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0화. (190/250)

190화.

쪼르르.

버핏은 앞에 놓인 찻잔에 차가 다 채워지기도 전에 단도직입적으로 얘길 꺼냈다.

"영주님, 앞으로 이곳에서 발생하는 새로운 사업권은 저희 황금성이 우선적으로 받고 싶습니다. 독점이라면 더더욱 좋고요."

찻주전자에서 떨어지던 물줄기가 일순 뚝 끊겼다.

차를 따르던 스왈로의 손이 버핏의 말을 듣곤 놀라 멈춘 탓이었다.

이든이 피식 웃었다.

"벌써 새로운 사업에 관해서 얘길 꺼내실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현재 사업도 아직 본격적으로 시작도 못 했는데 말입니다."

이든의 말대로 현재 진행형인 사업조차 제대로 시작도 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계획조차 없는 추가적인 사업에 관해 아직 얘길 나눌 시기는 아니었다.

버핏이라고 이를 모를까. 다만, 그럼에도 그가 서두르다시피 조금 전 얘길 꺼낸 이유는 이곳이 그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던 기회의 땅이었기 때문이다.

‘이 세상 어떤 영지도 엘프와 드워프를 거느린다는 얘긴 없었다. 필시 추후에 있을 사업 역시 대단할 것은 자명할 터. 어떻게 해서든 우선권을 따내야 한다…!’

버핏이 무안한 얼굴로 괜한 헛기침을 하며 입을 뗐다.

"크흠, 제가 원체 성미가 급하다 보니…. 죄송합니다."

"죄송은요. 그리 생각하지 마십시오."

무안한 얼굴로 말을 건넨 버핏과 달리 이든은 그가 먼저 저런 제안을 해 준 것에 대해 오히려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 역시 버핏에게 용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버핏 역시 자신에게 용건이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잘만 하면 얘기가 쉽게 풀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쪼르르.

스왈로가 쥔 찻주전자에서 재차 물줄기가 떨어지고, 잔에 마저 채워지기 무섭게 스왈로가 눈치껏 자릴 비켰다.

"그럼 말씀들 나누시지요."

이든이 모락모락 김이 나는 찻잔을 가리켰다.

"일단 한 모금 축이시지요. 영지 상황이 이렇다 보니 좋은 찻잎을 쓰진 않았지만, 맛은 훌륭합니다."

"아, 예. 그럼…."

버핏이 찻잔에 입을 가져다 대던 그 순간이었다.

"아뜨뜨!"

식지도 않은 차를 후륵 넘기려던 버핏이 화들짝 놀라며 오두방정을 떨었다.

이든이 놀라 물었다.

"어이쿠, 이런! 괜찮으십니까?"

버핏이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저었다.

"하, 하하… 괘, 괜찮습니다. 보시다시피 제가 이렇게 성미가 급합니다. 하하하…!"

그 대단한 황금성의 주인이라곤 생각하기 힘든 허당기가 다분한 모습이었지만, 이든은 알 수 있었다.

돈의 흐름을 놓치지 않는 직감과 저자의 저런 성미가 황금성이란 길드를 이만큼 키워 냈다는 것을 말이다.

혀를 한 차례 데었던 버핏이 조심히 목을 축이던 그때였다.

"좋습니다."

"예?"

난데없이 들려온 이든의 말에 버핏이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이든이 재차 입을 떼며 명확히 말했다.

"추후 발생할 이곳에 사업권에 대해서 황금성 길드에게 가장 먼저 우선권을 드리겠습니다. 사업 규모에 따라서 독점권 역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그게…. 정말입니까?"

"예. 전 한 입으로 두말하지 않습니다. 믿으셔도 좋습니다."

재차 들려온 확인에 버핏의 얼굴이 일순 밝아졌다.

욕심 같아선 엘프의 눈물 사업권 역시 독점으로 가져오고 싶었으나, 현 레온하르트 영지의 상황이 최대한 많은 상단의 관심을 끌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버핏이 이 정도면 충분히 원하던 결과라며 만족하던 그때, 문득 의아함이 밀려온 그가 물었다.

"한데, 단지 제가 황금성의 길드장이란 이유만으로 이 같은 약속을 하신 것은 왠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혹 제게 원하는 것이 있으신지요?"

과연.

대륙 제일 거상답달까.

돈을 좇는 눈만 훌륭한 것이 아니라, 눈치 역시 천하제일급이다.

이든이 솔직하게 고갤 끄덕였다.

"맞습니다. 사실 버핏 경께 긴히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추후 발생할 사업에 관해 우선권까지 받았겠다.

어떤 부탁인들 못 들어주겠는가.

버핏이 귀를 귀울였다.

"영주님의 부탁이라면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어려워 마시고, 뭐든 말씀해 주십시오."

이든이 고갤 끄덕이곤 버핏이 그랬던 것처럼 그 역시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냈다.

"정식으로 영주로 임명받기 위해 황궁에 갈 생각입니다. 절 아는 몇몇 이들은 환영하겠지만, 시기하는 사람들 역시 분명 있겠죠. 그들의 마음을 돌려주셨으면 합니다."

버핏이 화들짝 놀란 얼굴을 했다.

"혹 관료들을 매수해 달라 그 말씀이십니까?"

"예."

놀랐던 버핏의 얼굴이 이번엔 벙찌듯 입을 쩍 벌렸다.

그 역시 원하는 바가 있으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는 편이긴 하지만, 그보다 한술 더 떠서 이토록 노골적으로 부탁을 할 줄은 버핏, 그조차 예상치 못했던 것이었다.

한참 말이 없던 버핏을 대신해 이든이 먼저 말을 꺼냈다.

"듣기론 평소 알고 지내는 관료들이 상당히 많으시다 들었습니다."

"예…. 그렇긴 합니다만…."

버핏은 차마 부정하지 못했다.

실제로 그는 황궁 내에서 큰 행사가 있을 때도 그것에 관한 독점을 쥐기 위해 수많은 대신들에게 뇌물을 돌렸던 전적이 굉장히 많았다.

오히려 뇌물을 받지 않은 자들을 꼽는 것이 헤아리기 편할 정도로 말이다.

듣던 이든이 작게 웃었다.

"그리 소극적으로 대답하실 것 없습니다. 세상 사는 것이 다 그러한 것이니까요."

"아, 예…."

"사실 제가 버핏 경께 이런 부탁을 드리는 이유는 뇌물을 한 번이라도 받아 본 전적이 있는 대신들이라면 필시 제가 영주로 부임하는 것을 반대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어째서 말입니까?"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로 제가 지금 레온하르트의 성(姓)을 쓰고 있긴 하지만, 저와 레온하르트 공작님은 혈육의 관계가 아닌 사제 관계입니다. 그분의 유지를 받들어 이곳에 임시로 영주로 있다지만, 대신들 입장에서 저는 굴러온 돌쯤으로 취급할 가능성이 큽니다. 이전에 제가 반역자들로부터 제국을 구한 영웅이건 어쨌건 간에 말입니다."

"음."

버핏이 역시 이든의 관한 소문에 대해선 들어서 알고있었다.

듀란드 공작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반역을 막은 것에 관해선 말할 것도 없고, 패망에 들게 할 뻔한 전쟁에서 제국을 구했다는 이야기 역시 얼핏 들어서 알고 있었다.

두 번이나 제국을 구한 영웅이지만, 대신 중 상당수는 그를 환영하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가 아는 대신 중 상당수는 자신의 혈통에 근거 없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들이 레온하르트의 혈통이 아닌 듣도 보도 못한 혈통이 이곳에 임시 영주로 지내는 것을 탐탁지 않아 할 것이 분명했다.

고갤 주억거리던 버핏이 물었다.

"그럼, 두 번째 이유는 무엇입니까?"

"뇌물을 한 번이라도 받았던 대신 중에 과연 이곳에 눈독 들이지 않을 자가 있을지 염려됩니다."

"아…."

버핏이 확실히 이해가 간다는 듯탄성을 터트렸다.

"과연… 그럴 수도 있겠군요. 제게 꾸준히 뇌물을 받아 온 자들이라면 그만큼 돈 욕심이 많은 이들이란 뜻이고, 엘프의 눈물 수급이 가능한 현재 영지에 엄청난 관심을 가질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버핏은 이든의 염려를 정확히 추론하였다. 이든이 답했다.

"맞습니다. 제가 걱정하는 부분 역시 그것입니다."

"흠."

이든의 속사정은 충분히 가능성 있는 얘기였다.

하나, 그것만 가지고 대신들을 회유하기엔 뭔가 부족하다는 듯 여긴 걸까. 버핏이 물었다.

"저야 영주님을 최대한 돕도록 노력하겠지만, 혹 제가 더 능동적으로 움직일 만한 다른 이유는 더 없겠습니까?"

돕긴 돕겠다.

하나, 이를 도울 경우 자신에게 오는 이득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버핏의 입장에선 이든이나, 다른 누가 영주가 됐든 간에 별다른 상관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나, 들려온 이든의 대답은 그를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조금 더 능동적으로 움직일 만한 이유라. 이건 어떠십니까?"

"……?"

"오직 저만이 이곳 영지의 사업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영주님만이 말입니까?"

"맞습니다."

"이유가 무언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따로 이유를 말씀드릴 필요가 있을까요. 마을에 주둔 중인 드워프와 엘프만 봐도 이미 답이 나오질 않습니까. 엘프족도 그렇고 드워프족도 그렇고. 모두가 인간들과 등을 진 종족들입니다. 저들이 저를 위해서 일해 주는 이유는 오직 하나입니다. 제가 그들의 친구이기 때문이죠."

‘역시 그랬군….’ 사실 이는 버핏 역시 내심 예상하던 바였다.

수백 년도 전에 인간 세상과 등을 진 드워프와 엘프라는 종족의 도움을 받고 있는 이라면 필시 보통 사이가 아니라 짐작은 했던 것이다.

‘친구라…. 말인즉슨 이든, 이 자가 영주가 아닌 이상에 드워프와 엘프 역시 주둔할 이유가 없어진다는 뜻이군.’

모든 상황 파악과 함께 계산을 마친 버핏이 고갤 끄덕였다.

"확실히 그런 이유라면 영주님 본인이 아니고선 사업이 예정대로 진행되기 어렵겠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저 버핏, 영주님을 돕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버핏 경의 도움이라면 제가 황궁으로 갔을 때 필시 큰 힘이 될 것이 분명합니다."

"저는 이윤을 좇는 사람입니다. 마땅히 제가 해야 할 선택을 했을 뿐입니다."

사사로운 감정이 아닌 오직 얻게 되는 이득만 보고 당신을 돕는 것이다.

버핏의 속뜻은 그러했다.

하나, 이든 역시 오히려 다른 거추장스러운 말보다 그것을 더욱 선호하는 사람이었다.

"하면 수도에는 언제쯤 출발하실 생각입니까?"

"버핏 경께서 먼저 출발하시는 대로 저 역시 늦지 않게 출발할 예정입니다."

"그럼, 제가 먼저 도착하는 대로 착수하면 되겠습니까?"

"흠."

이든이 잠시 고민했다.

그가 고갤 저었다.

"아뇨."

"음?"

"이왕 하는 일 조금 더 재밌게 놀아 보는 것이 어떻습니까?"

"조금 더 재밌게요?"

이든이 하얀 이가 다 드러나도록 씩 웃었다.

***

마을에 찾아왔던 상인들이 유니콘 본부에서 온 사람들과 수도로 떠나고 며칠 뒤.

마을 한가운데가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로 북적였다.

잠시 이곳을 떠나 수도로 향하는 이든을 배웅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개중엔 스왈로 역시 있었다.

스왈로가 연신 뿌듯해하는 얼굴로 어깰 으쓱이는 사이, 이든이 얼굴을 구기며 입을 열었다.

"굳이 사두마차까지 준비할 필요는 없는데…."

"어허! 무슨 말씀입니까! 다른 곳도 아닌, 우리 레온하르트 영지의 영주님께서 수도로 가시는 길인데 당연히 이 정도는 준비해 둬야지요. 아니 그런가? 크리스 지부장!"

스왈로의 물음에 크리스가 어색하게 웃으며 답했다.

"그럼요. 하하…."

"거 보십쇼!"

그것 보라는 듯 유세 떠는 스왈로의 모습에 결국 이든은 두 손 두 발 다 들 수밖에 없었다.

‘저리 좋아하시니 안 탈 수도 없고….’

사두마차는 사실 스왈로가 얼마 전 유니콘 길드장에게 빌린 것이다.

게럴드 역시 스왈로만큼이나 유난스러운 아저씨라 스왈로의 부탁을 듣고는 ‘옳거니’ 하며 빌려줬다나 뭐라나….

어쨌든 이든의 입장에선 스왈로가 저리 좋아하는 것도 그렇고, 다시 저것을 돌려주려면 어쨌든 타고 가야 하긴 했다.

이든이 스왈로를 포함 모인 마을 사람들을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사람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꺼냈다.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조심히 다녀오세요. 영주님!"

"올 때 맛있는 거 사 오시고요!"

물론 중간에 이상한 말 한마디씩 껴 있는 것은 덤이었다.

이든이 마차에 타기 무섭게 함께 동행하게 된 크리스도 마부석에 앉았다.

크리스 역시 사람들을 향해 고갤 숙여 보이고는 곧장 말고삐를 당겼다.

푸르르륵! 히잉!!!

말들이 울음소리를 터트리기 무섭게 사두마차가 사람들이 비켜선 길목을 내달리더니 금세 마을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때였다. 마차 내부에서 대뜸 크리스를 부르는 이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크리스 지부장님."

"네, 영주님!"

"너무 놀라지 마십시오."

"네…?"

난데없는 얘기에 크리스가 고개만 살짝 돌려 의아한 얼굴로 되묻던 그때였다.

우우우우웅!

사두마차가 달리던 방향으로 난데없이 공간이 일그러지는가 싶더니 일순 개화(開華)하듯 입을 쩍 벌렸다.

개화한 이공간(異空間)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다름 아닌 수도 한가운데.

이든의 용언(龍言) 능력 중 하나인 공간이동이었다.

이를 본 크리스가 당황한 나머지 저도 모르게 급히 마차를 멈추려 했지만, 전속력으로 달리던 사두마차를 세우기엔 이미 한발 늦은 뒤였다.

멈추지 못한 사두마차가 이 공간으로 쏙 들어가며 감쪽같이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고 이공간 역시 언제 그 자리에 있었냐는 듯 입을 다물며 허상처럼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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