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칼스테인 공작이 황궁에 눌러앉은 지도 어느덧 삼 년이 훌쩍 넘어갔다.
한때나마 그의 장인이었던 듀란드 공작의 주동하에 이루어진 영주들의 반역을 막기 위해 황궁에 입궁했던 이후로 줄곧 이곳을 벗어날 만한 상황이 아니었던 탓이다.
듀란드 공작의 반역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전쟁이 일어났고, 전쟁이 끝난 뒤엔 곧바로 아슬란 황제가 승하했다.
아슬란 황제의 승하 후, 그의 어린 손자가 황위에 올라 아슬란 황제의 유언대로 현 황제를 바로 옆에서 보좌했고, 황궁의 일을 대충 정리한 이후론 전쟁이 남긴 참사를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정신없이 흘러간 시간.
칼스테인 공작에게 있어 최근 삼 년간은 심적으로나 체력적으로나 참으로 고된 시간이었다.
그래서일까. 거뭇하던 칼스테인의 머리카락은 어느새 하얗게 바래 있었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점은 그의 아들 칼라슈가 영주 노릇을 제법 잘 해 주는 탓에 영지의 걱정은 덜 수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일을 조금 던 셈이지. 그의 업무가 과할 정도로 많은 것은 여전했지만 말이다.
"후우…."
오늘도 어김없이 한참이나 서류를 들여다보던 칼스테인 공작이 훑던 서류를 던지듯 내팽개치고는 한숨을 푹 쉬었다.
머리가 지끈거려 온 탓일까.
그가 양쪽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지그시 문지르듯 눌렀다.
‘도무지 수습되지가 않아….’
역사상 유례없던 언데드 군단의 침범.
전쟁이 끝난지 2년이 훌쩍 넘었음에도 당시 전쟁의 여파로 수습해야 할 문제들은 여전히 산더미 같았다.
그중 칼스테인 공작을 가장 골치 아프게 한 것은 대륙 전역에 눈덩이처럼 불어난 산도적들의 기승이었다.
영지 두 곳과 수도를 제외한 남은 영지들이 전부 폐허가 되면서 갈 곳 없던 난민들이 생계가 막막해지자 급기야 산채로 투신한 것이다.
결국, 대 산적들의 시대가 왔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대륙 전역엔 그들이 일으키는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물론 황궁이 이를 지켜보기만 한 것은 아니다.
틈이 나는 대로 토벌을 진행하면서 인근 산채들을 정리하긴 했지만, 그것만으론 턱없이 부족했다.
대륙 곳곳 깊숙한 곳엔 아직도 숨어든 산적들이 온갖 악행을 저지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 이들까지 토벌을 강행하기엔 지금의 황궁 사정으로선 여의치 않았다.
전쟁으로 잃은 힘을 복구해야 할 판에 토벌로 재차 병력을 잃기엔 부담이 상당한 탓이었다.
그렇게 아슬란 제국은 제국이란 말이 무색할 만큼 쇠퇴해 버리고 말았다.
자칫 이웃 국가의 침략마저 걱정해야 할 정도로 말이다.
답도 없는 현 상황이지만, 그렇다고 마냥 손을 놓을 수만도 없는 노릇.
칼스테인 공작이 재차 던졌던 서류를 향해 손을 뻗으려던 그때였다.
똑똑.
자신의 집무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서류로 향하던 칼스테인의 손이 일순 멈칫했다.
그가 문 쪽으로 고갤 돌리며 입을 뗐다.
"들어오게."
칼스테인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무섭게, 한 신하가 황급히 문을 열고 들어왔다.
평소답지 않은 신하의 모습에 칼스테인이 의아한 얼굴을 하며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그리 요란인가?"
"공작님, 지금 이곳에서 이럴 것이 아니라. 급히 가 보셔야겠습니다…!"
신하의 보고를 듣던 칼스테인의 얼굴이 빳빳하게 굳었다.
평소 아무리 바쁜 일이 있더라도 저리 조급한 모습을 보인 적 없던 이가, 생전 처음 보이는 모습에 무언가 큰일이 터져도 제대로 터진 것이리란 생각이 들면서 불안감이 엄습해 온 탓이었다.
칼스테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물었다.
"궁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건가!?"
"그것이 아니옵고!"
"……?"
"지금 궁 밖에 레온하르트 공작께서 와 계신다는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뭐라고?"
칼스테인이 자신이 방금 무엇을 들은 것이냐는 투로 되물었다.
"지금… 무어라 했나? 레온하르트 공작이라고 했나…?"
"그, 그렇습니다! 필시 병사의 말로는 레온하르트 공작께서 오셨다. 그리 보고하였습니다!"
듣던 칼스테인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레온하르트 공작이 누군가.
이십 년도 훨씬 전 제국의 개국 공신이었던 칠 인의 기사 중 한 명임과 동시에 제국 최초의 소드 마스터였던 전설적인 인물이었으나, 어느 날 갑자기 종적을 감춰 버린 이가 아니던가.
그리고 그 후엔 단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어, 그의 실종을 둘러싸고 많은 말들이 나오며 지금까지도 세간에 회자되지 않던가.
당연히 나오는 말 중 상당 부분은 그가 죽었을 것이라 떠들어 대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칼스테인 그조차 레온하르트 영주가 죽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레온하르트 공작이 살아 있었다고…?’
죽었던 사람이 되살아온 듯한 심정이 이런 걸까.
그렇게 한참이나 넋을 놓았던 칼스테인이 이내 고갤 휘휘 젓고는 곧장 걸음을 옮겼다.
신하가 전한 병사의 보고가 사실이라면 이는 근래 들어 어느 것과도 비교되지 않을 중차대한 사건임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가 시립해 있던 신하에게 물었다.
"레온하르트 공작께선 지금 어디에 계신가!"
"우선 병사들이 응접실로 모셨다 합니다."
"알았네!"
파아아아아앗!
내달리는 칼스테인의 신형이 황궁 안에서 번개처럼 쏘아졌다.
그 모습에 아무것도 모르는 애꿎은 신하들은 화들짝 놀라기 일쑤였다.
***
응접실 입구를 지키는 병사들의 눈이 내내 한곳에서 떼어지질 못했다.
병사들의 시선이 향한 곳.
거기엔 레온하르트 공작이란 사내가 머무르고 있었다.
병사 중 하나가 옆에 있던 동료에게 물었다.
"그러니까…. 저 사람이 레온하르트 공작이라고?"
"그런가 본데?"
"…너무 젊지 않아? 난 할아버지쯤 될 줄 알았는데."
"후손이나 그쯤 되는 사람이겠지."
"그런가?"
"근데 말이야. 누구랑 많이 닮은 것 같지 않아?"
"누구?"
"그 왜 있지 않은가. 전쟁에서 제국을 구하고 전사한 심안의 무사 이든이라고."
"…에이 설마."
그렇게 병사들이 ‘레온하르트 공작’이란 사내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며 떠들던 그때였다.
휙.
누군가 그들 근처를 기척도 없이 바람처럼 지나갔다.
보초를 서던 병사들이 일순 화들짝 놀라다가 지나쳐 간 이의 얼굴을 확인하곤 급히 경례를 올렸지만, 지나간 이는 그것이 안중에도 없었다.
덜컥.
지나간 이의 걸음이 응접실에 있던 레온하르트 공작 근처에서 멈춰졌다.
차를 마시던 레온하르트 공작이 고개만 살짝 돌려 웃어 보이며 입을 뗐다.
"오랜만입니다."
"당신은…."
조금 전 응접실에 부리나케 달려 들어온 이, 칼스테인 공작의 눈이 레온하르트 공작의 얼굴을 확인하곤 재차 정처 없이 흔들려 댔다.
***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지만, 그 발 없는 말 중에도 가장 빠른 놈이 있기 마련이다.
그것은 바로 ‘황궁 안에서 도는 소문’이었다.
들리는 얘기가 무언지에 따라 관료들의 입지가 시시각각 바뀌며 긴요하게 받아들여지다 보니, 어느 곳보다 빠르게 퍼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관료 대신들의 가장 큰 화두는 뭐라 해도 ‘레온하르트 공작가’의 복귀였다.
황궁에 있던 관료들이 저마다 한 명씩 붙잡고 그 화제를 떠들어 대는 사이, 황궁에서도 가장 어두침침한, 인적마저 드문 곳에 몇몇 관료들이 모여 심각한 표정으로 얘길 나누고 있었다.
"들으셨습니까?"
"예. 레온하르트 공작 가문이 복귀했다는 소식 말이지요?"
"정말 예상치도 못했습니다. 그 레온하르트 공작 가문이 멀쩡히 남아 돌아오다니…."
모르는 이가 있을 리가 없다.
그만큼 레온하르트 공작가의 복귀는 황궁 전체가 들썩일 만큼 전혀 생각지도 못한 화젯거리였다.
그때였다.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
먼저 그 일을 언급했던 카다비 후작이 불쑥 말을 꺼내자 남은 대신들이 그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카다비가 말을 이었다.
"황궁에 왔다는 그 사람. 우리가 알던 그 레온하르트의 후손이 아닙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카다비 경, 그가 레온하르트 가문의 핏줄이 아니란 말입니까?"
카다비가 고갤 끄덕였다.
"결단코 아닙니다."
"확실합니까?"
"확인해 본 결과 확실합니다. 레온하르트 공작의 후손이 아니라. 수년 전 언데드 군단과 벨라트릭스 왕국과의 전쟁 때 활약하던 이든 남작이라더군요."
"이든 남작…? 심안의 무사 이든을 말하는 것이요? 그는 지난 전쟁 때 죽은 것이 아니었소?"
카다비가 고갤 저었다.
"어찌 용케 살아남은 모양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레온하르트 공작이 돌아왔단 소문이 난 걸까요?"
"병사들 말로는 자신을 레온하르트 이든이라 했답니다."
"레온하르트 이든…? 어째서 그런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레온하르트 가문을 상징하는 보검을 가지고 있었다 하더군요."
"…어, 어떻게 그것이 그자에게…."
카다비가 어깰 으쓱였다.
"글쎄요. 어디서 주웠든, 누군가에게 받았든, 혹은 정말로 살아 있던 레온하르트 공작 본인에게 받았든 간에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닙니다. 진짜 문제는 따로 있습니다."
"…진짜 문제요?"
"그자가 자신을 레온하르트라 칭하며 이곳에 온 이유가 무언지 아십니까?"
"……?"
"폐허가 된 레온하르트 영지의 살아남은 영지민들이 일구어낸 마을을 영지로 인정받고, 그 자신 역시 영주로서 정식으로 임명받기 위해서 왔다더군요."
"…마을을… 영지로 말입니까? 뭐, 그곳이야 살아남은 영지민들이 제법 있으니 제법 그럴듯한 마을이겠다만, 그것이 뭐가 문제란 겁니까?"
카다비의 눈이 찰나 명멸하듯 빛을 냈다.
"그 마을. 이든 그자에게 넘겨주어선 절대로 안 됩니다."
카다비의 말을 듣던 대신들이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을 했다.
"그래 봤자…. 마을 아닙니까?"
"그냥 마을이 아닙니다."
"……?"
"다들 들으셔서 아실 겁니다. 얼마 전 유니콘 길드에서 ‘엘프의 눈물’을 수급할 수 있게 되어 입찰에 참여할 상단을 모집한다는 홍보 말입니다."
"알다마다요. 그것 때문에 귀족들이 한동안 떠들썩하지 않았습니까?"
카다비가 고갤 끄덕였다.
"당시 유니콘 길드를 따라 입찰을 하려 했던 상단의 길드장에게 캐물어 봤더니, 엘프의 눈물 보석이 레온하르트 마을에서 버젓이 수급이 되고 있다 하더군요. 심지어 오래전 사라진 줄로만 알았던 엘프들과 드워프들까지 거느리면서 말입니다."
"…그, 그럴 수가…!"
대신들이 하나같이 놀라며 쩍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는 사이, 카다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든, 그자가 진짜 레온하르트의 핏줄이라면 모르겠으나, 진짜 그분의 핏줄도 아닌 어중이떠중이가 혹여 영주로 임명된다면 엘프의 눈물이 수급 가능한 그 황금 땅이 누구의 것이 되겠습니까?"
"당, 당연히 이든 그자의 것이… 서, 설마!"
듣던 대신이 그제야 요점을 파악한 듯 눈을 빛냈다.
"그러니까. 카다비 경의 말씀은 레온하르트 마을을 우리 손에 두어야 한다. 그 말씀이시군요!"
듣던 카다비가 씩 웃었다.
"맞습니다. 자그마치 부르는 게 값이라는 엘프의 눈물이 나오는 땅입니다. 그 땅을 우리 손에 넣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재물을 손에 넣을 것이 분명합니다."
"확실히 그렇겠군요…! 저희가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각자 될 수 있는 한 많은 대신들을 끌어모아 이든, 그자가 영주로 정식 임명되는 것을 막아 주십시오."
"그 후에는요?"
"그 후엔 저를 영주로 밀어 주십시오."
"카다비 경을 말입니까!?"
"예, 만약 제가 영주가 되어 그 마을을 손에 넣는다면 약속하건대 거기에서 발생하는 이익을 균등히 나눠 여기 계신 분들게 지급해 드리겠습니다. 어떠십니까?"
대신들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나눈다고 하더라도 엘프의 눈물이란 보석 자체가 가지는 가치가 워낙에 큰 탓에 돌아올 이익이 상당한 것은 말하면 입 아픈 것이었다.
대신들이 고갤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확실히 카다비 경이라면 영주로서 추대받아도 전혀 부족함이 없지요."
"암요!"
대신들의 말을 듣던 카다비의 입꼬리가 삐죽 솟았다.
그가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로 입을 뗐다.
"자, 그럼 서둘러 움직여 주십시오. 그리고 그 황금 땅을 우리 손에 넣어 봅시다…!"
카다비의 눈에서 명멸을 반복하던 눈빛의 근원. 그것은 필시 끝 모를 ‘욕심’이었다.