 더없이 어울렸다.
그리고 그 모습에 상인들이 저마 유니콘의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판단할 무렵이었다.
연신 엘프들에게 시선을 떼지 못하던 상인들 사이로 한 사람이 대뜸 말을 꺼냈다.
"모두 너무 섣부른 판단을 하시는 것은 아닌지요?"
"섣부른 판단이라니요?"
엘프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던 상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옮겨졌다.
수많은 상인의 시선이 향한 곳.
거기엔 찢어진 눈의 한 노인이 집중된 시선 속에서 고고한 척 연신 흰 수염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노인을 바라보던 상인 중 하나가 그를 알아보고는 외쳤다.
"세상에! 버핏 경이잖아!?"
상인이 그의 이름을 외친 후의 여파는 상당했다.
여기저기서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저마다 떠들기 바빴다.
엘프들을 목도했을 때만큼이나 상당히 부산스러운 모습이었다.
"뭐? 황금성의 그 버핏 경 말인가? 그 사람도 우리와 함께 왔었던가?"
"이럴 수가…. 제국 제일의 부호가 이곳에…."
"버핏 경께서도 우리와 줄곧 함께 오셨던 걸까…?"
"서, 설마…. 그랬다면 이미 진즉에 소문이 났겠지."
들리는 말을 듣던 버핏이 낮게 헛기침하며 이목을 집중시키고는 입을 뗐다.
"저는 제 전용 호송단을 이끌고 이곳에 오는 길입니다."
"허어…. 전용 호송단이라니. 역시…."
황금성 길드.
아슬란 제국 이전부터 줄곧 부를 축적해 온 명실상부한 가장 유명한 상단으로, 전용 호송단을 꾸릴 만큼 원체 그 규모가 상당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자산 역시 돈이 썩어 나갈 정도로 가늠할 수 없는 수준이라고 한다.
게다가 평소 뇌물을 어찌나 먹여 대는지 귀족들마저 그에게 함부로 하질 못하고 굽실거릴 정도라 전해지니, 그야말로 제국민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는 부호 중의 대부호였다.
그때였다. 버핏의 등장에 분위기가 재차 소란스러워지던 그때, 호들갑 떨던 상인 중 하나가 물었다.
"근데 섣부른 판단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버핏이 재차 수염을 쓸어내리며 입을 뗐다.
"말 그대로입니다. 단지 저것만 가지고 유니콘 길드의 말을 믿어선 안 된다는 말을 드리는 겁니다."
"하지만…. 마을에 저리 많은 엘프들이 주둔하고 있는데, 엘프의 눈물이 있다는 것이 거짓이기야 하겠습니까?"
듣던 다른 상인들마저 고갤 끄덕이며 그의 말에 동감했으나, 버핏은 어째선지 고갤 저었다.
"엘프들이 주둔 중이니 엘프의 눈물을 선보인다는 말이 거짓은 아니겠지요. 다만…. 엘프의 눈물이 있고 없고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응?"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이었다.
여기 있는 상인들이 그것 때문에 이곳까지 힘든 걸음을 했는데, 엘프의 눈물이 있고 없고가 중요하지 않다니?
상인들이 저마다 고갤 갸웃거리던 그때, 버핏이 말을 이었다.
"유니콘 길드가 대대적으로 홍보한 엘프의 눈물이 보석이냐, 아니면 채취한 원석이냐. 이것이 가장 주요한 화두란 뜻입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보석이면 어떻고, 원석이면 또 어떻습니까? 보석이 아닌 원석이라도 장인들에게 세공을 맡기면 되는 것 아닙니까?"
상인들이 여전히 모르겠다는 얼굴로 묻자 버핏이 곤란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갤 휘휘 저었다.
"이런…. 아니나 다를까. 이거 모르시는 분들이 태반이군요. 엘프의 눈물 원석의 강도는 ‘미스릴’과 동급입니다. 원석은 어찌어찌해서 구했다 쳐도 이를 세공해 줄 드워프가 없으면 애초에 세공조차 불가한 애물단지란 말입니다."
"헙…."
비로소 이해했다는 듯 상인들이 저마다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버핏이 그들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곤 말을 이었다.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드워프들 역시 수백 년 전에 자취를 감춘 종족입니다. 그들이 다시 나타났다는 말이 없으니 말인즉슨 유니콘 길드장이 말하는 엘프의 눈물이란 보석이 아닌 그 원자재인 원석을 가리킬 가능성이 크고요. 애초에 세공조차 불가능한 원석을 사서 다들 이를 어찌 처리하실 생각입니까? 설마 하니 원석 그대로 판매하실 요량은 아니실 테고?"
"……."
엘프의 눈물을 통해 제대로 한탕 하려 했던 상인들의 얼굴에 금세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버핏경의 말대로라면 엘프의 눈물 원석을 경매에서 낙찰받았다 한들, 하늘에서 갑자기 드워프가 뚝 떨어지지 않는 이상 이를 세공할 방도가 전혀 없다는 뜻이었….
"잠시만요. 길 좀 지나가겠습니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들려온 목소리에 상인들이 두리번거리던 그때였다.
연신 주위를 살피던 상인들의 시선이 대뜸 밑으로 향했다.
마을 안에 들어선 상인들 사이로 웬 땅딸막한 인간들이 목재와 바위를 짊어지며 지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난쟁이?"
"엄청… 작네…."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상인들의 시선이 자신들 사이를 지나가는 그들에게서 떼어지질 못했다.
몸은 제법 다부져 보이긴 했지만, 자신들의 반도 안 되는 키에, 무엇보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머리 위에 달린 뿔이었….
뿌, 뿌울…!?
상인들의 눈이 어느새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부, 분명…. 머리 위에 뿔이 있었지…?"
"그, 그랬던 것 같은데…."
상인들이 헛것이라도 본 것인가 싶은 얼굴을 하던 그때, 그들 중 하나가 떠오른 것이 있는지 크게 외쳤다.
"저, 저거…. 설마 드워프! 드워프들 아니야!?!?"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 속에 드워프와 너무도 흡사한 모습이었다.
"드워프라고?"
"드워프가 있어?"
"그러네. 진짜 있었네!?"
저마다 한마디씩 떠들어 대는 상인들 사이에 버핏의 눈이 지진이라도 난 것 마냥 흔들려 댔다.
‘미, 미친…. 진짜 드워프가 있었다고…?’
사실 표현은 안 했지만, 내심 마을 연무장에서 훈련 중인 엘프들의 모습을 보았을 때도 상당히 놀랐던 그였다.
하나, 그는 엘프의 눈물이 어떤 식으로 가공이 필요한지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어찌 엘프들은 구워삶아 원석은 구했다 쳐도, 드워프는 그 행적이 엘프보다 더더욱 묘연한 탓에 가공할 방도가 전혀 없으리라 감히 예상했건만….
그런 드워프가 한 명도 아닌 눈에 대충 보이는 것만 해도 수십을 아울렀다.
‘그 말인즉슨… 이곳 마을에서 엘프의 눈물 보석 수급이 가능하다는 것 아닌가!’
상황을 파악하던 버핏의 머릿속이 빠르게 회전해 대기 시작했다.
본래 그의 계획은 원석을 판매하려는 유니콘의 민낯을 낱낱이 까발려 그들의 명예를 실추시켜 회생 불가하게 만든 이후, 은밀히 저들의 수장과 접근해 유니콘 길드를 인수한 다음 황금성 길드와 합병시킬 계략을 꾸미고 있었다.
하나, 이곳 마을에서 엘프의 눈물 수급이 원활하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어떻게 해서든 유니콘 길드장과 접촉해서 수도에 귀족들에게 판매할 엘프의 눈물 보석에 관한 독점을 따내야만 했다.
거기서 오는 천문학적인 이득은 유니콘 길드와 황금성을 합병시키는 것과는 비교가 불가한 것이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그때였다.
줄곧 고고히 서 있던 버핏이 눈치를 보더니만, 일순 앞장서 가던 유니콘 길드장 곁으로 허겁지겁 달려가는 것이 아닌가.
파아아아아앗!!!
노인이 달리는 속도라곤 믿기지 않을, 신법을 써서 날아갔다 해도 믿을 만한 실로 대단한 속도였다.
그가 무슨 생각으로 유니콘 길드장 곁으로 뛰어갔는지 여기 상인 중 모르는 이는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내달리기 시작한 버핏을 시작으로 서로 눈치를 살피던 상인들이 대뜸 그를 따라 유니콘의 게럴드 길드장을 향해 전속력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우르르르르!!!
"응?"
데려온 상인들에게 현 레온하르트 마을에 모습을 제대로 각인시키기 위해 드워프와 엘프들이 마을 안에서 분주히 돌아다니는 시간에 맞춰 도착한 게럴드 길드장은 일순 뒤에서 들려오는 엄청난 뜀박질 소리에 고갤 돌렸다.
우르르르르!!!
"게럴드 길드장!!! 여기 이거! 이거 받으시오…!"
"아니오! 내 것, 내 것을 받으시오!!!"
가장 앞장서 백지수표를 들이밀며 달려오는 황금성의 버핏 경을 필두로, 회까닥 뒤집힌 눈으로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상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흡사 광기라 표현해도 부족함 없는 그 모습에 게럴드가 일순 식겁한 표정을 했다.
저들이 어떤 이유에서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지 모를 그가 아니었다.
게럴드가 달려드는 상인들을 향해 손을 휘휘 저으며 외쳐 댔다.
"모두! 줄을 서시오…!!!!"
게럴드가 외쳤지만, 이미 눈이 돌아갈 대로 돌아간 상인들에게 그것이 들릴 리 만무했다.
다가오는 상인들 무리의 속도가 줄지 않자. 그의 안색이 더욱 새하얗게 질렸다.
게럴드가 허둥대며 소리쳤다.
"자, 잠깐!!! 다, 다들 줄을… 제발 줄을!!!!!"
상인들에게 둘러싸인 게럴드의 처절한 외마디 비명이 마을에 가득 울렸다.
***
마을 회관은 찾아온 귀한 손님들로 오래간만에 북적거렸다.
회관 중앙에 있던 거대한 탁자를 치우고 빼곡히 늘어선 채 준비된 좌석에 찾아온 상인들이 하나둘씩 자리하며 채워질 무렵.
단상 바로 옆, 몇 개 안 되는 주최자 측 자리에 앉아 있던 게럴드 옆에 이든이 다가와 앉았다.
이든이 자리에 앉자마자 말을 건넸다.
"조금 전, 꽤 고생했다면서요?"
게럴드가 난데없이 상인들에게 둘러싸여 고생하던 순간을 말하는 것이었다.
듣던 게럴드가 피식 웃고는 입을 뗐다.
"말도 말게. 하나같이들 내 몸을 붙잡고 어찌나 난리들인지. 하마터면 팔다리가 다 떨어져 나갈 뻔했다니까."
"그래도 이렇게 웃으면서 말하고 계신 것을 보면 아직 팔다리가 멀쩡히 붙어 계신 모양인데요?"
듣던 게럴드가 얼굴을 와락 구겼다.
"원 사람도 참, 시답지 않은 농담은…."
"웃자고 하는 소립니다. 웃자고."
"끄응."
이든의 말 같지도 않은 농에 게럴드가 ‘끙’ 소릴 내다가 일순 주변을 훑었다.
"그나저나…."
눈을 빛내며 자신들을 뚫어지라 바라보고 있는 상인들의 모습을 보며 게럴드가 입을 뗐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로 관심이 뜨거울 줄은 몰랐어. 참으로 다행이지 않은가?"
"그러게 말입니다."
이든 역시 동의하듯 고갤 끄덕이더니 대뜸 물었다.
"지금의 반응이라면 정확히 어느 정도 이목을 끌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까?"
이든의 물음에 게럴드가 반색하며 답했다.
"어느 정도냐고? 여기 모인 상단들은 하나같이 수도에서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야. 특히나 이곳에 자리한 황금성의 버핏 길드장 같은 경우엔 제국 전체를 통틀어 제일가는 부호인 만큼, 제국 전체의 이목을 끌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세."
"그렇다면 이목은 이만하면 충분하단 소리군요."
"그런 셈이지."
만족스러운 듯 결과라는 듯 미소짓던 이든의 표정이 재차 비장해졌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것은 이제부터지요."
"아암. 옳은 말일세. 엘프의 눈물을 판매하는 것은 단지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지. 어쨌든 우리가 바라는 것은 이곳에 상인들 상주시켜 마을을 예전처럼 다시 부흥시키려는 것 아닌가?"
"맞습니다."
게럴드의 말을 듣던 이든이 고갤 주억거렸다.
그가 여전히 비장한 얼굴을 한 채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때부터가 이곳이 영지로서 재도약하는 순간이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