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8화. (188/250)

188화.

"영지로서의 재도약이라…."

오늘을 기점으로 이곳을 더는 마을이 아닌, 영지로서 격상시키겠다. 이든이 바라는 뜻은 그러했다.

그의 말을 듣던 게럴드의 표정마저 덩달아 비장해졌다.

그가 자리한 상인들을 재차 훑더니 어느 한 사람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렇다면 뭐니 뭐니 해도 저 사람을 잡아야겠군."

이든이 궁금한 듯 곧장 물었다.

"누구 말입니까?"

"황금성의 버핏 경. 다른 이들은 몰라도 저자만큼은 꼭 잡아야 하네."

"조금 전 말씀하신 제국 제일가는 그 부자 말씀이시죠?"

"그래. 그의 길드 지부가 세워 지는 순간, 자연스럽게 돈의 흐름이 이곳으로 모이게 될 걸세. 그럼 상인들 역시 자연히 모이게 되겠지."

"황금성의 버핏 경이라…."

이든이 그의 이름을 되뇌며 머릿속에 새겨 넣던 그때, 미리 마련해 둔 좌석에 상인들 역시 모두 착석을 마칠 무렵이었다.

끼익.

회관의 문이 열리고, 누군가 뒤늦게 들어서자 부산스럽던 실내에 일순 정적이 찾아왔다.

들어선 이는 다름 아닌 유니콘의 레온하르트 지부장 크리스였다.

사람들의 이목을 한 몸에 받던 크리스가 미리 마련해 둔 단상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걸어가는 크리스의 얼굴이 조금은 긴장한 듯 상기되어 보이기까지 했다.

그 모습에 게럴드 길드장이 난감한 듯 웃었다.

"이런…. 크리스가 긴장을 많이 했나 보군. 얼굴이 잔뜩 굳었어."

"훗."

듣던 이든이 피식 웃었다.

"긴장할 만하지요. 그는 이런 자리가 너무 오랜만이지 않습니까."

"음."

맞는 말이었다.

크리스에게 있어선 폐허가 된 영지와 함께 그곳에 있던 유니콘의 지부 역시 함께 사라지며 손가락만 빨던 것이 고작 한 달 전이었다.

물론 본부에선 그에게 수도로 오라 줄기차게 말해 왔었지만, 그에게 있어 레온하르트와 유니콘은 떼려야 뗄 수가 없는 것이었다.

길고 길었던 고된 지난 시간들 끝에 비로소 중차대한 공식적인 업무를 수행하게 되는 셈이니. 긴장이 안 되려야 안 될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하나.

저벅저벅.

단상 위로 향하는 그 걸음만큼은 당당하기 그지없었다.

오랜 공백기 탓에 긴장한 낯을 지울 수는 없었다지만, 그럼에도 오랫동안 이런 순간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려 왔던 것 역시 변함없는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크리스의 걸음 소릴 듣던 이든이 흐뭇한 듯 미소 지었다.

‘아주 걱정할 필요는 없겠군.’

보무도 당당하게 걸으며 어느새 마련한 단상 위에 선 크리스.

내내 자신에게서 떼어지질 못했던 이목을 한 몸에 받으며 크리스 지부장이 천천히 입을 뗐다.

"반갑습니다. 유니콘의 레온하르트 지부장 크리스라고 합니다."

"……."

딱히 박수라던지 환호 같은 것은 없었다.

다만, 이곳에 지부장이란 소리에 상인들은 그의 얼굴을 머릿속에 각인시키기에 바빴다.

크리스가 재차 말을 이었다.

"우선 저희 유니콘을 믿고, 이 먼 곳까지 자리해 주신 분들께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우선 ‘엘프의 눈물’ 신사업과 관련된 본 진행에 앞서 이번 유니콘 신사업의 책임자분들을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크리스가 주최자 측에 앉은 게럴드 길드장을 가리켰다.

"엘프의 눈물이 수도에 차질이 없이 안전한 수급이 되도록 책임지실 유니콘의 게럴드 길드장님이십니다."

게럴드가 일어서 모인 사람들을 향해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짝짝짝.

그래도 길드장이라고 크리스 때완 달리 제법 박수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게럴드 길드장이 다시 자리에 앉자 크리스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어서 본 사업을 계획하신 총책임자를 소개토록 하겠습니다. ‘레온하르트 이든’ 영주님이십니다."

이든이 소개된 순간, 조금 전 게럴드를 소개할 때와는 다른 반응이 즉각적으로 들려왔다.

상인들이 저마다 놀란 얼굴로 한마디씩 꺼냈다.

"뭐라고?"

"레온하르트 이든…?"

"설마…. 십수 년 전에 돌연 사라졌다는 그 레온하르트 가문…?"

그리고 이든이 일어서 가볍게 고갤 숙이자 몇몇 상인들이 그를 아는 듯 입을 열었다.

"저, 저 사람… 심안의 무사 이든 아니야?"

"…그 사람은 지난 전쟁 때 데스 스타를 막다 죽었다 하지 않았어?"

"대체 이게 무슨 영문인지… 심안의 무사 이든이 레온하르트 가문이라니…."

이든의 관해 떠들어 대는 상인들의 목소리에 전말을 알고 있는 크리스로선 입이 근질근질했으나, 이곳은 그것에 관해 설명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크리스는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리다 재차 정적이 찾아오고 나서야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곳에 함께 자리하시진 않았지만, 본 신사업에 가장 큰 도움을 주신 분들이 계십니다. 엘프족 숲의 왕 갤러하드 님께서 엘프의 눈물 원석을 수급하는 데 도움을 주셨으며, 드워프족 전설의 장인 몰린 님께서 수급한 원석을 세공하여 주셨습니다. 이 자릴 빌어 두 거장께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

일순 더없는 정적이 찾아왔다.

‘레온하르트 이든’이란 소개 때만 해도 입이 쩍 벌어질 지경이었건만, 엘프의 왕과 전설의 장인이란 말까지 나오니 무슨 말을 더 떠들어 대야 할지 감이 오질 않았던 탓이다.

다만 그런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주최자 소개를 통해 확실하게 깨달은 것 한 가지는 분명히 있었다.

그것은 바로 레온하르트 마을이 더없는 노다지 땅이라는 생각을 심어 준 것이다.

상인들은 발품을 파는 존재들.

그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재산은 무엇도 아닌 돈의 흐름을 좇는 눈을 갖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눈으로 보았을 때 레온하르트 마을은 더없이 매력적인 곳이었을 것이다.

상인들이 저마다 마른침을 삼키며 이 땅에 자신들의 세력을 어찌 확장할 것인가 고민을 할 무렵 크리스의 말이 이어졌다.

"자, 그럼 저희 쪽의 관한 간략한 소개는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어찌 됐든 간에 여러분들이 이곳에 모인 이유는 따로 있지 않겠습니까?"

맞는 말이었다.

그리고 이를 증명하듯 먼 산을 보며 고민하던 상인들의 눈이 찰나 빛나기 시작했다.

다시 휘어잡듯 집중시킨 이목 속. 크리스가 고갤 끄덕이자, 단상 위로 드워프 하나가 뒤뚱거리며 올라왔다.

몰린과 함께 보석 세공에 참여한 드워프 장인 중 하나였다.

그리곤 단상 위에 미리 마련해 둔 비단을 깔아 둔 조그마한 탁자 위에 상자를 조심히 올려놓고는, 닫혀 있던 상자의 뚜껑을 차츰 열기 시작했다.

"오오…."

상자를 열기 무섭게 곧장 환호가 터져 나왔다.

상인들의 시선이 상자 내부에 안치된 채 영롱한 빛을 내고 있는 엘프의 눈물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이럴 수가. 진짜 엘프의 눈물이잖아…?"

"그냥 엘프의 눈물이 아니야. 저정도면 최상급이 분명하다고…!"

과연 수도의 유명한 상인들 답게 상품을 보는 눈 역시 손색없었다.

군침을 흘리는 상인들의 반응을 보며 크리스가 미소 짓고는 말을 이었다.

"맞습니다. 여러분들께서 지금 보시는 엘프의 눈물은 최상급 원석을 수급 후 전설의 장인이신 몰린 님께서 직접 세공하신 보석입니다. 원석도 최상, 이를 세공한 장인 역시 대륙 제일가는 장인이신 만큼, 기존 시장에 소량 존재하던 엘프의 눈물과는 비교가 불가할 완성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탁.

크리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함께 단상 위에 있던 드워프 장인이 상자를 닫았다.

영롱한 보석의 자태가 사라지자 곳곳에서 아쉬움 섞인 소리가 새어나왔지만, 보석을 보여 주는 것은 이만하면 충분했다.

지금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입을 터는 것이었다.

엘프의 눈물에게 정신을 뺏겼던 상인들의 관심을 다시 자신에게 돌릴 필요가 있었던 크리스의 적절한 대처였다.

크리스가 말을 이었다.

"본 영지와 더불어 저희 유니콘 길드에서 이와 같은 품질의 보석을 총 스물다섯 개 정도 보유한 상황입니다."

"허업…!"

보유한 엘프의 눈물 개수가 발표된 순간, 상인들의 입이 쩍 벌어졌다.

개수가 적어서?

아니었다.

이 엄청난 것을 스물다섯 개나 보유 중이란 것에 놀란 것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모를 것이다.

스물다섯 개란 개수 역시 완성도 높은 고품질을 유지하기 위해서 만드는 속도에 조절을 가한 것임을 말이다.

"자, 그럼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경매를 시작하기 전에 앞서 입찰 전 한 가지 요구조건을 말씀드릴까 합니다."

‘요구조건’이란 말이 나오기 무섭게 상인들의 눈이 금세 변했다.

보통 이런 자리에서 시작도 전에 요구조건이라 하면 십중팔구 무리한 요구가 나오는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크리스가 계속 말을 이었다.

"본 상품에 입찰을 위해선 필수적으로 레온하르트 영지에 여러분 길드의 분점을 세우겠다는 약속이 필요합니다. 수도의 본점이 없으시다면 이곳을 본점으로 삼으셔도 됩니다."

일순 정적이 찾아왔다.

돈의 흐름을 좇는 이들이니, 당연히 이곳에 세력을 확장하면 어떨까 하는 계획이 있긴 했었지만, 그것이 계획이 아닌 무조건 이행해야 한다는 ‘약속’으로 변하면 얘기는 달라진다.

분점이란 충분한 검토 후에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곳에 건물을 세우는 것은 부가적인 문제.

그 건물 안을 채울 사람을 고용하는 것부터 이것저것 생각해야 할 문제가 한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상인 중 하나가 물었다.

"분점을 세우는 데는 비용은 둘째치고 고민해야 할 것들이 상당합니다. 당장에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데, 입찰 조건이 그러하면 너무 과한 요구가 아닌지요?"

상인들이 동의한다는 듯 고갤 끄덕였다.

"맞습니다. 게다가 분점을 세운 이후,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을 경우 생기는 손해도 막심할테고요."

또다른 이가 받아서 입을 뗐다.

"게다가 본점 없이 돌아다니던 저 같은 상인들은 부담감이 더욱 상당합니다. 전쟁이 끝난 지 이제 2년 조금 넘게 지난 시점입니다. 아직 전란의 피해가 완전히 수습되지 않아 곳곳에 도적들이 끊이질 않는 편인데, 안전한 수도 대신 이곳을 본점으로 자리잡아 달라는 요구는… 조금 불안합니다. 아직 이곳은 영지의 형태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 곳 아닙니까?"

예상보다 거센 반발에 크리스가 난감한 얼굴로 말문이 턱 막히던 찰나, 주최자 측에 앉아 있던 이든이 대신 입을 뗐다.

"그 부분에 대해서 제가 대신 답변해 드리죠."

들려온 목소리에 이목이 금세 이든에게 집중되었다.

"이곳에 분점을 세우는 비용부터 해서 직원을 고용해야 하는 문제까지 생각해야 할 문제들이 당연히 많을 것으로 압니다. 대신 이렇게 생각해 보는 건 어떨까요?"

"……?"

"이것이 단순한 요구조건이 아니라. 여러분들에게 기회를 주는 것일 수도 있다고 말입니다."

뭔가 전형적인 사기꾼의 말투였지만, 그냥 넘어가자….

상인들이 의아한 기색이 짙은 얼굴을 하던 그때, 내내 가만 듣기만 하던 황금성의 버핏이 처음으로 입을 뗐다.

"영주님, 기회라면 정확히 어떤 기회인지 자세히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듣던 이든이 고갤 끄덕이며 답했다.

"다들 아시겠지만, 어디에서도 이만큼 완성도 높은 엘프의 눈물을 구할 수는 없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선 모두 동의들 하실 겁니다."

상인들이 고갤 끄덕였다. 이는 더 말해 봐야 입 아픈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희는 이러한 최상품의 엘프의 눈물을 무리 없이 지속해서 수급이 가능한 구조를 만들어 냈습니다."

이 역시 맞는 말이었다. 세상 어느 곳도 엘프와 드워프를 거느리며 세상과 등진 그들과 우호를 다지고 있는 곳은 없을테니까.

이든이 말을 이었다.

"다른 것도 아닌 지속적인 최상급의 엘프의 눈물이 수급 가능한 곳. 그곳에 여러분의 분점 혹은 본점을 세우실 수 있게 되는 겁니다. 그 기회를 정녕 차 버릴 작정이십니까?"

‘요구조건’에서 ‘기회’라는 말로만 바뀐 것뿐인데, 생각이 이렇게 달라지는 것은 무어란 말인가.

상인들의 머릿속이 재차 계산기를 두드리며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때다 싶어 이든이 회심의 일격을 날린다.

"현재까지 준비된 상품들은 마을에 주둔 중인 오십여 명의 드워프 장인 중 기술을 보유하신 다섯 분의 장인들께서 만드신 것으로, 남은 사십오 명의 장인 모두가 해당 세공 기술을 습득하면 추가적인 생산 속도는 지금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더욱 빨라질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여러분들께서 웃돈을 주고서 분점을 세우고 싶어도 못 세우게 됩니다. 영지의 크기는 한정적이고, 수용할 수 있는 상가는 제한적일 테니까요. 엘프의 눈물은 부가적인 겁니다. 저희가 진짜 판매하려는 것은 단지 이 보석이 아니라. 여러분들의 분점을 세울 권리를 주겠다는 겁니다."

그때, 버핏이 다시 물었다.

"…그 말인즉슨 엘프의 눈물 사업권은 이곳에 분점을 세운 길드에게만 내줄 작정이다. 그리 생각하면 되는 겁니까?"

일순 정적이 회관을 휩쓸었다.

이든이 씩 웃으며 쐐기를 박았다.

"물론입니다. 어떻게… 이만하면 다들 구미가 당기지 않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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